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말이지 말입니다. (시편 80)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80: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80:2, 개역)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80:3, 개역)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80:4,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80:5, 개역)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80:6, 개역)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80:7, 개역)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80:8, 개역)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80:9, 개역)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

(80:10, 개역)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80:11, 개역)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80:12, 개역)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80:13, 개역)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80:14, 개역)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80:15, 개역)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80:16, 개역)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80:17, 개역)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80:18, 개역)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80:19,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북이스라엘이 망했을때에 지어진 시라고 합니다.

아삽 곧 찬양자는 미리 죽음으로 넘겨지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오히려 십자가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미리 장례를 치르는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시편 80편에서는 얼굴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의 얼굴

 

그렇다고 남유다가 안망하느냐?
그 다음 너 차례인데 우짜노!!!!!

북이스라엘이 망하면 남유다도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회개를 해서 그 멸망을 지연시킨게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순서로 해석한 겁니다.

오히려 미래에서 거꾸로 오는 것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미 완료 되었기 때문에 망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찬양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느냐? 아니죠

새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아니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홍해를 건넌 경험이 없는 자들은 요단강을 건너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주님이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나 시간이나 원인 있는 결과 즉 행함의 차원에서 해석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지금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해

아삽이 찬양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다는 겁니다.

 

주의 얼굴 뵈오리 ~~~~~~~~~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던 방향이

이제 이 곳에서도 주가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무도 저 속에서는 없다고 여기는

불 속에서 다니엘의 세친구와 함께 불 속에서 덩실 덩실 춤추는 겁니다.
불 속은 죽음인데 그 죽음 속에 주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겁니다.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랑 말이지 말입니다.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로 시편 79편의 글에서

주께서 자기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전 13:4, 개역)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개역)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개역)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덮칩니까?

주를 비방하는 그 비방이 내게 덮친다는 겁니다.

 

즉 오히려 미움이 덮칩다는 겁니다.

 

주의 얼굴이 유일한 소망인데(물론 여기서도 마찬가지 주의 오른팔과 한 세트로 등장합니다.)

 

(80:15, 개역)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80:16, 개역)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80:17, 개역)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 소망이 덮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는 바로 비방, 미움, 죽음에 넘겨짐 이다는 겁니다.

? 넉넉한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긴 사랑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 보다 명료한 사랑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이 일체 없다 라는 명료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지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미움받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이방으로 부터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라는 완료 때문에 말입니다.
 

참 제가 이렇게 표현하고서도 참으로 말이 안되는 불가능한 표현입니다.

말이 앞뒤가 안 맞거든요.

사랑이기 때문에 미움받는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겁니다.

 

미움 받았습니까? 그러면 사랑이 넉넉히 이겼다는 겁니다.

 

이게 참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참으로 역설적이다는 겁니다.

 

오늘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남유다는 안 멸망했으니까 그럼 올바른가?

아닙니다.

남유다도 곧 망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는 주님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주의 얼굴이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다는 겁니다.

 

?

주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 망하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몽둥이 역할을 하는 자가 괜히 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주의 사랑을 펼치는 일에 괜히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에

그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랑 때문에

 

마귀는 괜히 말려들어서
(사실 괜히 말려든게 아니지요 마귀가 하는 일은 이 일 밖에 없거든요)

오히려 베드로와 예수님을 더욱더 뜨겁게 넉넉히 이기는 사랑으로 본드칠을 하는

부정적인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보충물로만 일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떼어놓을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가

즉 마귀의 고소가 사실은 더더욱 본드 붙이는 역할이 되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록 하는 촉매제로 작용하는 겁니다.
괜히 본드 붙였어 ~~~~~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

남유다까지도 망하도록 하는 세력들은

 

아이구 이놈 이스라엘아 너의 구원자 어디있냐?

오히려 여호와가 너희를 망하게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놀려먹잖습니까?
그게 과연 하나님 맞니? 구원자 맞니?
구원자 하나님 꼴 좋다 너희를 쫄딱 망하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방이 사실상 여호와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듣도록 되어 있는 비방이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 조차도 여호와 본인이 심으셨다는 거죠.

 

소산님에돗 이라고 표현했는데

음악 스타일이

 

소산 ; 들의 백합화 골짜기 백합화

소산님 ; 복수형 들의 백합화들

에돗 ; 증거, 외침

 

들의 백합화들의 증거, 노래 이다는 겁니다.

 

시편 45편을 공부할 때 살펴봤듯이

광야라는 죽음 속에서의 백합화들의 찬양 노래 이다는 거죠.

 

말이 안되잖아요

광야에 무슨 꽃입니까?


가시떨기 나무 조차도 햇빛에 노출 되면 자연발화해 버리는 판국에
꽃은 무슨 꽃이냐 말이죠.

 

죽음 속에 무슨 꽃입니까?

 

죽음 속에 무슨 얼굴입니까?

 

죽음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수 없도록 불이 사물을 살펴보는 눈까지 다 태워버리는데

어떻게 볼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말이 안됩니다.

맞습니다. 말이 안되어야 찬양입니다.

말이 되는 찬양은 찬양이 아닌거죠.


그래서 찬양이란 우리가 익히 아는 노래로써의 찬양이 아니라
사건으로써

묵시로써의 찬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래에서 덮쳐지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말입니다.
 

찬양이 덮쳐지니까

죽음 속에서 보는 겁니다.

주의 얼굴을 말입니다.
찬양이 나를 죽음에 넘겨버렸는데 오히려 거기서 주의 얼굴을 뵈옵게 되는 겁니다.

 

앞의 언약들과 다윗의 언약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다윗 언약은 한마디로 얼굴언약입니다.
제가 붙인 별명입니다. 얼굴언약

그 전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거울 보듯했는데

다윗언약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또렷함이다는 겁니다.

 

아니 야곱이 왜 샬롬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아브라함언약)

간밤에 주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많이 봐줬다는 겁니다.

반드시 타죽도록 되어 있는데 안타죽도록 배려했다는 겁니다.

 

(32:29, 개역)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2:30, 개역)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리고 모세는 딱한번만 얼굴 보여달라고 했는데 (모세언약)

못보도록 모세 머리를 눌러버립니다.

보면 타죽거든요.

안 타죽도록 한 배려이다는 겁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등만 본 겁니다.

 

(33:18, 개역)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33:1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33:20, 개역)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33:2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33:22, 개역)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33:23, 개역)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랬던 여호와께서 자신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도록 직접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악마의 얼굴도 구체화 되는 것이 다윗언약에서 펼쳐지는 것이

다니엘서나 이사야 등등의 선지서에서 악마들의 활동이 구체화 됩니다.

 

그 이전에는 흐릿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 주의 얼굴과 주의 오른팔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얼굴 곧 십자가의 사랑을 볼려면

역설적이게도 죄인에게만 보인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죄인에게만 변호사로 나타나지

죄인도 아닌데 어떻게 변호사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그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로써

주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타죽지 않도록 주의 얼굴을 못보도록 했는데

이제는 주의 얼굴을 봐도 안 타죽도록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즉 다윗이 율법 등등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지킬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어겨도 너무 너무 어겨서 밑바닥까지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십자가의 용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의 얼굴로 주의 얼굴을 뵈도록 했다는 겁니다.

오로지 불쌍히 여기심 만으로 말입니다.

 

즉 이제는 역사나 행함이나 시간 공간이 아닌

주의 책에 기록되심만으로만 대하겠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인간의 믿음을 원치 않고, 보시지도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마주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율법이나 의문이나 모호함이나 흐릿함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곧 그렇지 않은 상대적인 것을 도출시키면서 한다는 거죠.

곧 흐릿함과 모호함 의문으로 하는 것을 도출시키면서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음과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음과

광야 곧 죽음 속의 백합화 가 아닌 솔로몬이 입은 옷으로된 것과의 대조로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어찌 뒤 바뀐게 아닙니까?

이게 영광이고 저게 저주입니다.

야가 첫째고 쟈가 둘째입니다 라고
엇갈렸습니다 라고

뒤바뀌게 설명한 것 아니냐? 실수 아니냐? 라고 말이죠.

 

아닙니다 제대로 말했습니다.
일부러 도드라지라고(돋보이도록, 특이성) 팔을 일부러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분명 얼굴과 얼굴로 본다고 했는데

그 얼굴이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라는 겁니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란

결국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덮쳐진 모습으로써의 사랑이기에

미움이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얼굴

미움 받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흠모할 모양이 전혀 없는 보자 마자 얼굴 돌리는 얼굴인데

어찌 마주 보는 얼굴이겠느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변질 되느냐?

변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넉넉히 이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얼굴을 돌렸지만
주님은 그 새까맣게 타버린 태양빛에 그을린 얼굴을 들이대십니다.
 

오히려 사랑을 미워하는 그들이 보충물로써 작용함으로써 사랑에 말려드는 겁니다.

올무를 놓을려다가 도리어 올무에 걸려든다는 겁니다.

이렇게 미움의 세력을 들추어내는 식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흠모할 모양이 없는데

흠모할 모양으로써 나타나는 얼굴을 상대적으로 도출해 냄으로써(광명한 천사의 얼굴의 마귀)

그 비교로써 등장한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처럼 말입니다.

 

그 주의 얼굴 곧 주의 오른팔이 어떻게 나타나던가요?

복음서에서 의도적으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예수님의 활동 전체가 그러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주의 오른팔은 어떻게 기능하던가요?


꼭 바리새인들로 부터(자칭 의인, 자칭 하나님의 자녀, 자칭 빛의 자녀) 부정되는 자들에게만
주의 오른팔 곧 예수님이 주의 얼굴로써 나타납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은 또는 다윗의 정신 곧 다윗의 언약은

바로 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으로써

그 자리에서 주의 오른팔을 외치고 부르짖는 겁니다.
다윗 자신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다는 겁니다.

 

지금 시편 80편이 바로 그런 입장입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쫄딱 망했는데
현장에서 잡혔는데
주의 얼굴이 나타나
주의 얼굴을 대하여 뵈옵고서는

주의 얼굴과 주의 오른팔을 외치는 겁니다.

다윗이 그랬거든요.

 

현장에서 잡혀서 마귀의 송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잡혀와야

또렷한 얼굴이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겁니다.

명료한 십자가의 용서가 밝히 보이는 주의 오른팔이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생뚱맞은 표현을 하는 겁니다.

 

분명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바리새인의 고소에 의해 송사에 의해 잡혀왔는데

그 여인에게 묻는 물음이 바리새인과 다릅니다.

마귀와 다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 박으라 그렇게 목터져라 외쳤는데

정작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물음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왜 너는 나를 억울하게 죽이려 드느냐 라고 묻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그것은 의문이다는 겁니다. 모호해요

 

명료하고 또렷한 살리는 영은

 

도리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물음입니다.

 

그 물음이 우리를 완악함을 눈 녹듯이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발악하며 진노로 가득한 굳어버린 몸을

눈 녹듯이 녹여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의문의 몸, 모호한 몸을 지킬려고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것을

더 이상 챙길 이유가 없이 눈 녹듯이 녹여버리는 그 물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마귀가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해서 감시카메라에 다 잡혀버린 책잡힌 송사꺼리에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용서 앞에서

눈 녹듯이 다 녹는다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의 용서다 다 완료되었기 때문에

 

눈 녹듯이 녹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앞에서

 

뭐뭐 지켰다는 둥

십이 이조를 드렸다는 둥

남을 7번 용서했다는 둥

안식일 지켰다는 둥

 

등등이 오히려 의문으로 죽은 것이다 라고 밝혀지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문을 밝혀버리지 못하는

또렷함은 또렷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의문이니 말이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이제 눈 녹듯이 녹는

 

이 사랑 앞에서

이스라엘이 망해도 상관 없고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도 상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상관 없고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 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이 없음을 거쳐서 주의 얼굴이

죽음 속에서

불 속에서

광야 속에서 들의 백합화들의 증거와 노래로써

명료하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음성 외에는 들을게 없습니다.

딴 소리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자꾸 모호한 의문을 외칩니다.

남들은 다 8번 용서하는데? 왜 너는 7번 밖에 남을 용서 못하느냐?

남들은 다 안식일 지키는데 왜 너는 못 지키느냐

남들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는데 왜 너는 세 번 부인하느냐?

 

이 따위 소리로 고소를 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딴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명료하고 또렷한 것만 묻는 겁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밝히 보이는데 왜 저딴거로 따지냐 말이죠?

 

참 신기하게도 교회를 다녀봐도

누구를 만나봐도

 

저 딴거 저 의문의 것만 따지는 인간들 밖에 없습니다.

죽이는 의문들이니까 죽이는 살인의 소리 빡에 못하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저에게

 

너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라고

 

명료하고 또렷한 말을 하는 놈을 못 봤습니다.

 

그저 돈만 노릴려고 다가오다가 돈이 없다 싶어 다들 피해가버리는 식입니다.

마치 시체를 본냥 부정탈까봐 말이죠.

교회 사람들이 더합니다. 완전 미신에 빠진놈들이 교회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 다들 피해 가듯이 말이죠.

 

그저 돈 되는 놈만 챙기는 식이다는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의문인 주제에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 사람이 영을 외친게 되게?

인간은 어디까지나 육일 뿐입니다.

 

살리는 영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얼굴이라고 합니다. 주의 얼굴 말입니다.

즉 들이댄다는 거죠.

왜 들이댑니까?

명료하기에 명료한 것을 최초로 물으시고자 말입니다.

그 명료한 물음은 딱 하나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참으로 대담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방금 외쳤던 우리들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는 것은

 

더 이상 의문으로 하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하겠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거죠.
이제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단번에 다 이루었습니다.

의문은 이제 없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오히려 상대적인 의문의 것들이 다 들통당하면서

죽은 시체마냥 수면 위로 떠 올라서 그 동안 살아있는냥 설쳐대었던 것들이

죽은 시체로 둥둥둥 물위로 떠오르는 겁니다.

어 저거 어제 이런 말로 꼬시더니 그게 사기였구나?

어 저거는 내일 뭔가 획기적인 것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하더니 오늘 시체로 떠 올랐네

 

마치 과거에 밧데리로 작은 또랑에서 물고기를 잡듯이

또렷하고 확실한 것이 밝히 보이니까

오히려 의문의 것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수면위로 그 감추었던 것을 들추어내더라 말이죠.

의문이면서 의문 아닌척 했던 것들이 속속히 드러나면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의문 속에 이스라엘도 포함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본인을 끙끙 거리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만들겠다고 했던 그 짖 또한 모호하고 이스라엘도 점점더 모호해지는 것을

 

주의 얼굴이 등장하고

주의 오른팔이 등장하니까

 

명료하게 그 의문의 이스라엘은 쫄딱 망하는 겁니다.

망하니까 이 보다 더 또렷한 것이 없거든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듯이 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문을 망하게 하는 그것은 또렷하다는 겁니다.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여호와가 그렇게 하신 일은 명료하다는 겁니다.

의문을 반복하는 것을 더 이상 반복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 여호와의 일하심 만큼 이 보다 더 또렷함이 어디있느냐 말이죠.

 

그렇기에 이미 완료된 이스라엘을 더 이상 내가 어떻게 잘해보겠다고 손댈 이유가 없도록

아예 손 못대도록 하셨다는 것 자체가

쫄딱 망하게 하셨다는 자체가

명료한 주의 오른손이 나타난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의문으로 할 필요가 없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겁니다.

 

율법 지킴이나

말씀 지킴이나

그런 것으로 하지 않고

이미 다 이루심 으로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만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 만으로 말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기에

이제 영으로 즉 그 어떤 육이 개입할수 없는 그 단절이

오히려 또렷하고 명료하게 다 이루었기에

살리는 영이 외치는 겁니다.

광야의 들의 백합화가 증거하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이게 얼마나 또렷하면

의문의 것을 다 없애 버리시면서 까지 물으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무화과 나무 잎이 말랐다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우리에 양떼가 없다고

그것만 신경쓰는데

사실 그게 있어봤자 또 의문이다는 겁니다.

모호함만 반복되는 겁니다.

그것이 없어질까봐 굶어죽을까봐 종노릇하듯이 의문을 반복한 것을

제대로 끊어버리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끊을수 없는 진짜 명료한 영이지

이것 안 보이면

계속 의문만 반복하다가 죽이는 것에 죽는 겁니다.

 

사람들이 웃끼는게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자꾸 너는 율법폐기론자이니 이단이다 라고 우기던데

 

율법을 왜 폐기해요

절대로 폐기하면 안되죠

 

율법이 없어져 버리면 지옥 갈자가 없어져 버려요

그럼 말라꼬 천국이 있습니까?

천국이 있을 이유가 사라지는데~~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은 지키라고 가입이 된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아니 율법 지키지 말라메?????

 

제가 언제 율법 지키지 말라고 했습니까?
본능인데 인간이 과연 안 지킬려고 할까요?
지킬려고 발악을 하는게 인간의 몸인데~~~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른데

언제요~~~

 

율법 지킬 인간이 없다는 거죠.

인간은 사기를 칩니다.

남을 속여요

자신도 속여요

율법을 못 지키도록 했는데

율법을 지켰다고
자꾸 우깁니다.
지킨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의문의 증서를 몸에 기억 기록하는 겁니다.
메모리에 저장합니다.
뇌 기억에 저장된 것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삭제할 수가 없어요.

 

천만 다행히도 십자가의 피가 삭제합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 의문의 증서, 기록, 저장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즉 모든 육체를 찢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도 찢어버리잖아요

 

주로 반발하는 사람들이 율법 못지키도록 했다는 말에는 반박 못해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

꼴에 문자를 자기도 해석할줄 아니

그거 반박했다가는 자신들이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게 될까봐 겁이 나서 반박 못합니다.

 

그런데 자꾸 꼬투리를 성화론자들이 잡아요

율법을 못지키도록 했지만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또 이제 말도 안되는 사기를 칩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성령이 오면 율법을 지키도록 가능성을 줬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국의 가장 정통 보수 신학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마귀들 이지요.

이 말도 안되는 사기술이 기독교 수천년의 교리와 신학을 형성해서

결국 복음보다 사람들은 이 의문의 죽이는 육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것이 현대교회를 이루고 있구요.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냐 말이죠.
 

율법을 못 지키도록 했지만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게 저들의 결론입니다.

그렇다 보니 성경 보는 눈에 전부 그런 해석 외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십자가도 심지어 그런 식으로 해석하거든요.

 

즉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아본적이 없다는 증거죠.

살리는 영의 음성보다

 

의문의 죽이는 육으로 영 흉내 내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형성하는 겁니다.

 

참으로 다행인데

그래봤자 그런 교회 오늘 시편 80편의 이스라엘 멸망처럼

어차피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IMF 사태때

정작 미국의 그 유명한 수정교회? 맞나?

쫄딱 망했죠

그런 교회도 망할정도면 이미 모든 교회는 다 망한 겁니다.

 

망하니까 비로소 주의 얼굴이 보이는 겁니다.

안 망하면 그 의문을 붙잡고 계속 반복하기 바쁠텐데 누가 주의 얼굴 보겠습니까?

 

이제 다윗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등장이 비로소 보이는 이스라엘의 망함으로 본격적으로 개시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마귀처럼 보충물로 작용하듯이 상대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여전히 잔상의 여운으로 남은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별에별 운동을 다 펼칩니다.

마치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처럼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기여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소환하겠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완료된 이스라엘의 활동은

안보이니까 안보겠다는 식입니다.

 

안 보인다고 활동하지 않는 겁니까?

 

누가 말했더라?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고 양탈늑대무리 권씨가 했던가?

 

주님의 살아계심 때문에

구지 우리는 눈에 보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쫏아가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에 발목잡혀 버리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 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게 활동하십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말이지 말입니다.

 

눈에 안보이면

없으면 없는 겁니까?

 

보여야 믿습니까?

 

보이는 것은 의문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을 쫄딱 망하게 했던 이방나라들이

이제는 이스라엘은 눈에 없어져 사라져 버렸고

자신들만 눈에 보이도록 또렷하게 되었다고 좋아라 하지만

정작 이 없는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방나라가 배치가 되는 것이

 

바로 다윗언약

곧 제가 붙인 별명 얼굴언약에서

 

이스라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방나라는 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없는데 멸망했는데 쫄딱 망했는데
이방나라 자기 손으로 죽여 버렸는데

마치 우리가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인자인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 배치되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얼굴을 주의 오른팔을 나타내심의 사건이 덮쳐져서 벌어지는 겁니다.

 

남은자 7천명이 눈에 보이는 7천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계수될수 없는 7천 입니까?
계수가 불가능한 7천인데 왜 7천이라고 구지 표현했냐 말이죠.
계수될 수 없다면 8천 9천 6천 알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천 중심으로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배치당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눈에 셈을 할수 있는 770번 용서입니까? 셈을 할 수 없는 770번 용서 입니까?

 

490번 용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나를 기준으로 의식하는 셈에 걸림돌이 되는 또렷함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를 기준으로 의식하는 셈에 의문이 되는 셈과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오히려 본다고 하니 못 보고
셈을 할줄 안다고 하니 못세는 겁니다.

차라리 눈 손가락이 없었다면 고침이라도 받았을텐데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배치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여지껏 살면서 남을 7번까지 용서해봤다는 겁니다.

그럼 몇 번 더 해야 천국에 가냐 라는 겁니다.

 

그렇게 남을 용서하는 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 나 라는 자아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남을 용서할 리가 있나요?

없잖아요 네 맞습니다. 아네?

아는 양반이 왜 남을 용서할려고 하냐 말이죠.

 

그게 마귀인데


마귀가 자꾸 남을 7번 8번 용서할라고 합니다.
왜? 몸에 새겨버릴려고
몸에 기록할려고
저장할려고 말입니다.

그거 안 지워지면 지옥갑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는 모호한 용서는 하나 마나입니다.

하지 마세요

 

또 하지 말라고 하니까 율법 페기론자래~~~

실제로 이 문제로 시비걸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교회사람들까지 선동해서 막공격했어요

더 웃끼는 것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권력이 있다고 여기니까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거든요.

권력해 봤자 순간적으로 주님이 부여한 강퍅함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 허깨비 권력에 놀아나더라 말이죠.

그 사람 뿐만 아니라 돈있다는 놈에게도 휘둘리기도 하고 말이죠.

그 정도로 인간은 약하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나 이 문제는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공부하면 해소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

영의 문제이지

육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죽을때까지 부딧히는 문제이니 남설득할 생각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대세입니다.

거의 100%입니다.

 

수 많은 목사를 만나봐도 결국 이겁니다.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니 피할수 없으면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병자들이니까 말이죠.

 

770번 도리어 용서 받으라 라는 말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셈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평생에 770번인지?

1년에, 한 달에, 하루에 인지?

남 용서하기를 다 포기해 버리면 1초에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면

어느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겠냐 말이죠.

나쁜 놈 중에 나쁜놈이냐 말이죠.

490번이 아니다는 겁니다.

490번의 너머의 세계가 용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율법폐기론 운운 차원이 아닌 거죠.

그런 수준 낮은 차원과 급이 다릅니다 급이 달라!!

언제까지 거울장난을 치냐 말이죠.

흐릿함과 흐릿함의 반복이 아닙니까.


다윗언약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는 수준이다는 겁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확실하고 완료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앙할려고 하는 대상물을 모조리 다 없애버립니다.
삭제해 버립니다.
이스라엘도 없고
이스라엘이 없으니 성전도 없고
눈에 뭐가 보여야 신앙할려고 달려들껀데
다윗언약에서는 모조리 비가시화로 만들어버립니다.
이제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무화과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어도 

논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떼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로 즐거워한다네요?????
 

수건으로 광채를 가리우는 수준이 아니다는 겁니다.

가리울 것이 아예 없는 민낯으로 마주보며 대하는 겁니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더 깊이 파들어가고 있는데

겉모양 따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말을 그냥 한 마디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음성입니다.

 

이것이 주의 얼굴을 뵈오리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해야 한다는 둥 등등의 그런 의문의 것들을 한꺼번에 총괄 처리하는

단번에 눈 녹듯이 다 녹여버리는 또렷함이다는 겁니다.

 

770번 용서 받아라 입니다.

 

더 이상 토를 달 필요가 없는 완료요

다 이루심 앞에서

 

그저 썃다마우스

잠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쥐 죽은 듯이 잠잠한 마치 죽음처럼 방불한 이 이스라엘 멸망 앞에서

오히려 더 입을 땔 수가 없도록 허걱 거리게 만드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눈 녹듯 녹이는 십자가의 피흘림이

 

나를 7번 용서할까요? 의문의 의문을 반복하는 나를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주의 영광

주의 얼굴을 봐 버렸네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로 게임오바가 되는 겁니다.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미 다 완료된 십자가의 용서이기에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는 삶을 즐겁게 누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미말에 구경꺼리가 되는 명료한 십자가의 운명을 기뻐하면서 말입니다.

 

이미 사랑이 이겼기에

 

사랑이 오셨네 라고 찬양은 찬양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