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답답해 하심과 분쟁 (12:49-59)

 

 

(12:49, 개역)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개역)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12:52, 개역)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개역)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2:54,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12:55, 개역)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12:56, 개역)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12:57, 개역)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12:58, 개역)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12:59, 개역)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섬김을 종에게 보여주고

다시 그 종은 주인을 위한 충실된 모습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일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그렇기에 그 주인의 종 또한 자기부인을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케 되면 주인이 마음껏 그 종에게 맡길수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부인이 곧 주인의 마음이기에

이심전심처럼 자기의 마음이기에

종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겁니다.

 

종은 부담을 가지기는커녕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 종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말입니다.

 

만약 자기 스스로 그 일을 떠맡게 되면

한계점에 부딧혀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일이 아니기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이의 일이기 때문에

일의 성공 실패에 무관하게 일하니

자유롭게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이 되고 자기가 하게 되면

이 일을 실패하면 안된다는 부담감만 커지게 되는 겁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 속에서의 일이기에

전혀 부담감 자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나 자기자신은 자기를 부인하는게 아니라

자기자신을 더욱더 쳐다보게 되니 미련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그래서 등 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결국 자기부인이란 부담감을 전혀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또 대뜸

 

맡긴바를 소홀히 여기게 되면 어쩔려구 하느냐

 

(12:45, 공동)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12:46, 공동)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

(12:47, 공동)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12:48, 공동)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바로 이런 마음이 아내와 파출부의 차이입니다.

관계성이란 주인의 마음의 여부입니다.

 

즉 주인의 마음이 종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은 주인이 있든 없든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종의 마음에 주인의 마음이 심겨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주인이 있을때와 없을때가 다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자기부인과 관계성은

예수님의 마음이 부어지느냐의 여부입니다.

 

종에게서 따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설교는 예수님은 문제 없는데

인간에게 문제 여부를 따지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의 섬김 여부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 섬김으로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자기 부인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도록

예수님의 마음이 그 종을 움직이는 겁니다.

 

결국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는데 유대인 아홉 명은 기존의 단절이

병고침을 통해서 이제는 가능성으로 바뀌게 되니

그 개방을 추구할려고 돌아가버리는 겁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자리는 결국 저쪽 세계였던 겁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병고침을 통해서 가능성이 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제대로 된 단절을 보게 됩니다.

병고침 받았는데 막상 받고 보니 병고침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으니

도리어 죽음을 느끼게 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개방은커녕 도리어 단절의 단절을 제대로 직시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의 처음자리를 유대인처럼 돌아가버리는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가 자신의 처음자리요

자신이 태어난 곳이 되는 겁니다.

 

아홉은 병고침 받은게 아니라 도리어 단절이 되어버린 겁니다.

단 한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단절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처음자리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래야 되는데 도리어 거꾸로

이스라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자리를 보여줘야할 이스라엘의 기능이

졸지에 사마리아인에게서 나타난 겁니다.

 

자기부인의 죽음의 자리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 있었다는

그 간격을 보여줘야 할 자가 이스라엘인데

그 틈을 보여주고 그 틈 큰 공백을 획득해야 할 자가

도리어 냅따 버리고 도망쳐 버리게 되니

 

이스라엘이 욕하던 원수이였던 사마리아인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기능을 획득하고 있는 식입니다.

 

마치 형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동생 야곱은 무슨 반칙을 벌리더라도 그 장자권을 귀히 여긴 겁니다.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장자가 바뀔 리가 없다는 그야말로 선민사상 구원론 선택론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자권이라는 약속이 졸지에 이동하고 움직이게 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오히려 되바라지게 그 약속은 언제든지 바뀔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종은 이 약속에 목매이며 사는 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종은 주인이 더디 오니까

맡긴바 된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겁니다.

 

(12:45, 공동)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12:46, 공동)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

(12:47, 공동)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12:48, 공동)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인자가 오는 때가 바로 이런 틈을 노려서

그 틈을 확보하고자 온다는 겁니다.

 

(12:40,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즉 고정된 것이 아닌

이동이 목적이고

차이가 목적이고

그 차이가 바로 보편적이다는 겁니다.

 

차이가 나지 않을때는 올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 곧 그 큰 간격을 확보했을 때 그 때에 짠하고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을 하시는 예수님의 섬김의 목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자기부인이랑 다릅니다.

자기부인이란 이 차이를 확보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차이 낼려고 활동하는 것이 자기부인이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섬김 때문에

차이를 누리게 됩니다.

그 차이를 확보하게 되니

다시는 회개나 금식이나 눈물이나 기도 따위를 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서는 자기부인이 덮쳐져버렸기에

예수님의 자기부인이 덮쳤기에

예수님의 섬김이 덮쳤기에

 

다시는 회개 따위나 금식 따위나 눈물 따위나 기도 따위를 하지 않고

도리어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을 추고 막 노래 부르는 겁니다.

 

그런 것들로 아이를 살릴수 없다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을 하지 않는 자들이 회개로 금식으로 눈물로 기도로 마치 형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긴 뒤에 이삭아버지에게 마음 돌릴려고 바치는 뇌물과 같은 것들을 지키는 식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차이와 그 간격을 획득하는 것인데

그것은 획득할 마음이 없으면서

이것이 자기부인인데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이 아버지 마음을 돌릴려고 알랑방구를 끼는 겁니다.

 

자기부인 곧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을 담은 마음을

분명히 거부했고

소홀히 여겼고

여전히 기도로 때우고 회개로 때우고 눈물로 때우고 금식으로 때울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성전에 두 사람 중에

바리새인이 자기부인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일주일에 금식 두 번

이레에 기도 몇분

이레에 십일조를 두 번 드린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그런 것으로

때울려고 하고

정작 예수님의 섬김으로 예수님의 마음이 부어진 세리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자기부인하는 자를

도리어 정죄하는 식이 되니

 

애초부터 자기부인을 쳐다볼 마음조차 아예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도리어 선민 선택 거룩한 의인이요 율법은 내편이다고 여긴

그 장자권은 변할 리가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똘똘똘 무장되었다는 자체가

 

자기부인을 스스로 발로 차버린 마음이였음을

 

예수님이 통보하듯이 들추어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회개하지 마세요

자기부인 하지 마세요

자기부인을 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자기부인을 채워질수가 있겠습니까? ㅋㅋㅋㅋ

 

하라는 말인지 하지말라는 말인지 ㅋㅋㅋㅋ

 

그 자체를 따진다는 자체가 자기부인을 거부하는 우리의 속내이다는 겁니다.

 

하든 말든 어차피 자기부인은 주님의 섬김에 달려 있다고 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 야곱처럼 고정된 것을 깨뜨려 차이를 확보를 할려고 한다면

가감하게 하면 되는데

그건 또 자기자신을 눈치를 보니

이제는 주변의 환경과 남들 눈치를 보는 겁니다.

 

하든 말든 주님은 하시는데 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좌우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 잡다한 것 다 치워버리고

그냥 예수님과 독대를 하면 됩니다.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카든 말든

이단들이나 안티들이 방해를 하든 말든 말이죠

 

그들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적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 관계 곧 장자권과 같은 이 예수님의 마음

자기부인하신 마음을

 

불로써 표현함으로써

 

나는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불 지르러 왔다 라고 표현하십니다.

 

불은 소멸케 하고 모든 이어진 관계망 다리를 폭파시키는

단절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불 입니다.

 

다 태워버리니까 관계망이 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 모든 연료공급 에너지통로를 다 차단하는 겁니다.

 

태어버림 당해 버리면

단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인이란 바로 태어버림을 당해 버린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산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간격을 무슨 수로도 좁힐수가 없습니다.

 

거지나사로는 이 간격을 확보했고

부자는 이 간격을 획득하지 않았기에 지옥에 간겁니다.

오죽하면 지옥에 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기에

그 간격을 주제 넘게 넘어설려고 하니

다시 각인시켜 줍니다.

그 간격을 오락가락 할 수가 없다고 말이죠

 

간격을 획득했다

확보했다 라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현실을 획득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 현실이란

예수님이 불로써 이 땅을 불지르러 왔다 라는 현실 말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봐버렸다

난 이제 타 죽어 마땅하게 되었구나

 

라는 현실 말입니다.

 

이 현실을

 

이스라엘 속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 현실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도리어 현실은 이스라엘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한다는 현실이다 라는 겁니다.

 

그 현실을 획득하게 되니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태어나 이 입술을 부정한 줄도 모르고

안정빵이라고 여긴 이스라엘 속에 있었던 것이 도리어 제일 먼저 매맞는

완전히 속았구나 이 안전빵은 안전 축에도 끼이지 못한다 라는 것을

순엉터리를 붙잡은 것에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구나

누가 나의 부정한 입술의 죄악을 제거해 주랴 라는

오호라 곤고함을 외치는 겁니다. 현실직시입니다.

아무도 살아남을자 없다라는 여호와의 불이 임했다 라는 현실직시입니다.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런데 말도 안되게 제단 숯불로 부정한 입술을 지지니까 부정함이 씻겨져서

이제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 불을 지르러 갈래?

 

저요 저요 저요

 

이래되는 겁니다.

 

결국은 불지르러 돌아다니는 자가 바로 현실을 직시한 자였구나

발등에 불떨어진 자였구나 라는 겁니다.

 

왜 자꾸 자폭할려고 하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본게 있었던 겁니다.

 

그 불이 도리어 살리는 불이요

불이 없는 곳은 죽은곳이 되는 겁니다.

 

지금 종들은 이 불을 다루는 자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곧 간격을 획득하고 간극을 벌리는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차이입니다. 이것을 구체적 보편으로써 때려붓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와의 차이 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그 죽음을 보여주는 제사로써의 차이성을 획득한 겁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이 불을 붓지 않고자 합니다.

미움당할 짖을 왜 하냐 라는 겁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소홀히 여길수 밖에요

 

불이 발등에 떨어지면 저절로 뛰도록 되어 있는데

불 곧 주님의 섬김이

예수님의 마음인 자기부인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니

구지 남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구지 구지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남들이 듣기 좋아라 하는 소리

회개하세요

기도하세요

진심으로 눈물로써 금식하세요

 

이런 것들은 미움 받을 리가 없는 가능한 소리이기에

이런 소리만 해도

돈이 들어오거든요

 

뭘 해도 개방이지

 

뭘 해도 단절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소리가 결국 자기 생존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회개가 도리어 돈벌이가 되는 겁니다.

 

회개 자체가 죽었다 라는 소리인데 말입니다.

 

나를 죽이시는 분을 직시하는 그 현실을 획득하는 것이 회개인데 말이죠

 

그러니 뭘해도 회개입니다. 돈이 될 리가 없습니다.

뭘해도 회개이기에 뭘해도 망하고 뭘해도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되는 현실인 허구와 죽음이 되는 현실로 갈리는 그 현장의 차이가

 

바로 인자의 날입니다.

모든 날이 인자의 날입니다.

 

이 인자를 위한 날을 위해

종은 활동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종은 차이를 획득할려는 자입니다.

그 종은 기존의 고정적인 장자권을 빼앗는 현실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선택 선민 구원확정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깨뜨리는 겁니다.

교회를 부수는 자입니다.

교회라는 구원의 장치를 허물어 버리는 자입니다.

 

차이 획득 때문입니다.

제사 장치, 구원 장치를 해체시키는 차이를 획득.

 

물론 자기 교회도 해체입니다. 자기자신도 해체입니다. 자기부인. 

 

매일 매일 해체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고정화 할려고 했고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해체시키는, 자기부인케(자아해체) 하는, 회개(자아상실)케 하는 자입니다.

 

가정 파괴범입니다.

가정을 해체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원수지간 만들어버립니다.

 

움직이는 장자권으로 해체시켜서 재구성합니다.
움직이는 장자권이 고정된 장자권을 해체시키는 겁니다.

그 재구성한 것 조차도 그 다음날 또 해체합니다.

단절의 연속성입니다.

 

최종적인 바닥인

예수님의 죽음이 나올때까지 말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만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누가 교회 충성 봉사 했다는 둥

십일조를 많이 냈다는 둥

이웃사랑을 많이 했다는 둥

전도를 많이 했다는 둥

이런 것들이 중간에 낑기일 틈들이 있겠습니까?

 

목사들이 자꾸 교회를 그 중간에 낑가서 눈에 보이는 증거물로 삼고자

모든 열심을 교회에 퍼부으라고 합니다.

그 교회 부셔버려야 하는 우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현실이 없습니다.

이 현실만 획득하는 자가

 

바로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은 이것만 이 땅에 부어버리는 자입니다.

그 결과는 관심없습니다.

부어버리고 자신은 누락당해 버리는 겁니다.

무대 뒤로 나가버립니다.

부어졌다면 이미 게임 오바입니다.

아니 부을수 있도록 주님이 종을 섬겼다는 자체가

이미 게임 오바입니다.

 

이 사이에

이 간극에

 

도대체 무슨 불순물들이 개입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목숨 버렸고

종도 목숨 버렸습니다.

이 간극 사이에

 

교회가 건방지게 중간에 낑길수 없습니다.

교회조차도 미끄려져 박살이 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꼴입니다.

종말에 그 불에 다 타버리는 겁니다.

교회 붙잡지 마세요 다 지옥 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붙잡는 자가

현실을 제대로 본 자입니다.

 

나머지는 다 허구입니다.

 

자기자신도 붙잡지 마세요

불도 통과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꾸 미련으로 자신을 쳐다보라는 속임수에 속지 마세요.

 

현실은 예수님의 죽음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버림받은바 된 그 죽음이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라고 십자가에 못박으라 라고 싫어버린바 된 그 죽음이요

스스로 버리는 죽음입니다. 다시 얻을 권세를 획득 하는 죽음입니다.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 십자가 라는 불을 이 땅에 질러버리고서는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기에

결과에 구애지 않고 두 손 털고 누락되는 겁니다.

 

다른 현실이 없기에 오로지 관심사는 이 불 입니다.

 

(12:49, 공동)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12:50, 공동) 내가 받아야 할 침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12:51, 공동)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불 만이 해체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절입니다. 다 태워버립니다.

 

즉 예수님의 답답함이란 딴게 아니라

이미 불이 붙어 시작이 되었습니다.

 

먼저 누구?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 불 붙은 현실을 보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스라엘을 먼저 불 붙여버려서 다 태워버린 현실을 보여줘도

 

다들 안 본척

남 일 취급하고 있습니다.

 

캬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다시는 유대인 나치 학살 같은 역사를 만들지 말자 라고 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유대인이 뭐하고 했나요?

우리 조상이 참선지자를 죽이는 그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 라고 해 놓고서는

 

세례요한을 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죽입니다.

 

이미 불이 붙었는데

과연 이 불이라는 현실을 피해서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

 

더했으면 더했지 그런 일이 반복이 되지 않는다는 그런 망상을 자꾸 심어놓고 있기에

 

답답해 하시는 겁니다.

 

뭘 답답해 하냐? 그게 맞다면 그것이 정상이니 답답해 할 필요가 뭐있냐?

예수 당신이 뜻대로 되는데????

 

답답해 하시는 것은 딴게 아니라

이미 불이 붙었는데 불 속으로 들어와 그 불이라는 간극을 확보할 생각을 안한다는 겁니다.

 

봐 놓고도 안 본척 하니

 

그 모습이 웃끼다는 겁니다.

 

현실이 불로 가득찬 불타는 세상인데

타조가 눈을 감아버리니까 현실이 취소되었다고 여기고 우기고 안그런척 한다는 겁니다.

 

못 본걸로 하고 있으니

 

참 기가막히고 코가 막혀서 답답해 하시는 겁니다.

 

자신은 예외라고 하는 겁니다.

 

그 예외가 보편화 되었다고 우기는 세상인 겁니다.

 

그래서 예외인 보편화 된 세상에 더욱더 예외로써 보편화 시킨 것이
더 나은 예외인 보편을 곧 불을 질러버리는 겁니다.

 

막아볼려면 막아보라는 겁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사도들을 죽이고 성도를 아무리 죽여도

그 불을 끌자는 아무도 없는데

 

이 현실을 못 본척 안 본척 안 들은 척 하는 그 모습을 답답해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실상 더욱더 불을 재촉케 하시고자 하는 취지인 겁니다.

 

다툼이 벌어졌고 불이 붙어 몽땅 타버린 현장을 보시면

주님과 주님의 종들이 부지런히 일한 흔적임을

이것이 현실임을 보시고 기뻐하시면 됩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주인의 수종(섬김) (12:32-48)

2014/05/10 12:34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먼저 기다리고 있던 주인의 수종(섬김) (12:32-48)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

 

(12:32, 개역)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2:33, 개역)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12:34, 개역)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12:35, 개역)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12:36, 개역)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12:37, 개역)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12:38, 개역)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12:39, 개역)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2:40,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12:41,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12:42,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12:43, 개역)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12:44,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12:45, 개역)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12:46, 개역)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12:47, 개역)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8, 개역)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12:37, 현대인)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주인이 몸소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직접 시중들 것이다.


인간이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환경이 이런 상태입니다 라고 표출하는데

그 징후로써 인간이 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생각을 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뭐든지 인간은 그냥 통로일 뿐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지요 종이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야가 지금 이런 것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할 줄을 모르네요 라고 대신 외치고 대신 구하는데

그 징후로써 인간에게서 기도가 술술 나오게 되는 겁니다.

기도가 주체이지

기도하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다는 겁니다.

왜 필요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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