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의 확장력][구원 얻는 자가 왜 적습니까?] (13:18-30)

 

 

(13:18, 개역)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3:19, 개역)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3:20,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13:21, 개역)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3:22, 개역)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13:23, 개역)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13:24,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3:25, 개역)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13:26, 개역)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13:27, 개역)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13:28, 개역)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29, 개역)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13:30, 개역)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요즘 갑자기 유행하는 말이 [의리] 라는 말을 수십년째 외치던 연예인의 말로

이제야 대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반작용이라고 합니다.

 

즉 상대적으로 의리가 없는 팍팍하고 각박한 한국사회이다는 증거를 반증하는 겁니다.

 

의리는커녕 속고 속이는 판이 어린아이부터 노인네까지 그 마음들이 퍼지고 있는 상황에

과거부터 의리만을 외치던 사람이 외면을 받다가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의리 라는 광고를 통해서 또 속이는데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존귀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다는 뜻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 하나님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큰 나무를 이룰때에

새들이 그 무성한 가지에 앉아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나무로써 하나님 나라가 비유로 증거됩니다.

 

즉 얼마나 풍요롭고 확장성이 뛰어난 무한반복의 증폭을 분명히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입장에서

아주 아주 제대로 질문을 합니다.

 

즉 분명히 풍요함과 넉넉함의 넘침 과잉 초과잉성으로써 나무와 누룩을 예수님이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런데 왜 구원받는 자는 적냐고

 

아주 아주 예리하게 제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바를 간파 했습니다.

즉 질문만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왜 적은지 모른다는 뜻이지요

다만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풍요케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데 적죠 라고 하는 것은

분명 예수님의 활동상황이 정작 구원을 일부러 적게

아니 아예 없도록 하기 위한 일들만 골라 골라 하더라 라는 겁니다.

 

오늘날 기존의 구원을 다 차단하는 복음이 없듯이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해 보니

기존의 유대 속에서의 안전빵이 다 엉터리이고

정작 너무 너무 구원받은 자가 적다라는 것을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직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 번 이 제자들의 질문처럼

 

주여 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빠글 빠글하고

전세계에 교회가 이렇게 천지삐깔이로 많아도

왜 구원받는 자가 없습니까

 

적다 라는 것 보다 아예 왜 없냐고 한 번 질문해 보자 라는 겁니다.

 

즉 질문하는 제자들 본인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구원의 보장이 된 상황 사건을 접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위험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 만을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직시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간직한 제자들은

이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도 안 된 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해도 구원 안생겨요 ~~~~

 

얼마나 낯설고 불가능한, 전혀 다른 말씀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왜 적습니까?

왜 없습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아니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열매란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그 경험만이 있는 것이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존의 열매로 알리라 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설교하던 내용들이 다 엉터리인 거죠

3일 이라는 간격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죽어야 했고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에

소생한 것도 열매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 받는 자가 왜 없습니까 라는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우리는 열매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찍어버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됩니다.
제철에 맺는 것도 불가능한 판국에
때가 되지도 않는데 열매를 요구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가능성을 피해서 요구한다는 겁니다. 단절과 차단, 불가능성으로만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국 겨자씨 한 알, 누룩 곰팡이 즉 무가치하게 취급받는 무능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되고, 고개를 돌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 많이 생기겠군요 라는 것이 아닌

왜 천국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만 오는 겁니까?
좁은 문입니까? 아무도 찾지 않는 천국입니까?
왜 넓은 문이 아닙니까 라는 겁니다.
 
이런 천국이면 나도 싫어버린바 된다는 겁니다.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는 겁니다.
좁은문 취급당하는 아무도 찾지 않는바 된다는 겁니다.

나도 우리도 제자들도 모두다 구원이 많은 넓은 길을 원하고 있지
인정받지 못하는 좁은 길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작은 겨자씨 한 알, 그런 누룩곰팡이 로써의 천국은 싫다 라는 겁니다.

또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이 굽어버린 여인을

예수님이 보시고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고치십니다.

여기에 그 동안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쉼을 얻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구원에 대한 정당성과 안전빵)

18년 동안 쉼이 없었던 귀신들린 여인 곧 부정한 여인을 하필이면

딴 날을 다 내버려 두고 안식일날 고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대 반발을 예수님께 겨누게 됩니다. 대격분입니다.

예수님의 선하신 일에 맞물리도록 그 선하신 일을 시비 걸수 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결국 

그녀가 안식을 얻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전체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체 입니다.
18년 동안 마귀 걸려 있었으니 [없음] 취급 당해 왔기에, 구지 이제와서 있음 취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왜 안식일날 고치느냐에만 꼿혀서 공격하는 겁니다. 오로지 전체인 안식을 더렵혔다 라는 것만 가지고 공격합니다.


즉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율법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입니다
.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율법을 보호하고,

성전의 질서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반면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이 굽은 여인의 안식은 무시하겠다는 겁니다. 작은 비중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취지라며는 이런 사고방식의 유대인이라면 즉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받을 자 라면

주여 어찌하여 이렇게도 구원받을 자가 많습니까? 라고 해야 합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이 굽어 쉼이 없었던 아주 극소수의 비존재인 [없음] 여인을 병고친 것보다

 

평상시 이레에 한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더 구원에 합당하는 사고방식에서

왜 이렇게 구원 받을 자가 많고 많아서 풍요로운 나무와 누룩처럼 과잉 증폭되는 무한한 과잉이

하나님 나라와 딱 들어 맞아야 하는데

 

정작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그게 아니였던 겁니다.

 

왜 이렇게 적냐고, 왜 이렇게도 없냐고 말입니다.

 

극대화의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듣고

도리어 극소수의 구원을 발설하는 이 실제상황

곧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이 간극을 실감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어디에도 개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철저한 단절 뿐입니다.

 

 

어머니께서 왜 누가복음의 희년의 대상이

왜 하필이면

유대인 과부가 아닌, 이방인 과부도 아닌, 이방인 과부 중에 그렇게도 많는 과부도 아닌, 한 과부이며

유대인 문둥병자가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하필이면 많은 이방인 문둥병자 놔두고, 한 문둥병자가

 

희년의 대상이냐 라는 겁니다.

왜 딸랑 한 명이냐 라는 겁니다.

그들은 잠재적인 기관없는 신체와 같은 알이요 씨앗이요 곰팡이효소 입니다.

단 하나만 있어도 엄청납니다.

아브라함이 불안해서 자신이 약속을 이룰려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런데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단절된 신체입니다.
죽은태인 불임여성이요
100세가 넘으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신체일것 같아서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단절의 몸
죽은 몸을 가지고서
하나님 나라라는 믿음으로 된 나라를 누룩의 확장력으로 증거하십니다.

일부러 누가복음에서는 희년의 대상물을 한 과부 한 문둥병자 입니다.
단지 한 명이라는 소수 뿐만이 아니라
과부며 문둥병자라 라는 부정한 자이다 가 더해 지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단절의 단절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해가 자기 스스로의 영광을 높이고자 일부러 그런 대상물을 찾은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비존재 또는 비전체라고 하는데

비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가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비존재가 오히려 존재보다 더 과잉적인 존재이다 라는 뜻입니다.
(벙어리가 오히려 하늘에까지 찬양이 넘쳐흐르고
귀머거리가 오히려 피리 소리에 호산나 춤을 추고
앉은뱅이가 더 펄쩍 펄쩍 뛰면서 즐거워 한다는 겁니다. 이 희년의 복음을

정상인들은 희년이 와도 오든지 말든지 춤추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대상물이 아니다는 티만 팍팍 내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구원자는 자기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구원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자에게는 아예 오시지 않습니다.
구원을 아예 꿈도 꾸지 않는 자에게만 오신다는 겁니다.
구원이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
구원받을자를 구원해 주고파서가 아닌 것입니다.)

우연은 비필연으로써 필연이 아니다가 아니라, 필연 보다 더 필연의 초과잉성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존재는 없다. 그러나 비존재는 있다 라는 거죠

 

[있음]은 없다. 그러나 [없음]은 있다 라는 겁니다.

 

여자는 없다 라는 말은

여자는 비존재이다 라는 겁니다.

즉 여자가 없다 는 존재로써의 없다가 아니라

그 반대로 비존재로써의 과잉적으로 존재 보다 더욱더 과잉존재이다 라는 겁니다.

 

분명 한 과부, 한 명의 문둥병자는 없는자 취급당하는
없는 겁니다.

상대적인 숫자 축에도 끼이질 못한다는 의식이

우리에게는 전제로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 전제로깔려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무시하는데

도리어 무시받아야 할 것이 전제된 것 보다 더 전제적인 먼저 있었던 것이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던 자들에게
부른바가 된다 라는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죽은자 같으나 산자요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다 라는 겁니다.

 

빛의 아들들의 지혜보다

더 나은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8, 새번역)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16:8, 공동)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16:8, 쉬운) 주인이 그 불의한 일꾼이 슬기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다.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16:8, 우리말)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을 보고 오히려 칭찬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삭빠르다.

(16:8, 킹흠정)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그를 칭찬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세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니라.

(16:8, 한글킹) 이에 그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가 현명하게 처리하므로 칭찬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이라.

(16:8, 현대인) 주인은 옳지 못한 이 재산 관리인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것을 보고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16:8, 현대어) 주인은 그 정직하지 못한 경리의 약삭빠른 짓을 보고 감탄하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거래를 하는 면에서는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

(16:8, 가톨릭)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래서 왜 여찌하여 구원받는 자가 적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렇지? 좀 적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적으니까, 좀 많게 하도록 해야 겠다.

너희들도 좀 분발하여서 누룩처럼 많이 부풀도록 하자꾸나 라고 대답하시는게 아니라

 

어 너거들 우찌 알았노?

고럼 고럼 고럼

반드시 적어야 한단다.

 

라고 말씀하시는 취지인 겁니다.

그게 바로 누룩이라는 곰팡이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만약 많아버리면 누룩의 가치와 기능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누룩의 기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신 것인데
그 기능이 없다면 하나님나라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씨앗 그것도 겨자씨 입니다. 아주 작습니다.
그러니 겨자씨에 새들이 어떻게 앉아 쉬겠습니까?
그 정도로 무가치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겨자씨가 심겨지니 큰 나무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누가 누룩처럼 부풀린것처럼 말입니다.

(눅 13:19, 공동) 『어떤 사람이 겨자씨 한 알을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싹이 돋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겨자씨와 같다."』

 

작고 작다. 한 알, 딸랑 한개 등등, 적게 하시는 취지가 바로

 

(13:24,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 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가 많아도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즉 좁은 문은 결국은 없는 길입니다.

 

[없음]의 과잉이다는 겁니다.

비존재의 존재로써의 과잉이다는 겁니다.

 

좁은 문 곧 없는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 라는 겁니다.

 

없는데 어떻게 그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말이 되고

말이 되는 것은 결국은 말이 안되게 하는 것이 (넓은 문은 말이 안됨)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취지이다는 겁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말이 안되는데 말이 되게 하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살고자 하는데 어떻게 죽는가? 살지! 이게 말이 되는데 결국은 말이 안됨)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좁은 문 곧 없는 문에 들어간 자는 더 받고

없는 문에 못 들어간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이 되는 거죠

 

그런 취지로

 

(13:30, 개역)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분명 먼저 될 자인데 나중이 되고

나중이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오래전에 들었던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천국에 가보니 도저히 천국 올자가 아닌 지옥갈자들이 천국에 와있고
저 사람은 반드시 천국 갈 사람이야 했던 자들이 지옥에 빠글 빠글 채우고 있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왜 구원 받는 자가 적느냐?

 

인간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마귀가 심어놓은 구원이 있고

마귀가 심어놓은 하나님나라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의식하는 겁니다.

마귀를 의식하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지난 시간처럼

안식일을 누가 심어놓았습니까? 마귀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없고
그저 구원에서 탈락당할까봐 불안해서 의문의 안식일만 지키는 겁니다.

그 마귀가 해석하는 안식일을 들추어내고자

그 엉터리 해석을 들통내고자

일부러 안식일날에 그 여인을 고치시는 겁니다.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래야 반응합니다.

 

만약 안식일날이 아닌 다른 날에 고치며는

마귀가 반응하지 않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조리 다 마귀에게 잠식당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구원이니 성경공부니 말씀실천이니 이웃사랑실천, 봉사 충성 하는 것들이
모조리 다

사실상 외설적인 짖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없는채 구원받겠다고 지키기를 실천)

 

그 외설성에 맞서는 예수님의 일부러 안식일 고치심은

우리에게 더더욱 외설적으로 보여야만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반응하는 겁니다.

 

이것을 숭고 라고 합니다.

존귀하고 거룩한 것을 숭고라고 하는데


비존재 =무능 = [없음] = 무가치 = 아무것도 아닌 것에 전부를 걸다

위에서 존귀가 없다고 언급 했죠?

의리, 의리, 의리 가 불쾌감을 주지 않잖아요!!
 

아름답다 라는 미(美)는 즐거움과 안정감과 쾌감을 줍니다.

그러나 숭고는 흥분과 들뜨게 하는 불안함과 불쾌감을 줍니다.

 

거룩(숭고)이 멍청하게 그냥 가만히 인간들이 거룩한 행동을 지키기를 바래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거룩 자체가 활동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일을 벌리게 되면

숭고한 상태 곧 불쾌하고 무례하고 불편한 일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즉 거룩의 폭력성입니다.  천국의 침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날 일부러 여인을 고치심으로써

안식일을 안정감있게 미적으로 지키는 자들에게 불쾌감을 안겨다 주게 된 겁니다.

 

이것이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처럼

가인의 제사와 더 나은 아벨의 제사와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끝까지 존재화 됩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런 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함으로써 비존재가 되지만

정작 아벨이 행한 더 나은 제사는 예수님에게 까지 계속적으로 반복이 됩니다.

 

없음은 정작 있음이 되고

있음은 정작 없음이 되더다 말이죠.

 

고로 하나님 나라는 이 없음으로써 일한다 라는 겁니다.

거룩은 없음 취급 당하면서 일하는데

더욱더 풍성하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아들을 많이 낳았던 여자는 종말에 그 아들들이 다 사라져 죽게 됩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남자와의 성관계를 가진적이 없던 수태치 못한 여인이

무수한 아들들이 생긴다고 라고 하시는 겁니다.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것이 종말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이런 종말의 시선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죽은자는 살게 되고

산자는 죽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논리나 그 어떤 이해력으로도 해석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세요

억지로 해석한다고 해서 실천이 될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불가능성입니다.

좁은 문은 불가능성입니다.

안식은 불가능성입니다.

열매는 불가능성입니다.

 

누가 감히 열매 맺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 맺었다고 말하는 순간 쫄딱 망해서

오늘 밤에 니 영혼 취하면 이 모든 창고를 늘릴려고 했던 것들이 누구 것이 되겠냐 말이죠.

 

불가능하니까

가능성으로 땡끼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니 이 모든 불가능성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선물이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없는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없는데 말입니다.

 

이 없음을 주님은 증폭 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간격과 차이가 반복되는 것이지

아벨의 제사를 따라한다고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우리는 백날 설쳐대봤자

가인의 제사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갇혔다는 인식을 가질수가 없습니다.

 

뭘해도 다 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불가능성만 골라 골라서 하는 주님이 하신 일만 쳐다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믿음 조차도 내가 하지 마세요

주님의 믿음이 어떤 일을 벌리시는가

그 불가능성만 쳐다볼 것이지

내가 믿어버리면 내 믿음이 하는 가능성의 일을 쳐다보게 될 겁니다.

그거 종말 속에서는 다 없음 취급 당할 것 뿐입니다.

불 속에 집어 넣었다 빼내면 다 사라질 삭제당할 것 뿐입니다.

불 숙에서도 타지 않을 것만 쳐다보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능성을 쳐다보자 말이죠.

좁은 문 곧 없는 문을 쳐다보자 말입니다.

 

없는데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질 것이다 라는 말씀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16, 개역)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즉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되었다 라는 겁니다.

 

즉 믿음의 징후물이다 라는 겁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이 굽어버린 꼬부랑 여자가

예수님의 징후물인 것이 보이지 않지?

왜 안 보일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원치 않아서야

곧 하나님 나라를 원치 않는 것이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징후물로써 그 여인이 분명 없음 취급당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우연히 그 여인이 보이게 된다면

우리는 기존의 안식을 깨뜨리는 새로운 안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넓은 안식일이 아닌 좁은 안식을 보게 되는 겁니다.

넓은 안식일은 지옥이요 좁은 안식은 천국인 거죠

 

손할례는 지옥이요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는 천국인 겁니다.

즉 지킬수 있는 율법은 지옥이요 지킬수 없는 율법인 사랑은 천국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손에서

인간들의 손에서 떠난 문제로써의 구원

새로운 구원을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구원은 계속해서 무한 반복적으로 불가능성으로만 계속 반복되지

중간에 가능성으로 바뀌는 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 새로운 구원이 기존의 구원은 거짓이다는 판명을 하는 그 활동을 제자들은 봐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물어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가능성으로써의 구원이 왜 지옥이고

불가능성으로써의 구원이 왜 천국이냐

 

마치 아주 아주 작은 씨앗이

비존재화 됨으로써

없음 취급 당함으로써

존재의 과잉성 곧 큰 나무로 무성한 가지를 뻗어

새들이 쉼을 얻게 되고

 

아주 작은 누룩이라는 세균이 엄청나게 부풀려져서

맛있는 빵이 되도록 하게 하는 이로움을 준다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누룩도 아주 작은 씨앗도

없음으로 취급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13:21, 개역)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3:21, 바른) 그것은 마치 누룩과 같으니,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감추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었다."

(13:21, 새번역) 그것은 누룩의 다음 경우와 같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 , '사타스'. 세 사타스는 약 22리터 , '감추었더니'

(13:21, 공동)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

(13:21, 쉬운) 하나님 나라는 마치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이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세 말 에 섞으니 전체가 부풀게 되었다.”

(13:21, 우리말)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가져다 가루 3사톤에 섞었더니 결국 온통 부풀어 올랐다.”

(13:21, 킹흠정) 그것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마침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13:21, 한글킹) 그것은 어떤 여인이 가져다가 가루 서 말에 숨겨넣어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시더라.

(13:21, 현대인) 이것은 어떤 여자가 한 포대의 밀가루에 섞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13:21, 현대어)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13:21, 가톨릭)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즉 전체는 밀가루 한 포대이고

비전체는 누룩 조금입니다.

아니 곰팡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숫자로 표시 할수 있다면

단 한 마리 한 개만 있어도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비전체인 누룩이 전체인 밀가루 보다 더 과잉성으로써의 전체인

역전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종말 곧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렇다 라는 겁니다.

 

왜 한 명의 문둥병자 만이

왜 한 명의 이방여자 과부만이

 

희년의 대상일까요?

 

비전체 비존재 없음 으로써

 

있음 보다 더 과잉적인 있음으로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없음으로써 자신의 과잉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한 과부 한 문둥병자가 잘나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폭력성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죽었구나

구원은 없구나 라고 복창할 뿐입니다.

 

그 정도로 무서움을 제대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두려워 한다면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두려워 한다면

 

 

상대적인 다른 것들은 두려워 하지 않는 겁니다.

 

구원을 두려움으로써 이루시는 내가 아닌

주님이 벌리시는 취지입니다.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것은 없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없음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나타나게 한 증상들의 배후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믿음인 십자가입니다. 곧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불가능한 단절의 십자가가

가능성의 십자가로 인간의 지혜는 기여히 만들어 버렸지만,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가능성의 십자가로 증거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우리 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아무리 없음, 비존재 취급 당해도 말입니다.

이것이 나의 구원의 정당성을 제거하고 단절시키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 혼자만 구원 받은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있는 희년이요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구원 됨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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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규님과 김대식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
"나는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 지 모른다"
-감각의 논리-를 보면서

  • 김대식 경험론에서의 감각은 결국 이 땅에서의 초인의 삶으로써의 광학의지인 거죠

    학권 취권 태극권 등등 으로 몸 하나 하나 털 하나 하나의 기능의 잠재성을 누리는 것

    초감각적 향유를 누리는

    뭐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알 ~~~~~~ 무한 잠재력

    스피노자의 신에 해당하는 들뢰즈의 개념 ‘기관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 어떤 것도 될(becoming) 수 있는 생성 능력
  • 김대식 진리를 사랑하는 자만이 

    단 한번의 주사위던지기를 다시 던질수 있는 무한반복의 영원회귀를 펼친다.

    기관없는 신체는 결국 사랑이다!!!?
  • 최일규 "기관 없는 신체"가 뭘 의미하는 지 도움이 되었어요. 무한 잠재성 맞아요~ 근데 살아보니 그 잠재성도 "죄"라능.. 인생이 "육"에 기대를 걸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찾아오는 "사랑"이 아니면 무한반복의 영원회귀(희망)일지라도 천년의 하루일 뿐
  • 김대식 하나님 없는 인자 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이 없어서라기 보다


    하나님이 인자로 오니
    졸지에 인자의 하나님이 비존재로 취급받아서

    상대적인 하나님 있는 유대인과 대충돌을 하는 셈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을 해체함으로써 불안을 제거하는 사랑을 완성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못지키는 율법으로 불안이라는 의문만을 계속 반복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죽일수 밖에 없는데

    정작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그런 불안의 마침이 된 거죠 (진짜 산 자는 죽은 예수님, 너희가 죽인 예수가 주가 되셨다)
    율법의 마침

    (롬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아예 불도저로 밀어붙임
    18시간 전 · 수정됨 · 좋아요 · 1
  • 최일규 바리새인의 반복이네요
  • 김대식 인간의 본능상 바리새인의 반복성에서 벗어날수 없고

    예수님 쪽에서 찾아와 주심만이


    바울처럼

    그 외설적인 매듭이 끊어지겠지요

    그 이전까지는 바울의 사울적 행동을 반복할 수 밖에 ~~~~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나의 구원을 제거하는 예수님의 구원이 옳았습니다.

나의 구원을 제거할줄 모르는 구원자는 구원자가 아니다.
나의 구원을 제거하는 구원자만이 구원자이다.

구원을 제거하는 구원

예수님만 구원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이의 구원은 없다.

진리란 예외만이 진리다.

예수님만이 예외 였다.

  • 송재원님, Yun Jin Park님과 최일규님이 좋아합니다.
  • 김대식 구원 구조도 동일하다

    전혀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자만 구원 되고


    구원의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은 자는 아예 구원이 없다.

    구원을 제거하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만을 부르러 왔다.
    구원 받을 자를 부르러 온게 아니라
    도저히 구원 받을 구석이 아예 없는 자만

    이것이 사랑의 일방적인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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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보시고 부르시는 인물로써의 안식 (13:10-17)


2014/05/31 11:4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먼저 보시고 부르시는 정치적(편파적)인 예수님의 활동


(13:10, 개역)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3:11, 개역)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3:12,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13, 개역)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14, 개역)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3:15,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3:16, 개역)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3:17,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인간의 회개를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회개만 격렬하게 작용케 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회개가 뭔가를 볼려면

인간 회개의 허구가 들추어져야만 합니다.


인간 신앙의 허구가 들통나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회개의 달인

신앙의 달인과의 충돌을 유발케 하십니다.

자신의 회개를 자랑키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의 간격을 확보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과 신앙, 인간의 회개와 기도 금식 눈물 등등은

모조리 불을 피하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불 곧 심판 죽음을 빨리 앞당겨 달라는 재촉으로써

인간의 회개와의 차이를 벌리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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