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법칙 ; 광야 속에서의 찬양 (시편 77)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1:5, 개역)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6, 개역)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7: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77:2, 개역)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3, 개역)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77:4, 개역)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77:5, 개역)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77:6, 개역)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77:7, 개역)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77:8, 개역)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77:9, 개역)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77:10, 개역)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77:11, 개역)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77:12, 개역)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77:13,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77:14, 개역)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으시고

(77:15, 개역)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77:16, 개역)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77:17, 개역)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77:18, 개역)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77:19, 개역)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77:20, 개역)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여두둔의 법칙은 곧 십자가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62)

곧 심판 속에서의 구원, 환난 속에서의 찬양이다는 겁니다.

 

1절부터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곧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했다는 겁니다.

 

무엇이 생각납니까? 맞습니다. 출애굽 사건입니다.

애굽왕 바로(파라오) 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난데 없이 이스라엘은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하신 겁니다.

즉 기도가 덮쳤습니다. 부르짖음이 덮쳤습니다.

내가 부르짖는게 아니라 부르짖음이 나를 다루는 겁니다.
내가 찬양하는게 아니라 찬양이 나를 노래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더 나은 찬양입니다.

 

결국 기도는 주님의 아이디어 이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다는 겁니다.

 

기도하라 라는 말은 말이 안되지요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겁니다.

맨날 부르짖어요

즉 이 말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주변의 상황이 마귀의 세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을 요청하는 부르짖음 곧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했다는

주님의 아이디어 이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을 죽인 세상입니다.

우리도 거기에 가담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했습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부르짖음이 덮쳐지지 않는 이상

모조리 중언부언이 되는 겁니다.

곧 주님의 구원의 전쟁

출애굽전쟁

십자가의 전쟁을 보라 라는 취지인 겁니다.

 

누가 광야에서 장대 높이 달렸는지에 대한 싸움 말입니다.

힘의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올리면 이기고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면 지는

이상한 전쟁입니다.

전쟁을 거부하는 전쟁입니다.

 

모세가 아닌 지팡이가 주인공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가 주인공이다는 겁니다.

모세는 인간의 믿음이 가미가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는 인간의 믿음이 가미 될 수가 없습니다.

기여이 인간들이 믿음을 가미 시키기 위해서 지팡이를 구별하는 짓을 합니다.

금으로 도금하든지!(마치 성전을 황금으로 도배하듯이)

아니면 다른 지팡이와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노리고 지팡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 합니다만

아무리 십자가를 붙잡아 보세요

그 어떤 의미가 되돌아 오는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곧 예수님이 그런 의미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아무런 의미가 없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구원전쟁이냐?

 

출애굽의 효과를 본 자들은 구원 받았잖아

그것이 이스라엘이고 유대인들은 그 출애굽사건의 모세를 의미 두잖아?

유대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모세교가 아닌가? 라는 거죠.

 

그런데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에서 제가 강조했습니다.

용서 받은 자는 없다고

구원 받은 자는 없다고

 

현대교회의 설교나 모든 목사들은 사기꾼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의 반만 증거했지

뒤의 부정적인 의미는 싹 빼버립니다.

곧 광야에서 벌어진 사건도 포함해서 출애굽입니다.

장소 이동만 했지 단한번도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의 거짓선지자의 출현이
바로 애굽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증거로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날도 역시나 마찬가지 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받아 놓고도 긍휼의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따지죠

그게 무슨 용서냐? 그게 무슨 용서의 비유냐?

 

용서 받은 자가 없는데

 

이게 오늘날 교회의 주장입니다.

아니 그런 주장을 하는 교회가 없는데?

네 맞습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죠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감추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으로써

구원 받았다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구원 받으세요 라는 식입니다.


아닙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구원받은자는 없어요

요단강에서 다 탈락 당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자가 없다는 거죠.


얼마나 용서 받은 자가 없으면 구원에 대한 기술만,
지식만 습득한 기술자만 오늘날 가득합니다.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여(시편 76)에서

야곱은 구원 못 받아요

이스라엘만 구원 받아요

그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껍데기는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의미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구원받아요

그것이 바로 유대인도 야곱도 무시했던 바로 이스라엘만 구원 받는 겁니다.

 

그것이 용서의 비유인 일만 달란트 탕감 비유에서

용서 받은 자는 없이

 

용서의 의미는 더욱더 극대화 됩니다.

용서의 대왕, 용서의 왕 중 왕 비유이다는 겁니다.

 

결국은 야곱은 빠져 줘야 합니다. 이스라엘만 의미 남도록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빠져 줘야 합니다. 예수님만 의미 남도록 말입니다.

나는 망하고 그는 흥해야 한다는 겁니다.

겉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다는 겁니다.

겉사람이 후패하는데 어떻게 속사람이 새롭게 됩니까? 말이 되나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교회는 누락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 되신 예수님만 남도록 말입니다.

 

용서 받은 자는 빠져 줘야 합니다. 용서 자체가 되신 분만 의미 남도록 말입니다.

 

이것을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 이다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책을 보는 와중에 갑자기 재미있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떠올라서 그렇게 표현해 봤습니다.

머리 무지 아픈 내용들 뿐입니다.

 

전쟁은 없다 라는 책인데

 

더 나은 제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의미가 책을 보다가 확 떠오더라 말이죠.

 

애굽과 이스라엘이 어찌되었던 한국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한 쪽이 기존의 제사에서 더 나은 제사를 드리겠다고 나오겠다고 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그 남자의 전쟁

한 남자의 전쟁 말입니다.

 

 

마치 내 믿음은 의미 없도록 하는 더 나은 믿음이 의미 남도록 하는 사건이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십자가가 의미 없도록 하는 더 나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의미 남도록 하는 사건이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스스로가 십자가를 부정하면서(자기부인) 날로 날로 새로운 의미를 터트리는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십자가를 믿어도 고정되어 버리는 고착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믿음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은

마치 어제 믿은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듯이 

오늘 새롭게 사랑이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의 사랑은 나의 지식과 믿음과 기억 속에 고착이 되어버렸기에

그것을 정당화 하는 짖만 우리는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랑입니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것이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의 믿음을 대표성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는 마치 그런 인간의 믿음을 기다렸다는냥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고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도가 말입니다.
 

인간의 믿음에 더 나은 예수님의 믿음이 대조를 이루게 되니

유대인은 예수님을 안 죽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한 발치도 벗어난 인간이 없지요?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의 사건에서 벗어나는 인간은 없습니다.
 

유대인의 믿음에 반대되는 행동만, 믿음만, 골라 골라 하시니까 말이죠.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목사의 설교에

반대되는 복음을 증거해 보세요

열받나 안받나?


오늘날 목사들이 인간들에게 대접받는 이유는
인간들의 믿음에 반대를 위한 반대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인겁니다.
그럼 목사는? 결국 돈 때문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는 방식, 법칙이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법칙인 바로 더 나은 잉여적인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날로 날로 새롭다는 겁니다

얼마나 새롭기 짝이 없으면 낯설겠냐 말이죠!!!

 

이번 주간 동안 계속해서 더 나은 제사 가 뭔가가 갑자기 그 철학책 땜에 떠올라서 계속해서 생각해 봤는데

 

제사와 더 나은 제사의 대조이다는 겁니다.

 

앞의 제사는 위에서도 조금 언급했듯이

인간의 믿음으로써

인간의 믿음은 종교적인데 바로 자기가 믿음을 가미시킨 일종의 자기믿음 투사 투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믿어서 자기 믿음을 연금, 보험금 타듯이 받아먹는 겁니다.
예수도 하나님도 성령도 모조리 자기투사입니다. 가인의 제사입니다.

 

즉 원인 있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 곧 모든 인간의 제사는 원인 있는 결과입니다.

적금 부은 만큼 타 먹는 겁니다. 사기 안 당하도록 조심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더 나은 제사는

 

바로 그런 제사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자기부인의 성향을 띤 제사입니다.

오히려 자기부인의 달인들인 불교인 또는 바리새인, 성화론자들 앞에서는

오히려 자기 과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거든요.

오히려 십자가를 우상화 하는 듯이 보인다는 겁니다.

 

실지로 광야에서 뱀을 단 것 같이 구리놋뱀을 우상화 한 사건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이상 인간들은 그것을 우상믿음이라고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 말은

무조건적인 너의 믿음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겠다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더 나은 제사로써 원인이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원인도 다 없애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를 원인으로 하는 믿음인데

그 나를 없애버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가인 본인이 드리는 제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졸지에 더 나은 제사 땜에

아벨 본인이 삭제 당하는 죽음의 제사가 되어 버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죽음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삭제 당해 버리는 겁니다.
죽었더라 ~~~ 족보 입니다. 단절의 족보 입니다.

 

제사 한 번 드려서 삭제 될 것 같으면 말라꼬 제사 드리냐 말이죠.

제사가 의미 없어져 버리잖아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리잖아요

 

제사드린 내가 남아 있어야

제사도 의미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제사가 될 것 같으면 말라꼬 제사, 예배, 기도, 찬양 드리냐 말이죠.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에만 의미를 두고
원인 있는 결과인 가인의 제사를 공격하는, 전쟁하는 더 나은 제사이다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바로 이것이 더 나은 제사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용서가 될 것 같으면 말라꼬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냐 말이죠.

괜히 구원하냐 말이죠. 괜히 출애굽 하냐 말이죠? 괜히 구원전쟁을 하냐 말이죠.


요단강 앞에서 모조리 다 탈락 할것 같으면 왜 출애굽하냐 말이죠?

그게 무슨 구원전쟁입니까?
 

그래서 구원은 없다.

전쟁은 없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더 나은 구원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더 나은 용서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더 나은 전쟁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더 나은 제사이다는 겁니다.

 

 

제사라는 원인을 없애버리는 제사

전쟁이라는 원인을 없애버리는 전쟁

구원이라는 원인을 없애버리는 구원

용서라는 용서받은자를 없애버리는 용서

 

이것이 더 낫다 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이 결과만 있는 겁니다.

 

너 왜 예수님 믿게 되었니?

몰라 나도 왜 예수님을 믿는지?

나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는데

저절로 믿겨 지데?

 

원인을 아무리 찾을려고 해도 찾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너는 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니? 용서 받니?

몰라! 이유 없이 사랑하는데 말릴수가 없네~~

 

그런데 교회를 다니든 어떤 종교 단체에 있든

인간들이 주로 하는 말은

자기가 부은 적금 타는 겁니다.

모조리 자기 숙제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성화해야 하고

자기가 말씀지켜야 하고

자기가 기도해야 하고

자기가 교회 다녀야 하고

자기가 믿어야 하고

 

골치 아파요 골치

 

그 원인을 제거 할 수가 없어요

 

누가 이 원인을 제거 해 줄수가 없을까요?

 

이것이 출애굽 전쟁이다는 겁니다.

 

전쟁 자체를 없애버리는 전쟁

구원 자체를 없애 버리는 구원 (피라미드가 뭡니까? 구원의 문 아닙니까?)

제사 자체를 없애 버리는 제사

찬양 자체를 없애 버리는 찬양

신을 없애 버리는 신

 

인간이 저 마다 손에 쥐게 되었다고 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인간을 없애 버리는 인간이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모든 인간이 달려들어서 죽여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본인을 없애 버리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법칙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가 임금 삼을려고 하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고 싶어도

손에 잡히는 예수님이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데

그런 기적에 반대를 위한 반대가 바로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표적 자체가 표적을 제거하는 표적이거든요.

 

유대인이 바로 이 출애굽의 사건을 기적으로 믿고 계속해서 전승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믿은 것이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인간의 믿음은 모조리 가짜이다는 말이네?

네 바로 그겁니다.

 

가짜 아닌 믿음이 없어요

뭘해도 가짜입니다.

 

이것이 기쁘지 짝이 없어요

 

그게 진짜가 되어버리면

그거 지킬려고 사수할려고 얼마나 애지중지 소중히 여길려고 하겠습니까?

그게 예수님 당시에 바로 성전에 투영이 되어서 성전에 모든 것을 가득 담았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헐라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니

3일만에 일으키는 것에는 관심 없고

더 나은 제사는 관심 없고

자기 제사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자기 성전을 시비 걸었다는 이유로

자기 하나님이 투사가 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이런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복음은 가짜복음인 거죠.

 

성전을 없애는 성전

더 나은 성전에는 도무지 시선이 갈 수가 없습니다.

앞의 성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이미 열받아 버렸으니 말입니다.

 

내 뒤에 오실 분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내 제사 뒤에 오실 제사

내 성전 뒤에 오실 성전 말입니다.

 

그래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관심 없게 되거든요.

 

즉 이 말은 미래에서 온 결과가 덮쳐진 것이 믿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토대로 합니다.

곧 역사죠.

그래서 역사 쌓기를 하는 겁니다.

경건의 시간을 쌓기 하면 된다는 거죠.

 

그런데 미래에서 온 경건은 과거의 역사의 경건 탑을 허물어 뜨리면서 오거든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결과는 원인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원인 없는 결과

더 나은 제사는

 

마치 실재계처럼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거든요.

 

의미가 있어야 상징계로 자리를 잡을 것인데

실재계는 이 땅 어디에서도 자기 자리가 없는 오드라덱 곧 죽은자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 괴물이 그 유령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원인 없는 결과인

더 나은 제사이다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내용을 서두로 깔고 있는고 하니

 

지금 시편 77편의 기자는 마치 미리 이사야 선지자처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스라엘은 이제 없다 라는 겁니다.

완료된 이스라엘을 외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없애는 출이스라엘 전쟁을

출애굽전쟁과 연관 시켜서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을 없애는 이스라엘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선지자들의 외침 아닙니까?

그것도 거짓선지자의 외침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반드시 대조를 이루면서 말이죠.

 

이스라엘을 없애는 이스라엘 즉 더 나은 이스라엘

원인 없는 이스라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가인에 속하는 거짓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없애버리겠다는데

화를 내겠습니까? 안내겠습니까?

참선지자들을 다 죽일 수밖에 없이죠.

 

지금 시편 77편 찬양자는

출이스라엘 전쟁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구원을 없애는 구원

이스라엘을 없애는 이스라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야 이거 무서운 구원전쟁을 선포하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애굽왕 바로왕에게 대하듯이

 

내 이스라엘을 내 놔라 더 나은 제사를 드릴려고 한다.

 

내가 이스라엘인데 내가 미쳤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겠는가?

너 같으면 나의 노예를 내어주겠니?

 

이런 식으로 지금 찬양자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을 내 놔라 라고 전쟁선포하는 겁니다.

 

눈으로 아래 위를 쳐다보면서

몰골은 어떤 무기도 어떤 능력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이스라엘을 내놔라 하니

기가 막히죠.

 

여러분 지금 누가 생각 납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사들 앞에서

마치 내 하나님 내놔라 라는 식과 같습니다.

 

12 이스라엘을 내 놔라

 

그러니 대제사장이 옷을 찢고 회개를 하는 겁니다.

부정한 말을 들었다고 귀를 씻는 영조처럼

손을 씻는 빌라도처럼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죽이겠다는 유대인들처럼 말이죠.

부정탈까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 심하게 부정의 부정으로 계속 가십니다.

 

십자가를 계속 밀어붙입니다.

어리석은 지혜를 계속 밀어 붙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담아야 하거든요.

부지런히 담습니다.

마치 다윗이 자신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악을 담습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이 십자가의 지혜를 거리끼는 걸림돌로

쓸모 없다고

관심 없다고 버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과거를 재료로 원인으로 삼아서 건축물을 짖는데서는

미래의 결과는 붕뜨는 이야기 일 뿐입니다.

 

이미 건축물이 다 완성이 되었다면

말라꼬 건축을 합니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건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것은 쓸모 없는 재료일 뿐입니다.

과거의 것이 차곡 차곡 쌓여야 건축이 되기에 과거와 현재가 건축재료가 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그렇게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건축하는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미래의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 제사입니다.

 

하나는 미완료인데 완료를 향하여 계속해서 노력과 땀을 흘려야 결실을 성취하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완료인데 노력과 땀이 아닌 피흘림이라는 희생의 죽음이 미래에서 덮쳐지는 결과 곧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결과입니다.

 

가인은 관심도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제사에 빠져,

자신이 흘리는 땀과 노력으로 쳐다볼 수도 없지만

아벨은 그런 모호한 제사 보다 또렷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만 쳐다보다가

예수님의 죽음과 똑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이 또렷합니까? 아벨의 제사가 또렷합니까?

과거로부터 현재의 차곡 차곡 쌓는 제사가 또렷합니까?

아벨의 허무하게 죽는 그 죽음의 제사, 죽었더라가 또렷합니까?

 

인간은 누구나다 자신의 손으로 지은 제사가 또렷합니다.

그런데 그 제사를 없애는 더 또렷한 제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만 하는 제사입니다.

그것이 더 나은 제사인데

왜 더 나은고 하니

 

너는 나 보다 더 낫다 라고 했을때에

자신이 옳았음이 분명했는데 그 분명한 것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고

도저히 눈길이 갈수 없었던 것이 나의 옮았음이 무너졌을 때

누가 무너뜨렸는가에서 그것이 나 보다 더 또렷했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표적은 그래서 기적을 없애 버리면서 다가 오는 더 나은 표적인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약속의 가문이라는 기적을

그 고정화 되고 고착화 된 딱딱한 회칠한 무덤을

 

이방여자 며느리 다말이 표적으로써

말랑 말랑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오빠생각이라는 영화에서

고아원 여선생님이 주인공 장교 소위에게 묻습니다.

 

왜 전쟁을 하는 거죠?

사람을 구하기 위한 명분으로 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냐 라고 묻는 겁니다.

 

소위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본능이라고

내가 살려고 죽이는 것이라고

 

네 이것이 보편적인 답변 맞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그랬습니다.

자신이 구원 받기 위해

가인의 제사가 선택받기 위해 살인을 했듯이 말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살인하는
천국 가기 위해 살인하는
인간은 이런 모순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런 사망의 몸에서 누가 구원하랴?
이 신체의 속성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자신만의 국가

자신만의 제사를 원했던 겁니다.

자신을 위한 전쟁 말입니다.

 

이미 완성된 예수님 나라를 원치 않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손으로 지은 제사로 이루고자 하는 국가를 원했던 겁니다.
자기 믿음으로 상상하는 천국이지
예수님의 천국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천국을 알아도 들어가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자기 천국과 너무 너무 안 맞거든요.

 

성경의 답변은

바로 그런 가인의 제사를 없애고자 하는

제사를 없애고자 하는 제사인 더 나은 제사

곧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 더 나은 전쟁하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진짜배기 전쟁

영적 전쟁 말입니다.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야곱의 우물도 아닌 예루살렘도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말입니다.

더 나은 예배 말입니다.

 

주님 쪽에서 찾은

십자가의 완료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배드리는

더 나은 예배 말입니다.

 

살인을 없애기 위해서 죽는 곧 십자가의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살인을 없애기 위해서 살인하는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는 전쟁을 펼치는 겁니다.

살인을 곧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천국을 완성하십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말입니다.


신약은 누가 누가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전쟁, 경쟁을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자들, 목 베인 영혼들입니다.

인간의 전쟁은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여야 하는 원인 있는 결과이고
(아무도 이런 육체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괜히 난 그렇게 안 살아야지 하지 마세요, 오히려 더 시험듭니다. 그냥 그런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수 없는 자임을 인정, 고백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더 나은 전쟁은 누가 누가 저 장대 위에 달리느냐 라는
남을 위해 죽는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면 전쟁을 이기고

팔이 아파 지팡이를 내리면 지는 전쟁인 이상한 전쟁처럼 말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말이죠.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내가 살고자 하면 남을 죽여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이 전쟁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끝도 없는 전쟁이요 의문의 전쟁입니다. 마침이 없습니다.

모호합니다. 살아 남아도 또 모호합니다. 의문만 맴 돕니다.

과연 살아있는 것 맞는건가?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남을 죽여야 하거든요.

겨우 좀비와 같은 생명 아닌 생명을 유지하겠다고 말이죠. 이미 죽은 시체일 뿐인데!
사는게 사는 게 아닌 셈입니다.

오빠 생각 이라는 영화는 오빠만 있고 생각은 없다 라고 누가 비평했던데

모호하기 때문이다는 증거죠.

 

우리 오빠 예수님이 중간에 낑겨서 죽어야만 마침이 됩니다.

모호한 전쟁이 비로소 끝납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더 나은 전쟁을 하시는 겁니다.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전쟁을 종지부 찍는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십자가 전쟁

더 나은 전쟁

전쟁을 없애는 전쟁

 

그것이 바로

남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는 전쟁입니다.


여동생을 살리고자 오빠가 죽어야만 하는 전쟁
그것도 의문의 전쟁을 하는 두 패거리들의 전쟁 싸움에 중간에 낑겨서 
죽는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우리를 살리고자 자기가 죽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고자 남을 죽여야 하지만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신 예수님은 남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는 전쟁을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또렷하고 명료한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바로 남을 7번 용서하는 모호한 용서가 아닌

내가 예수님을부터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또렷한 십자가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저 모호한 용서와 전쟁을 벌리시는 더 나은 용서이다는 겁니다.

 

? 십자가만이 밝히 보이는 또렷한 완료이거든요.

 

남을 살리고자 자기가 죽는 것 보다 더 또렷한게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가도, 절간에 가도, 성당에 가도, 사원에 가도 역시나 감사하게도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입니다.

목사들끼리 싸우는 이유는 복음 때문에 안 싸웁니다.

돈 때문에 싸웁니다.

진리 때문에 싸운 적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만약 복음을 위해 싸워버리면

그 사람을 예수님 대하듯이 대해야 하거든요.

다행히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섬기시면 됩니다.
아무도 그런 목사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말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말만 들으시면 됩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나를 죽음에서 꺼낸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2천년 전의 과거 사람인데

너는 그런 말을 하느냐?


맞습니다. 저도 예수님 믿기 전에는 제가 오히려 남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절로 믿겨졌습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교회 다니면서 그 어디에도 원인 없는 결과를 말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즉 십자가를 증거하는 곳이 없어요
십자가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고 외칩니다.
알고보니 모조리 다 원인 있는 결과만을 외치는 곳 밖에 없었습니다.

성경과 달라도 너무 너무 달라요.

원인 없이 결과가 덮쳐졌으니

나도 예수님을 무지 반대했던 안티였는데

그랬던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되니 원

믿음이란 결국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음이다는 겁니다.

합리적이면 말라꼬 믿겠습니까?


그런데 안티들이 교회를 세우니까
참 신기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니
아 맞네 안티들이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도 믿음도 다 말 되게 말합니다.
말이 안되면 못믿겠다 라는 식입니다.
 

아무튼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저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만이

가슴팍에 박혀 버렸습니다.
내가 박은게 아니라 예수님이 말입니다.
그것도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예수님인데~~~

그래서 십자가만 알기로 했다고

십자가 외에는 밝히 보이는게 없게 되어버림을 당한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목숨을 남을 살리고자 버리시는 전쟁을 에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전쟁 같은 사랑 ~~~~~~~~~ 난 위험하니까 ~~~~

얼마나 위험한 사랑입니까? 전쟁 보다 더 나은 전쟁이니 ~~~

 

그런데 인간이 교활합니다. 인간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것을 성화론자들은 또 따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숙제 인데

인간이 이 숙제를 해요

(그러니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는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 인간의 본능이니 어쩔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야곱의 하나님에게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없애지 않고

사망의 권세 깨뜨리지 않고

그저 구원만 딸랑 챙기는

천국만 갈려고 하는

전쟁을 없애지 않고 말이죠.

제사를 없애지 않고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의 구원관 약속관 언약관처럼 말입니다.

나오미가 그런 남정네들 따랐다가 드디어 전능자를 만난 것 아니겠습니까?

이새의 뿌리 말입니다.

 

다른 신들을 없애지 않고 신국, 신의 나라에 가겠다는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게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모호한 전쟁을 없애버려야 또렷한 전쟁만이 평화를 안겨 줍니다.

화평을 줍니다.

전쟁은 종식을 목적으로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의 마침이 목적입니다. 평화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 하든 말든 저거들끼리 내버려 두고

자기만 딸랑 평화를 누리겠다?

무슨 자격으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없앨수 있냐 말이죠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전쟁의 목격자로써 동원이 됩니다.

이렇게 구원 되었다고!!

이스라엘은 이것을 찬양하는 겁니다.

찬양이 그렇게 덮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착각하지 말아라 검을 주러 왔다 라고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을 싸움 붙이는 겁니다.

 

이 경과를 거치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이기게 되면 영원히 모호한 전쟁만 계속 됩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이 그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드디어 화평이 옵니다.

 

예수님은 곧 여자의 후손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을 하러 왔다는 겁니다.

이 원인을 없애는 결과가 아니면

인간은 모호하고 의문의 증서를 계속해서 챗바퀴 돌 듯이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이 바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겁니다.

 

약속을 하신 그 분이

약속을 없애는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율법을 주신 그 분이

율법을 없애는 율법의 완성을 이루십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는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없애는 이스라엘을 완성하시고자

출이스라엘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애굽이 지금 눈에 없는데

애굽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출애굽을 선포하고 노래합니다.

 

아니 누가 지금 이스라엘을 괴롭혀서

저렇게 1절부터 부르짖고 있나요?

 

이스라엘을 부르짖도록 만드는 그 괴롭힘은

바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속에서의 교회이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 이스라엘을 선언하시고

그때의 출애굽 사건이 지금 현재이다는 겁니다.

과거의 그때로 옛날 이야기가 되는게 아니라

미래의 완성으로써 벌어지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구원 사건은 그야말로 신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렇게 벌어지는 겁니다.

과거로 인한 원인을 추론하는 계산법이 하나도 안먹혀드는 이유입니다.

오로지 미래에서 결과적으로 덮쳐지는 사건이기에

오히려 기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 기쁨의 찬가는 승리의 찬가요

주의 책에 기록이 된 미래완료의 또렷한 더 나은 찬양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백날 한 때, 반 때, 백날 계산해 봐요 되나!!!

 

오늘 시편 77편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반으로 짤라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그 어떤 연결이 없이 단절이 되어 있습니다.

 

분명 앞 부분에는 부르짖음의 의미처럼

버림 받았나?

왜 심판받지?

왜 고난에 처하지?
왜 이스라엘로 부터 핍박받지?

분명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구원하랴? 라고

 

분명히 구원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없애는

구원이 단절 된

 

절망

진노

심판

핍박

 

이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뒷 부분은 아무런 연결점이 없이

갑자기 구원 되어버렸다는 결과가 덮쳐져 버립니다.

그래서 찬양 아니하고는 못 배기고

기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구원이 덮쳐져버렸다는 겁니다.


신구약으로 나누어지는 의미도 그러합니다.

왜 같은 약속인데 신약 구약으로 나누어지냐 말이죠?
이거 설명할 줄 아는 놈들이 없어요.
구약과 신약은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단절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완고함이 이해가 되지 않나요? 이해해 주자 말이죠.

구약의 이스라엘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느냐 말이죠!
그것은 이유 없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선포인 결과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스라엘은 실패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과 신약의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점도 없습니다. 단절입니다.

만약 연결점이 있게 되면
유대인은 예수님을 거부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원인 없는 결과인 십자가로 다시 역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겁니다.
연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더욱 더 나은 단절을 위해서 말입니다.
즉 구약 어디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예수님이
구약 전체에 (원인 없는 결과) 이유 없이 예수님만 기록되어 있다는 결과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무리 봐도 없으니까 말이죠.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것도 그냥 구원이 아니라 더 나은 구원

왜 더 나은 구원이라는 표현을 제가 쓰냐하면

인간들이 말하는 구원

특히 현대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사루비아 같은 달콤한 말로 속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는 놈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루비아 같은 달콤한 구원을 깨는 더 나은 구원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심판 속에서의 구원

진노 속에서의 기쁨

광야 속에서의 찬송

죽음 속에서의 화관(결혼, 한 몸)이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그 어떤 원인도 없는 사랑이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조건 제대로 따지면 유대인 중에 한 사람도 구원받을자 없습니다.
다윗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세도 모조리 다 편법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 편법 곧 불법이
법 보다 더 나은 법으로써의 불법인 곧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스캔들, 불륜의 사랑입니다.
 

시편의 구조가 모조리 다 이런 식입니다.

한편 한편 다 이렇고

전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시편 후반부에서는 오직 기쁨의 찬양 뿐입니다.

앞 부분에서는 살려달라고

마치 누가 죽는것처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다가

갑자기 원인도 없이 구원받아 기쁘다고 막 춤을 춥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히스테리처럼

이 두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겁니다.

 

원인이 있는 사랑이면

조건적인 사랑인 거죠.

 

그것은 오히려 모호하며 의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기에 의문 뿐입니다. 흐릿합니다. 언제 변할수 모릅니다.

요나의 표적이 아니라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은

종교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거짓사랑인 거죠. 거짓선지자가 절대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는 ~ 평강이다 평강이다.

 

그러나 복음은 전쟁을 없애고자 벌이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되도 않는 전쟁 때려치우라 라는 거죠.

남도 구원도 못하는 전쟁이 무슨 전쟁입니까?

 

남은 구원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데

 

인간들은 사랑은 관심없고 율법 지킨 나는 옳잖아 라는 그 전쟁에

그 경쟁에 빠져 살고 더욱더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게 성화론 아닙니까?

성화론은 딴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한마디로 말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겁니다.

이게 성화론 아닙니까?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그런데 현대교회는 이것이 복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모호한 것만이 챗바퀴 돌 듯이 도는 겁니다.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불교의 절간

천주교의 성당

기독교의 교회

다들 동일한 사상입니다.

성화론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말입니다.

애굽사상입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이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이스라엘을 깨는 이스라엘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의 임마누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법칙입니다.

 

다시 광야로 가자입니다.

 

그 광야에 뭐가 있는데?

찬송이 있다는 겁니다.

 

에이! 광야 안가도 우리는 찬송 할 줄 안다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그렇게 주장합니다.

없습니다. 모호한 것 붙잡고 백날 노래 불러도

그거 찬양 아닙니다.

 

그럼 광야에 가면 뭐가 있는데?

광야에 가면 찬양을 없애는 찬양 곧 더 나은 찬양이 있다는 겁니다.

 

더 나은 찬양?

 

그게 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어린양의 찬양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고! 너무 추상적이다! 자세히 좀 말해 봐라!

 

지금 현재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이방여자 며느리 다말이 되어서

우리의 죄악의 물증 세 가지를 예수님 신체박스에 담습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다말이 왜 시아버지 유다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는고 하니

바로 더 나은 이라는 의미는

앞의 것은 더 나은 것이 아니다 라는 비교로 차이 나는 구별성이다는 겁니다.

 

즉 시아버지 유다의 제사는

원망하지 않는 신앙

율법 잘 지키는 신앙

말씀 잘 지키는 신앙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신앙(탕자의 형) 이다는 겁니다.

7번 남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 라는 식이다는 겁니다. 성화론

 

그런데 다말의 제사는

그렇게 잘난 시아버지 유다의 허점을 노려서 부정한 물건 세가지를 잡아내어서

시아버지 유다를 심판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심판 당하는

그 죽음 속에서도 약속은 니가 생각하는 약속이 아니라

이것이 진짜 약속의 정신이다 라고

 

약속을 깨는 약속이다는 겁니다.

 

불의한 십자가가 너의(시아버지 유다) 믿음보다 백배나 더 낫다 라는 겁니다.

 

비언약을 깨는 언약이다는 겁니다.

야곱이라는 땅콩껍질을 깨는 껍질속의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즉 인간에게 포착당한 약속은 가짜 약속이다는 거죠.

시아버지 유다가 신앙하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시아버지 유다가 주체이고 그 주체의 대상물이 약속이 되니

대상물이 되는 약속이 무슨놈의 약속이냐 무슨 놈의 언약이냐 말이죠.

 

언약이란 자고로 대지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합쳐지는 시아버지의 유다의 언약관이 아니라

바로 그 언약관을 깨뜨리는 언약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고 글을 적었는데

왜 하필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냐 말이죠?

 

즉 비언약의 야곱의 / 언약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고로 야곱은 거짓말쟁이 사기꾼 비언약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놈을

그런 비언약을 언약으로 다루시는 분이 언약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마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가

자신의 의사기능 구원자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라고 했지요.

 

그럼 비언약존재는 비언약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 언약적 존재라고 우기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그 비언약을 깨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방여자 곧 비언약민족으로 오셔야 하는 겁니다.

부정을 깨기 위해서 부정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 본인이 죄인인줄 모르고 약속의 자손이다고 우기고 있으니까

즉 원인 있는 결과로 과거의 조상 개념을 그렇게 우려 먹는 겁니다.

마치 모태신앙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 없습니다.

믿음은 미래에서 덮쳐집니다. 그것도 완료로써 미흡함이 없이 말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라는 표현이 통하지 않는 미래완료의 또렷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깨는 믿음이 더 나은 믿음으로써 다말에게로 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벌어진 사건이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건이

이제는 국가 민족 전체에서 두 패로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깨는 이스라엘로써 말입니다.

찬양을 깨는 찬양

성전 중앙의 찬양을 깨는 광야에서 부르는 찬양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 사건이다는 겁니다.

물론 구원을 깨는 구원 곧 더 나은 구원으로써 말입니다.

 

더 낫다 라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데 더 낫다 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오는 것은

기존의 것이 옳다 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깨뜨리기 위해서 온다는 겁니다.

 

누가 깨뜨림 받고자 하겠습니까?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길 수 밖에 없이죠.

 

그런 찬양이

그런 십자가의 찬양이

광야에서 부르짖는 겁니다.

 

광야로 가게 되니 부르짖게 되는 찬양

이것이 명료한 구원이다는 겁니다.

 

곧 내 구원이 아닌

약속을 구원하는 약속이다는 겁니다.

 

구원을 구원하는 구원

 

바로 예수님을 구원하는 구원인

더 나은 구원을 보게 광야에서 부르짖는 겁니다.

 

십자가를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도 구원의 선택민족인 유대인 속에서 말입니다.

 

?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시아버지 유다처럼 약속을 엉터리로 신앙하고 있는 그 약속을 구출시키는 출애굽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약속을 엉터리로 생각하고 있는 그 약속을 구출하는 겁니다.

찬양을 구출하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구출하는 겁니다.

 

이 출애굽사건이 지금 현재에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무한반복으로써 말입니다.

십자가를 구출하기 위한 십자가 구원사건을 매일 매일 개시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찬양

더 나은 전쟁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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