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 (13:31-35)


김대식

610일 오후 8:15 · 

 

(13:31, 개역)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13:32, 개역)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13:33, 개역)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13:34,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13:35,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찬양(시편)이란 남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온 동네 방네 떠드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누군가 자신의 원수의 성문을 열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나의 원수됨을 열지 못하는 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온 동네 방네에 이 내용을 퍼트린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선지자란 나를 하나님의 원수임을 들추어내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들추어내었으니까 다시 땡빵 봉합할 수 있는
기술 테크닉 또는 지식을 주겠다는 것이

거짓선지자이고 (개방 개방을 외치고)
약점 잡아서 평생 꼬끼어 밥풀떼기로 삼음
(아니 약점 잡혔다고 자진해서 알아서 납세합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를 양성하는데 이들도 한 몫을 담당하는 겁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땡빵 봉합은커녕 오히려 그 흠집의 간격을 더욱더 벌려 버리는 것이

참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너는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더더욱 죄책감을 가지도록 해서

삥을 게속해서 뜯고자 자기도 못 지키는 의문의 법을 계속해서 주입시키는 자이고

동시에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자가 거짓선지자이고, 거기에 속아넘어가는 자도 결국 한패거리입니다.

 

참선지자는 역설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 없이 무조건

용서 받았다 라는
이 말도 안되는 모순, 그 간격, 그 부조리의 간격을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케 하는 자가

참선지자입니다.

그러니 그런 숭고
(불쾌한 부정한)한 짖만 골라서 하기 때문에

밉상 받는 짖만 골라 골라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 돌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거짓선지자는 살고자 하는 자고, 참선지자는 죽고자 하는자 입니다.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 8:35) (눅 9:24) (눅 17:33) 


(여러분이 죽을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괜히 새삼스럽게 자기가 선지자 이다 라고 우기는 놈을 이 기준을 통해서 보시면 됩니다.
괜히 새삼스럽게 막살겠다고 나서는 놈을 이 기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참 선지자의 눈에는 이미 보이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모조리 다 허구로 취급해 버리고

실상은 이미 새이스라엘을 봐 버렸기에

현존의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욱더 기뻐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예루살렘 안에서만 죽을려고 용을 씁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다짐과 반성이

다시는 선지자를 우리 조상들처럼 죽이지 않도록 하자 라는

법이 그들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아니라 법이고

가치가 아니라 존재가 자리 잡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성 때문에
예수님 조차도 존재로 봐버리니까

이런 법적으로 하자 없는 자신들의 다짐을 훼방하는 예수는

그야말로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이 아닐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의 일치성을 추구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깨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존재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는 가치에 있다고 합니다. 즉 기능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기능

무시받는 겨자씨 한 알입니다.

무시받는 누룩곰팡이입니다.

천국이라는 존재를 침략해 허물어 버리는 천국의 기능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이 누룩이

모든 새들이 앉도록 쉼을 주는 안식

맛있는 빵을 먹이는 안식을 준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무리 알려줘도

저들은 기능이 아닌 존재로 봅니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그러나 평강이 없는 천국의 존재를, 천국의 기능이 망하도록 천국이 쳐들어 온 겁니다.

천국을 제거하는 천국으로써 말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은 기능이지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는 여전히 야곱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기능이기에 손으로 잡아서 존재화 시킬수가 없습니다.
백날 손할례를 해 보세요 이방인이 이스라엘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조차도 하지 못하는 마음판의 할례를 무슨수로 합니까?

도리어 비존재화 됩니다. 미끄러집니다.

야곱 본인도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을 야곱이 잡을수 없습니다.

기능이 본인에게 작용해야 야곱은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교회라는 존재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넘어서는 교회라는 기능
곧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머리되심에 교회는 누락 되어야 한다는 그 기능을 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인 겁니다
.

마치 예수님의 운명인 십자가처럼 말입니다.

 

즉 존재는 법이요, 기능(당위)은 사랑입니다.

 

안식일날 일부러 18년동안 귀신들려 등이 굽어버린 여인을 고친 사랑인가?

아니면 안식일 날이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 소나 나귀에게 물과 풀을 먹이지 않는 금식케 할 것인가? 법 때문에?

 

(13:15,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주님은 일부러 법 속에서 사랑을 구현 하셨습니다.

즉 일부러 안식일날 고치십니다.

존재 속에서 존재자의 기능을 구현하십니다.
안식일 속에서 안식의 주인의 마음을 나타내십니다.

 

딴 날에 고치면 이 기능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안식의 주인 이랑께요 ~~~ 화요일의 주인이 아니라 ~~~~
마지막 날의 주인이지, 둘째 날의 주인이 아닙니당 ㅋㅋ

 

작동이 될려면

기존의 것을 건드리면서 새것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을 건드리지 못하는 새인간은 가짜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보다 더 인간적입니다. (일만 군사 보다 더 일만적인 군사 이만 군사)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안식일 지키기 보다 더 안식적인 안식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하나님 보다 더 나은 하나님이신 본인 그 자체입니다.

(시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나의 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만이 유일한 복 이십니다. 이 복을 만나는 복)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니 기존의 하나님이 다 무너질 판국이니

존재가 사라져야할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아니 누가 이것을 믿겠습니까
강이아빠 말 마따나 누가 알겠습니까?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결국 믿음이란 이런 존재의 정당성인 행함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믿음이 아닌 겁니다.

 

사랑이 기존의 법을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존재를 대표하는 그 원수의 성문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 원수의 성문을 열지 못하는 선지자는 결국 가짜죠

거짓선지자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결국 이 존재를 사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구원의 문을 사수하는 것이 거짓선지자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의 문을 깨뜨리러 오신 겁니다.

이 원수의 성문을 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기능은 결국 구원자가 아닌 셈입니다.

 

예수 라는 존재를 우리를 오늘 살려보는게 아닙니다.

예수 라는 존재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합니까?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그들은 그저 존재로만 살 뿐입니다.

믿음이란 선물입니다. 곧 기능입니다.

 

선물을 줘야 믿을 수 있습니다.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 자에게 자꾸 믿으라고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믿으라 해서 시키는대로 믿었다 이것은 행함입니다.
 

믿어 줬으니 믿었다 라는 것은 행함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믿겨지는 것은

선물의 차원인것이지

믿어 줬다 라는 행함으로 믿음을 따 낸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복음은 일부러 유대인 코 앞에서 그들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에게

믿음을 부으니까

 

유대인이 예수님에게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예수님은 시누이처럼 깐족 깐족 속을 박박 긁어대는 겁니다.

못 참을걸 어쭈 참내? 몇초 가나 보자!!

완전히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이다는 바리새인의 시선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즉 선민, 언약의 자손, 약속의 민족, 구원받을자. 유대인 곧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존재에 자신들이 부합되도록 행동해 왔다는 그 정당성이

 

졸지에 예수님의 문턱에서 턱 하고 가로막혀 버리는 겁니다.

 

그래?

 

그럼 이스라엘의 기능을 한 번 내어놓아보시지 그래?

 

기능?

 

기능이 뭔데?

 

법이 아닌 사랑, 존재가 아닌 기능

 

아 사랑

 

내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는지 큰 계명과 둘째계명을 내가 잘 지켰다는 것은

예수라는 선지자는 아주 잘 알고 있어(율법사)

 

부자청년도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접근해 오고 예수님 마저도 그런 존재로 파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기능을 드러냅니다.

 

곧 예루살렘 밖이 아닌, 예루살렘 안에서 죽는 기능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능입니다.

 

사랑은 실재적으로 실제상황으로 부딧히는 겁니다.

사랑이 존재적으로 멍청하게 사람들이 다가와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제적으로 쳐들어 와서

나를 해체시키면서 나를 새롭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갈기 갈기 찢어서 전혀 다른 존재 곧 존재 보다 더 존재적인

더 나은 새피조물로 말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새피조물로 개조해서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백날 해 봤자 부자청년의 존재의 반복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나에게 쳐들어 와서

내가 전혀 원치도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창녀 세리 강도 로 만들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이 아닌 안에서 죽는 기능에 딱 부합하도록 말입니다.

 

왜 창녀 세리 강도로 만드는 것이

예루살렘 밖이 아닌 안에서 죽는 예수님의 기능과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즉 쉽게 말해서

죄인 되는 것이

환자 되는 것이

 

왜 의사의 기능과 딱 맞아떨어지고

십자가라는 용서와 딱 맞아떨어지느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기능에

자신은 건강한 자요

죄를 짖지 않는 의인이 되면

 

이것은 나 라는 나만의 세계인 나의 존재만이 있을 뿐이지

관계라는 사귐이 없는 겁니다.

 

관계란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겁니다.

 

내가 존재 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지

나 라는 존재를 위해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평강이 있다고 합니다.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각 시켜 주니

이스라엘이 다 속아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를 위해 평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 평강을 위해 이스라엘이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쫄딱 망하는 기능이 바로 평강이다는 겁니다.

 

사랑에 의해 나는 쫄딱 망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의 사랑으로 즐거워 하리처럼 말입니다.

 

분명 망했는데 분명 죽었는데

분명 [없음] 취급당했는데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있음] 보다 더 있는 [과잉 있음]으로써

[비존재]의 기능 곧 여성성

여자의 후손과 부합되는 기능으로써

십자가 라는 용서의 기능만 쳐다볼 뿐인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를 구원받을만한 자로 만들기 위한 조건을 채울려고 정신팔리게 됩니다.

그 또한 존재의 반복입니다.

 

십자가는 정말 정말 우연이였습니다.

필연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가치 라고 합니다.

로또가 필연성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겁니다.

철저한 우연성입니다.

 

어느 정도로 우연이냐 하면

 

구원받은 한 쪽 강도에게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실 줄 미쳐 몰랐습니다.

얼마나 큰 감격인지?

 

죽는 판국에 과연 그 감격이 일어날까요?

죽는다는 것이 더 클 까요? 감격이 더 클 까요?

그런데 그 강도에게는 죽는 것 보다 이 우연의 우발의 감격이 덮쳐져서

이루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감격에 겨워

감히 내 뱉을 수 없는 말을 뻔뻔 너무 너무 뻔뻔스럽게 하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 보여줘야할 이스라엘의 기능인데

전혀 엉뚱한 자에게 이 기능이 발현 됩니다.

 

주님의 자작극이요 참으로 꼼꼼하신 섬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능이였습니다. 죽는 순간 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 강도는 둘의 대화가 귀도 안찹니다.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냐 말이죠

 

야들아 지금 죽어 죽는단 말야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

존재는 사라지는 거야

너거들 지금 빵깨이 사냐? 지금 장냔하냐? 귀신들린거 아니니?

죽는 판국에 뭐 ? 뭐가 어쨋다고?

아이고 미친놈들아 정신 차려라!!

 

아니 저 강도 말 마따나

죽는 판국에 정신 차려서 뭐하게? ㅋㅋㅋㅋ

다른 강도 말 마따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진다메? ㅋㅋㅋ

 

인간의 사고방식인 존재의 한계입니다.

존재 이전의 기능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을 전혀 볼 줄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우연이면

이 우발이 한 쪽 강도에게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이

그 강도에게 덮쳐짐으로써

그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이것이 그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을 말하기 위한 기능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예수님의 기능을 거부하는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존재적으로만 취급하기에

자신들의 존재만 운운합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 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능을 더더욱 확장 반복케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루살렘 안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십자가란 교회 밖에서는 의미 없습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이스라엘 속에서 기능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부딧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선지자들이 그래서 다들 이스라엘 속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조상들의 잘못을 유전 하지 않도록 하자 라고

또 자신들의 존재만을 자꾸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 일에 미쳐 있다면

예수님도 그저 존재로 볼 뿐입니다.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존재이니까

그 선민의 존재를 훼방하는 예수라는 존재를 제거하면

그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존재를 제거 합니다.

 

아이구 이 바보들

 

오히려 그 존재가 더욱더 누룩처럼 부풀려져서

비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 더욱더 존재의 과잉이 되어서 되돌아 오는 부메랑이 된 겁니다

 

그러니 도저히 손 쓸 겨를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누룩비유인 겁니다.

 

괜히 건드려서 더욱더 확장 반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현재 2014년 저쪽 중동의 이스라엘 또한 아직도 여전히 존재 존재 라고 우깁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또한 존재 존재 라고 우깁니다.

 

뭐 개혁주의

뭐 가장 온건한 파

뭐 가장 순수한 복음을 전한다고 자부하는 자들

 

다 살펴보니 존재 뿐입니다.

 

기능이 없습니다.

 

존재는 전혀 불쾌하지 않습니다.

 

기능은 너무 너무 불쾌합니다.

 

죽어야 하거든요

 

그것도 예루살렘 밖에서 죽으면 순교자 라는 영웅 칭호로

덕분에 가족들이 호사를 누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반대인 예루살렘 안에서 죽어야 한다면

3대가 저주 받았다는 둥 가족들을 들들 뽁을 겁니다.

아니 가족이 이제는 저주하면서 달려들 겁니다.

 

이게 기능이거든요

 

선물 한번 잘못 받아서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또 외칩니다.

다시는 선지자를 죽이지 말자 라고

 

그런데 선지자는 멈추지 않습니다.

또 죽일걸 이라고

선지자는 자꾸 딴 곳도 아닌 예루살렘에서만 꼭 죽기를 바라는 듯이

막죽으러 옵니다 막죽으러

 

교회에서 죽다 처럼

교회에서 죽는 존재가 될려고?

아니지요

 

존재가 되어서 뭐하게?
마귀 이겨서 뭐하게?

선지자 되어서 뭐하게?

 

그 반대입니다. 기능입니다 기능

 

교회에서 죽는 존재 되지 마세요

마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말씀을 내 쪽으로 끌어당길수 있는 약속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에서 죽는 기능은 바로 예수님의 기능이였다를 말하면 됩니다.

괜히 동질화 일치화 시켜서 자기존재를 부각시킬려는

그런 트릭에 속아 넘어갈 예수님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런 기능을 늘 무시한 자들임을 고백해야 할 판국일 뿐입니다.
그것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을 무시해도 얼마나 무시했으면

감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요?

 

인간의 존재는 반복 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납니다.

 

죽으면 끝나는 존재를 반복하고자

예루살렘 밖이 아닌 안에서 죽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기능이 이런 기능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이

바로 원래 이스라엘의 기능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없었던 존재인 비존재입니다.
이것은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이스라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유일한 이스라엘로써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기능은 본인이 약속한 기능이지
이스라엘이 창작한 기능이 아니거든요.
성령을 이스라엘은 만들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전이 이스라엘이거든요.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러니 이스라엘 조차도 이 기능을 발휘하는데 불가능했습니다.

그 원자리 원뿌리의 기능을 지금 예수님이 실현하신 겁니다.

 

원수의 성문을 여는 기능입니다.

즉 존재를 뚜껑여는 기능입니다.

 

존재의 정당성이 된 법을 뚜껑여는 기능

 

법은 사람을 죽이지 살리는 법은 없습니다.

존재는 사람을 죽이지 살리는 법이 없습니다.

 

살리지 못하는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살리고자 죽이는 겁니다.

존재를 죽이고 사랑을 살리는 겁니다.

 

결국 사랑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사랑은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자 이제야 본문으로 들어와서

분명 회당에서 안식일과 하나님나라의 본취지를 말하니까

유대인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군대가 예수님을 죽일려고 한다는 소식을

바리새인이 듣고서는 예수님을 숨기고자 도망을 치라고 합니다.

 

! 이 얼마나 살인을 싫어하는 바리새인의 모습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배려해주고 걱정해 주는 모습이 아닙니까

다 진리를 위해서 논쟁하고

진리를 위해 너와 내가 이렇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존재죠

 

그런데 이런 배려를 예수님은 매몰차게 단절시켜 버립니다.

저런 선하디 선한 개방의 모습에

예수님은 차단 시켜 버립니다.

 

하여튼 예수님 너무 너무 괘팍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그 붙잡는 모습이

얼마나 제자로써 당연히 스승을 사랑하는 모습

스승을 위하는 모습인데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십니다.

 

차단시켜 버립니다.

 

?

 

당신의 존재를 존중하는 나의 존재이다는 접근시도를

다 차단시키는 겁니다.

 

좀처럼 기능을 발휘해 주세요 라고 나오는 자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향유를 깨뜨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그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줍니다.

즉 미리 장사 치르는 겁니다.

마치 살아있는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시체 딱듯이 머리카락으로 딱는 겁니다.

?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러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는 기능을 보여주는 예수님이지

 

살아있는 존재로 남을려고 하는 예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비아냥 거립니다.

아이구 아까워라 그 비싼 향유를 땅에 몇초만에 다 허비했네

그 돈으로 가난한자를 도울수 있을텐데

 

끝까지 존재 타령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 마다 이 여인이 한 일

곧 기능을 널리 퍼트리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런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데

거꾸로

창녀가 이런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제자들의 존재에 의해

창녀인 향유를 부은 여인의 기능은 반드시 예루살렘 밖이 아닌 안에서 죽어야 했던 것처럼

기능은 오히려 존재에 맞물려서 더더욱 부각이 되는 겁니다.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아벨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 속에서 죽어야만 아벨의 제사가 더더욱 무한반복이 됩니다.

가인의 제사 밖에서, 가인의 제사가 아닌 곳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성령의 일이라면

육은 육의 모습을 철저하게 드러내면서

성령과 대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육의 그런 대립성 보다

육이 덤벼드는 그 대립에 비대립으로써

 

육 속에서

 

죄 속에서 사랑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곧 의인이라고 하는 자가 아닌

죄인이라는 자 속에서 용서라는 피 발림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일부러 지을수는 없죠

 

주님의 기능이 결국 우리의 존재 보다 더 나은 존재로써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루살렘 안에서 예수님을 죽이지 않는 존재가 되겠다는 존재를 따질것이 아니라

 

비록 예루살렘에서 밖이 아닌 안에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구원받는 강도처럼 예수님 저의 죄를 고쳐주옵소서 라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주님의 기능을 통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간격을 예수님의 기능 덕분에 획득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다가오심으로 인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즉 이것이 베드로라는 존재 보다 더 먼저 앞서 있었던 기능입니다.

 

존재로 사는 자는 다 지옥입니다.

 

기능으로써 존재 보다 앞서 있었던 기능으로써 우리를 태어난 겁니다.

욥이 그 기능 때문에 원치 않는 애매한 고난을 격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싹 다 잊을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욥의 기능을 예수님께서 뽑아내신 결과인 겁니다.

 

또 오독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시기 위한 기능이 아닌

자신의 기능 뭐 탈랜트 달란트다 라는 둥

그런 식으로 기능을 뽑아낸다면

 

뭐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웃기지 마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라는

 

선지자의 기능을 무시하는 꼴입니다.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 됩니다.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할 것이 없이

 

그냥 사시면 됩니다.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것을 확장키 위해서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주님 혼자 다 해놓고서는 (우렁각시)

 

우리에게 부어주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루살렘 밖이 아닌 안에서 선지자를 죽이는 짖 밖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걸림돌이라는 기능으로 십자가를 세우시고

 

(13:33, 개역)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미련함이라는 이방인의 비지혜로써 다 이룬 겁니다.

 

(13:32, 공동)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여라.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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