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 미리 앞당겨 받는 심판

 


(
13:1, 개역)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13: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6, 개역)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13:7, 개역)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13:8,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3:9, 개역)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회개란 미리 앞당겨 받는 죽음입니다
.

죽음을 미리 앞당기는 겁니다.

단절인 거죠.

 

사람은 누구든지 하루에도 몇 십번 죄를 짖습니다.

즉 부정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했냐 라는 유무를 따지는 것 보다 앞서서

이미 죄 아래 갇혀 있기에

스쳐 지나가면서 죄가 달라붙는 시공간에 놓여진 겁니다.

시 공간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인처럼 특별한 공간과 특별한 시간을 구상했습니다.

이런 이런 시간을 소비하면서 이런 제사를 드리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구상입니다.

이런 특별한 공간에서 조심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구상입니다.

이 둘을 중첩시켜서 시공간이라는 역사를 죄짖지 않는 것으로 채우면 죄가 되지 않는 구상말입니다.

 

그런데 그 구상 자체가 사실은 죄에서 나온 겁니다.

특정 공간 특정 시간

그로인한 특정 사물 바치기 말입니다.

인간의 땀이 졸지에 신선한 노동으로써 바쳐질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회개 조차도 특별한 기도로써

그냥 기도가 아니라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드리는 기도인 회개로써 바치면

무슨 난제나 어려운 점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것들은 족히 비교조차 안되는 겁니다.

그 따위 외설적(불법적)인 것을 노릴게 아니라

아예 내 쪽에서 출발하는 회개가 단절되고

회개로부터 출발하는 대상물인 나를 한번 쳐다 봅시다.

 

회개가 왜 하필이면 딴 놈 한데 가지 않고

나에게 오냐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회개는 특별기도인 자신이 구별해서 드리는 특화한 기도가 아니라

회개가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차이 구별케 하는 식으로 나에게 덮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회개는 내가 믿을만 해서 믿는 방식의 취사선택식의 회개가 아닌

졸지에 빼도 박도 못하는 나를 대상물로 삼아버리는 회개인 겁니다.

 

죄가 그러합니다. 죄란 인간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죄가 인간을 대상물로 삼아버린 겁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길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은혜의 왕노릇 또한 그러합니다.
회개가 나를 대상물로 삼아버린 겁니다
.

그렇게 되면 회개는 나를 찢어버립니다.

더 이상 나를 잦을 수 없도록 나를 상실케 만들어 버리는 것이

회개가 벌리는 단절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자기부인이죠.

나를 잊어 버림 당하게 되면 더 이상 상실할 것이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곧 나를 삭제 당하면 말입니다..

회개란 이런 목적으로 나를 찢고자 다가오는 겁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입니다.
나를 내가 쳐다보면 볼 수록 시험에 빠지고, 계속 미련 뿐입니다.
그런 나를 상실케 하는 회개는 미쁘심입니다. 든든하고 안정감있고 믿음직스럽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나의 숙제 대상으로써 회개란 없습니다.

도리어 회개가 나를 자신의 숙제로 삼아버린 겁니다.

 

회개에 달린 겁니다. 회개가 인격화 되고 도리어 나는 그의 사물이 되는 겁니다.
주객이 뒤 바뀐 겁니다.
왜? 회개가 나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일 나중에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취지입니다.

 

종교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회개의 달인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 손에 죽는 것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은 것

 

모조리 다 회개를 안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욥아! 너가 그렇게 쫄딱 망하고 저주 받게 된 것은 회개를 안해서 그런거야!!
종교의 달인은 이것 밖에 못 봅니다. 더 이상은 볼줄도 모르고 할 줄도 모르고 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마약의 한계입니다. 육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빼내시는 작업을 욥에게 펼치시는 겁니다.
이들의 종교에서, 이들의 엉터리 회개에서, 이들의 엉터리 하나님에게서 빼내시고자 회개가 개입하는 겁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회개가 말입니다.
육을 치면 육의 본성들이 욥 본인 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모든 육들의 본성들이 다 들추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부터 심판을 퍼붓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

 

이런 회개를 안해서 저주 받았다 라는 유대인의 해석에
예수님은 그 다음 니 차례야 라고 합니다
.


우짜지? 우짜면 좋노!! 그 다음은 니 차례인데?

즉 너도 회개 안하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

아니 회개의 달인들에게 이 무슨 일방적인 통보냐 말이죠.

? 내가 회개의 영을 부어준 적이 없기에 ...


회개란 불가능성입니다. 단절입니다.
그 동안 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 다 거짓으로 밝혀지는 겁니다.

회개 자체가 죽음인데 그 죽음을 회개로써 했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회개를 안 했다는 증거입니다. 죽어야 하거든요
샬롬!! 간밤에 죽어 마땅했었는데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은 깨끗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무시당했으면 봐줘서 안 죽였던 겁니다. 불에 타야 마땅한데 ~~~
그래서 휴우 너 간밤에 하나님 곧 불에 안 타죽었니?
응 불이 봐줘서 안 태우더라구 샬롬 샬롬!
이래 되야 하는데, 이것이 단절성인데

유대인의 회개에 대한 해석은 

빌라도 손에 죽는 것은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되는 것은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지 않아서 이니

주께 부르짖으라고 했으니 주를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거든 이라는

전혀 다른 회개라는 해석을 내어놓습니다.

 

엉터리 회개가 졸지에 다 무너질 판국이고

도리어 새로운 회개로 인해

빌라도 손에 죽어야 함을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

주여 빌라도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회개 해야 할 판국으로

회개의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회개 조차도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마치 손 할례와 마음판의 할례처럼 말입니다.
하나는 가능성(엉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성(외부의 회개)의 단절로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회개 안 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경험이 있습니다. 부르짖음의 효과를 전수받아 왔습니다.
부르짖으니 되더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부르짖음의 엉터리 예를 들어줘도 모르는 겁니다.
전형적인 예로 법궤만 앞장세워 가면 전쟁에 승리한다는 경험을 자기 쪽으로 당기니까
도리어 법궤가 블레셋 군사들이 요놈 내 뒤에 숨었다 라고 고자질하니
도로 속아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법궤 뿐이겠습니까? 회개 기도도 그런식으로 활용하는 것을 주님은 역이용하시는 겁니다.
지금 본문이 그런 취지 입니다.

유대인의 회개에 대한 해석은 취소 취소 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빌라도 손에 죽어나가는 일들이 취소 되게 해 달라~~~
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대 절대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 망할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요 오늘날 기독교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해석은 빨리 빨리 그대로 실행해 주옵소서 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가 아니라
정반대로 이런 일 조차도 주님께서 벌리신 은혜이다는 겁니다.
어서 빨리 실행해 주옵소서 라는 것이 예수님의 회개요 그것이 감사할 뿐이다는 겁니다.
왜? 이미 이스라엘은 완료된 것을 봐버렸기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왕창 사라져 삭제 당해도
쫄딱 망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여기에 설상가상 바로 그런 새로운 회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내어놓으라 라는 비유를 곧 단절을 곧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차이 곧 차단성입니다.

간따나 실로암 망대에 대한 해석
빌라도의 살해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조차도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인데
거기에다가 비밀의 비유까지 차이의 반복을 차이의 차이라는 단절의 이중성을 펼쳐서
더욱더 간격을 벌려 버리는 겁니다.
강을 건너올수 없도록
여기서도 못 건너고
저기서도 못 건너는 강을, 골짜기를, 틈을 극과 극으로 벌려 버리는 겁니다.


정작 바리새인이 그런 간격벌리기의 달인이였잖습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그런데 이제는 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겁니다.
간격벌리기.
 

종교꾼들이 심심하면 외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내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도끼로 찍어 버린다 라는 세례요한의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외치는 그 당사자는 내어놓은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단절을 시도한게 아니라 그들은 그 말로 그 주문 주술 외우듯 마술 트릭으로 연합을 꾀하고 있는 겁니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 망할리가 없다. 라는 정치술 말입니다.
망한다 라고 하면 결집력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의 믿음 자체가 소속감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은 해체 입니다.
그래서 열매 열매 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것도 결집력을 추구하는 주문 주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꼭 물어보십시오

그 열매가 뭔가요 라고?

다들 모릅니다.

 

열매를 운운하는 놈들 치고 대부분 다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열매로 알리라 라고 맨날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기껏 그렇게 외친 열매로 알리라 라고 한 자들의 열매라고 내놓은 것을 보니

 

성공했다는 겁니다.

부요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식들이 잘 되었다는 겁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어려움이 없이 살게 된
복받은 삶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꾼들이 다 추구하니
뭔가 차이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열매 입니까?

 

열매란 정작 그런 것들을 불에 태워서 다시 나오는 겁니다.

즉 불에 상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매입니다.

만약 불에 태워져 버리고, 상해버리면 그것은 열매이지도 않았던 것들이 열매인척 한 겁니다.

불도 통과 못하는 것들이 까불고 속이고 사기를 친 겁니다.

 

즉 회개란 불 통과입니다. 심판통과, 죽음통과입니다. 단절을 통과 한 겁니다.

그래서 통과한 것이 바로 열매 곧 부활입니다.

죽었는데 다시 사는 겁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이다는 겁니다.

 

열매인지 아닌지 알려면 불에 태워보면 압니다. 삭제해 보면 압니다. 단절시켜 보면 압니다.
의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죽여보면 알듯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 거든요

죽여서 부활 되면, 복원 되면, 다시 살면 열매고

 

죽였는데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불을, 심판을 통과케 하는 세례(단절)를 때려붓는 것이 참선지자이고,
이스라엘은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참 선지자 이고 (이미 완료된 새 이스라엘을 봐 버렸기에),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절대 망할 리가 없다는 회개(종말의 영)를 통과치 못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고정성을 외치는 것이 거짓선지자입니다.

 

누가 봐도 거짓선지자가 인간 편입니다. 인간을 구원해 주고파 안달이 났습니다.

 

사람을 좋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선지자는 누가 봐도 싫어버린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듣기 싫은 소리만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새이스라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심심하면 세례 곧 물 속에 불 속에 심판 속에 집어넣습니다.

죽음을 통과하는지 보자 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불은 소멸케 하는 불입니다.

 

소멸 속에 들어갔는데 소멸이 되지 않는 것만이 열매 이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 들어갔는데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이 되는 것이 열매인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살펴봤듯이 그래서 회개의 영은 바울 죽이기를 실행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엉뚱한 목회 성공한 것이 열매라는 둥

삐딱한 사고방식이 없고

부정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열매라는 둥

자꾸 종교 마약을 열매라고 하니 기가막히는 거죠

 

예수님은 인간을 나무로 표현했습니다.

당연히 나무에는 열매가 당연히 아주 당연히 맺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야 한다는 겁니다.

 

찍어버림으로써 예수님 자신의 비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능은 회개를 보여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만약 회개가 즉 종교적 회개가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내어 놓지 않으면

예수님이 직접 몰고온 새로운 회개로 이스라엘 전체가 지금 찍어버림 당할 판국인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 곧 이방인을 중심으로한 즉 새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의 기능인 회개가

그 처음자리가 새롭게 전개될 판국임을

 

판을 뒤짚는 식으로 다가오는데

 

천지를 분별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지금 닥친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차라리 소경입니다. 또는 제가 개같은 이방인입니다

저야 말로 귀신들린 자입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해야 할 판국에

 

도리어 예수님과의 적대적 관계에 놓여진 상태임을

 

이 무화과 나무의 열매 비유로써 표현하시는 겁니다.

 
참 기가막힙니다. 천지를 분변할 줄 아는데 도사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닥친 임박한 종말은 꿈에도 모릅니다.
차라리 천지를 분별할줄 몰랐으면 혹여나 고침을 받는 불쌍히 여김이라도 받을 줄 누가 압니까?

(눅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눅 12:52, 개역)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눅 12:53, 개역)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 12:54,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눅 12:55, 개역)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눅 12:56, 개역)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그런데 유대인들은 개같은 이방인에게 임할 저주를 잘도 보면서 정작 본인들에게 닥치는 심판은 깜깜하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녀보면 점쟁이들이 판을 칩니다. 그 점들은 왜 그리 잘 맞는지.
딱 보면 안다고 자랑질 합니다. 저 사람의 눈빛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를 안다고 자랑합니다.
그렇게 잘 보는데 왜 자신에게 닥칠 임박한 종말은 왜 못 볼까요?
실로암 망대 무너져 깔려 죽은자는 회개 안해서 저주 받아서 이다 라고 기가막히게 잘 해석을 하는데
왜 그 다음은 자기 차례인줄 모르는 것일까요?
정작 본인 자신에게 임하는 심판은 전혀 감도 못 잡더라 말이죠.

지금 누가 누구보고 원수라고 하느냐?

 

뭐 개같은 이방인?

 

너야 너! 너가 원수야!

 

뭐!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 이라고!!

웃끼지마 아브라함은 내 때를 보고 기뻐했어

 

뭐? 넌 모세보다 크냐 고?

모세는 나에 대해서 기록했단다 모세 보다 더 큰 이가 여기있단다

 

즉 더 크냐 작냐의 문제가 아닌 더 크다는 것은 지금 심판이라는 불을 부을자인데

정신이 딴데 가 있어서 자꾸 크냐 작냐를 따지는 겁니다. 수준이 높다 낮다를 따지는 거죠.

 

즉 그 정도로 예수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크게 보이기는커녕

한참을 작게 보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만만치 않게 대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만 보여야 합니다.
절대로 구름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면 구별이라는 거룩 작업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다들 엎드릴 텐데 말입니다.
반드시 무시 받는 잉여의 모습, 찌끄레기 스레기의 모습인 풍채도 없고 흠모할 모양이 전혀 없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 부재의 모습에서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회개라는 단절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만 크게 보이는 자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두려워 할 뿐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십자가는 시시한 겁니다.
십자가가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코 앞에 닥친 현실이기는 커녕
너무나도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전혀 복된 은혜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정반대이거든요.


십자가가 갈라버리는 그 갈라지는 현상을 원치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자기자신부터 갈라져버려야 하고
자기자신부터 장대 높이 달려 웃음꺼리가 되어야 하는 비방받는 증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신뢰가 갈 만한 조금의 것이라도 있어야 말이죠

 

믿음의 달인들인데 믿을 만한 구석을 왜 찾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미쁜 구석이 없습니다.
도리어 시험들 것 밖에 없는 겁니다. 

전혀 믿음이 안 갑니다 믿음이


그러니 걸림돌 입니다. 시험들게 하는 걸려 넘어뜨리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시 못하는 것이 거짓선지자 입니다. 그와 그의 똘마니들입니다.
시험들게 하는 것을 제시 못하는 거죠. 오히려 십자가를 구원용으로 포장하기 바쁩니다.
듣기 좋은 소리로 말입니다.
 

조금 믿어줄만 해서 다가가면 예수님 쪽에서 확 분위기 깨버립니다.

 

즉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믿고싶어도 못 믿는 겁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믿음의 대표자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자라고 예외일까요?

제자들도 안 됩니다.
믿고자 아무리 맏어도 안생겨요 ~~~
도리어 믿음이 없구나 라는 소리만 듣는 곳으로만 인도함을 당합니다.

아무리 믿을려고 애를 써도 안되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안 됩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회개 할려고 해도 안되는 겁니다.

아니 회개의 달인들이

왜 예수님 앞에서는 회개가 안될까요?

 

예수님 앞에서만 그런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회개가 먹혀들고 회개한 것으로 속일수가 있는데
예수님 한테는 아예 통하질 않습니다.
회개 그 자체이거든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순 엉터리 믿음만을 쫏았다는 것을 들통나야 하는 겁니다.
그 단절성을 격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믿음이 고마운 겁니다. 안 그러면 착각하다가 지옥 갈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열매도 동일합니다.

 

부활의 영을 부어 준 적이 없는데 열매를 운운할 수 있냐 말입니다.

 

즉 영으로만 상대하지

육으로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절성입니다.

 

육이 백날 회개 금식 눈물 기도 백날 해 본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찾아와 주심, 다시 살려주심이 아닌 이상은 다 가짜 열매인 가짜 부활인 겁니다.
 

다윗이 그래서 이 영이 없다 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다. 회개의 영이 나에게 없음을 직시 해야 할 판국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의 이조를 드린다는 둥
자꾸 정직한 영이 있다고 구라를 치는 겁니다.

육이 율법을 4배나 갚아라 할 정도로 육은 율법 지키는데 달인인데

알고보니 육이 율법을 지킨적도 없으면서 지켰다고 우기는 것이

 

영이 없다 라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너에게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준 겁니다.
회개의 영이 없기에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통보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육 곧 영이라고 믿었던 그 육의 실상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이

회개요 그런 회개에 영이 벌리는 열매를 지금 운운하시는 겁니다.

 

결국 영은 예수님 혼자 뿐입니다.

 

나머지는 육으로써 예수님께 대들고 있는 겁니다.

 

끝까지 대들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면 유대인일수록 더욱더 대듭니다.

전형적인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육인 이스라엘을 영이신 예수님과 대조 시키는 것이 바로

영의 회개요 영의 부활 곧 열매입니다.

 

우리는 육입니다. 영이신 예수님과 늘 비교당해야 마땅한 처지에 놓여진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육과 육끼리 백날 비교해 보세요

선악 밖에 안 나옵니다. 법 밖에 안나오니까

 

율법대로 4배나 갚으라 라고 율법 뒤에 숨는 겁니다.

 

도리어 노출 되고 발가벗겨짐을 당해야 하는데

거룩 뒤에 숨어버리니

오늘날 종교꾼들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둥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둥

자기들도 못 맺는 열매를 남에게 강조하게 되는 겁니다.

 

영이 없습니다.

열매 없습니다.

차라리 다윗처럼 열매 없음을

영이 없음을 직시하는 현실을 본게 바로

회개가 덮치는 겁니다.

 

예수님과 비교해야 하는데

평생은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비교에 종노릇하면 평생을 보내는 겁니다.

 

거기서 꺼내시고자 예수님은 지금 비밀 비유언어로써 말씀하시는 겁니다.

영의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곧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다윗 자손이라고 모세 제자라고 우기는 자들이

이 영의 말씀을 거부하는 겁니다.

 

사실상 오늘날 성경말씀을 보는 모든 인간은 영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말씀 뒤에 숨어버리는 육의 짖만 골라서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목사는 더 심합니다.

 

레위인? 제사장? 영의 말씀에 박살이 난 적이 없기에

오늘날 목사는 사람 눈치만 보는 존재들입니다.

 

마귀는 말씀을 지키는데 정신팔려 있지

예수님처럼 원수의 성문을 획득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그 간극사이에서

다윗은 정직한 영이 없음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직시하고

그 영을 달라고 합니다.

 

율법 백날 지켜도 영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냐 라는 것을 비로소 안 겁니다.

 

그 간극사이에서 나온 영을 다윗은 선물로 받게 되는 겁니다. 여디디야 ~~~

 

그러나 마귀는

그리고 그 아비의 그 자식인 마귀자식인 유대인은

졸지에 모세의 자리에 그만 앉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열매를 못 맺는 죽은 나무입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에

 

도리어 열매를 내지 않으면 찍어버리겠다고 외치는 그 자리에 앉아버리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자신들이 외친말을 왜 니가 외치냐 라고 말입니다.

 

(23:1, 개역)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3:2,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23:3, 개역)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23:4, 개역)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23:5, 개역)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23:6, 개역)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23:7, 개역)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9, 개역)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23:10, 개역)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23:11, 개역)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3:12, 개역)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4, 개역) (없음)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율법은 정직한 영이 없음을 직시케 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없제? 없으니 이 분을 봐라 라고

가이드 안내를 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없으니까 이 분을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자리에 앉아버린 유대인은

열매가 없음을 직시하는게 아니라

율법의 자리에 앉았으니 우리 열매 맺었잖나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것이 오늘 비유입니다.

 

열매 내지 못하면 찍어서 불에 태우겠다고

 

결국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도로 찍어버림 당하지 않습니까?

 

맞잖아요

예수님의 비유가 완성 될려면

도리어 예수님이 찍힘당해 불에 태움 당하는 겁니다.

 

? 그래야 열매를 보여주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 열매를 없애버릴려고 얼마나 유대인들이 비상걸렸는지

완전히 미친 사이코패쓰 같더라 말이죠

 

사도행전 살펴 봤을 때 우리는 보았습니다.

주의 주 되심을 끝까지 방해하고 막아서는 유대인의 모습

 

오늘날 기독교가 또 그러합니다.

 

주의 주 되심에서는 관심 없고

 

어떻게 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비교

곧 육과 육의 비교에서 열매맺기 경쟁을 펼치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가 없습니다.

회개하는 자는 없습니다.

 

열매 맺는 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열매 맺은 한국 교회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축복 받았다고 ~~~~~~

 

예수님은 지금도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곧 죄인을 찾고 있습니다.

 

정직한 영이 없어서 죽게 되었다고

울부짖는 자를 찾습니다.

 

의인들만 넘쳐나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은 빨리 뜨자 라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열매 찾아서 빨리 빨리 이 땅을 뜨고자

 

죄인 일병 구하기를 펼치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극박한 상황의 현실을 직시하시는 분은

예수님 혼자 뿐입니다.

 

임박한 종말 ~~~~~~~

 

아무도 이 임박해 있는 종말을 의식하지 못하는 시대가

종말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