[없음]의 [반복]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눅 12:22-31)

방도 창고도 없는 귀한 하루살이의 영광

 

단절의 반복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시간에 복음은 이 단절의 반복성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로 비복음은 소유의 연속성을 꿈꾸는 마약 중독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본문은

없고 없고 없는데 없음으로써 반복하면서 예수님 나라를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됩니다.

없는데 어떻게 없음이 계속적으로 반복을 이룰까요?

 

없음은 없는 겁니다 라는 말을 저쪽 양탈무리들이 얼마나 강조를 합니까

맞잖아요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는 말이 인간 세계의 주장 아닙니까?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누룩을 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조심하라뇨? 오히려 [없음]을 조심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없음][반복]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소유의 시선에서는 있음의 반복 때문에 누룩을 좋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을 과시하고

창고를 늘리는 것은 일종의 잉여, 이자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 말이죠

이 땅에서 살려면 그것이 아니면 어떻게 살길이 있냐 말이죠

 

문제는 그런 방식을 하늘에 까지 연장시킬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이 하늘나라에서만 통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정반대의 목숨을 위하여 가 아닌 방식이다는 겁니다.

목숨을 위하지 않는 방식이 뭐냐?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그럼 목숨을 없애 버리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목숨이 음식 보다 귀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귀중하다 라고

오히려 목숨의 과잉성 몸의 과잉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래도 말라 저래도 말라는 말이 아니냐?

 

아니죠 목숨은 음식 보다 귀하다 라고 하심은

목숨을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이 목숨 보다 귀중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말이 아니냐

 

문제는 목숨을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그것이 졸지에 소유가 되어 버리니까

목숨은 뒷전이 되어 버리고 음식이 목숨 보다 더 귀하게 가치전도가 되어 버리는

소유의 사고방식으로 역전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창조의 원리가 뒤짚어져서 주객이 뒤바뀌어 졌다는 겁니다.

창조가 뒤짚어 질 리가 없는데 뒤짚어 졌다고 하니 많이 당황하셨죠 ~~~

정작 주객이 뒤바뀐 상황이 인간 세상을 지배해 버렸기 때문에

소유가 더 목숨보다 귀중한 가치로

몸 보다 의복 옷이 더 귀중한 가치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이 창조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겁니다
.

물론 창조는 뒤짚어 질 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이 창조의 원리를 원치 않아서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꼴을 예수님 나라는 그냥 못 보고 넘어가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소유의 방식인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라는 염려로 가득차 버린

육체가 되어버린 몸이 되었다는 지적을

 

예수님 나라가 지적해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 없으면 우리는 다 죽는다고 하소연합니다.

 

없애라 라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의 과잉성의 몸을 누리고

과잉성의 목숨을 누리라 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단 한개도 지킬것이 없어요 그 반대 입니다. 누리는 것 뿐입니다.

 

없는데 없음의 반복이 되는 목숨

없는데 없음의 반복이 계속적으로 되는 몸

 

과잉 목숨

과잉 몸

 

을 누려라 라는 겁니다.

 

그것 누릴줄 모르면 예수님 나라가 아니다

못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목숨 곧 과잉 목숨이요

몸 곧 과잉 몸이라는 겁니다.

 

없음의 반복이라고 하니까

불교처럼 자꾸 무소유로 생각하는데 그건 무소유를 소유할려는 방식인 겁니다.

 

그것 역시 소유죠

 

말씀은 내 쪽에서 단 한 개도 지킬 것이 없습니다.

만약 말씀을 내 쪽에서 지킬 것이 단 한 개라도 있다면

그것은 복음의 미완성이 되고 말아 버립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종교라는 마약이 번성하게 됩니다.

곧 누룩입니다.

그래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누룩이 뭐냐?

 

자꾸 말씀을 내 쪽에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을 주입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소유케 할려는 겁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신앙을 소유하고

믿음 행함 이웃사랑 실천

부자청년처럼 율법을 어릴적부터 지켜왔으니 뭐가 부족하냐?

부족한 것 있으면 내가 행하고 지키고 실천해서 소유할려고 노력하겠다는 식입니다.

 

오 그래?

그럼 과연 소유 할 수 있는지 보자!!

니 전 재산을 가난 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즉 무가치해도 너무 너무 무가치한 일을 하라는 겁니다.

가난한자의 이웃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니가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지킨 마일리지 소유물 다 삭제 하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등돌리고 돌아설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소유물이 자신의 가치인데 어떻게 버립니까? 아까운데!!
소유물이 곧 자기의 목숨인데
졸지에 그 소유물 음식과 의복이 자신이 목숨보다 몸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되어버린

주객이 뒤바뀐 처사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처음부터 등돌리게 할 목적이였습니다.

도저히 지킬수 없는 것을 뒤짚어 씌우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까지 더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형편을 잘 아시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숫자를 제시할 분이지 절대 불가능한 단절의 숫자를 제시할 분이 아니야

그 정도까지만 하면 바리새인에게도 꿀리지 않고

딴 사람들에게도 눈치 보지 않을 정도의 숫자를 제시해 줄 거야 라고 예상하고

예수님께 물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것이 예수님 나라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7번 그거 삭제 하라 라는 겁니다.

있는 것 마저 가난한자에게 다 나누어 주라 라는 식으로

7번 삭제 해 줄게 자 770번 해라

 

아이 너무 하십니다 이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바로 소유 라는 겁니다. 누룩입니다.

7
70을 해서 490번 소유하라 라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도리어 용서를 490번 마이너스 통장이 되어서

영원히 빚진자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따위 789번 용서 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삭제 단절 시킬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처럼 무소유가 아니라

그것 조차도 자기 숙제가 되어버리겠지요

무소유가 아니라

삭제의 과잉, 없음의 과잉 반복, 마이나스 통장만 늘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뭡니까?

 

이것 아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좀 유명하다는 목사들 말 들어봐도

온건하고 건전하다는 제대로 된 목사 다 라는 평을 듣는 자들의 주장을 봐도
특히 개혁주의 다 엉터리 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라는 이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백프로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외치는 예수 믿지 마세요

교회도 다니지 마세요

다 마귀 소굴일 뿐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이런 단절을 벌리는 나라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단절의 나라

 

오늘날 교회는 반대죠 소유의 확대 곧 누룩만을 구할 뿐입니다.

 

단절 곧 삭제를 전문적으로 하는 나라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단절의 반복이요

없음의 반복입니다.

 

없는 것은 없는데 그 없음이 계속적으로 반복케 하는 일을 벌리는 나라

그런 일의 원천이 되는 나라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 구할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안 구합니다.

교회 백날 다녀보세요

예수 백날 믿어보세요

단 한 명도 그의 나라를 구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명료해 집니다.

 

그의 의를 구하라 라는 말은 이제 쉽게 알아먹을 겁니다.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나의 의를 삭제 시키는 의가 되는 겁니다.
그의 의를 구하는 겁니다. 나의 의를 삭제시키는 의

 

내가 생각해도 이것은 참 괜찮은 짖이야 라고 당연시 했던 것을

삭제시키는 의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그의 나라요 그의 의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과연 구할수 있겠습니까?

 

아예 베드로처럼 7번 용서를 쌓지 않아서 의가 없으면 되겠지?

아니지요 그 반대입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 해서

그렇게 의의 마일리지를 억수로 나름대로 쌓아놓고서
와르르 왕창 무너지는 기쁨을 누리는

주여 이 의를 삭제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 라는 겁니다.


쌓은것이 없는데 무너지는 기쁨을 어찌 구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반드시 나의 의 쌓기가 반드시 동반이 되어놓고서

그 의를 삭제시키는 또 다른 의가 나타나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중단절입니다.

 

내 의를 쌓지 않겠다 라는 것이 단절 되어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이미 늘 수시로 뭘 하든 다 죄요
뭘 하든 다 자기 의 쌓기요
뭘 하든 막살기 뿐인 모습이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무소유를 실천하라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는게 아니라 구조로 보는 겁니다. 판대기 전체로 보는 겁니다.

 

무소유를 소유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단절을 소유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즉 마음껏 소유하듯이 막소유해 놓고서

 

다시 그 소유물 곧 나의 의 죠

그 의가 예수님의 의에 의해 삭제 당하는
그 처참한 굴욕을 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 이라는 겁니다
.

 

그러니 없음(단절)의 반복이요 없음(단절)의 과잉이니

목숨이 소유보다 더 귀하게 되는 것이요

소유가 묵숨보다 귀중하지 않게 되는

창조의 처음원리가 되는 겁니다.

 

믄 말인지 모르겠지요

 

쉽게 말해서 부자청년에게 너의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 부자청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하니까 근심하고 등돌리고 뒤돌아가버리는 겁니다.

 

말라꼬 지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여서 지킬려고 하는 겁니까?

 

그러니 관계라는 사귐이 아니였던 거죠

주종 관계였던 거죠

 

그렇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부자청년이였더면

 

주여 이것 원래 제것이 아니였습니다.

아니 소유가 제 목숨보다 귀하겠습니까?

원래 저들의 것입니다.

저들의 목숨 또한 이 재산에 의해 좌우 되지 않습니다.

내 재산에 의해 저들의 목숨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 가난한자의 목숨과 몸은 예수님의 긍휼에 의해 좌우되는 겁니다.

주여 저도 불쌍히 여기셔서 저를 살려주옵소서

저의 목숨과 몸은 이런 소유물인 재산에 의해 사는게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지심에 달려 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얼마나 되바라진 말이겠습니까?

 

돈 한푼도 버릴 필요 없이 예수님을 제대로 볼수가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미 사물이 그를 장악해 버렸기에

목숨이 더 귀중한데

몸이 의복 보다 더 귀중한데

의복과 음식이 그를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볼수가 없어서
음식과 의복이 목숨과 몸 보다 더 귀하게 되어버려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유를 확장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을 바라고 예수님께 무슨 율법을 또 지킬까요? 라고
얼마나 예수님을 거꾸로 봐도 한 참을 거꾸로 본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을 정반대로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그들 소위 믿는자들에게 복받았다 라는 소리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은 그들 세계를 대표해서 예수님께 걸려든 겁니다.

 

제자라고 해서 다를 것 없습니다만

예수님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시기에

새창조 된 겁니다
예수님이 그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면 그들 또한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선상에 같이 놓여진 입장일 뿐입니다.

 

인간은 개과천선 절대로 바뀔 리가 없습니다.

 

오죽 하면 안되기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했겠습니까?

즉 주여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십시오 라는 되바라진 소리를 하라 라는 겁니다.

 

아니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져야지 왜 예수님께 대신 져 달라고 해

나쁜놈들일세

 

네 맞습니다. 나쁜놈 맞아요.

그런데 죄 없는 자가 십자가를 이루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십자가를 져도 안생겨요

 

긍휼이 안 생깁니다.

도리어 누룩만 생깁니다.

 

우리는 그저 그 어린양의 살과 피를 맛있게 먹는 것 뿐입니다.

 

? 내 목숨보다 음식이 귀중하지 않기에

내 몸 보다 의복이 귀중하지 않기에

이런 호사를 십자가의 긍휼 때문에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이것 구할수 있는 뻔뻔함이 과연 있을까요?

 

이것이 과잉 없음입니다.

 

일반 없음은 저쪽 불교식입니다.

기쁨도 없고 얼굴을 오만상 찡그려서 겨우 겨우 참는 식입니다.

기쁨 조차도 연기를 해야 하는 식입니다.

아파도 안 아픈척

슬퍼도 안 슬픈척

고통스러워도 티를 안내는 척

 

그것이 몸 보다 의복 곧 외식이 더 귀중한 가치가 되어버린 주객이 전도된 누룩인 겁니다.

 

아프면 아프다 라고 소리치면 됩니다.

 

주여 쌀 떨어졌습니다 제 목숨이 음식보다 귀합니까? 아니잖아요

주여 입을 옷이 없습니다. 제 몸이 의복보다 귀합니까? 아니잖습니까?

주여 먹을것과 입을 것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주옵소서 라고

뻔뻔하게 기도하십시오

 

내가 먹을 것도 내가 입을 것도 애초에 없었습니다.

다 주의 영광을 위해

심지고 거두지도 않아도 기르시는 긍휼 때문에

너무 너무 귀해서 입히시고 먹이시고 기르셔서

오늘 배불리 먹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내일 아궁이에 던지시는 거죠

 

왜 주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에 또 내일 아궁이에 던질 꺼면 말라꼬 오늘 배불리 먹이고 입히냐 라고 하겠지만

그 아궁이가 그 단절이 바로 예수님 나라 라니깐요

 

아궁이에 던지지 않을꺼 같으면 말라꼬 귀히 입히시고 먹이시고 기르시겠습니까?

 

바울을 괜히 죽이기 하시겠습니까?

다니엘을 괜히 불 속에 집어 넣으시겠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는 자들이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던지시는 겁니다.

 

그들이 던져지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쳐다보는 자가 없잖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울상을 하면서 불 아궁이에 던져지던가요?

그래서 바울이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없음이 졸지에 더 증폭이 되어서 뻥튀기 기계에 뻥하고 터져나오더니만

바울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얼룩을 제거할려다가 도리어 얼룩이 되어서

아무리 죽일려고 온 동네가 다 나서도 죽일수 없는 얼룩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없음의 반복이요 없음의 증폭입니다. 얼룩(예수님의 얼굴)을 아무리 지울려고 해도 안되요.

 

얼굴은 몸의 증상 징후 아닙니까?

예수의 흔적이라는 징후 얼룩을 아무리 그 흔적을 지울려고 앙대요 ~~~~

 

 

그러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누가 구합니까?

우리가?

아니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결국 그의 나라가 구하고

그의 의가 구하는 겁니다.

거기에 당첨당한 자가

 

베드로

 

베드로 졸지에 소유물이 다 삭제 당해 버려서

이제는 얼룩이 되어버려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의해

490번의 용서받음을 무한대로 펼치는 겁니다.

 

지는 아나리아 삽비라의 실수를 조금도 허용치 않고 죽여버리고서는

자신은 정작 백날 실수를 해도 용서를 받는 겁니다.

고기 묵으라~ 안묵을랍니다

어여 묵으라 내가 깨끗케 했다. ~ 안 묵을랍니다 율법에 의하면 더럽습니다.

어허 내가 깨끗케 했는데 누가 그 카더노 묵으라 ~~ 알았습니다. 우엑 켁 켁 겨우 묵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알고보면 억수로 부조리 하지요

 

말도 안되는 비거룩입니다.

 

마치 구원파 교리처럼 구원받았으면 마음껏 죄 지어도 된다는 식으로

죄를 조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외설(부조리) 축에도 끼이지 못합니다.
결국 딸랑 교주 지혼자 잘해먹고 나머지는 그 밥풀떼기로
등쳐먹힘을 당할 뿐이죠

 

마치 이미 나쁜놈인데 새삼스럽게 나쁜놈 되자 라는 식에 말려든거죠.
불가능한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가능성의 잠재성을 지닌 것을 자극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 만의 교리가 아니라 사실상 모든 종교의 특히 기독교 교리가 결국 그런 교리들 뿐입니다.
속임수일 뿐입니다. 누룩입니다. 소유의 확장입니다. 교세의 확장.

그러나 베드로 지는 큰 죄를 지어도 용서 받으면서

남들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실수를 조금도 용서치 못해서 아예 죽여버리는 겁니다.

물론 성령님이 하셧다 해버리면 할 말 없거든요

 

이런 부조리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알고보면 이 부조리를 거부해서 소위 거룩하다 깨끗하다 라는 것을 잡았던

그 당사자가 바로 베드로 아닙니까? 그게 7번 용서 아닙니까

 

그것 또한 부조리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부조리 보다 더 부조리한 770을 과잉으로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 부조리가 바로 3이라는 꼬기오 꼬끼오 꼬끼오 간격입니다.
못 넘어오니까
7번 용서도 삭제 불가능할 뿐더러
7에 70 용서 받는 삶은 더더욱 불가능한 겁니다.
이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부조리
부조리를 더욱더 벌리는 더 나은 부조리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실천이

사실은 부조리 한 겁니다.

가난한자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지 혼자 지켜온 겁니다.

함께 지킬 마음 조차도 없었었습니다.

그것을 까발리면서

그 부조리 보다 더 부조리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예수님이 제시하니까

근심하고 등 돌리고 돌아서 가버리는 겁니다.

 

 

이들의 부조리를 삭제하는 것은 더 나은 더 부정한 부조리입니다.

 

외설적인 율법보다 더 나은 외설은 십자가라는 도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 걸림돌이요 어리석고 미련한 거지요

 

지혜자들이 바보입니까? 십자가를 괜히 미련하다 어리석다 라고 한게 아닙니다.

유대인은 뭐 율법을 모릅니까? 왜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일 수 밖에 없습니까?

 

율법을 뒤짚어 엎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최고의 외설 곧 스캔들 불륜입니다.

 

그 부정의 부정함 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외설적인 십자가 나라를 원하고

외설적인 십자가의 의로움 곧 긍휼을 구할자가 있겠습니까?

 

남들로부터 다 인정받은 나의 의로움은 가장 외설스럽다고 규정하는

나 보다 더 외설적인 걸림돌 거리끼는 십자가를 구할자가 어디있냐 말입니다.

 

십자가를 좋게 좋게 포장하기 바쁘지

누가 그 피 비린내나는 역겹고 토하는 살과 피를 먹을자가 어디있겠습니까?

 

내가 장 지진다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나의 자식을 뜯어먹지 않겠다.

 

아냐 넌 뜯어 먹도록 되어 있어

 

 

아닙니다 전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아냐 넌 닭 울기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할 거야

 

이런 나의 말도 안되는 부조리를 뒤엎어버릴 수 있는 것은

나 보다 더 외설적인 기생복장을 한 다말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기생복장, 거짓말)을 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상한 나의 신앙에 속고 속아서

적나라한 나의 실체인 죄악을 못보고 지옥에 갈 뻔한 겁니다.

 

그것을 까발리는 것이 나의 먹보다도 더 검은 적나라한 붉은 피로

 

그 잔인하게 찢긴 살과

썩고 부패한 역겨운 죄 보다도 더 비린내나는 토하는 피로써

 

그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겁니다.

 

과연 내 목숨 보다 더 귀한 이 음식인 예수님의 찢겨진 살을 그의 나라를 구하듯이

과연 내 몸 보다 더 귀한 의복처럼 예수님의 비린내나는 피를 몸에 바르듯 그의 의를 구할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나쁜 놈 중의 나쁜놈

 

죄인 중의 괴수임을 율법이나 양심따위로 죄책감도 아닌 선악과도 아닌

 

그런 되도 않는 외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의 용서 라는 진짜 제대로 된 더 나은 외설

갈 때 까지 다 가버린 바닥의 바닥을 친

그 외설인 십자가의 용서로 인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면

 

우리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실겁니다 라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고백을

 

감히 외치면서

 

덩달아 더욱더 반복이 되어 무한 증폭으로 호사를 누리고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입니다.

 

나의 나라(목숨)와 나의 의()을 삭제 시키는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간담이 녹듯이 기뻐하면서 기생라합이 이스라엘도 구하지 않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마음껏

막 구한 겁니다.

 

삭제시켜 달라고 ~~~~~~~~~

 

 

 

 

 

 

 

 

 

 

 

 

 

 

 

소유냐? 죽음이냐? (12:13-21)

2014/04/26 16:24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소유와 단절성(십자가) (12:13-21)

소유가 바탕에 깔린 삶이냐? 십자가의 죽음이 바탕에 깔린 삶이냐?

 

(12:13,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2:14, 개역)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복음과 비복음의 차이성은 이 단절성에 의해 좌우 됩니다.

 

소유란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꾸 잇고 잇고 잇는 그 연속성이요

끊임 없이 제공되는 뚝뚝뚝 단절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소유(역사,시공간,개방)에게서 단절(묵시,죽음)은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디 바리새인의 누룩을 좋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연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싫어할 자가 없습니다.

 

부자청년이 오죽하면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율법을 지킨 것을 내세우겠습니까?

혹 부족한 것 있으면 말하라 내가 다 이루겠다는 겁니다.

 

다들 이런 부자청년을 부러워 죽을 판국입니다.

율법사가 큰 계명이 뭐냐고 묻는 의도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니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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