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기다리고 있던 주인의 수종(섬김) (12:32-48)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

 

(12:32, 개역)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2:33, 개역)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12:34, 개역)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12:35, 개역)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12:36, 개역)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12:37, 개역)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12:38, 개역)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12:39, 개역)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2:40,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12:41,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12:42,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12:43, 개역)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12:44,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12:45, 개역)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12:46, 개역)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12:47, 개역)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8, 개역)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12:37, 현대인)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주인이 몸소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직접 시중들 것이다.

 

 

인간이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환경이 이런 상태입니다 라고 표출하는데

그 징후로써 인간이 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생각을 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뭐든지 인간은 그냥 통로일 뿐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지요 종이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야가 지금 이런 것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할 줄을 모르네요 라고 대신 외치고 대신 구하는데

그 징후로써 인간에게서 기도가 술술 나오게 되는 겁니다.

기도가 주체이지

기도하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다는 겁니다.

왜 필요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그 다음으로 그 구하는 것은 곧 소유물입니다.

소유물 곧 필요한 것

즉 이러 이러 한 것이 없다 라는 없음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소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소유물이 왜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결핍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래서 소유물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그 소유물을 거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이 말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없다 라는 없음의 반증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없는 것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지난 시간을 예로

생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구할 생각을 안하고

소유를 구한다는 겁니다.

 

결핍은 결핍인데 왜 결핍인줄 모르고 구하는 것을 구할 뿐이니

뭔가를 지켰다 로 끝내버리는 겁니다.

 

즉 출처를 모르고 알고픈 마음도 없고 그냥 그대로 알수 없는 강요된 선택에 끌려 살아갈 뿐이다는 겁니다.

 

소유 자체만을 구할 뿐이지

그 소유를 통해서 정작 소유를 소모하는 생명이 없음

생명의 부재에 대한 심각성을 모른다는 겁니다.

 

예로 멀쩡하게 있는데

갑자기 누가 지나가는데

이유없이 붙잡고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이 왜요? 누가 당신을 죽일려고 합니까?

아니요 아니요 저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어주세요?

~~~ 깜놀 미친거 아니야? 당신은 지금 생명이 붙어있고

어떤 누구도 당신을 해칠려고 하지 않는데

왜 하필이면 지나가고 있는 나에게 생명을 부어달라고 하느냐?

정신과 의사를 소개시켜 줄테니 그곳에 가서 진단 받아보세요

아이구 불쌍하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누가 자신에게 이미 생명이 아예 없는 상태로 여겨서

제발 좀 생명 좀 부어주세요 라고 아무나 붙잡고 생명을 구걸한다면

누가 그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생명이 없다고 여기겠습니까?

 

구걸 한다는 자체가 이미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외치는 것이고

아직 죽음이 도달하지 않았기에 외치는거 아니냐 라는 겁니다.

 

생명이 단절이 된 상태이며는 외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외친다는 자체가 이미 생명이 없습니다 라고 해서 외치는 것이다 라고

반증하듯이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외침이 그 사람을 가지고 스피커 삼아서 외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인 겁니다.

외침이라는 목소리가 그 사람을 다룬 것이니 말입니다.
(바로 우물가의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달라고 예수님이 유도하여 질문하도록 해 놓고서는
그 말도 안되는 요청에 오냐 내가 그것에 딱 맞는 자이다 라고 또 말도 안되는 답변을 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수다 라고 말입니다.)

(요 4:7, 개역)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개역)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런 식으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아무도 주객이 뒤바뀐 상태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홀로 외치게 되면 당연히 비정상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유를 구하는 자는 많아도 생명을 구하는 자가 없듯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마치 인간에게서 생명이 없듯이

생명을 구하는 자가 없듯이 말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는 치료하는 소유물을 소유하게 되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곧 망할 도시인데...
단 한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생명이 여기 있기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무가치한 죽은자들을 살려놓으니까 단 한명은 그 미련함을 더욱더 확장시키는 겁니다. 단절을 더 단절되게 말입니다.
그 동안 쓰지 못했던 근육을 쓰러 돌아오지 않는 자와, 오히려 죽은자를 살리는 어리석은 십자가를 더욱더 확대시키는 단절을 확대 시키는 자와의 두 갈라짐으로 벌어진, 간극을 확보 획득하는 겁니다.
)


 

이렇게 없음을 크게 확대 확장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없는데 없음을 크게 보인다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보이지 않는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크게 확대시켜 보인다?

 

오히려 아무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자력으로써 더욱더 확장하는 겁니다.

 

마치 벙어리의 외침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에까지 울려퍼지고

귀머거리의 반응이 천리안 보다 더 명료하게 듣고서 그 노래 장단에 춤을 추는 겁니다.

소경이 죄가 뭔지를 정확하게 보고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았고

본다고 하는 자는 정작 아무것도 못보는 소경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들을 다루어서 나타나는 역전의 현상이다는 겁니다.

없음으로만 일하신다는 겁니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를 통해서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확대 확장 증폭 반복한다는 겁니다.

 

부자가 아닌 거지나사로를 통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증거되더라 말입니다.

 

없음의 반복이요 그 없는 것들을 통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침노입니다.

 

그러니 소유는 도리어 이 생명을 드러내는 시다바리로 동원될 뿐인 겁니다.

마치 마귀는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더욱더 증폭시키는데 동원이 되는 어두움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소유를 거부하는데 아니라

소유는 생명을 드러내는데 더욱더 필요한 도구인 겁니다.

야곱을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했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형 에서는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하는 미워하기로 작정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연장선에서(없음의 반복으로써, 단절의 단절로써)

 

주인과 종의 관계인 소유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 생명의 관계로 증거됩니다.

 

누가봐도 상전은 주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거꾸로입니다.

 

거꾸로 종이 상전이 되어 주인의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소유물인 종이 어떻게 마법을 부렸는지?

졸지에 소유물이

졸지에 종이

보물로 변해버린 겁니다.

 

(12:32, 공동)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12:33, 공동)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12:34, 공동)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너희 소유물을 팔아서 좀먹지 않는 지갑 창고을 마련해 보물을 사라 라고합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목숨이 음식보다 귀중하고

의복이 몸 보다 귀중하지 않다고 하듯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데 소유를 팔아서 마련하라 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이것이 아니고 이것이다 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자기 소유물을 팔아서 종을 샀다는 겁니다.

종을 사서 종을 섬기는데 마치 소유물 다루듯이 하지 않고

보물 다루둣이 섬기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섬기고 있는가? 이거 완전 거꾸로죠

종이 이래야 되는데 완전 반대입니다.

 

(12:35, 공동)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12:36, 공동)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12:37, 공동)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

(12:38, 공동)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주인이 바깥에서 일하고 돌아왔는데 깨어있어 주인을 맞이하면 그 종은 얼마나 기쁘지 않겠느냐?

그러면 주인은 그 종을 식탁에 앉히고 먹이고 입히고 시중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이거 보통 이상한 장면이 아니고 뭡니까?

 

언제 주인이 문열고 돌아올지 모르는 가운데

깨어있어 주인을 맞이하면 그 종은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일방적인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과잉 오바 도착성입니다.

 

주인이 피곤해 돌아오면 종들이 시중을 들어서 식탁에 앉혀 먹이고 입히고 바쁜데

이것은 완전 반대인 겁니다.

 

이런 과잉 오바 행동의 섬김이 어디서 왔는고 하니

그 다음 구절을 통해서 좀 이해가 됩니다.

 

(12:38, 공동)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12:39, 공동)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12:40, 공동)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12:38, 개역)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12:39, 개역)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2:40,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주인의 과잉 오바의 일방적인 사고방식은

도적을 의식하는 예민함에 있다는 겁니다.

 

마귀만을 의식해서 나오는 복음이요 말씀이요 행동이요 믿음이요 비유라는 겁니다.

 

인간은 알 리가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 놓여진 겁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것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어떻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안할자가 있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근심하게 되면 도리어 마귀가 더욱더 추궁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보다 마귀가 더 설쳐 댈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 소리,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정죄하는 풍경이 펼쳐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불가능한 외설성으로써 말씀이니 단 한 대목도 지킬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지킬 생각 하덜덜 마세요

그냥 누릴 수밖에 없도록 덮쳐지게 됩니다.

맨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것만 평생을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걱정했을 뿐인데

일방적으로 너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구나 라고 일방적으로 취급해버리듯 선언을 하십니다.

결국 마귀만을 걸려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마귀에 상대적인

주인의 섬김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적이

 

(12:39, 공동)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12:40, 공동)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나옴으로써 주인의 과잉된 오바 액션을 이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도적 보다 더 나은 도적같은 사고방식을 펼쳐시는 겁니다.

 

셀록 홈즈 라는 영화에서 나오듯이

탐정은 범인이 계획하는 범죄를 미리 앞당겨

앞서서 미리 그 계획을 실행해 보는 겁니다.

형사는 적어도 범인 보다 더 범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형사이다는 겁니다.

 

앞서서 미리 범죄를 예견하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이 되는 것이 바로 모든 사물 피조물 똥개 새 날파리 등등

인간만 누락된 채 모조리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그 결과만을 통보받을 뿐인

섬김의 대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띠를 띤다고 합니다. 섬기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그 섬김을 맞이하라 라는 겁니다.

 

맞이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도적을 의식한다면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냥 당하는 섬김입니다.

 

그런데 도적의 활동이 뭔지 모르면 주인 조차도 이해가 안되고

이 모든 구조가 말도 안되는 것이 되는 무시꺼리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만 들으랍시고 하는 소리입니까

저들 모두에게 들으랍시고 하는 소리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영역성의 선을 긋고 있습니다.

즉 말귀를 못 알아먹은 겁니다.

도적이 보일 리가 없고

그 도적을 의식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과잉오바일 뿐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오히려 그 질문을 증폭기로 삼아서

더더욱 증폭시켜 더더욱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합니다.

단절의 단절 없음의 없음으로 더 확대 시킵니다.

 

12:42, 공동)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12:43, 공동)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12:44, 공동)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12:45, 공동)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12:46, 공동)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

 

 

분명 위에서는 주인이 종을 섬깁니다.

종을 식탁에 앉히고

종을 수종듭니다.

아니 종이 주인에게 수종 드는게 아니라

주인이 종을 수종 듭니다.

 

그런데 다시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은 또 다시 역전이 됩니다.

 

주인의 이런 의식을 알았다면

그 종은 자신의 책임을 다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12:43, 공동)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12:44, 공동)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좋다 말았지요

 

그럴줄 알았어 좋다 말았네 ㅋㅋㅋㅋ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해 자기 정당화 할수 있는 기회로 딱 삼기 좋았는데

곧바로 뒤짚어 버립니다.

 

이랬다 저랬다 우짜라는 건지?

 

즉 마귀를 상대할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위에도 불가능이듯이

어느 하나 가능한 것이 없다는 불가능 뿐입니다.

그냥 이렇게 주님 자신만의 활동으로써 일방적으로 퍼부어버리겠다는 겁니다.

그 원인 없는 결과물을 일방적으로 섬김당해 놓고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하나 하나 보게 될 뿐인 겁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만이 의식하는 마귀를

우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마귀를 보게 됩니다.

싸울수는 없지만

그 마귀의 활동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비교하게 됩니다.

나의 행동을 마귀와 비교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이 왜 이런 마귀와 차이가 나는지를

그 차이의 반복성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귀와의 차이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곧 마귀인데요 뭘

마귀에게 잠식 당한 상태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차이나는 예수님의 활동

곧 예수님의 믿음이 벌리를 활동을 보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르는

주께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 그 세계를 새삼스럽게 덮쳐져서 보게 될 뿐입니다.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내 중심으로 보는 세상의 단절입니다.

더 나아가 마귀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단절입니다.

더 더 나아가 인자 중심으로 돌아가 세상의 단절입니다.

 

그러니 내 쪽으로 끌어당길 말씀은 아예 없습니다.

 

(12:47, 공동)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12:48, 공동)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위에서는 주인이 수종든다 라고 해 놓고서는

이제는 말 바꿔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매 디지기 맞는다 라고 합니다.

 

이건 뭐 좋다 말았다 정도가 아니라

살벌하게 목숨까지 내어놓아라 라는 식입니다.

 

목숨이 소유 보다 귀하다 라고 붕띄워 줄때는 언제고 말이죠

 

더 기가막힌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못했을 때 매를 많이 맞겠지만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짖을 해도 덜 맞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안맞는다는 소리는 안합니다.

매는 이래나 저래나 맞는다는 겁니다.

 

(12:48, 공동)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이거는 뭐 결속 시키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단절, 없음의 차단

 

해체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즉 비유 비밀로써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이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종을 섬기는 모습을 보였는데 도리어 종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겠다는 식입니다.

 

즉 사랑, 위에서 씨뿌리는 비유라는 씨의 비밀, 단절성은

바로 씨앗의, 사랑의 외설성을 더욱더 곤고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외설성 중심으로 하늘나라는 증거되고 있습니다.

 

인자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나라는 이런 침략 침노의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섬김과 수종의 모습이 도리어 도착과 외설성으로써 견고하다는 겁니다.

빼도박도 못하도록 말입니다.

 

완전히 뭐 사로잡힌바 된 거지요 뭐

 

 

알아도 맞고 몰라도 맞고

그 간섭 자체가 사랑 때문에 펼쳐지는 것이다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고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고

 

모든 법칙이 해체가 되어 다시 새로운 법칙으로써 외설성 곧 단절성을 획득하는

씨앗, 사랑,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 건널수 없는 간극을 획득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그 획득한 간극을 선물로 주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그 이전의 법칙 조차도 외설적인데(아무도 지킬수 없는 불가능성의 율법)
그 외설 보다 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방적인 용서(불가능한 율법을 다 이룬 용서의 사랑)
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부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모순의 간극을 획득해서 부어주시는 겁니다.

 

이 간극을 보존 확대 증폭 반복하기 위해서

이 간극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외설적이고 말도 안되는 부조리가 인자를 중심으로써

도적(마귀) 보다 더 도둑적인 인자의 섬김 사랑으로

 

그 다음 본문 전쟁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로 왔다고

 

개방 연결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 차단 없음의 반복을 구체화 하겠다는 겁니다.

 

즉 획득한 간극을 더욱더 반복, 단절의 확대

단절의 단절인 이중성을 구체화 하겠다는 겁니다.

농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리겠다는 겁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가 원수 지간으로 변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12:49, 개역)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개역)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12:52, 개역)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개역)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이거는 코난 보다 더 심해요 심해

 

예수님의 수종 곧 섬김을 차라리 받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집안이 화평으로 넘칠텐데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이미 확정적인 구조인 겁니다.

가정 뿐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 국가 구조를 다 이렇게 인자중심의 판대기로 펼치는 겁니다.

 

예수 믿어서가 아니라

믿든 안믿는 이미 그 아래에 갇혀버린 상황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미리 격는 것이 말씀의 실상을 보는 것이겠죠.

이게 현실입니다.

 

이상하다 왜 우리 집안은 이렇게 싸울까?

이미 구조화 시킨 겁니다.

백날 연구해 보고 해도 안되는 이유입니다.

차라리 기생라합처럼 더 나은 외설성에 간담이 녹아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이 그런 취지입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서는

이제는 인생 배렸다고 한 순간

도리어 하늘의 전쟁이 부어지니

이제는 아예 당차게 그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부어달라고 합니다.

 

분명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여호와의 영광을 봐버렸네

이제 죽었구나

 

라고 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사야든 다윗이든 시편 136편이든 요나든 그 어떤 선지자든 다 그런 식입니다.

여기에 반면에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보존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멸망을 구원으로 보는 시선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거짓선지자는 없는데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부자는 물방울도 없고 건널수 없는 간격을 획득하지 못하고 (거짓선지자)

도리어 거지 나사로는 그 건널수 없는 간격을 획득하게 되는 겁니다.(참선지자)

 

즉 간격을 획득한다는 말은

제대로 된 현실을 획득했다는 겁니다.

바로 인자 중심의 하나님 나라의 종말성 단절성을 획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구원이지요

 

그러나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외치지만 평강이 없는 겁니다.

 

기정 사실화 된 종말을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아무리 외쳐 본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누락이라는 간격을 획득한 존재인데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거짓선지자는 무시한 겁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진실된 청기지는 주인의 섬김을 제대로 인식한 자입니다.

 

(12:42,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12:43, 개역)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12:44,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12:45, 개역)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12:46, 개역)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12:47, 개역)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8, 개역)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말도 안되는 인간의 모든 법칙인 외설성 보다

더 나은 외설인 십자가라는 부조리를 때려붓는 자가 바로 진실된 청지기입니다. 곧 예수님 뿐입니다.
주께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주님의 자작극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보다 먼저 있었던 주의 섬김인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처음부터 이 십자가였던 겁니다.

 

예수님의 섬김 때문에 비로소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가 갈려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누락을 기뻐하는 주의 섬김을 보는 자가 참선지자요

반대로 이스라엘의 존재의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하는 자가 거짓선지자입니다.

 

 

 

 

 

 

 

"[없음][반복]""그의 나라와 그의 의" (12:22-31)

2014/05/03 13:2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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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반복]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 (12:22-31)

 

골방도 창고도 없는 귀한 하루살이의 영광


단절의 반복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시간에 복음은 이 단절의 반복성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로 비복음은 소유의 연속성을 꿈꾸는 마약 중독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본문은

없고 없고 없는데 없음으로써 반복하면서 예수님 나라를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됩니다.

없는데 어떻게 없음이 계속적으로 반복을 이룰까요?

없음은 없는 겁니다 라는 말을 저쪽 양탈무리들이 얼마나 강조를 합니까

맞잖아요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는 말이 인간 세계의 주장 아닙니까?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누룩을 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조심하라뇨? 오히려 [없음]을 조심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없음][반복]이 된다고 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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