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예루살렘)와 소망 (시편 79)

 


(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79: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79:2, 개역)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79:3, 개역)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79:4, 개역)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79:5, 개역)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79:6, 개역)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9:7, 개역)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79:8, 개역)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79:9, 개역)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10, 개역)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79:11, 개역)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79:12, 개역)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79:13, 개역)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15:1, 개역)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2, 개역)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15:4, 개역)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15:5, 개역)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개역)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7, 개역)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8, 개역)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5:10, 개역)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5:11, 개역)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5:12, 개역)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5:13, 개역)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14,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15,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5:16, 개역)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15:17,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5:18, 개역)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5:19, 개역)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5:20, 개역)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1, 개역)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5:22, 개역)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15:23, 개역)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15:24, 개역)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15:25, 개역)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15:26, 개역)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15:27, 개역)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15:28,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15:2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15:3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15:31, 개역)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15:32, 개역)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5:33, 개역)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지난 시간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사도행전 7)를 통해서

시편 78편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79편은 로마서 15장의 사도바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곧 그리스도와 소망과 이웃(이방인) 그리고 찬양에 관한 겁니다.

 

찬양이란 전쟁을 이겨서 그리고 이긴 결과로 찬양을 부르른게 아니라

이미 전쟁을 하지도 않았는데 찬양을 미리 불러서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결과를 먼저 누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전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할례도 이런 식입니다.

할례를 먼저 하고 난 뒤에 전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전쟁은 무조건적으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전쟁에서 졌다면 그것은 전쟁에서 힘이 없어서 무기가 없어서 전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례를 단 한명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율법과 같죠.

결국 힘이 없어서 진게 아니라 힘을 정반대로 빼지 않아서 지게 된 겁니다.

힘의 우열로 좌우되는 전쟁이 아니라 정반대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찬양도 이렇다는 겁니다.

 

누가 질문을 하기를 음악오디션 프로그램이 요즘 많은데 어떻게 보느냐고 묻길래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가 누가 잘하나, 누가 누가 잘 부르나 로 우승자를 뽑는데

복음은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누가 누가 가장 음치인가? 박치인가?를 뽑는다는 겁니다.

 

아니 왜?

그것은 이미 가장 잘 부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구지 잘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오히려 음치를 박치를 삑사리를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왜냐? 이미 잘 부르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신

 

즉 찬양이가 직접 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79편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꾸 정반대로 봅니다.

그 정반대로 보는 것에 다시 정반대로 주장하십니다.

 

찬양이가 이미 완료된채로 왔기 때문에

찬양을 우리가 더 잘 불러야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찬양을 못 부르는가를 지적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공간 지명이 아니라 신약에서는 인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 예루살렘의 그림자 기능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예루살렘은 구원의 장소로써 작용함으로써

이 구원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졸지에 이 구원이 이 선택의 장소가 버림의 장소 단절의 장소로 작용하는 겁니다.

율법적이지요? 물침대처럼 한쪽을 누르면 시이소처럼 다른 한쪽은 올라가는 식입니다.

난 구원받기를 바랬는데, 선택받기 바랬는데, 정작 돌아오는 것은 버림받음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율법적인 저주성을 예수님이 대신 받는 겁니다.

율법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거든요.

 

마침 예루살렘이라는 다큐를 봤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인데 2013

이번에 더빙이 되어서 나왔더군요.

 

jerusalem.2013.docu.1080p.bluray.더빙

검색해서 다운 받으면 됩니다.

 

유튜브에서는 자막이나 더빙은 없더군요 그냥 영어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9p2EXhObM

 

이 다큐를 보면서 내내 아이구 저 예루살렘 그냥 불도져로 다 밀어버려야 하는데

과거에 목사들에 성지순례 한번 못간다고 얼마나 교인들을 닦달내더니

저거 뭐 볼게 있다고 그냥 밀어버리지

뭐 하긴 마귀를 통해서 보충물로 삼아야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3명의 여성이 나오는데

다마스커스(다메섹) 성문에서 출발하는 무슬림 이슬람교 여성

전세계에 흩어진 가족이 예루살렘 정착으로 출발하는 유대교 여성

감람산 부활절 행사로 출발하는 기독교 여성

 

이 세 여성의 시선으로 예루살렘을 설명하는데

제가 듣기에는 그냥 돈 되더라 라는 말로만 듣기질 않는 겁니다.

돈과 신앙을 동시에 챙길수 있는 곳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성전, 교회, 절간, 성당 이다는 거죠.


이 세명의 여성의 공동된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확 허물어 버려야 할 강도의 소굴이였습니다.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기가막히더군요.


그럼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한 상태인 예루살렘은 그럼 괜찮겠네?

강도의 소굴 속성을 제거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되겠네?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없어요 그냥 공중 분해 되어 버린 겁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다고 왜 안 믿냐 말이죠. ㅋㅋㅋㅋ

 

사실 믿을수가 없지요

눈에 보여야 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양 쪽 종교들의 구원의 문으로 작용하게 되니까

서로가 서로의 구원의 문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멈춰지지 않는 겁니다.

다큐에서는 전쟁이 지금 안 일어나니까 전쟁이 종식?

아닙니다. 수천년동안 전쟁만 있었지요.

휴전상태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서로가 관광수입으로 누가 누가 더 복받았느냐 라는 싸움을 하고 있어요.
누구 신이 더 복되냐 라는 식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짖이랑 똑같죠.

 

구원의 문이니까 서로가 성벽을 붙잡고 기도하는 겁니다.

눈물 흘리면서 벽에다 뽀뽀하고 난리예요 난리

 

? 소망을 두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그런 그림자에 소망을 두니까

정작 실상에는 소망을 두지 않는 겁니다.

 

그럼 그런 그림자 곧 성벽(통곡의 벽)을 붙잡고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고 하는 소망과

참실상 이신 예수님이 소망되심과의 차이점은 뭡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소망 되심과 인간들의 종교적 소망과의 차이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의 차이점이지요.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밥상 곧 저들의 돈주머니를 확 엎어버리시는 것은

이게 소망이 아니라 우상인데 왜 이 허구에 소망을 두느냐 로 확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의 기쁨을 구하시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돈주머니를 확 엎어버리시면서 말씀하시는 참소망

자기가 자기 기쁨을 구하지 않는 소망은 뭡니까?

 

바로 뒤에 나옵니다.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예수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참 소망 되심의 증거이다는 겁니다.

 

에이 그게 무슨 소망이고

그것은 오히려 절망이지

사람들은 그런 절망이 닥칠까봐 겁나서 정반대로 소망을 구하는데

 

아니 소망을 구한다면서 정작 절망을 구하고 있으니

너가 오히려 우상숭배자 악마의 대왕 바알세불 걸린 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꼴에 소망을 구한다고 나선 모습들이

저 예루살렘 구원의 문에 모여서

평생을 평화의 도시가 아닌 분쟁의 도시로써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소망의 역설 아닙니까?

 

결국 저들도 예수님이 무슨놈의 소망이냐 라고 했던 것처럼

저들 또한 소망은커녕 분쟁을 자발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누가 누가 소망이 옳았냐 라는 자본주의 관광수익 싸움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훼방성을 맞물려있는 상황으로 만드셔서

소망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역설적이지요~~

 

그러나 저들은 또는 오늘날 현대교회들은

훼방성을 제거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사기꾼들인 겁니다.

 

자 다시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이 말하는 소망은 이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소망은

자기가 자기의 기쁨이 되지 않는 겁니다.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자 자 자 좋다 좋아 그래 예수 너의 소망은 그렇다 치자

그럼 그 소망 때문에 주어진 결과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친다는 겁니다.


소망 제대로 구해서 완전 쫄딱 망하는 꼴 싫다 라는 겁니다.
좋은것이 따로 있다는 거죠.
아벨 꼴이 싫다 라는 겁니다.

소망의 반대말 훼방이, 절망이 미친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망의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에이 이게 무슨 소망이고 ~~~~~~~

 

오늘 시편 79편은 예루살렘을 이방나라 바벨론이 짖밟는 역사속의 사건으로

예루살렘 파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망인 예루살렘이 파괴 됨에 있어서 소망이 아닌 절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더더욱 소망이 되는 겁니다.

 

이 역설입니다.

(제가 중학교는 불교재단 학교고 고등학교는 기독교재단 학교 나왔는데
불교에서 밀교가 있어요 형상이 없는 무형상 불교입니다.
즉 묵시세계를 추가한다는 식입니다. 역설적이지요.
예루살렘이 없는 것이 더 예루살렘적이다는 식입니다.
묵시신앙, 종말신앙이다고 우기는 거죠. 

모든 종교가 종말신앙 종말사상 묵시사상 다 있거든요.)

 

종말이란

사실 종말이라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시간의 끝으로 대부분 인식해서

묵시적인 의미를 말할 때 종말을 언급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시간은 없었고

묵시 뿐이였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버린후 자기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거리와 시공간 때문에

시간이라는 것이 인식되다 보니 자꾸 1 2 3 이라는 순서로 보는 겁니다.
자기 기준의 1 2 3 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역사는 없고

묵시만 있었기에

처음부터 모든 사건 하나 하나는 미래에서 덮쳐진 사건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니 과거가 없는 거죠.

과거가 없다면 시간은 없는 겁니다.

모조리 묵시 뿐입니다.

인간 자기가 과거 속에 갇혀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과거가 있는 시간개념을 소환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심심하면 과거를 끄집어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왜 자기를 말하고픈 겁니다.
 

결국 시간은 없고
즉 자아는 없고

처음부터 묵시였고 묵시 뿐이였죠.

 

그런데 그런 시간 속에서도 한계점을 만나니까 종말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는 겁니다.

 

결국 시간을 인식하는게 아니라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만을 인식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소망 자체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소망이 없어요
소망이라고 우기는 것이 안개예요

뜬구름 허깨비 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참 소망이 왔습니다.
인간이 소망을 찾은게 아니라
참소망이 인간에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 소망이 하는 말

자기가 자기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 라는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무슨 소리인줄 몰라서 붕 떠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간따나 소망이 날라가버렸는 판국에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나에게 미치는 것이 소망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간따나 소망이 소용없다 라고 듣기는 판국에

이제는 훼방이 내게 미친다 라고 하니


아 그래 소망은 없다는 말이군 이라고 그것은 억지로라도 말귀 알아먹겠는데


그래서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망은 소망인데 우리가 전혀 수용못하는 소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할수 없는 소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 소망이

내가 원하는 소망이 아닌데 이거 우짜지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소망 괜히 말했다는 큰일 난다는 겁니다.

큰일 곧 종말 곧 묵시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꼴 난다는 겁니다.


제사가 아니라 미래에서 더 나은 제사가 덮치는 바람에 졸지에 아벨 꼴 나는 겁니다.
 

네 빙고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 꼴 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고

아삽의 시 오늘 시편 79편은 외치고 있습니다. 노래하고 있어요 노래

얼마나 신났으면

얼마나 맛있었으면

얼마나 기쁘면

얼마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노래를 막해요 막해

 

어떤 소망

 

예수님 꼴 났다는 겁니다.

 

예수님 꼴

 

예수님 꼴이 뭐냐고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지요 뭐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을 소망하는자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 다들 피합니다.

유대인에게 괜히 십자가의 지혜가 걸림돌이 된게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는 더 심하다는 거죠.

그런데 성령으로 난 자는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기쁨이 되지 않는 것

소망은 이런 거야 라고 언급하지 않고
소망은 이런 이런 것이 아니야
그 나머지는 모조리 다 소망이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뭐 뭐 아니요 라고 부정적으로 말이죠

나 아니요 예수님만 옳았습니다 라고 했을때에
나와 연관된 모든 것이 아닌것이고

나머지 모든 것이 옳다 라는 겁니다.
그 나머지 모든 것

잉여

잔여물 

찌끄래기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감사하게도 이 그리스도의 소망을 이루어주십니다.
내 소망을 이루어 주시러 오신게 아니라 말이죠.
 

사도바울이 지금 격는 상황이 그겁니다.

스데반 집사의 사도행전 7장 설교와 같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드디어 죽으러 간다는 겁니다.

다들 말립니다. 가지마이소

그런데 이것이 내 소망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

성령의 소망이기에

그리스도의 소망이기에

자기가 자기의 기쁨이 되지 않는 소망이기에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바울에게 미치는 소망이기에

신나게 가는 겁니다.

 

시편 79편에서 예루살렘은 외칩니다.

예루살렘은 파괴 되는 소망으로써 외칩니다.

야들아 예루살렘 땅 차지하지 말고 저분 봐라 라고

저분이 누군데?

너희의 소망이야?

아니 왜?

왜 소망인데?

 

너희의 모든 허물을 다 덮거든 ~~~~~~~~

 

그 용서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거든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남의 허물을 위해 피흘리셨거든 ~~~~~~~

 

아 그럼 우리가 생각했던 소망은 소망이 아니였네

저분의 소망이 진짜 소망을 간구했구나

 

그래 시편 79편아 너가 나 대신 진짜 소망을 제대로 보여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의 기쁨을 구하는 헛된 허구의 소망을 구했구나

예루살렘아 너는 파괴 되어가면서 까지 그것 하나 보여줄려고

허물어 지는 구나

 

왜 우리는 보이는 소망을 구했을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을 먹이고도 12 바구니가 남으니까

나의 기쁨을 구할려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소망

그 동일성의 소망이

허구였구나

예루살렘 땅 차지해서 거주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엉터리이다고 예루살렘 땅이 외치고 있는 소리를
저들은 못 듣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예루살렘 땅 차지함이 예수님을 임금삼고자 하는 식입니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다니는 겁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불러 터져서
헛배 헛소망을 구하는 겁니다.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것을 십자가에서 밝히 보여줌으로써

나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 것이

소망을 구하지 않는 소망이

진짜 소망이였구나

 

라고

 

시편 79편은 헛된 소망을 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진짜 소망은 이거야 라고

참소망을 외치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82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2.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3.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길 못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 하도다

4. 주의 자비롭고 화평한 얼굴 모든 천사도 반기며 주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천지가 화답하도다

5.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 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일세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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