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시편 50)

 


(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50:1, 개역) [아삽의 시]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50:2, 개역)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50:3, 개역)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50:4, 개역)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50:5, 개역)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50:6, 개역)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50:7, 개역)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50:8, 개역)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50:9, 개역)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50:10, 개역)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50:11, 개역)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50:12, 개역)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13, 개역)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50:14, 개역)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개역)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6, 개역)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50:17, 개역)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50:18, 개역)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50:19, 개역)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50:20, 개역)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50:21, 개역)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50:22, 개역)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제목을 중심되는 구절을 통해서 정해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감사한 자가 일단 없다는 겁니다.

단 한 명도 말입니다.

 

감사의 제사가 드려져야 하나님이 영화롭게 된다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왜 제가 말이 안된다고 보는고 하니

일단 감사한 자가 없기에 감사의 제사를 드린자가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했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의 주장 또한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원인적인 면에서는 감사한 자가 없다는 것은 맞습니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오로지 원망한 자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은 나타났다는 겁니다. 원인 없이 말입니다.

 

자 결국 문제는 원인이 없이 이런 결과만 성취되었다는 겁니다. 우연입니다.

 

그런점에서 말이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에 더 말이 안되도록

결과 때문에 앞의 원인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꼭 구지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결과 자체가 원인이 되는 겁니다.
모순이죠. 그런데 이 모순이 흐릿하고 모호한 원인들보다 더 또렷하고 명료한게 없습니다.
 

캬 제가 말을 해 놓고서는 이게 진짜 말이 안되는구나

그런데 말이 되어버린 겁니다.

결과적으로 말입니다.
역설이지요 페러독스

 

그럼 제가 문제를 삼은 원인자가 되는 감사하는 자가 없다 라는 것인데

 

감사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또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느냐 말이죠

 

지난 시간에 용서의 왕 중의 왕의 비유인 곧 비밀인 일만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용서 받은 자는 없는데 용서라는 주체는 용서의 최고의 왕으로써 맹위를 떨친다고?

용서 받은자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하시는 자의 용서만 덩그라니 남아서

만개를 펼치느냐 말이죠.

오히려 텅텅 비어야 정상인데, 도리어 꽉꽉 채워져서 초과잉적으로 흘러 넘치더라 말이죠.

 

분명히 없는데, [없음]인데, [있음] 보다 더 있음이 되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모든 비유, 하나님나라 비유 비밀은 다 이런식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씨뿌리는 비유도 그러하고
임금님이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 비유, 특히 마 25장 종말의 비유 세가지 열처녀 비유, 양과 염소 비유, 악한종 충성된 종 비유, 모든 비유가 이런식입니다.)
 

분명 불임여성인데 무자 한데 어떻게 해산하는 수고가 없이 많은 자식이 생겼다는 겁니다.

또 수태 곧 임신한 적이 여자가

또 아기에게 젖을 물려 본 적이 없던 여자가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로써의 기능인 아기(생명)와 연관된 것이 전혀 무능한(죽은태),

전무한 누가 봐도 그런 여자를 저주(죽음) 받은 여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복 되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영적인 시선이지

육적인 시선에서는 말이 안되는 거죠.
(마치 성령으로 잉태하는 방식과 같은 겁니다.)

의도적으로 말이 안되는

육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로만 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을 피해가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믿을수 없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고 성경말씀은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없음]-(불임여성, 또는 죽은 태)가 초과잉적인 충만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용서 받은 자가 없는 용서가 오히려 용서받은자가 없음을 통해서 더 충만하고

아기를 낳은 적이 없는 여자가 오히려 많은 자식의 어미로써 남들이 부러워 배아파할 지경이다는 겁니다.

 

지혜문서 전도서인가 잠언인가?

세상이 배아파 죽을 정도로 시기하는 것이 바로

계집종이였던 소녀가 왕비가 된다는 겁니다.

제일 밑바닥이 제일 높이 되었을 때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삼상 2:4, 개역)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삼상 2:5, 개역)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삼상 2:6, 개역)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개역)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세상이 시기를 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또 이것을 지혜라는 인물이 한다는 거죠.
누가? 지혜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허물덩어리와 결혼한 그 왕 이야기가 바로 지혜라는 인물이다는 거죠.

구스 여인과 결혼한 신랑이 [온유] 라는 인물 입니다.

유대인에게서는 이방인이 여기에 해당 되는 신부 입니다.

그래야 시기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배아파 죽을듯이 시샘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정작 본 백성은 버림받고

버림받았던 이방인이 새이스라엘로써 예수님의 신부가 되니까 말입니다.

원가지는 짤리고, 버려진 죽은 가지는 접붙임을 당하는 겁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원래 감사로 제사를 드린자가 아니였던 겁니다.

아무도 감사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덮쳐져서

감사라는 주체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감사하는 자가 없는데
없는데서 졸지에 뿅하고 생겨난 겁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셨지
인간이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이룬고 하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겁니다.
단번에

 

알고보니 자작극이였고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 십자가의 자작극에 말려들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단절이요 불가능성이였던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일만달란트 비밀입니다.

 

또 여기에 반드시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지혜만이 오직 지혜라는 인물만이 하실수 있는 일인

 

가짜 감사를 개입케 만듬으로써 감사의 보충물로써 극과 극의 간극을 만드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감사가 감사 답고 용서가 용서 답다는 거죠.

 

일만달란트 용서에 반드시 백데나리온 띠먹고 토낀놈이 반드시 지나가야 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일만달란트 용서 받았다고 장담할수 있냐 말이죠

가장 아프게 한

가장 미운 놈이

하필이면 그 때 코 앞에 지나가게 하는데?

과연 일만달란트의 용서고 뭐고 눈에 불이 안들어오겠냐 말이죠.

 

반드시 이런 보충물을 개입시키시는 이유인 겁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구원받은 자격도 없고

그 어떤 구원의 조건도 갖출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서는 바로 용서받는자가 없어도

용서가 뭐 하나 아쉬운 것 없이 용서의 충만으로 까가득 하다는 겁니다.

 

혼인잔치 비밀 곧 하나님나라 비밀 비유에서

? 살육이 넘치는데 잔치의 페스티발은 더욱더 풍성해지느냐 말이죠?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인데

오히려 그것이 혼인잔치 답다는 겁니다.

 

혼인잔치를 더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

보충물로써 작용한다는 겁니다. 임금의 심판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우리가 쉽게 나의 인내의 실천으로 인한 감사

또는 용서 또는 영화롭게 또는 거룩 등등은

그렇게 쉽게 이해할수 있는 의미들이 아니였던 겁니다.

 

철저하게 보충물들을 끌어당기는 미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들인

용서요 결혼이요 믿음이요 거룩이요 오늘 말하고자 하는 감사이다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로써의 감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도저히 감사가 될수 없는 세계를 끌여들여서 그들에게 미끼로써 감사이어야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인 겁니다. 결국 없습니다.

없는 의미인데 결과적으로는 있음입니다.

결국 육의 흉내들을 끌여들여서 그것들을 파 하는데 감사가 감사 답다 라는 겁니다.

 

마치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은 허무하게 죽었잖습니까?

제사 한번 잘 드리다가 개죽음 당한 겁니다.

이렇게 감사는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가인의 감사제사를 끌여들여서 드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제사인 겁니다. 아벨제사가 말입니다. 허무하게 죽는 제사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감사가 바로 이런 거짓감사나, 거짓선지자나 마귀가 주장하는 감사를 끌여들여서

그런 감사를 거부하는 감사로써 하나님께 영화롭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출애굽사건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는 출애굽을 생각할 때 마다.

물론 영화에서 아무리 카피할려고 해도 안되는 이유가

 

모세가 감사제사를 드리겠다고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겠다고

잔치를 벌리겠다고 했을때에

 

애굽왕 바로의 반응이 정말 정말 잊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예 주제에 무슨 제사냐? 라는 겁니다.

주인들의 제사가 따로있는데 노예 주제에 따로국밥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완전 웃끼는 소리죠.

 

또 더 웃끼는 것은 모세가 약을 바짝 올립니다.

물론 애굽왕이 비아냥 거림으로써 스스로 모세를 약올린다고 착각하겠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내 노예를 내어준다는 말인가?

 

결국 말도 안되는 요구를 요구했기 때문에

미끼를 덮썩 물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이 강퍅케 하는 방식입니다.

 

강퍅 곧 미끼를 안 물고는 못배기도록 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리 강도 창녀 문둥병자를 앞세운다는 것은

저들 거짓영을 받은 바리새인들이나 이런 자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무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는 겁니다.

거리벌리기를 제대로 했는데

되도않는 것들이 예수 예수 라고 주장하게 되면

 

도대체 예수가 누구관대 라는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것이 강퍅케 만들어서 미끼를 물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한다는 거죠.

 

그럼 우리가 용서라는 의미가 지난 시간처럼 일만달란트 용서 비유 비밀이

얼마나 무시 무시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무서운 의미처럼

 

감사라는 의미 또한 얼마나 무시 무시한 것이냐 라는 것을

 

얼마전에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통해서 살펴본적이 있습니다.

마르다가 오죽하면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예수님께 꾸중하라고 했을까요?

예의범절의 기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으니

마르다 자신이 감히 어른이 계신 가운데 곧 예수님 앞에서 나무래는 것이 아니라

큰 어른 예수님이 직접 나무래서 예의범절을 가르치라 라고 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거꾸로 되어서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도리어 칭찬하고 너도 마리아처럼 되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1:21, 개역)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즉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 순간만큼은 영화롭게 했다는 겁니다.

결국 이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가 감사인지 아니면 감사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거죠.

 

그런데 너무 너무 쉬워서 너무 너무 어렵지 않아서 무시받는 의미인데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본인이 기쁘면 그것이 영화롭게 한 것이다는 겁니다.

에이 말도 안된다고요?

아닙니다. 진심으로 말하는 바입니다.

 

왜 본인 개인이 기쁜데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느냐 하면

제가 위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거꾸로입니다.

즉 본인이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곧 선물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자는 기쁘지 않습니다.

 

마리아 보세요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 말입니다.

언니가 힘들게 예수님을 위해 대접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왜 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영화롭게 했냐고요?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이 것이 팍팍 티가 났고

이 선물의 의미가 더욱더 풍성하도록

선물을 못 받은자의 자기 일에만 몰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시기심이 작용케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아내와 일만 하는 가정부의 차이인 겁니다.

 

즉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인간의 감사를 안 받습니다. 즉 인간의 감사는 미끼가 되질 않아서 마귀가 덮썩 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를 선물로 받은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애굽왕과 애굽군사의 강퍅을 작용게 합니다.

 

자 그러니 우리 순순히 인정합시다.

내 쪽에서 감사를 표시하는 것들은 하나도 마귀가 시기하지도 않는 것들이라고

그러나 주님 쪽에서 감사를 선물로 주시면 마귀가 온 발똥을 다 하는 겁니다.

 

감사 뿐이겠습니까?

용서

찬양

기도

구제

사랑

경건

 

모조리다 선물로 받아야 하는 의미이지

 

내 쪽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법 지키는 것과 같은 셈입니다.

외설 밖에 안되고 위선이 되는 겁니다.

 

그런 거짓된 위선에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에서 더 거짓된 더 나은 외설성으로써 우리의 거짓됨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해서 지옥에서 빠져나와 구원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께 영화로와야 하나님의 구원이 됩니다.

 

구원은 반드시 감사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때에만 구원이 여호와께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였다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지 못하는 제사가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며

구원은 없는 겁니다.

 

결국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감사가 없기에

즉 받은 선물로써 감사가 없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가 전혀 미끼를 덮썩 물 수가 없는 겁니다.

마귀가 강퍅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호와의 구원 사건이 나타나겠습니까?

 

감사가 없는데 ~~~

 

 

자 이렇게 운을 띄우고 시편 50편 본문을 살펴보면

 

(50:14, 개역)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개역)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 이라는 아주 아주 시편 50편 전체에 맞지 않은 분위기의 단어가 있습니다.

 

아니 감사 영화 구원 등등 좋은 의미들만 가득한데

완전히 언발란스하게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의미로써의 환난 날이 나옵니다.

네 맞습니다. 눈치 채셨지요

 

즉 우리가 감사 영화롭게 그리고 구원 등등은

바로 이 환난 날 속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빛이 빛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대낮에 비추시는게 아니라

캄캄한 어두운 밤에 비추듯이

여호와의 말씀은 해 뜨는데부터 해지는데 까지 어두운 구석 구석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환난 날에는 특히 원망이 나오지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감사했다고 억지로 뒤짚어 씌워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감사가 선물로써 안 기쁘고는 못배기도록

안 감사하고는 못배기도록 여호와의 구원을

애굽왕 바로왕을 통해서 영광받으시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겁니다.

이런 어두운 세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영화롭게]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환난 날 이다는 겁니다.

즉 애굽왕 바로왕을 참 제대로 강퍅케 했다는 거죠.

 

이런 의미로써 구원을 언급하지 않는 자들은 다 거짓의 영을 받은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구원은 인간구원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거죠.

 

구원은 어디까지나 여호와의 솜씨입니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참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솜씨입니다.

마리아가 누린 참 좋은 것입니다.

 

이런 감사를 선물로 받지 못하면

 

몇 번 감사 할까요?

몇 번 남을 용서 할까요? 7? 8?

이런 인간의 감사, 인간에게 회귀하는 용서요 구원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마귀가 주장하는 겁니다.

 

우리는 도리어 770번 예수님으로부터 감사를 선물로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매초 매초

결국 감사 또한 믿음처럼 선물 개념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할 입장이 못됩니다.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처럼
우리는 감사를 선물 받지 못하면 감사의 세계가 뭔지를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가망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를 드릴줄 모르기 때문에 영화롭게 못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의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들이 우리 육의 한계에서 생각해낸 겁니다.

마치 7번 감사드리면 된다는 식처럼 말입니다.

아닙니다. 770번 감사를 받아야 하는 선물의 의미입니다.

이 선물의 의미만이 영화롭게 하며(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회수하시는 주님께 귀결되는)
그리고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한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에게는 아무리 봐도 감사가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감사를 주옵소서 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주님을 영화롭게도 못하고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지도 못하고 있으니

제발 제발 감사하지 못하는 이 죄인에게 감사를 선물로 주셔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해 주소서

내 눈은 어두운 눈이니 주의 구원을 보게 하소서 라고 간구해야만 할 판국인 겁니다.

 

즉 내 쪽으로 땅길

나의 구원을 위해 내게로 회귀하는 구원 용서 감사 영화롭게 함 등등은 없는 겁니다.

어차피 그런 것은 모호해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렷하고 명료한 구원과 용서와 감사는

오로지 주님의 필요에 의해서 주님이 주시는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즉 다른 말로 애굽왕을 강퍅케 하고

애굽왕이 강퍅케 되어야

여호와의 구원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애굽왕을 강퍅케 못하는 감사는

여호와의 구원을 나타낼수 없을 뿐더라

애굽왕을 강퍅케 해서 끌어들이지 못하는 구원은

인간의 탐욕으로 귀결되는 우상입니다.

 

애초부터 나를 위한 구원은 없으니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감사라는 이 불가능한 선물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우리는 원망 밖에 안했기에)

 

마귀가 강퍅케 되는
(탕자같이 원망밖에 안한 자를 무조건 용서하심에 반발하는 맏아들이 분노)

 

여호와의 구원만을 바라봅시다.

 

바로 십자가의 용서만이

마귀가 시기하고 배아파 하는 유일한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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