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란 마땅히 해야할 바를 말한다.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즉 심판받아 마땅함을 드러냄으로써 심판자 라는 인물을

부재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비존재

 

결국 당위라는 증상은

그 원인이 되는 주체를 나타내는 징후물이다.

 

심판자는 심판받는 자가 있음으로서 그 정당성으로써 증거 된다.

마치 의사는 환자가 있기에 의사라는 기능을 발휘하듯이
(인자의 등장은 곧 비로소 모든 인간은 가짜로 탄로나야 마땅한 당위를 보여준다.

진짜 인간의 등장으로 인해 가짜 인간은 누락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당위 누락의 기능이다.

그래서 고쳐주소서 해야 할 판국이다. 심판해 주소서 라고 해야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존재는 도덕적이여 당위는 윤리적이라고 한다.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왜 어기냐고 도덕을 추궁한다. 안식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당위는 안식일이기에 너의 가축인 소와 나귀에게 풀과 물을 주지 않느냐 라고 하신다.

 

그래서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것이 마땅 하지 않는가? 당위하지 않는가 라고 하신다.

 

이것은 도덕 속에서 윤리가 나온다. 이것이 안식일 곧 거룩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라고 했다.

사랑은 율법 속에서 나온다.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일점일획도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이루신다고 했다.

 

(5:15, 개역)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16, 개역)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가? 사랑이 말이다. 사랑이

 

그래서 당위 곧 마땅하고 당연한 것을

 

정작 이스라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기능을

개같은 이방여자가 한다.

 

나는 이스라엘 곧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맞습니다 맞고요 저는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선을 그었다.

차단 당했다.

단절시켰다.

거룩은 천하고 더러운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는 분명한 경계선이다.

그런데 그렇게 선을 그은 그 당사자가 그 선을 허물어 버린다.

 

그 이방여자의 한 마디 때문이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랬다 저랬다 줏때가 있긴 한 걸까? ㅋㅋㅋ

 

왜 법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는 것일까?

 

법 보다 먼저 있었던 용서(은혜, 긍휼)을 이 여자가 언급했기에

예수님 조차도 별수 없이 살살 녹는다. 사랑은 법 보다 먼저 있었고

법은 이 사랑을 토대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임을

예수님은 자작극으로써 이 여인을 통해서 드러내신다.

 

왜 율법은 일점일획이라고 폐함이 없는가? 사랑을 도출하기 위한 배경으로 끝까지 활용이 되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가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에 의하면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 죽으면 그만이고 죽으면 끝인데

굳이 죽는데 그 죽는 법에 죽으면 죽으리라를 두 번 씩이나 언급하는 것일까?

 

그 법의 정당성을 더더욱 높여주기 위해서

그럼요 저는 마땅히 죽어야지요 아무렴요 죽어야함이 당연합니다 라고 한다.

 

안식일의 취지인 거룩의 취지도 살리면서 동시에 그 안식의 원래 취지인

안식 이전의 안식을 만든 사랑의 취지까지도 드러낸다.

 

그래서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풀과 마실 물을 주듯이

 

안식의 취지인 안식의 뿌리인 안식을 만든 주인의 마음이 그러하기에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이 오히려 안식을 이루는 것이다.

 

지키기와 누리기의 차이

 

법에 의해 사형을 실행하는 쪽과 그 법에 의해 마땅히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법의 원래 취지를 드러내는 법을 만든 자의 긍휼을 오히려 죽으면 죽으리라가 더 발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없다.

오직 심판만이 용서다 라는 취지로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를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용서의 기능과 가치를 높여버린다.

 

용서 받는자가 이제는 더 이상 용서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신자의 용서는 오히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는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만달란트 탕감한 용서의 왕의 용서는 더더욱 빛나는 것이다.

 

괜히 용서를 무시한 용서받은자였다.

 

그렇게 용서를 무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왕의 기능은 전혀 전혀 훼손됨이 없이

그 가치를 더더욱 빛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가 아닌 당위 곧 기능이다.

 

존재가 바로 이 기능이 먼저 주어짐으로써 존재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법은 은혜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법은 죄아래 가둔다.

 

은혜를 도출하고자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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