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하나님이여!! (시편 76)

 


(시 76:6, 개역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
76: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76:2, 개역)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76:3, 개역)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76:4, 개역)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76:5, 개역)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76:6, 개역)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76:7, 개역)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76:8, 개역)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76:9, 개역)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76:10, 개역)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1, 개역)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76:12, 개역)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시편 76편의 배경이 되는 내용은 열왕기하 19장의 내용입니다.

 

(왕하 19:34, 개역)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왕하 19:35, 개역)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 19:36, 개역)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왕하 19:37, 개역)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설 명절에 형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성경은 비유로 되어 있냐고?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마귀들이 읽으라고 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믄 뚱딴지 같은 소리?

 

즉 비유 쉽게 말해서 수수께끼로만 적은 이유는 풀수 없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상하게 다들 풀어버린 식으로 말을 하더라 말이죠.

곧 그 말은 해석 풀이를 했고 그 해석에 따른 말씀을 지킬줄 안다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어떤 장로가 저에게 죄가 뭐냐고 묻더군요.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안나오자

! ! 그러면서 비아냥 거리고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식으로 죄가 뭔지를 답해 줬습니다만

제가 보니 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더라 말이죠.

 

꼴에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답했으니 맞잖아 라는 식이던데

그런 억지가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죄라는 개념은 그때 그때 달라요

고정된 개념이 될 수가 없는

죄 조차도 수수께끼인 겁니다.

인간은 죄에 갇혀 있지

죄에 갇혀 있는 인간이 죄를 해석할줄 안다면

그게 말이 되냐 말이죠.
인간에게 해석 되는 죄란 더 이상 죄가 아닌거죠.
마치 인간이 이길수 있는 마귀는 마귀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인간은 죄를 해석 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인간을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읽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위해 대신 죽임을 당하는 불가능이 덮쳐져야 한다는 겁니다.

 

주인 싸움이지 인간 싸움은 없습니다.

 

아무튼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너 보다 더 잘 알고 제대로 안다는

힘의 사고방식을 펼치는 것을 보니

장로가 된 이유가 드러난 겁니다.

평생을 그 짖을 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다행히도 다른 곳에서도 그 짖만 하더라 말이죠.

 

고로 인간은 짐승입니다. 짐승인 주제에 어떻게 죄를 풀어낼수가 있겠습니까?

 

고로 성경은 마귀 읽으라고 준 겁니다.

그 반대는 뭐냐? 말씀이 나를 읽어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활동이 없어요.

 

모조리 다 성령의 활동이요 예수님의 활동 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성경은 못 풀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풀었다고 우기면서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잘 지키는 자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바리새인을 마귀자식이라고 하시는 이유인 겁니다.

일부러 안식일날 고치십니다.

? 안식일을 너무 너무 잘 지키는 바리새인을 열받게 할려고 말이죠.

 

반드시 말씀을 지킨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고 성도를 핍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괜히 말씀을 읽고 지킨거죠.

그런자들은 말씀이 나를 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겁니다.

고침을 받은 실로암 소경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서는 형님이 다시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번역이 잘못 된 것이 많은데 의미가 확 달라지지 않느냐 라고 번역문제를 질문했는데

제가 말했습니다.

 

찬송가 새찬송가 문제는 결국 돈싸움 문제였다고

번역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권력다툼이 그 진짜 배후의 모습이다고

그러니 번역 문제 등등은 핑계이고 그 껍데기를 한꺼풀 벗겨보면

안개 연막탄을 제거해서 보면

실상은 번역 하나로 의미가 확확달라지는게 아니라

번역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내가 더 옳지 않느냐 라는

성전 중앙의 권력 차지 싸움이다는 겁니다.

 

군에 갔다 와서 얼마되지 않아 젊은 전도사가 새로 왔는데

말씀보존학회의 성경이 진짜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우기길래

사기치지 말라고 했더니

이제는 역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마귀는 아이큐 2천이다고 지식적으로 똑똑하다고 저를 그런 식으로 공격하더라 말이죠.

겨우 스무 몇 살 되는 놈이 하여튼 별에별 소리를 다 들어서 써먹더라 말이죠.

루터가 한 말을 써먹었는데 그런 식이다는 거죠.

 

말씀 보존학회가 이제는 한물 간 유행이 되다 보니

아마 이제는 원어 번역으로 사기칠게 뻔하다 말이죠

 

결국 원본이 없는 판국에 사본을 가지고서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가짜들이 그 중앙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고

지난번 공부부터 계속 언급한 겁니다.

 

그런 싸움에 밀려 밀려 벼랑끝으로 몰려 죽음까지 몰리는 자가

바로 다윗왕이였다고 했지요.

 

서로가 성전 중앙에 더 중앙 정중앙을 차지하고자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순종하면서 조금더 조금더 중앙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게 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이죠.

 

아니 피난처에 피난민으로 갔는데 졸지에 그 피난민 속에서 다시 피난민이 속출하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다 라는 거죠.

 

고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짐승이다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성전 중앙을 차지하기 위한 짐승이 인간이다는 거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도망치라고 합니다.

피난처에서 다시 그 피난처를 떠나 도망치라고 합니다.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제는 형수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어떤 기업이 이슬람 국가의 어떤 기관과 협력을 하면서

그들이 한국에 이주를 해 오게 되었답니다.

어떤 도시가 그들의 이주 지역으로 선정이 되었던 모양인데

문제는 형수가 화를 내면서

이슬람 종교는 일부 다처제이고

기독교인을 죽여도 그들은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막 흥분을 하더라 말이죠.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잘 없었는데 참으로 기가막혔습니다.

저번에 서울시장 박시장이 또 아들 군문제로 다시 재 시비로 고소를 당하게 되니

아들의 기도문을 올리면서 참으로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을때에

 

형수가 박시장을 욕하면서 자기가 뭔데 우냐고? 막 화를 내더라 말이죠.

 

알고보니 박시장이 불교신자라는 이유로 막 화를 내었다는 겁니다.

아들은 기독교인인데 ~~~~

 

아무튼 자기 종교가 아닌 자는 다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웃끼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라고 하는 자들도 사실상 다들 악마의 우상종교입니다.

 

일부다처제가 기독교 아니던가요?

솔로몬은 완전 변태인데~~~

 

이슬람만 기독교인 죽이는게 죄가 안되는게 아니라

물론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서 또 세뇌 당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기독교인도 이슬람 사람 죽이면 죄가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양쪽 종교인 모두다 세상 나라의 국가 법에 의해서 조정을 신청하는 겁니다.
마치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고
빌라도에게 판결을 유보하듯이 말입니다.
빌라도도 손에 피 안 묻힐려고 유대인의 사기에 안 말려들지요.

그럼 결국 둘다 마귀인 거죠.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말입니다.

 

자 이렇게 제가 이런 내용을 먼저 서두로 깔아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과 연관이 됩니다.

 

제목을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고 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야곱은 한마디로 사기꾼 가짜 거짓말쟁이 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짐승이듯이 말이죠.

 

그런 야곱에게 언약의 하나님이 덮쳐진 겁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야곱은 일종의 껍데기가 되고

야곱의 하나님은 그 껍데기 속의 땅콩이 되는 겁니다.

 

이제 야곱은 자기 마음대로 살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자유의지가 없다는 거죠.

이제 노예의지로만 살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짐승인데 그 짐승 속에 언약이 들어가서 언약이 이끄는대로 질질질 끌려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사는 것이, 삶이, 목적이 아니라

껍질 속의 땅콩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삶이다는 겁니다.

결국 야곱은 실패하도록 되어 있고, 멸망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땅꽁껍질 야곱은 의미 없고 그 그릇 속의 보석인 예수님만 의미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거죠.


자기는 정작 그것을 모릅니다. 알아도 소용없어요

안다는 것은 질질질 끌려다니는 것에 대한 대처방안을 가지게 된다는 말인데

알아도 소용없는 이유가 대처할 방법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질질질 끌려 다니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약속에 의해서 말입니다. 보석에 의해서 말입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릇은 깨어지는 맛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자 이제 부터 접시를 깨자 접시 깬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보배만 드러나면 됩니다. 속은 날로 날로 새롭거든요! 보배만 드러내고자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올때에

항상 출애굽 전쟁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 76:6, 개역)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물론 그때는 야곱은 죽고 없어요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은 출애굽전쟁을 시작하신다는 겁니다.

야곱은 없는데

야곱의 하나님은 그 약속을 실현한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야곱은 없는데

야곱 없이

? 말라꼬?

무슨 이유로?
출애굽이면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냐 말이죠.

 

야곱과 한 약속은 야곱이 있을때 실현하거나 지켜야지요?

야곱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야곱 개인의 의미가 아니다는 겁니다.

야곱 개인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계셨는데

시간을 초월한 주님이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야곱 개인과 말라꼬 언약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언약사상이 인간과 언약했다고 사기를 치는데
아닙니다. 인간은 오히려 누락됩니다.
이스라엘과 언약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시간 공간을 초월한 주님이 말라꼬? 인간과 약속하시겠습니까?

인간은 육에 갇혀서 육이 소멸되면 더 이상의 공간이 없는

몸이 없는데 약속이 언약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런데도 그런 야곱과 약속을 했다는 말은

야곱 개인이 아니라

야곱 속의

껍데기 속의 존재?
(
존재로 표현하면 안되는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철학자들은 비존재 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말이죠.)

바로 이스라엘과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곧 예수님과 약속했다는 거죠.
약속의 관심사는 약속 자신이지
야곱이 아닙니다.

 

자 이렇게 되면 시공간에 한계적인 의미가 확깨어져서

무소부재 이다는 겁니다. 유비쿼터

그렇다고 범신론적이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겁니다.

범신론적인 의미가 아닌 오히려 정반대로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언약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없어요.
이스라엘은 민족 개념이 아니거든요.
없는데서 나타난 비존재
바로 역사적 존재가 아닌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육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뿌러진 허리에서 나온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

야곱도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도 다들

 

오해를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약속을 지킬수 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그 실상은 정반대로 예수님 쪽에서 다 이룬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덮쳐지게 되니까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바로 나는 가짜다 라는 겁니다.

 

나는 가짜다 라는 고백이 마치 장난같이 느껴져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바로 이 가짜 속에서 진짜인 예수님이 있다 라는 겁니다.

야곱 속에서 진짜 이스라엘되신 예수님이 있다 라는 겁니다.


가짜 야곱 속에서의 선하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참되신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가짜이다 라는 고백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요

환자를 부르러 왔다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을 읽고 지키는 자인 의인의 예수님이 아니라
말씀에 해석당하고 읽혀짐을 당한 죄인의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말씀을 읽고 지키는 의인, 빛의 아들들의 예수님이 아니라
말씀에 해석 당하고 읽혀짐을 당한 죄인,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자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의미를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지혜로 보는 겁니다.

납득이 안가요 납득이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는 것은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여!!

거짓말 쟁이 야곱의 하나님이여~~~


이런 의미이다는 겁니다.

 

이 야곱의 하나님이 구원전쟁인 출애굽전쟁을 벌렸다 라는 겁니다.

 

구원전쟁은 이것 뿐입니다. 출애굽 전쟁

구약은 계속해서 출애굽전쟁을 무한반복합니다.

시편 7778편 계속해서 애굽 사건을 반복합니다.

괜히 지나간 옛날 사건을 끄집어 내는게 아닙니다.

그것이 실상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다는 뜻에서

계속 끄집어 내는 겁니다. 다른 현실은 없다는 거죠.
지금 현재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과거 3400년 전의 출애굽 그 때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 2000년 전의 십자가 그때의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건이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예 더 노골적인 출세상

출인간

입예수안 이렇게 되는 거죠.

 

바로 이것을 누구를 불러서 약속했다?

죄인을 불러서

 

바로 야곱

사기꾼 야곱

거짓말쟁이 야곱

 

신약으로 치면

실로암 소경

탕자

세리

창녀

강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들과의 일방적인 편파 약속 때문에

일방적인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용서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기능

의사 기능을 발휘하셨다 라는 겁니다.

 

?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왜 야곱과 약속하셨나요?

답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기에!!!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는 거죠.

그러니 야곱이라는 껍데기를 의미 둘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 야곱에게 말려드는 겁니다.


결국 야곱에게 말려든게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에게 말려든게 되지요.


자기 보다 못한 죄인이어야 말려들지
자기 보다 우월한 의인이면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겁니다.
왜? 자칭 의인이라는 놈들이 다 말려드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십자가에 말려들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마음 푹 놓고 미끼를 덮썩 물게 되는 겁니다.
 

고맙게도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

모든 힘이 애굽에게 집중이 되어 있을때에

신전 중앙에 집중이 되는

그 애굽이

야곱의 하나님에게 말려듭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노예들을 내어주겠느냐? 너 같으면 내어주겠니????

 

이것이 십자가 전쟁

출애굽 전쟁

구원전쟁이다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신 이유도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 받기 위해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은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하신 거죠.
주님의 아이디어 였습니다.

 

그 전쟁이 오늘 시편 76편에 다시 반복해서 벌어집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잡아먹고

의기 양양해져서

이제 남유다까지 잡아먹을려고 합니다.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그 동안의 전쟁승리에 기고만장해져서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과도 싸울려고 한다는 거죠.


이미 북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이겼으니
그 하나님이 남유다의 하나님이기도 하니
여호와의 싸움에 자신만만했던 겁니다.
말려든줄도 모르고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말려드는 식과 똑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랍사게의 시선이 인간을 인간으로 안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랍사게 자신은 신들의 전쟁에서 신들과 싸워 이겨왔기에

인간은 그저 종이조각 밖에 안된다는 것이 랍사게의 시선이다는 거죠.

 

그래서 남유다왕 히스기야를 가지고 놀 듯이

여호와 하나님과 한 판 뜨겠다고 덤비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런 랍사게의 그 동안의 승리를 누가 승리케 했냐 말이죠?

애굽의 바로왕을 누가 강퍅케 했나요?
앗수르를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로 사용했는데

이제는 이 몽둥이가 거만해져서 몽둥이로 삼은 주인에게 덤벼드는 꼴이 된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바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게 되니까

저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 라고 보는 종말의 시선에

그런 랍사게의 시선에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라는
종말의 종말의 시선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까불던 랍사게의 앗수르 군대를 한 순간에

천사의 등장으로 인해서 송사가 되어버린 겁니다.

 

여기에 히스기야 또한 몽둥이로 삼은 이 앗수르의 등장이 아니였다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겠냐 말이죠. 여호와를 붙잡겠냐 말이죠?

 

둘 다 짐승이요 둘 다 가짜이다는 겁니다.

 

결국 주님은 처음부터 모든 일을 가짜를 동원해서 일하셨던 겁니다.

가짜만을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진짜 맞는데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습니다.

몇 번 용서할까요? 7번까지 했는데 8?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편에 섰으니 나 진짜 맞지요? 라는 의식 아닙니까?

성전 중앙에 조금더 가까이 좀더 가차이

그래서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조금더 성전 중앙으로 정중앙으로 진입하고자 말이죠.

 

바로 이것이 가짜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넌 가짜야 라고 알려주시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요

출애굽 사건이다는 겁니다.

 

가짜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종말의 종말이다는 말은

 

자기가 부정한줄도 모르기 때문에

죄인인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 부정에 부정으로써 일하시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옳았다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시편 76편은 출애굽 사건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찬양입니다.

주님이 이기신 전쟁 말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라는 취지인 겁니다.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가만히 있기는커녕 원망했지요.

맞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사단아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단입니다.

짐승입니다.

우리는 늘 사단의 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왠 은혜인지 용서해주시는 십자가의 피를 흘리시냐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사건이였다는 겁니다.

전쟁도 사건도 모두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가짜로써

껍데기로써

사기꾼으로써

짐승으로써

사단으로써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로써
예수님의 세번 부인하는 자로써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죄인으로, 가짜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시 76:10, 공동) 『인간의 분노는 당신의 영광을 더할 뿐이요, 당신의 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당신의 축제를 지키리이다.』

(시 76:10, 쉬운) 『주께서 악에 대해 분노하시니, 사람들이 주를 찬양합니다. 주의 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 76:10, 킹흠정) 『확실히 사람의 진노가 주를 찬양할 것이요, 그 진노의 남은 부분은 주께서 억제하시리이다.』

(시 76:10, 한글킹) 『진실로 사람의 진노가 주를 찬양할 것이요, 진노의 나머지는 주께서 억제하시리이다.』

(시 76:10, 현대인) 『사람의 분노는 결국 주께 영광을 가져다 주며 주는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시 76:10, 현대어) 『원수들이 일으키는 분노는 오히려 주님의 영광만을 더 드러낼 뿐이며 주께서 퍼부으신 분노를 피하여 요행히 살아남은 자들도 결국은 주께서 벌이시는 잔치를 맞이하게 되리니』

(시 76:10, 가톨릭) 『사람의 분노마저 당신을 찬송하고 그 분노의 나머지로 당신께서는 띠 두르십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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