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이 나를 이겼으나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편 65)

 


(
65:3, 개역)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어제 시편 65편 말씀을 나누면서

땅과 약속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땅이 아주 아주 희한한 땅입니다.

약속 때문인데

 

기존의 땅과 약속의 땅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기존의 땅은 경작을 해서 시간이 지나고 그래서 열매를 내어

그 소출을 먹어서 생존을 하는 식입니다.

인간이 땅을 벗어날수가 없는 이유인 겁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은 정반대입니다.

시간이 거꾸로입니다. 아니 사실상 시간을 없애버리는, 시간을 치는 방식입니다.

즉 소출이 이미 구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심은 적도 없는데 그 소출을 먹는 겁니다. 원인 없이 결과를 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출이 뭔고 하니 용서입니다.

 

770번의 용서만을 먹고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땅은 희한하게도

용서를 모르면 이 약속의 땅의 소출을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소출이 용서이니까 말입니다. 용서라는 열매
 

이 땅 개념이 구약에서 신약으로는 옮겨와서는 실상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 실상은 인물로 바뀌게 됩니다.

항상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보시면 됩니다.


예를들어 안식일이라는 날짜 요일 시간 개념이

또는 성전이라는 공간 개념 건물 사물 개념이

십일조라는 몇분의 몇이라는 그런 의미들이

모조리 신약에서는 인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거꾸로 미래에서 완료로 덮쳐져서 현재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 완료란 오로지 어린양의 예수님 뿐이거든요.

 

성전 건물 완료해서 뭐하게요?

십일조 십이조 십삼조 십사조 내어서 뭐하게요?
인간들은 이유도 몰라요 그냥 지키는 겁니다. 법이니까 말이죠.

안식일 지켜서 뭐하게?

아무 의미 없습니다.

법이니까 말입니다. 법이라는 말은 신을 끌어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들이 모조리 예수님을 말하기 때문에

졸지에 다른 의미들과 차이성이 나는 겁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간이 끌여들인 신을 모조리 해체하시는 겁니다.
죄요 우상이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이방나라도 민족도 종교도 이방신도 저마다의 규칙이 있거든요.

그러니 그거 지켜서 뭐하게요?

결국 최종적인 종착지는 인간 자기자신에게 귀결된다 말이죠.
신을 운운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곧 법이 인간 자기자신이요
신이 인간 자기자신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법이요 신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것을 단절 할례 시키는 마음판의 할례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할례란 꼬추 끝을 짜르는 것 아닙니까?

구체적인 어떤 행동이고 일종의 법칙 아닙니까?

그런데 마음판의 할례가 되어 버리면

행동도 안되고

법칙도 안됩니다.

행할수 있어야 법이 되지

행할수 없으면 그게 무슨 법 입니까?

그리고 법을 지켜서 뭐하게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것보다 모호한게 없습니다.
구원도 안되고

지옥 가는 짖 밖에 안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모호한 것이 인간들 세계

그것도 유대인 세계에서는 통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안 통한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오늘 제목을 저렇게 하는 이유는
저 의미가 교회에서 가장 안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기하죠. 그야말로 신비 입니다.
절대로 안통해요
단절입니다.
그럼 통하는 것은 뭐냐?
모호한 것들만 통하는 것이 교회세계입니다.
거리끼는 십자가만 빼고는 다 통하는 세계가 교회세계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성전중심과 같은 식입니다.

그럼 복음은 뭔가? 기쁜소식은 뭔가?
십자가만 알기로 했다는 겁니다. 십자가만 통하는 겁니다.
이것을 시편 65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 속에서 안통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서
신나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한테서 마저도 안통하는 것을 다윗은 통하고 있다고 즐겁게 누리고 있는 겁니다.

 

결국 마음판의 할례가 인물인 예수님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면

아픔을 참아가면서 어릴적의 트라우마로 남아서 극복했던 유대인들에게서는

그 예수를 오히려 죽이고 싶어 미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참아가면서 지키고 행한 할례인데~~~~

내가 어떻게 행하고 지킨 안식일인데 ~~~

그러니 인물로 바뀌면 안되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이 나타나면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믿음 조차도 인물이라고 말하면 화를 내는 것이 오늘날 교회 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절대 인물로 바뀌면 안된다는 거죠.
수수께끼가 되니까

비밀이 되면 안되니까 말이죠.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결국 마음판의 할례를 말할려면 처음부터 구약에 마음판의 할례를 이야기 해야지
왜 단 한번도 마음판의 할례를 이야기 한 적도 없다가
왜 갑자기 신약에 와서야 마음판의 할례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모르고 유대인은 이 영원한 언약인 할례를 지키는데 목숨까지 걸 정도였잖아요
실지로 할례를 한 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져서 죽게 되니
어차피 안 하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신약에 와서 마음판의 할례 이야기 하지 말고
구약에서 처음부터 마음판의 할례 이야기를 왜 하지 않냐 말이죠.
바뀔꺼면 처음부터 바뀐것을 왜 말 하지 않냐 말이죠.

결국 마음판의 할례는 손 할례를 거쳐야 그 차이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동일하게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거쳐야 그 차이로써 인간의 손으로 지을수 없는 성전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말하고자 한다면
손 할례를 지키고 행하는 인간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인간이 바로 죄인이다는 겁니다.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명료하지 않다는 겁니다.
밝히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문만 더하게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밝히 보이는데 말입니다.

죄인이 지키는 것은 모조리 죄 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지키니까 의인으로 둔갑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다시 죄인에게 찾아온 예수님 앞에서는 비로소 죄인 그대로 드러나니까
손할례를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 마음판의 할례를 행한적도 없이 저절로 마음판의 할례를 하게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직접 찾아오심이다는 겁니다.

 
인물로 바뀐다는 말은 단순히 인물로 변이, 이동의 의미가 아니라
나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안식일을 지킨 나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물만이 그렇게 합니다.
인물 아니면 그렇게 안해요~~~~~~~
(이것을 쌍둥이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인공지능로봇을 겁내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인간과의 형상과 똑같이 안하면 전혀 겁을 내지 않는데
이상하게 똑같게 인간처럼 로봇을 만들면 겁을 내는 겁니다.
캥기는 것이 있는 거죠.
인간이 피조물로써 창조주를 거부했듯이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로봇에 의해서 정복당할까봐 

모든 인간의 욕망 속의 분모로 자리잡은 겁니다.)

내가 없어져 버리면 안식일이 무슨 소용이며
안식일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로봇인데 

도리어 인공지능로봇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인물은 의미 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버립니다. 


인간은 안식일 지키는데 목숨 걸어 버리고
한 인물은 그 안식일 지킨것을 없애버리는 것에 목숨 거는 십자가를 밝히 보이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인물로 바뀌지 말고 법으로만 남아 주어야

인간들이 그 법칙을 수행해서

천국가고 구원받고 하고

그 법칙을 수행하지 못하면

지옥가고 저주받고

 

그런데 이것이 뭐다? 바로 기존의 땅의 원리입니다.

땀을 흘려야 그 소출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원리입니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손할례이다는 겁니다.
시간의 영원성입니까? 아니면
시간이 무의미한 영원성입니까?
다들 영생불멸로 보는 겁니다.
결국 시공간 조차도 예수 라는 한 인물을 말하기 위함인데
자꾸 소유물로 생각하니까?
소유물로 가졌느냐?(쟁취했냐?) 못 가졌느냐?
가지면 영생이고 못가지면 소멸이다 이런 식인 겁니다.
영생을 원인 있는 결과로 보는 겁니다. 천국도 구원도 십자가도 말이죠.


그런데 마음판의 할례가 결국 예수라는 인물을 말해버리면

위의 저런 의미들은 다 공중에 날라가버리는 거죠.
괜히 쓸데 없는 짖만 했던 겁니다.

영생도 구원도 천국도 십자가도 결국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교회가 없다는 것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온이라는 공간도 나오지만

그 시온도 실상인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시온이라는 공간을 차지할려고

정작 시온(그림자)의 주인(실체)인 예수님을 쫏아내는 겁니다.

왜냐? 구원받고자 시온을 차지해야 하는데

정작 시온 되신 예수님이 그런 인간들에게 쫏겨나는 겁니다.
그럼 시온 안에 들어온 겁니까? 시온 밖에 있는 겁니까?
누가? 예수님을 아니 시온을 쫏아낸 인간은 시온(구원)에 들어온 겁니까?
구원 밖에 있는 겁니까?
예수님이 구지 일일히 지옥에 직접 인간을 보낼필요가 없이
인간 스스로가 지옥에 가도록
그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만을 외치시면 되는 겁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입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욥을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욥의 세친구는 욥이 저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을 했고 그 잘못으로 인해서 저주가 왔고

그 저주 때문에 밤새도록 긁어대니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하는 길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성화론자나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나

불교의 땡중이나 천주교의 사제들이나

부모나 친구나 마누라나 다들 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해석가능이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누구나 할 줄 아는 가능성의 이야기 이다는 겁니다.


안그러는 인간이 없습니다. 모두다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말라꼬 욥기에 기록이 되어있겠습니까?

숨겨진 비밀인데

공개하면 공개할수록 더더욱 비밀이 되는 욥기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다들 알 것 같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가능성이다면

성경책에 기록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욥은 바로 그렇게 해석하는 인간의 믿음의 한계를 지적하는 겁니다.

즉 시간의 순차적인 해석

곧 원인 있는 결과의 해석을 거부하는 겁니다.

 

아니 거부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부하라고 욥에게 닥쳐진 것이 애매하고 모호한 재앙인 겁니다.

 

왜냐? 해석불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곧 십자가의 용서로 인해 구원이지

회개해서 구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은 보통 중요한 의미가 아닙니다.

기존의 교리를 거부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원인이 없기에

모호한 재앙에

애매한 재앙에

해석 불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해석가능이다는 겁니다.

회개만 한 번 잡솨봐 그럼 눈 녹듯이 깨끗하게 싹 낫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욥은 거부합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다 넘어갑니다.
그러나 욥은 안 속습니다.

 

욥에게 약속이 덮쳤기에

소출이 이미 덮쳤기에

열매가 이미 덮쳤기에

 

그런 모든 인간의 투사인 신(하나님) 개념을 거부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신도 결국 인간이 조작한 겁니다.

물론 엉터리 기독교 말이죠.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교리를 보면

기가막힙니다.

 

복음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1%

0.00000000000000000000001 %도 없습니다.

 

없으니 낙심할까요?

울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없어야지 만약 복음이 있는 교단 또는 목사 또는 교회가 나타나 봐요

그들을 섬겨야할텐데

다행히도 안 나타났기 때문에

그냥 바로 예수님만 섬기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냥 목사나 교회나 교단은 그저 서로 서로 등쳐먹기 위해서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진 적이 없고

내 죄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자 아예 없습니다.

그저 교인하나 꼬셔서 돈되는 놈은 삼키고

돈 안되는 놈은 뱉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니 아예 기대를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기쁜 겁니다.

예수님만 보고 기뻐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뭐가 생각납니까?

맞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좋은밭의 무조건적인 소출 열매이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의 원리인 겁니다. 즉 예수안에 있으면 무조건 [예] 30배 60배 100배 이다는 겁니다.

 

결국 복음은 이 싸움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좋은밭 되자 비유냐?

아니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씨뿌리는 비유이냐?

 

다들 밭 비유로써 좋은 밭이 되자 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욥의 세친구의 해석법과 같죠.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

가시도 갈아서 없애고

돌짝밭의 돌도 골라서 없애고

길가를 밭으로 개간하여 바꾸면 되는 겁니다.

결국 좋은 밭이 되기위해서는

저런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못하느냐? 회개를 안하고

게을러서

원래 부정적으로 태어나서

등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씨앗을 무차별적으로 막 허비하듯이 막 뿌립니다.

복음을 막 뿌리니까

감추어졌던 땅의 속성들이 드러나는 겁니다.

 

길가

가시밭

돌짝밭

 

이것은 인간의 해석에 의해서 길가 가시밭 돌짝밭으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복음에 의해서 그렇게 드러나기에

절대로 인간들은 인정할수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즉 길가도 가시밭도 돌짝밭도 역시나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자그럼 좋은밭은 결국 원인 없는 결과로써

무조건적으로 소출을 내는 약속의 땅 곧 예수님 자신을 좋은밭으로 소개하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채로

다 완료된 상태로써의 미래완료로 덮쳐진 상황이다는 겁니다.

 

이 약속의 소출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소출을

정작 죄인은

죄악이 죄인을 이겨버린

그 죄인에게는 용서로 다가오지만

 

반대로 이 약속의 소출 자체를

자칭 의인들 즉 인간의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서는

이 약속의 소출 자체가 거리낌이 되고

약속의 열매 또한 이런 자들을 거부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안식의 주인을 거부하는 겁니다.

안식일이 인물로 바뀌면 안되는데 바뀌니까

그럼 내가 안식일 지킨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안식의 주인이라는 인물을 제거하는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사건이 졸지에 재현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그때로 끝난게 아니라 오히려 무한반복이 되는 재현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웃깁니다. 가인의 살인사건이 남의 일인줄 압니다.

즉 과거의 사건으로만 취급합니다.

아닙니다. 그 사건 자체가 미래완료로 덮쳐진 미래의 사건이다보니

그 어떤 인간도 그 가인의 살인사건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이 숙제를 무슨 수로 푸느냐 말이죠?

그 어떤 인간도 못 푸는 숙제를 그 어떤 인간도 못 벗어나는 채로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해결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65편입니다.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십자가의 용서는

결국 약속의 땅의 소출을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누리게 되는 기쁨

곧 복음이다는 겁니다.

 

너가 십자가 진적 있냐 말이죠?

없는데

다 이루었다는 그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외침이

우리를 소출을 누리도록

다 이루었다 라는 열매 소출을 누리도록 한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입니다.

결국 인간이 소출을 먹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출이 인간 속에 들어가는 탁란을 하는 주체이다는 겁니다.
열매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인간이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자들도 아주 아주 특이합니다.

즉 그들의 자랑은 따로 있습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자랑꺼리가 아니기 때문에

딴 것을 자랑스러워 하기에
자랑스러운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자랑꺼리가 바로

거리낌이 없는

걸림돌이 되지도 않는 것들

곧 누구다나 거부하지 않는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

 

안식일 지키기

남을 7번 용서하기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이 살기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는데 부족한 것 있으면 더 보충해서 지키겠다는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지 않고 매국노처럼 살지 않고

등등의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견합니까?

좋은밭되자
열매로 알리라 열매를 맺자 라는 식입니다.

 

죄악을 너끈히 이기는 자들인데

얼마나 대견합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파서

또 그렇게 살도록 자식들을 가르치지

자기자식 보고 탕자처럼 살아야 돼!! 라고 가르치는 자는 없습니다.

맏아들처럼 살아라 라고 가르치지

누가

어떤 부모가 탕자처럼 살아라 라고 하겠습니까?

 

즉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절대로 탕자를 자랑스러워 하는 부모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거부감과 거리끼는 것을 누려라 라고

원인 없는 결과로 외친다면

그것은 가인에게 딱 맞아 죽기 좋은 겁니다.

오늘날 교회사람들에게 딱 맞아 죽기 좋은 소리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교회에서 쫏겨나도록 되어 있어요

복음을 안 믿다 보니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겁니다.

 

교회사람들이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게 아니라

복음 뒤에 있는 결과물을 소유하고파서

복음을 원인으로 삼는 자신을 추구해서 결과물을 습득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천국이요 구원이 되어버린 겁니다.

결국 유대인의 반복입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것 또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미래에서 덮쳐져서 나타나는 결과이니

하등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는 마귀짖을 하도록 되어 있기에

복음의 보충물로써 충실하게 일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 또한 원인 없는 결과로써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에

충실해줘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차이로써의 복음이 그 다른복음을 거쳐서 그 갭이 나타날 것 아니겠습니까?

빛은 반드시 어두움 속에서 빛나듯이 말입니다.

어두움이 카페트로 깔려 그 어둠을 배경으로 깔고 증거되어야

더더욱 또렷하고 명료한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보충물로 등장해줘야만 하는 겁니다.

 

분명 죄악이 나를 이겼고

나는 죄악을 이길수 없는 불가능성인데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에 더더욱 불가능한 십자가의 용서가 덮친다면

즉 의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가 아닌
죄인 환자를 부르러 오신 의사요 구원자이다면

이 사람은 과연 기존의 원리대로 해석하게 될까요?

그 어떤 인간도 그런 해석에서 못 벗어나는데?
불가능한데 남들이 다 가능한 해석을 하는데서 못벗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졸지에 불가능한 해석이 덮쳐지는 겁니다.

 

바로 해석을 포기하는 해석

불가능에 더 나은 불가능이 덮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법칙인데

모든 것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소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지 그 은혜를 기여이 행함의 법칙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이 편하거든요.

은혜는 졸지에 불편해요

거리낌이 되요

싫어버린바 되거든요.

 

아니 생각해 보세요

남을 7번 용서하는 삶이 나은가요?

남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는 삶이 나은가요?

 

대부분의 인간은 남을 7번 용서하는 삶을 추구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쁜소식으로 조작하고 싶어합니다만

 

정작 성경은 미래에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소출 즉 십자가의 용서라는 열매가 덮쳐진 자는

남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는 삶을 평생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으로 부터 7에 70번 용서받는 삶이란
마치 십자가의 지혜처럼 어리석고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과 같은 겁니다.
아무도 어리석은 삶을
미련한 삶을 
거리끼는 삶을 원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삶을 원치 않아요
싫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삶은
남을 7번 용서하는 삶입니다.
괜히 성화론자들을 주님이 배양시킨게 아닙니다.

그렇게 다들 살기 원하는데
졸지에 사도바울이 그랬던 삶을 살다가 졸지에
사도바울이 핍박하던 나사렛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오히려 그것이 배설물이다고
자랑스러운게 아니라(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얼마나 싫고 싫은지 모르겠다 로 바뀝니다.

그럼 이제 무엇을 자랑하느냐?
거꾸로 죄인 중의 괴수 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겁니다.
사실상 죄인 중의 괴수가 자랑스러운게 아니라
그런 죄인 중의 괴수에 원인 없이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달라붙어있는 예수님의 긍휼이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딤전 1:12, 개역)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개역)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개역)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개역)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개역)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간따나 탕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판국에

탕자 중의 탕자 라고 바울은 외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의 시절이
정작 남들은 다 우러러 보는 그 시절이

오히려 자신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배설물일 정도로 싫고 싫고 싫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금수저 중의 금수저를 똥냄새 난다고 죽으라고 싫어합니다.
남들은 좋아 미치는 것인데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 하지 않고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주님이 먹이시는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한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그럼 무엇이 좋으냐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만이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에는 없는
죄수복에만 있는 십자가의 피가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힙합전사들이 맨날 외치는

너와 나의 연결 고리

그게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 단절인데 피가 묻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제목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는데 주께서 사한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에는 없는 피가 발린 옷은 죄수복이다는 겁니다.
그럼 솔로몬은 어떻게 구원받았나? 죄수복을 입어 피 발려서 구원받은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은 정작 죄수복을 입었는데
바보같이 우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입은 옷이 이미 죄수복입니다. 육체는 백날 해도 거룩한 옷이 못 됩니다.
그래서 피 바르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몸을 쳐다보는 겁니다.
나는 죄악을 이길수 없는 육체이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이런 불가능한 고백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입니다.
 

불편하고, 거리끼고, 싫고, 목에 걸린 무엇처럼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그러면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용납이 되지 못하냐 하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

비밀

수수께끼

숨길수 없는 비밀을 말씀하시는고 하니

 

예수님이 바로 그 세리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자라고 해도

예수는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현대인은 하나님을 예수라고 하면서

싫은 예수를 싫어하는 마음을 감추는 식으로

이미 교회에서 그런 사기를 쳐주고

본인들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주고

다들 좋은게 좋은거다 라는 식이 되다 보니

그냥 넘어가는 식입니다만

 

예수님에게는 안 통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자들조차도 직접 십자가의 용서를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 라는 복음의 보충물로써 작용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대로 안 이루어진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거야 말하나 마나 뻔한 겁니다.

두말 하면 잔소리요 입만 아플 뿐입니다.

미래에서 덮쳐지는 것으로 현재를 이루기 때문에

이건 처음부터 끝난 게임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완료된 영화를 보면서 누릴 뿐입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말입니다.

 

그러니 과거는 없지요.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기억을 미래에 까지 질질 끌고 갈려고 합니다.

 

그러니 예정론을 창세전이라고 운운하면서

시간 전, 시간이 없을때인데

결국 그것이 미래인데

완료인데

과거로 예정론을 따지다 보니

졸지에 개인구원에 미쳐있는 겁니다.

남 구원이 되든 말든 관심없어요 자기 구원이 중요하기에

예정론을 그런 식으로 따지는데

과거라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또렷하고 명료한 완료가 아니라

예정론을 믿으면 믿을수록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겁니다.

이게 유대인의 믿음입니다.

인간 중의 최고의 믿음의 달인들도 이런 판국인데

이방인인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미래완료가 덮쳐져서 원인 없는 결과는 결국 없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대안방안으로 비스무리하게

원인 있는 결과를 찾아내는 식의 교리 뿐이다는 겁니다.

썩은 동앗줄 붙잡은 줄로 모르고 예정되었다고 좋아라 하는 거죠.

 

그러니 인간이 구상하는 예정론은 무조건 다 엉터리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으나 주께서 우리의 죄가를 사하시리라

 

이게 괜히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말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는 것인

땅에 심고 그 심은 것이 시간이 지나면 때가차매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이게 뭐가 나쁘고

이게 뭐가 이상합니까?

전혀 이상한 것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과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약속의 땅의 소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는 겁니다.

즉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냈습니다.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럼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은 뭡니까?

 

분명 귀신을 쫏아내었다고 하는데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 벌어지다 보니

안 믿고는 못배기겠죠.

그런데 그것이 졸지에 모호해 집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할 때

다들 귀신을 못 이기는 겁니다.

 

아니 이기면 안됩니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된 겁니다.

죄악을 못 이겼는데 주께서 우리를 사한다고 졸지에

개인 개념이 졸지에 우리 개념으로 집단화 됩니다.

집단화 된다는 말은 미래에서 덮쳤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우리 개념이 없습니다.

내가 필요할때에 우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나 뿐인 겁니다.

잠시 내가 필요해서 우리를 이용하지

우리를 위해서 내가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과거 곧 원인 있는 결과로써 평생 얽매여 사는 이유인 겁니다.

 

그런데 원인 없는 결과는 졸지에 우리 개념이 생겨버립니다.

미래완료이기 때문이요

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바로 이 우리 개념입니다.

다윗 개인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는 다 같이 격게 되는

미래완료사건으로써 격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참 이상합니다.

시온을 사울왕이 다 차지했고

성전도 예루살렘도 이스라엘 전체도

이스라엘 왕 자리도 다 차지했는데

정작 불안해서 노래가 안 나옵니다.

다 차지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쫏겨나서 이방나라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됩니다.

정작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땅 그것도 약속의 땅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어도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 또한 노래가 안나옵니다.

여전히 불안해 합니다.

사울왕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났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에

그 소출을 마음껏 누리고 있으니

노래가 저절로 납니다.

 

정작 모든 것을 다 가진 사울왕은 노래가 안나오고

불안해서 미쳐서 다윗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라고 밤낮으로 미쳐있고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 열매 없어도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다윗은 여호와로 막 기뻐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양식이 없어도 너무 없어

오늘 한 끼의 양식도 없는데

뭐가 저리 기뻐서 지루박을 춥니까?

 

앗싸 가오리

 

다윗은 지 혼자 신났어요 신났어

 

죄악을 못이기고 죄악이 나를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에서 기뻐 좋아라 합니다.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기뻐요

 

반대로 상대적인 사울왕은 모든 것을 다 차지해도

다윗 하나 못 죽여서 불안해 미치니까

노래고 뭐고 기쁨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으나 주께서 사한신다는 것이 전혀 안기쁘거든요

오히려 그것으로 기뻐하는 다윗이 기뻐하니까 더더욱 미워 죽습니다 죽어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상대적으로 둘을 대조시키면서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미래완료적으로 덮쳐져서 말입니다.

그냥 씨뿌리는 비유에서 좋은밭 하나만 나오는게 아니라

상대적인 가시밭 길가 돌짝밭도 같이 나오는 이유인 겁니다.

그 속에서 가르는 거룩이 바로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갈라졌을 때 기쁜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지니 말입니다.

 

반대로 이렇게 가르는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 있는 결과가 무시당하니까 말이죠.

 

그렇게 모호한 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악령 들린 자들이고

 

반대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십자가의 용서가 덮쳐진 자는

왠 은혜인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밤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모든 유대인들이 피해가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의 대조에서

 

주님을 찾는 쪽과

 

주님이 찾아내는 쪽의 갈라짐으로 인해

 

무엇이 더 또렷하고 더 나은 영적 예배인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죄가 없이 의를 쌓고자 하는 일에서 더더욱 의를 쌓고자

예수님에게 까지 직접 찾아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지역 수가라 동네의 우물가의 여인은

도저히 죄악을 이길수가 없는

남편 5에 하나 더

죄 뿐인 인생에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무조건 적으로 용서하시겠다고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는 영생을 받을려고 무지 무지 노력하고 열심인데

그것도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찾아왔는데

 

그런 자는 거부하시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여인에게

직접 찾아가서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여자

개같은 이방여자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둘을 가르게 하는 복음인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는 소식이

 

오늘 시편 65편에서는 노래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저 여자가 바로 내 꼬라지와 같다고 기쁘게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이 시온이라는 인물이 직접 나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말

 

다 이루었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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