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당위

나는 왜 태어났나? 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는 왜 태어날수 밖에 없었습니까? 라는 당위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기능, 대상 소문자 에이)

실로암 소경을 보고 저 사람의 존재는
날때 부터 소경됨이 자기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소경으로 태어났어야만 했다 !!!

대칭에서 비대칭으로(처음엔 비극에서, 그 다음엔 희극으로)

대칭적 사고방식 보다

비대칭적 사고방식을

할수 없다 와 할수 있다의 대칭보다

할수 있다 와 할수 밖에 없다 (아니 하고는 못 배긴다) 라는 비대칭성

(막 9:22, 개역)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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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원

610일 오후 5:45 · 수정됨 ·

잠언에서 왜 개미를. 보라고 했나요? 대식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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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와 같습니다. 곧 종말 비유입니다.

 

열처녀 비유,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비유, 양과 염소 비유

 

개미가 보여주는 기능은 바로 종말성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6:7, 개역)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아직 신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기름과 등을 준비해서

마치 신랑이 지금 온 냥 지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가 아닌 기능 입니다.

610일 오후 7:53 · 수정됨 ·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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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와 복음의 차이는

 

쉽게 말해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차이 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바리새인이기에

예수님과의 차이를 매일 매일 지적 당해야 할 입장입니다.

 

과거의 구원파 물론 구원파 뿐만 아니라 장로교 예장 합동 등

또는 오늘날 개혁주의

성화론 등등 할 것 없이

고유의 색깔을 주장했으나 이제는 다 짬뽕이 되어서

 

오로지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어떤 교리든 자기 존재를 이롭게 한다싶으면 스폰지 처럼 다 빨아들이기에

오늘날 현재의 이단들은 다 이런 모양새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해도 다 동일한 것은

바리새인처럼 바로 존재를 주장하는 겁니다.

 

존재를 위해서면 복음 조차 예수님 조차 존재로 보는 겁니다.

 

그럼 복음의 차이성은 뭐냐

 

기능입니다.

 

구원을 존재 또는 소유로 보는 자는 예수님도 존재로 보고

구원도 존재로 보고 있기에 소유할 수 있냐 없냐 라는 유무로만 따집니다.

 

그런데 구원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구원이라는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실로암 소경은 반드시 소경으로 태어났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나는 구원이다 라는 존재로 빠졌기 때문에

구원을 받냐 못받냐로 이 사람은 자기죄냐 부모 죄냐 로 존재론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거짓선지자도 동일합니다.

 

오늘날 모든 이단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존재로 따집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겁니다. 곧 소유죠

구원을 소유로 보는 겁니다. 다윗도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들통난 겁니다.

 

그러나 기능 곧 성령의 선물인 은사는

기능으로써 구원이 어떤 일을 벌리는가 라는 사건으로 봅니다.

 

구원자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실로암 소경은 소경으로 태어나야만 했고

개미로 태어나야만 했고

종말의 기능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기능을 말하지 아니하고는 못배기는 기능을 발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소경을 존재로 본 바리새인의 해석은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기능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졸지에 존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육이 되어버려서

 

영이 무슨 일을 벌리는지 감을 잡을수가 없게 된 겁니다.

 

구원파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자꾸 존재를 주장하는 육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건져내달라고

종말을 부어달라고 기능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나에게 정직한 영이 없다고

 

존재만 주장할 뿐이지(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의 이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 구원 받을자 맞지요? 라는 존재)

 

기능(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이 없다고

 

무능함을 개미처럼 요청해야 할 입장인 겁니다.

 

귀신은 기도 외에는 나가는 법이 없는 거죠.

 

(9:28, 개역)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610일 오후 8:07 ·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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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Lee

3시간 ·

누가복음 13:24 KRV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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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좁은 문은 없다. 비존재

 

상대적인 넓은 문은 있다. 존재

 

좁은 문은 존재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기능으로써만 작용하고

 

반대로 넓은 문은 보이는 존재로 작용한다.

 

존재 보다 비존재(기능)이 먼저 앞서서 있었다.

베드로 라는 존재 보다, 닭의 세번 울음이 먼저 있었듯이 ~~

 

믿음은 보이지 않는 기능을 바라는 것이다.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시간 · 수정됨 · 좋아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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