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보시고 부르시는 정치적(편파적)인 예수님의 활동

 

 

(13:10, 개역)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3:11, 개역)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3:12,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13, 개역)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14, 개역)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3:15,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3:16, 개역)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3:17,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인간의 회개를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회개만 격렬하게 작용케 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회개가 뭔가를 볼려면

인간 회개의 허구가 들추어져야만 합니다.

인간 신앙의 허구가 들통나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회개의 달인

신앙의 달인과의 충돌을 유발케 하십니다.

자신의 회개를 자랑키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의 간격을 확보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과 신앙, 인간의 회개와 기도 금식 눈물 등등은

모조리 불을 피하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불 곧 심판 죽음을 빨리 앞당겨 달라는 재촉으로써

인간의 회개와의 차이를 벌리시는 겁니다.

 

그리고 열매를 언급하십니다.

그 불 속에서 나온 것만이 열매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그런 불 곧 심판 저주 죽음을 피해서

맺은 열매라야 열매 답다고 우깁니다.

과연 그런지 불태워 보자 말이죠

 

부자청년이 졸지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곧 불 소멸하는 불을 만난 겁니다.

부자청년은 자기따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기는 열매라는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매들이 과연 열매 맞는지를 확인코자

불을 질러 버립니다.

 

정금같이 나오기는커녕

불에 확 다 타 버리니

더 이상 꺼내어 놓을 것이 없어서 등 돌리고 돌아서 버리는 겁니다.

 

아니 비로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괜히 열매 맺은 겁니다.

 

차라리 주여 저 열매 없습니다. 저에게 열매를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하면 될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단절, 삭제 시켜 보면 압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런 인간의 속성을 들추어내는데 씨앗이 너무 너무 아깝게 허비가 됩니다.

 

비록 허비될 지언정 때려죽어도 열매 아닌 것들을 가려내겠다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결국 단절인 겁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회개 라고 했듯이

열매를 거부하는 열매 이고

신앙 곧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

거룩을 포기하는 거룩인 겁니다.

 

왜냐?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기를 포기하고 죄인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기를 포기한 하나님

 

결국 또 저 위의 말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라는 취지가 아니라

누구 라는 인물을 보라는 취지입니다.

철저하게 외부의 인물이지 즉 사건 개념이지

 

내부의 자신의 도닦는 취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거부하는 새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의 해체가 곧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 미련을 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짓선지자는 이 이스라엘을 고정화 시키는 겁니다.

반면 참선지자는 이미 새이스라엘을 봐버렸기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오히려 철저하게 이물질화 시킵니다.

 

즉 미끼죠

 

걸림돌로 활용한다는 겁니다. 참선지자 본인도 이스라엘의 걸림돌

즉 삐딱하게 말하고서는 정작 포로 당해 가니까

이것이 구원이라고 완전 거꾸로 보는 시각이다는 겁니다. 시편 136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에 열매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고 신나게 노래 부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 노래입니다.

 

이미 완료를 봐 버렸기에

없다 라는 부재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완전 쫄딱 망해 저주 속에

불 속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인데

 

도리어 불 속에 있는 자가 더 신나게 춤추고

불 밖에 있는 자는 소유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케 되는

역전의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이 지금 다시 가시화 시키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귀신들린 여인이 18년 동안 끙끙 앓게 되어

몸은 그야말로 완전 피폐해 졌습니다.

그리고 등이 꼬부라져 꼬부랑 할머니처럼 등을 펴지 못하는 겁니다.

이 여인을 여인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서 고쳐주소서 라고 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 여인을 발견하시고 먼저 보시고 부르십니다.

 

?

병 고칠려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날이다는 점입니다.

 

일부러 안식일날 고치신 겁니다.

그럼 우리가 당연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안식일날 왜 일하냐 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 드디어 율법 문제가 충돌하는 겁니다.

 

지난 주에는 회개 해석이 부딧혔죠

이제는 율법 해석이 부딧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해체하시듯이

율법을 해체하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해체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고 하니

 

바로 불안이 발생합니다.

 

이 불안을 발생케 못하는 율법은 가짜 율법입니다.

동시에 이 불안을 극복하는 율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거든요

 

그러니 유대인의 율법은 불안도 사랑도 둘다 아닌

그저 율법을 자신의 신체를 위한 육의 할례로 활용하듯이

육의 율법으로만 활용한 겁니다.

오늘날도 그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기독교 즉 모든 종교는 성화론이거든요

성화론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

다 이런 자들이 여전이 유대인의 의식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즉 율법으로 인한 불안과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둘다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기껏 율법을 주니까

 

성전에서 자랑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분명히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 문자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그것대로 지켰으니 전혀 문제가 없고 하자가 없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을 깨뜨리기 위해, 해체 하기 위해

일부러 비교하기 너무 너무 좋은 세리를 주님이 붙였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그 걸림돌에 딱 제대로 걸려 넘어진

넘어뜨리는 율법은 전혀 몰랐던 겁니다.

 

그러니 율법 자체가 모순적인데

그 모순성을 자신은 획득하지 않고

모순이 아닌 바른 의미를 획득했다고 자랑질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게 말려든 겁니다.

 

율법은 놀랍게도 모순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어 볼까요?

아니 벌써 율법 옹호론자들이 이 말을 듣고 열받아 부글 부글 끓고 있겠지요!

 

율법이 얼마나 모순적이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첫계명부터 나옵니다만

이게 말이 안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면

구지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

오히려 다른 신을 누가 더 의식을 합니까?

여호와 본인이 의식을 한다는 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말입니다.

 

즉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이

 

우상을 인정하고 있는 자가 바로 여호와 본인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말 자체가 모순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말 자체가

 

(20:4, 개역)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5, 개역)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20:6, 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20:8, 개역)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20:9, 개역)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개역)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개역)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너는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다 라는 선언인 겁니다.

 

!! 이거 완전 이단소리 들을만 하죠!!

 

결국 이 말씀은 이미 그 자체로써 모순 적입니다.

즉 외설적입니다. 부조리 하다는 겁니다.

 

물론 거룩한 말씀입니다.

문제는 왜 거룩한지를 모릅니다.

거룩이란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그러니 이미 외설적이며 부조리성을 깔고 들어가는 겁니다.

묻거나 따질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힐문할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는 일방적인 편파성에

아무도 따질 권한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가 다 그러합니다.

법은 사실상 왕을 위한 도구입니다.

말로는 왕도 그 법에 저촉을 받도록 법을 수정 갱신을 합니다만

정작 그것 조차도 사실상 왕을 위해서 수정하는 겁니다.

결국 언제든지 예외성을 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법은 그 법 자체로써 불법성을 깔고 가지만

감히 그것에 힐문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정 하고프면 그 왕의 백성임을 포기하면 됩니다.

 

결국 거룩 자체가 철저한 일방적인 선포이지

다수결이나 민주적이거나 그렇게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동일하게 율법은 이런 모순을 깔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즉 법과 법사이의 모순점을 정작 법의 종사자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만

백성에게는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법을 무시하고 법과 막먹을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밝혀지지 않다가

사도바울이 이 모순점을 발견하고서

율법이 가입된 이유가

거룩을 지키라는 취지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죄아래 가두기 위함임을 밝혀냅니다.

 

그러니 기존의 해석에서는 이런 해석이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법 당사자들만 자신들을 예외로 두고서는 외설적으로 활동하면서

그 거리감을 위해 범법자에게는 조그마한 죄를 부풀려서 일방적으로 퍼부어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법은 공정하기는커녕 편파적입니다.

미운 놈은 더 미워하고

이쁜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내는 식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외설성 보다 더 큰 외설성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단 한놈도 이쁨 받을 자가 아예 없다는 선언으로써

모조리 다 저주 아래에서 미움 받아 다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미움을 대신 받았다는 선언을 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한데

아무도 지킬자가 없어서 그 불안이 보편화 된 입장에서

사랑이 그 불안을 제거하고자

의문의 증서를 찢었다는 겁니다.

 

저들 율법 종사자의 편파성을 깨뜨리는 더 나은 편파성이 닥쳐버리니까
그 이윤과 혜택들이 다 날라가버리는 판국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걸림돌이요 거리끼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불안과 사랑 사이라는 간격을

그 모순 점을 획득하신 겁니다.

십자가라는 불륜적 사랑을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분명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구나 누가 나 같은 죄인을 건져내랴

라고 했는데

말도 안되게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말이 안됩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보니

비로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임을 알았다는 겁니다.

즉 희망 없고 절망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도리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합니다.

 

중간에 큰 갭이 발생한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발생한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중간의 그 사시의 공백을 그 어떤 논리나 신앙적 체험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 합니다.

 

그냥 그 선언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저절로 믿겨질 뿐입니다.

 

믿기싫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불법을 사함 받은자는 복이 있다고

다윗을 예로 들면서 바울 자신이 그랬다는 겁니다.

율법을 적용할려다가 다윗은 되래 큰 코 다쳤는데
알고보니 율법은커녕 근처도 못 갔는데

오히려 율법을 엉터리로 사용했는데

도리어 율법이 아닌 방식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외에 다른 방식의 거룩이 있을수가 없는데

거룩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입혀졌다고 합니다.

자기가 말하고도 이것이 말이 안된다면서도 그 모순이 자신에게 벌어졌다고 합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오늘 귀신들린 여인을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호명하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부른적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는 자입니다.

귀신 들렸는데 부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와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러서 그 병을 고치십니다.

 

왜 고치시느냐?

 

단순히 병 고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이냐?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왜 고치시는가 하는 이유는

바로 율법을 깨뜨리시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 한 올 이라도 누락되지 않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율법옹호자들이 눈 시뻘겋게 달려들곤 합니다.

 

도대체 자신은 율법을 단 한 개라도 지키기나 해서일까요?

아무튼 막 달려들더군요

 

예수님이 그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이 꼬부라진 여인을 고침으로써

비로소 안식일 논쟁을 유발케 하신 겁니다.

 

마치 천국의 침노하듯이

이들의 천국을 깨뜨리시는 식입니다.

그들의 안전빵을 완전히 불안한 체제로 들추어내고

악마의 소굴로 만드시는 식입니다.

 

과연 그들의 안식일 지키기가 과연 지킨 것 맞을까요? 라는 식으로

다가와서 안식일을 박살내어 버리는 식입니다.

 

안식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직

성전

율법

 

소위 안 건드리는 것이 없이 다 건드리면서 깨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세웁니다.

다시 세우는데 도저히 건널수 없는 강으로써 세워버리니까

 

유대인들의 외설성 보다 더 심한 외설성이 되어버리니

도저히 건널수가 없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도저히 지킬수 없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말하니까

도저히 못 지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폐하시러 온 게 아니라

도리어 완성하러 오신 것이고

 

오히려 율법 옹호자들이 율법을 폐하고 있다는 실상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율법 뒤에 숨어서 율법을 어기는 짖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거죠

 

그러니 이것 들추어낼줄 모르는 율법은 가짜 율법인 겁니다.

 

부자청년이 가짜 율법만 모아왔다는 것을 꿈에도 알았을까요?

 

요기까지 적고 점심을 먹는 중에

어머니께서 성경을 숟가락을 놓고 막 찾아서 읽습니다.

야야 !!

 

고레스 왕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더라 요 봐라 요기 적혀 있다.

 

이사야 44장과 45장을 언급하십니다.

 

저번에 고레스에 대해서 니가 말했잖아

네 그랬죠

 

고레스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나오데

 

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고레스가 이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레스가 당첨된 겁니다.

 

의사가 자신의 치료 솜씨를 자랑하고 과시할려고

환자를 찾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18년 간 귀신들려 몸이 상해 등이 굽은 여인을 예수님이 먼저 보시고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여인을 고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여인을 통해서

마패로 곧 암행어사의 징후로써

저들의 안식일을 깨뜨리기 위함인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라는 참성전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눈에 보이는 성전이 가짜임을 드러내듯이

안식을 예수님이 안식됨을 드러내기 위해

저들의 안식이 예수님이라는 안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확보하기 위한 증거삼기 위한 겁니다.

 

고레스는 왕입니다.

이방나라 왕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 다 삭제 당한 상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들은 정작 미움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을 깨뜨리듯

이스라엘 왕 개념들은 다 망한 겁니다.

그럼으로 인간 중에는 섬기는 자가 없게 되는 겁니다.

도리어 이방왕 고레스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인 겁니다.

 

결국 율법의 모순을 그 부조리를

인간이 율법을 잡아본들

사랑이 없기에

도리어 그 모순만을 더 부각이 되게 되는 겁니다.

말라꼬 율법을 곧 거룩을 잡냐 말이죠

 

그래서 그런 율법 보다 더 더 더 모순인 사랑이라야

인간 속의 선악이라는 마귀가 심은 것을 잡아내는 겁니다.

 

누구는 그 선악을 암덩어리처럼 아예 제거해 달라고 하지만

사도바울을 이 18년간 귀신들린 여인처럼 찾으신 환자 죄인 사도바울을

사단의 가시를 오히려 제거는커녕 더욱더 깊이 찔러서

자고치 않게

약할 때 강함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니 그 정도의 바울 수준이며는 그의 겸손에 맡겨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못 믿습니다.

인간 자체를 믿은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가시를 손오공의 머리 쪼이는 쇠고리처럼 못벗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중국의 발이 아주 작은 어떤 족속의 여인들이 있던데

마누라가 도망갈까봐 신발을 작게 만들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말입니다.

 

안 믿겠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기 믿음으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안 믿는다는 뜻에서 성령을 약속하신 겁니다.

성령이란 결국 인간 거부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성령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 좋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파서 안달이 났습니다.

성령을 어떻게하면 좋게 표현할려고 하는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선물입니다.

안 믿겠다는 것이 전제된 겁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하시겠다는 겁니다.

 

단절의 단절입니다.

 

먼저 보시고 부르신다는 것은

성령으로만 하시겠다는 의미와 같은

오로지 자기 사랑만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써

인간의 안식개념을 깨뜨리겠다는 겁니다.

 

안식 뿐이겠습니까?

 

신앙도 깨뜨립니다.

믿음도

행함도

성전도

저들의 인형 예수도

하나님도

교회도 다 깨뜨립니다.

 

오로지 약속하신 성령으로만 상대하시겠다는 겁니다.

 

성령으로만 하시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쭐꾸덕 미끄러져지는 일만 벌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틀렸고 주님만 항상 옳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일방적인 선포죠

 

내가 항상 틀린 것이 들통나지 않으면 주님이 왜 항상 옳은지를 모르도록 하시겠다는 단절성입니다.

 

(13:15,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3:16, 개역)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3:17,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지적당하고 간섭당하는 것

 

성령으로만 하시겠다는 것은 사랑이신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이쁜 구석이 있어서 당연히 사랑받는다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

 

저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지옥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빼내어서

사랑의 징후(마패, 의사의 환자)로써

사랑을 과시하고 자랑하는데 이용되고 누락 될 뿐이다는 겁니다.

같이 부끄럼을 당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왜 옳았는가를 직시하는 현실을 보는 겁니다.

 

두 사람이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달려 죽게 됩니다.

강도입니다.

 

한 쪽 강도는 주변사람들이 예수님을 저주하니

같이 따라서 저주 합니다.

그 와중에서 선악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흐름을 따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 강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선악으로써의 저주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겁니다.

 

그 불안에 같이 동참하는게 아니라

 

불 속에 들어가는 분이 진짜 사랑임을 비로소 보고

성령으로 인해 고백하게 됩니다.

 

저 분이 진짜 사랑이다고

 

주여 당신의 사랑에 저의 선악의 뿌리를 뽑아서 제거하시고

그 사랑에 새로 뿌리를 심어 주옵소서

 

죽는 순간에 무슨 요구가 그렇게 많을까요?

죽는 순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희망도 없고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뿐만이 아닌

자신이 뿌리

태어나기도 전인

 

그것도 아예 수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묵시에 까지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됨의 여부인 처음자리를 사랑의 자리로 채워달라고

뻔뻔스럽고 당돌하게 요청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요청에

 

예수님도 말도 안되게 응하십니다.

내가 이 말을 이룰려고 십자가에 죽으러 왔단다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요청하는 이가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비로소 이루는 구나

 

왜 이스라엘 유대인은 단 한명도 그것을 구하는 자가 없을까?

사랑을 구하는 자가 없구나

 

처음자리를 구하는 자가 없구나

 

너와 내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

 

이 여인에게 처음자리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덮썩 주어집니다.

그리고 문둥병을 제사장에게 보이듯이

마패가 암행어사의 징후로써

종말이라는 단절성 그 동안의 안식일을 폐하심으로써 완성하시듯

이 여인을 바리새인들 코앞에서

일부러 일부러 안식일날 고치시는 겁니다.

 

더 큰 일이 안식일날 율법 규정인데

그 법칙을 일부러 깨드릴려고

이 여인을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고치십니다.

 

도발입니다.

 

침략입니다.

 

폭력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저들이 천국 속에 놓여졌다고 안심하고 있는 저들의 천국을 침노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망할 리가 없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저들의 천국은 완전히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주의 이름을 부른적이 없던 개같은 이방인에게 나누어 줘버립니다.

 

이 단절성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성령 곧 사랑의 폭력성이 아니면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율법을 남이 아닌 누가 깨뜨립니까

깨뜨리면 완전히 무너지는데 이상하게 더더욱 완료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요구한 모습을

자기 스스로가 자수하듯이 발설하면서까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오히려 강조하시는 겁니다.

사랑의 열매 없으면 다 찍어버리는 겁니다.

유대인은 망할 리가 없는데

쫄딱 망함으로써

유대인은 영원히 망하지 않음을 예수님 본인이 세워버립니다.

 

거짓선지자들이 유대인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라는 주장을 거부하시면서 말이죠.

 

이런 숙제를 과연 누가 풀겠습니까?

악마들이 다 율법을 차지한 판국에

어떻게 그런 율법을 깨뜨리면서 율법을 완성하시는지

 

깨면서 세우시는지

 

이 양쪽을 다 성취하시는 자가 바로 안식 그 자체다 라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먼저 선점해 버린 안식일을

오늘 본문처럼 깨뜨리면서

 

저들의 평강 평화 쉼을 깨뜨리면서

 

전혀 다른 평안을 전쟁으로써 폭력으로써 곧 사랑으로써 완성하십니다.

 

안식 곧 평안은 이 전쟁의 의미가 없이는

단절의 의미가 없이는

 

전혀 모르도록 되어 있는 비밀이 바로 안식이였던 겁니다.

 

주일성수?

과연 전쟁이 아니다면 그 주일성수는

거짓선지자들 배를 불려주는 일 밖에 되지 않은 겁니다.

 

깨어지지 않는 안식

깨어지지 않는 주일성수

깨어지지 않는 성전

깨어지지 않는 믿음 등등이

 

왜 거짓임을

안식 되신 예수님이 밝혀주지 않는 자는

 

영원한 쉼이 없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을 깨뜨리는 안식

 

이 차이를 갈라놓는 성령이라는 약속이 아니고서는 말이죠

 

 


ps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지킬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단절성 뿐입니다.

즉 인간의 대상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이 대상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지키는 안식은 없고

안식으로 부터 먼저 안식이 나를 보고, 안식이 나를 부르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주님이 부르지 않는자는 다 가짜고

자기가 알아서 찾아가는 것도 다 가짜입니다.

오로지 인간이 정작 사물로써 취급당해서
대상물이 될 뿐일때(도둑이 빼앗고자 하는 세간처럼 물건취급당할때)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 3:27,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사랑의 폭력성 곧 사랑의 단절성
죽음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 시기의 사랑, 폭력의 사랑이

왜 나 보다 옳았는지를 성령(단절, 폭력)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인간들의 고만 고만한 것으로 평강이다 평강이다를 외치는 거짓선지자들을 깔고

그들 거짓선지자들에게 다 넘어갈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바탕을 까시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사랑이라는 폭력의 자작극입니다.

 

안식을 인물로 표현한 이유는
인물이라고 백날 이야기 해 봐야 안 통하는 이유는

이미 인간 본인을 인물로 취급해서 입니다.
그래서 안식을 인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인간은 믿음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물로 취급당하는, 세간처럼 가구물인 대상물로 취급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만 일하신다는 것은
성령만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오로지 인간은 사물로만 취급당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노예의지 보다 더 심합니다.
자 이러면 이것을 또 이용해 먹는 놈들도 막 생겨나겠지요.
그것 조차도 주님의 사랑의 자작극이니
말려들자는 뭘 해도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만 남기고 다 누락 시키는 보편성은 동일하기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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