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를 미리 장례를 치르는 찬양이 (시편 66)

 


(요 12:3, 개역)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4, 개역)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개역)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개역)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 12: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 12:8,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가 자주 [찬양이] 라는 표현을 쓰고는 했는데

찬양을 의인화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처럼 찬양을 인물로 취급했다는 거죠.

 

즉 이 말은 정반대로 정작 인간은 이 찬양에 의해 배치를 당하는 배치물인 사물로 취급하고

찬양이는 인간을 사물 다루듯이 다루는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정작 인간은 찬양에서 배제 된다는 겁니다.
찬양이에 의해서 다루어지길 바랄뿐입니다.

 

인간이 부르는 찬양이란 없다는 거죠.

찬양이가 인간을 부르는 겁니다.

찬양이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미래에서 온 사건으로써의 찬양 이라고 제목을 달았었는데

이번에는 살아있는 예수님을 미리 보내버리는, 미리 장사 치르는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나누다가 나온 내용인데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비싼 향유를 더러운 발을 씻을려고 발에 향유를 부어서

긴머리카락으로 발을 씻는 겁니다.


여인으로써는 가장 굴욕적인 모습인데

오히려 그 여인은 가장 영광으로 여기는 겁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히려 민망하다고 분노로 화를 내면서 이 여인을 욕합니다.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냐 말이죠.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여인은 제자들이 알면 더더더 화날 일을 한 겁니다.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르는 마치 시체를 딱듯이 장례를 치르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미리 화를 돈 때문에, 가난한자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미리 화를 내 버려서 그렇지

사실상 시체를 딱는다고 알았다면 아마 이 여인을 죽일려고 달려들었을겁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입니다.

 

아니 너는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는데 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느냐?

 

아니 안 보이십니까?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장례 치르고 있다니깐요.

살아있는데 마치 죽은 사람 취급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더 화낼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의 화냄이 우리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일을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기념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즉 노래가 되게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사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마 26장, 막 14장, 눅 7장, 요 12장)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맞습니다. 찬양이란 미래에서 덮쳐진 사건입니다.

 

즉 미흡함이나 모호함이나 흐릿함이나 [이미와 아직] 따위의

의문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다 이루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바로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찬양이다는 겁니다.

 

찬양이가 예수님을 미리 장례치르는 겁니다.

?

십자가가 또렷하거든요.

 

모호한 가난한자를 위해서 돈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보다 더 또렷한 것이 없다고

[찬양이]가 자신의 머리카락 음표 콩나물을 풀어서

비싼 아주 비싼 전재산을 땅위의 발에 다 쏟아부어 허비해 버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는다고

나의 죄를 씻는 분이라고
이것보다 더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고
자꾸 의문의 것으로 꾀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찬양이가 외치고 있는 겁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이 악한 세대에게 보란 듯이

의도적으로 정반대의 역행을 하시는 겁니다.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이 잡혀 죽어도 울지 않습니다. 애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롱했듯이 에라이 잘 죽었다 라는 식입니다.

그 동안의 꼴보기 싫었던 놈 없어져 버렸으니 속이 시원하는 겁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피리를 부니까 함께 춤을 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놀려먹습니다.

한마디로 막사는 자라고 경계하는 거죠.

방종을 조장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역시나 조롱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찬양이라는 사건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우리의 정반대의 위치에 배치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찬양의 사건을 대하는 너는 어떻게 할래 라는 겁니다.

 

역주행송이라고 요즘 자주들리는 표현이던데

바로 미래에서 덮친 사건으로써의 찬양은

인간의 이런 죄악성을 역어서 역주행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죄악성을 돌출해 낼줄 모르는 찬양은 거짓이다는 거죠.

거짓선지자들이 부르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는 노래와 다를바가 없는 겁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십자가가 옳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르는 행위 곧 역주행송을 부름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악성을 역어버리는 겁니다.

 

누구랑 똑같나요?

네 맞습니다 다말이랑 똑같습니다.

 

꼴에 말씀 좀 안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시아버지 유다처럼 약속의 가문이라꼬 절대로 저 이방여자랑 안 역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역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이 향유부은 여인은

우리의 죄악인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물증으로 확보하듯이

우리의 죄성을 돌출해 내면서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고 증거합니다.

 

가난한자를 위해서?

얼마나 모호합니까?

앞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도 안 보이는 판국에

멀리 멀리 있는 가난한자를 위한다고?

그것처럼 사루비아 같은 달콤한 말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지금 눈 앞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데

거기에 향유를 부었다고

온갖 윤리 도덕들이 손가락질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성의 본질이다는 겁니다.

선악으로 포장된 인간성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왔다는 겁니다.

과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어느것이 명료한지도 모르면서

모호한 소리를 인간들은 하는 겁니다.

바른소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거 모호한 소리 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왜 이 내용이 오늘 시편 66편과 관련있습니까

얼마전에 시편 79편을 살펴봤는데

분명히 예루살렘의 파괴가 이방나라들에게 짖밟혀서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찬양이는 더 신나게 찬양 부르는 겁니다.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드디어 쫄딱 망했다고 아주 신나게 춤추는 겁니다.

 

백성들은 그런 예레미야를 보면 할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다가 당했기에

뭐하고 따질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암울하게 이스라엘이 쫄딱 망했는데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는 끝까지 따라와서 아주 신나게 춤을 추면서

야들아 야들아 포로되어 가는 것이 신나지 않니?

돌아올거거든 표시 해 놓아라 라고 하는 겁니다.

 

뭐라 따질수도 없고

간따나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양반이

이제는 쫄딱 망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데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면서

돌아오게 될테네 표시해 놓으라고 하니

이거 뭐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표시 해 두면 뭐합니까?

70년 세월 동안에 그 표시한 흔적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10일만 지나도 아니 3일만 지나도 아무리 또렷하게 했던 표시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

무슨 수로 표시하냐 말이죠.

 

말 되는 소리를 해야죠.

 

당연합니다. 성경에는 말 되는 소리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마음판에 새기는 흔적이지

그거 지켜야지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게 아닙니다. 사라지거든요.

흐르는 강물에 표시하는 것이랑 같은 겁니다.

 

즉 이 말은 찬양이가 벌린 사건이고

미래에서 덮친 사건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아니 이미 이루어진채로 벌어진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79편에 찬양이는 오히려 더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겁니다.

예루살렘 파괴는 오히려 이미 완성된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귀들만이 말려든 겁니다.

그거 그림자 부순다고 예루살렘이 부서지냐 말이죠.

그림자 때렸다고 그림자가 아파 하냐 말이죠.

괜히 그림자 때려서 그림자 괴롭혔다고 으싸 으싸 하니까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괜히 그림자 건드려서 여호와한테 걸려들게 되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예루살렘이 있기에 무너져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이스라엘이 있기에 이스라엘 망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안돼 예루살렘 무너지면 안돼

땅에 비싼 향유 붓지만 그 돈으로 가난한자 먹여 살려야돼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림자를

그 모호하고 의문이고 미흡한 미완료를 계속해서 찝찝하게

의문을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를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십니까?

이미 완료된 몸이 있거든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니까

이 표현이 불교나 유교나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윤리 도덕처럼 해석하는

성화론자들이 우세를 띠는 겁니다.

오히려 엉터리 해석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요

참 신기하죠.


찬양은 나를 미리 장사치르는 겁니다.
십자가는 나를 미리 장사 치러요

멀쩡히 살아있다고 우기는 나를 장사치러서 죽은자이다고 하는데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거든요.

그러나 거짓의 영을 받은 자는 거룩한 몸을 만들겠다고 도 닦아요 도
자기가 기여이 의인이 될려고 한다는 겁니다.

 

거룩한 몸 만들필요가 없이

 

십자가에 그 어떤 육체도

잘났던 못났던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말인데
그것이 이미 거룩한 몸인데, 거룩한 필요가 없이 이미 거룩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미리 자기가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겠다는 식입니다.

 

완전 정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말해도 안먹혀요

즉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는데

이것 조차도 이미 다 완성이 되었기에 벌어지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 미래 완료로써 벌어지는 상황이니까 그런거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안먹혀 들어야지요.

먹혀들면 안돼 ~~~~

아니 왜요? 먹혀들면 죽기라도 하겠어요~~~

죽었어

 

어느날 팔복이는 시장바닥에서 자기 말이 먹혀들었다고 좋아라 하다가

역병에 걸려 죽었어

 

먹혀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미래완료로만 일하시는 겁니다.

안먹혀 드는게 참으로 다행이다 생각하세요.

 

복음을 증거하면서 혹시나 듣고 깨달아 고침이 될까봐 두려워 하세요.

제발 먹혀들지 마라 먹혀들지 마라 라고 하세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슬퍼하지 않는 세대라고

이미 미래완료가 선언한 바를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이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조롱받기를 즐거워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미래에서 덮쳐진 사건으로써

찬양이가 벌리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자기의 기쁨이 되지 않기를 바랬고

이것이 소망이고

그래서 주님을 훼방하는 훼방이 우리에게 미치는

조롱꺼리가 되닌

 

날마다 죽음에 넘겨져 비방받는 미말에 둔 찌기

쓰레기

뿌스레기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가 된 것이

 

바로 넉넉히 이겼기에 나타난 결과이다는 겁니다.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넉넉히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주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을 누리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구경꺼리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찬양이가 펼치는 겁니다.

찬양이가 우리를 이렇게 배치시키는 겁니다.

 

시편66편은 출애굽사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출애굽 구원사건은

시편 66편의 기준에서 볼때에 과거입니다만

과거가 아니다는 겁니다.

성경은 모조리 미래사건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뿐이거든요.

그러니 과거로 취급할 수가 없는 이유가

미래에서 덮쳐져서 현재에서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과거 사건인줄 아세요?

아닙니다. 지금 현재에도 무한반복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애굽이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고

그 이스라엘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다윗이

출이스라엘을 노래 부르고 있는 겁니다.
주의 구원사건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찬양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노래 부르는 기쁨의 찬양은 다윗에게 있고

 

정작 이스라엘을 다 차지하고 성전도 율법도 다 차지하고 있는

저 사울왕은 불안해서 미칩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차지해도 저 다윗 하나 살아있는 이상

미치고 팔짝 뜁니다.

 

그래서 외국나라 이방나라에 까지 도망쳐 있는 다윗을 끝까지 따라 잡아 죽일려고

밤잠을 못잡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잠을 못자고 어두움을 못통과하니 아침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다윗은 목숨이 뭐 수천개가 되는냥

쫏겨다니면서도 아침을 맞이하면서 찬양을 룰루랄라 부르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이미 완료되었기에 벌어진 사건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찬양이가 우리를 다루는 방식인

 

또렷하고 명료한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매일 매일 찬양이는
십자가는 나를 장례치르고 있습니다.
미리 보내버리고 있습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끊을수 없거든요.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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