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싫은 십자가와 자랑스러운 십자가 (시편 64)

 

오늘 시편 64편에서는 자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과연 무엇을 자랑하느냐?

 

적어도 자랑한다는 말은 무엇은 싫어한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말입니다.

심지어 믿는다고 했던 2천년 더 나아가 수십천년 몇만년 동안 믿어왔던

그 전통, 정통, 이라는 자들 조차에게서 마저도 싫어버린바 되어야 하는 것이

그 싫은 것이 자랑이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싫었던 것이 자랑으로 바뀌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시편 64편은 바로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너무 너무 심하게 불이 활활 타오르다 보니

소방관 마저도 고무장갑 끼고서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불 속에서 들려 옵니다.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아무도 못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를 듣고 들어가는자 유일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의 엄마는 평상시에는 그렇게도 겁이 많아 겁순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아랑곳 없이

한치도 망설임이 없이 불 길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리고서는 극적으로 아이를 화마 속에서 건져냅니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은 그야말로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입니다.

풍채도 다 사라져서 불로 인해 쪼그라져버렸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모양하나 없이 진물로만 가득해져버린

질병이 되고 만 얼굴이 된 겁니다.

 

남들은 다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해 가면서 우리 엄마 보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외칩니다.

 

그 어떤 자랑 보다 이 저주의 십자가가 자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내 대신 죄수복을 입으 셨듯이
모든 시선으로부터 거부당한 거리끼는 그 얼굴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얼굴이 된 겁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이것이 며칠전의 글에서 더 나은 십자가 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주님 참 심술굿다 라고 하십니다.


참 희한하게 싸움 붙인다는 겁니다.

 

아무도 이길수 없는 불속의 화마랑

아무능력도 없는 가장 연약한 아기랑 싸움을 붙이는 겁니다.

 

누구에게서 울부짖음이 나오겠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그 십자가의 지혜가

사람의 지혜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더 나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싸움 붙이는 겁니다.

전쟁 속의 전쟁이라고 했죠!!

 

방금 전 아기의 울음소리를 언급했듯이

 

부르짖음을 유발케 하기 위해서

바로왕을 강퍅케 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찬양자가 웁니다.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바로왕의 세력과 같은 사울왕과 압샬롬

곧 십자가를 자랑치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고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거리끼는

아무 쓸모 짝도 없다고 버려버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
무가치하게 취급해 버리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랑할 수조차도 없는 그 새까맣게 불에 타 버린 그 얼굴을

싫어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처럼

자랑이 될 수 없는 이유가

강퍅케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울부짖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울음소리를

그 부르짖음을 주님은 빨리 빨리 듣고싶어서

더더욱 강퍅케 만드시고서는

시계를 보시는 겁니다.

어 이상하다 울때가 되었는데
울어라 울어라 울어라

옳치 드디어 우는 구나

내가 지금 간다 라고 불 속으로 뛰어드시는 겁니다.

 

방금 불렀던 찬양

411장 예수 사랑 하심은 에서

3절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가장 높으시기 때문에

가장 낮은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신다고

 

어머니!! 방금 읽었던 고전 1장의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법칙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가장 약한 가장 낮은 자와 인간 속에서의 가장 높은자를 싸움 붙여야

주님이 가장 높다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시 64:10, 개역)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가장 강력한 그 당시의 초강국 애굽과

가장 미약한 민족 이스라엘을 싸움 붙이는 겁니다.

 

싸움 붙이나 마나 뻔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부르짖음이라는 주님의 아이디어로

누가 내 새끼 건드렸어 라고

 

그 부르짖음이 일종의 고자질

주의 병에 담고자 하는 주에 책에 기록이 됨과 같다는 겁니다.

(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오늘 시편 64편에서는 찬양자의 울음의 부르짖음과

높다고 하는 권력자와의 충돌

 

누가 생각 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당하는 사건과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에스더 사건을 보면 그렇잖아요.

권력이 이상하게 하만에게 집중이 될 때에

에스더는 오히려 미움만 가득 받게 됩니다.

 

권력을 추구하게 되면 약한 자를 싫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랑은 이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십자가의 법칙 십자가의 도를 펼치시는 겁니다.

 

광야에서 더 나은 찬양이 나온다고 하는 이유는

그 정도로 미움 받아서 쫏겨나고 쫏겨나고 쫏겨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이새의 뿌리에 왕이 오시는 겁니다.

 

웃끼죠

이스라엘의 왕이 타국에서

타국으로 쫏겨나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과연 본국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정할까요?

안 합니다.

 

오늘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인 이스라엘 국가에서(현재 현대)

성문 밖에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을 붙임 당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그 예수님을

과연 나의 구 세주로

만왕의 왕으로 모실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거리끼는 거거든요.

 

얼굴이 괴물인데

왕으로 모시게 되면

자기들이 부끄럽고 껄끄롭고

도리어 자신들이 미움당하는데

 

누구 엄마는 괴물이래요~~~~

 

과연 구주로

자랑으로 삼을수 있겠냐 말이죠!!!!

 

오죽하면 사도바울 본인 조차도 자랑으로 못삼았습니다.

본인이 죄인 중의 괴수

괴물이 되니까 비로소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지

그 잘난 구석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똥떵어리가 되기 전까지는

때려죽어도 안된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건져내라

 

그래서 광야에 몰아버리는 겁니다.

불 속에 집어 넣어 버리는 겁니다.

똥물에 7번 담궈 버리는 겁니다.

 

?

 

건질려고

 

?

 

진짜 자랑이 뭔지 보여주마 하고

 

예수님이 아기 엄마처럼 지옥 속으로 뛰어드시는 겁니다.

 

그 지옥속에서 불타고 있는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찬양자는 주의 병에 울부짖음을 담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랑이 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십자가의 용서를 자랑하며 외칩니다.

 

이 보다 더 명료하고 또렷한 밝히 보이는 사랑 있으면 나와 봐!!!

 

라고 자기 스스로가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는

 

똥물 속에서

광야 속에서

죽음 속에서 외치는 겁니다.

 

더 나은 찬양으로써 말입니다.

 

 

부자를 지옥 보내는 복음입니다.

강한 자를 지옥 보내는 복음입니다.

 

마태(19), 마가(10), 누가(18) 복음에서는 모두다 부러워하는 부자청년과

아무도 원치 않는 오히려 빨리 벗어나고파 하는 어린아이와 대조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어린아이가 아니라 꾸지람 듣는 분노를 사는 어린아이 말입니다.

무시받는 것이 아주 당연시 되는 무시꺼리의 어린아이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의 자랑꺼리는 지옥가고

천국은 이 어린아이의 것이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적이였으면

 

그럼 누가 구원 받겠냐 라고

 

수 천년의 구원교리가 다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 무시받는 어린아이의 천국인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가

그 동안의 자랑꺼리가 아닌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이

 

들통난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갈려진다고 했지요 (시편 73편 이였던가?)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와

가장 미움받는 자를 충돌시켜 보세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누가복음 18)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시편 64편의 찬양 곧 자랑은

그 충돌 속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으로써의 자작극인

십자가의 자랑인 겁니다.

 

노래 중의 노래 말입니다.

노래 보다 더 나은 노래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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