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의 반복(기념)되는 충돌사건 (시편 81)

 

 

(81: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81:2, 개역)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81:3, 개역) 월삭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에 나팔을 불지어다

(81:4, 개역)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81:5, 개역)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81:6, 개역) 이르시되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81:7, 개역)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셀라)

(81:8, 개역)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81:9, 개역)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81:10,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81:11, 개역)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81:12,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하였도다

(81:13, 개역)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81:14, 개역)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

(81:15, 개역) 여호와를 한하는 자는 저에게 복종하는 체 할지라도 저희 시대는 영원히 계속하리라

(81:16, 개역) 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눈과 눈을 마주보며 우리 사랑을 노래해요

맘과 맘을 함께 모아 우리 사랑을 노래해요 라는 가사있는데

 

지난 시간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항상 우리는 정반대로 청개구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구원 조차도 우리식의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지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너무 너무 낯설고 생소해서 오히려 이해는커녕 거부감이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충격적인 충돌이기 때문입니다.

이 충돌의 흔적인 트라우마가 나 보다 더 옳았다는 겁니다.

 

저런 달콤한 사루비아 같은 노랫가사말처럼 성경이 되어 있다는 참으로 좋겠지만

정작 정반대의 의미이고

우리는 고로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대해야 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럼 왜 마귀를 거쳐야 하는가?

오늘 시편 81편에서는 원수로 표현되어 있는데

왜 원수를 거쳐야만 하는가?
왜 애굽을 거쳐서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격게 되느냐?

 

그래야 예수님과의 차이를 보게 되는 겁니다. 주의 영광 주의 얼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동일성을 추구하다 보니

마귀를 예수로 꾸며서 생각한다는 거죠.

거의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우상화된 인간이 조작한 예수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을때에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돌을 버렸거든요.

건축자들이 말입니다.

건축자는 집을 지을 때 단순한 기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집 곧 일종의 국가요 나라인데

그 나라를 건설할때에

쓸모 없다고 여기는 것이(즉 싫어함의 반대인 자랑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종의 나그네 고아 과부 인것처럼

황금으로 된 성전을 짖는데 돌이 무슨소용이 있냐 말이죠.
(황금은 영원성 아닙니까? 곧 불멸성)

황금성인데

솔로몬의 영광인데

아름다움인데

 

그러면 추하고 못낫고 못난이고 못생기고 더러운 것은 모조리 다 버려야 하는 겁니다.

흠모할 모양이 없는 것은 싹 다 버려야 한다는 거죠.

싫어버린바인데 어떻게 두겠습니까?

미워 죽을 판국이요, 싫어 죽을 판국인데

 

그러니 쓸모 없다고 여기는 것은 다 버리는 거죠.

오늘날 교회들이 이런 짖을 하거든요.

(마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사람의 손으로 집을, 성전을 지으니

잘 지어야 하잖아요

 

사울왕도 이스라엘 왕답게 하겠다고 하잖아요

다윗왕도 그 짖을 하다가 얻어터졌잖아요.

 

그래서 쓸모 없는 인간들은 다 버리는 겁니다.

황금처럼 아름답지 못하거든요.

성화론자들이 성화되지 못하는 인간은

아무리 가르치고 앞에서 이끌어주고 백날 해도 안되는 인간은

결국 버리는 겁니다. 안버린다 치더라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또 바리새인 보다 더 잘난 인간이 나타나도 안되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성화론자들보다 더 믿음좋고 더 선한 분이 나타나면 성화론자들 손에 죽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버린 겁니다.

가룟유다가 괜히 팔아넘긴게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유대독립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에서는 예수라는 자는 쓸모 없는

다른 엉뚱한 것에 관심있지

유대나라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라는 것을 파악한 겁니다.

그래서 팔아버렸거든요.

 

우리도 똑같거든요.

바로 이런 원수성

 

원수를 거치지 아니하면 우리가 생각했던 구원이나 모든 성경에서 뽑아서 만든 교리처럼 생각한 모든 것들이 사실상 마귀가 의도했던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마귀가 원하는 짖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민낯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얼굴이다는 겁니다.

이 원수성을 죄인됨의 민낯의 얼굴을

예수님의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과 싫어버린바 된 얼굴과 마주보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이지 말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실로암 소경 이야기를 앞의 글에 올리면서

왜 바리새인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봤습니다.

바리새인을 거치지 않으면

즉 우리 속의 죄성 원수성

우리의 민낯의 얼굴을 거치지 않으면

안식일을 바리새인이 원하는 식으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마귀가 의도했던 바 대로 보는 겁니다.

 

다행히도 지금 현재에 바리새인과 똑같은 자들이 오늘날도 교회에 있습니다.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정의사제구현인가 뭔가 하는 것들

소위 차카게 살자 라는 조폭들이 오늘날 교회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런 엉터리 안식일 개념을 곧 바리새인을 거치지 않으면

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든 일을 꼭 바리새인 보란 듯이

마귀 보란 듯이

안식일날 일부러 안식날만 골라서 고치시는가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안식의 주인이 안식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한다고 말해줘도

우리는 이미 의식적으로 바리새인과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기에 그 차이성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벌리시는 겁니다.

 

곧 충돌입니다. 충돌사건

이 충돌이 없으면 왜 저러시는지 알길이 없는 거죠.

불법으로만 의도적으로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 차이를 알게 하실려고 말입니다.

 

그 구원사건으로써 불법사건으로써 출애굽을 이스라엘 속에서 벌리시니

출이스라엘

출교회사건이 되는 겁니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아무리 천재이고 아무리 모태신앙이어도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우리 또한 못 벗어나기에

성령이 이런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의문만 맴돌뿐입니다.

성령이라야 살리시는 영이고, 의문()은 죽이는 것이다고 했듯이 말이죠.

빼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무리 해도 자력으로 안되기 때문에

성령의 주도권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충돌을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충돌이 아니면 그 차이를 알 길이 없거든요.

 

그래서 매일 매일 충돌이다는 겁니다.

 

구원이 뭡니까?

한마디로 충돌입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충돌입니다.

 

우리는 고정적으로 고착화 될려고 하고

심심하면 예정이다고 과거로 동일시 할려고 합니다.

예정론 선택론 구원론이 다 동일시 아닙니까?

황금성과 자신을 일치시킬려는 동일성

 

그래서 쓸모 없는 것들 추하고 더럽고 무능한

고아 과부 나그네 같은 쓸모없는 흠모할 모양이 없는 것은 버리는

이런 사고방식에 고착화 되어 있는 예정론 구원론 선민사상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충돌은 그런 고정성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럼 고정성이 아니라

동일성이 아니라

합일, 일치가 아니라

 

차이성에서 우리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충돌을 누리게 됩니다.

 

이 충돌이 은혜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들어서 희년 은혜의 날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주님 혼자 은혜롭지
우리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고아 과부 나그네이니 은혜의 날이기는 커녕
짜증나는 재수 옴 붙었다고 소금 뿌리는 날이 되는 충돌의 날인 거죠.

 

결국 고정성은 고착화는 선악과의 법 의식입니다.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는 결과가

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사랑이

믿음을 소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는 겁니다.

민낯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말입니다.

안 그러면 너거들 다 죽었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재주 중에 가장 특이한 재주가
사랑 없는 믿음
사랑 없는 소망의 달인들이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교회에 이런 인간들이 수두룩 합니다.

불가능을 억지로 가능으로 만들다 보니
마지막 판에 뾰록 들통나는 겁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줬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일 마지막 맞지요.
사랑을 줬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는커녕 가장 비믿음의 조상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비웃음)
사랑되신 예수님이 미래에서 믿음을 심었기 때문에 비웃음을 믿음으로 바꾼 겁니다.
팔을 어긋맞게 말이죠.

 

분명 우상조각가인데 분명 비웃었는데

누가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느냐 라고

아브라함을 보는게 아니라

누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지를 보게 한다는 겁니다.

그 누구 라는 인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 소망 믿음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라고
사랑은 순서상 제일 앞에 두는게 아니라

일부러 제일 마지막에 둡니다.

 

사랑 때문에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는 거죠,

누가? 믿음의 조상이

누군데 아브라함

 

그럼 소망은

 

지난 시간에 왜 이들 언약과 다윗언약의 차이점이 뭔가 라고 물음을 달았잖아요.

아브라함 언약이나 모세 언약은 뭔가를 자꾸 거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거쳐야 하고 말이지 말입니다.

모세언약은 율법을 거치지 말이지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언약은 제가 별명을 얼굴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안 거친다고 했습니다.

민낯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겁니다.

민낯으로 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죄를 어떻게든 개선해서

손댐이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온다는 겁니다.

소경이냐? 소경 그대로

죄인이냐? 죄인 그대로

 

그런데 자꾸 모세언약때처럼 율법으로 얼굴을 화장을 해서

그 광채로 수건을 써서 나아가게 되니까

엉터리 이다고 했습니다.

수건을 벗으라 말이죠.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민낯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수건(가면)을 쓰는 완악함 완고함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정작 사도바울은 이 율법이 자신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는 소망이 아닌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절망을 거쳐서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얼굴을 누리게 됩니다.

 

그 얼굴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얼굴을 뵈오기 직전까지는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를려고 하나

육체로는 육의 법을 따르게 되니

벗어날수가 없는 절망 속에 갇혀 버렸다는 겁니다.

 

내 속에 마귀가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마귀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절망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된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지

율법 지키라고

안식일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 지키라는 말이군 이라고

그렇게 그런 테두리에서 볼게 아니라

더 깊게 들어가서

지키기는 지키는데 내가 아니라 딴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 딴 분 때문에

우리는 못 지키는 율법이라는 의문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키니 안지키니 라는 수준이 아니다는 거죠.

 

더 나아가는 겁니다. 더 깊게 더 높이 더 길게 들어가는 겁니다.

제사 수준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 수준이다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 곧 상한심령을 원한다는 겁니다.

제사 보다 순종이 낫다 라는 겁니다.

그 순종이 뭡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아닙니까?
제사는 내 쪽에서의 행함 곧 지키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이고 그런거 따지는 동네이고
순종은 주인이 누구냐 라는 졸지에 주인이 생기는 겁니다. 구원자가 생기는 문제 입니다.

환자에게서는 의사가 졸지에 생기는 문제이고
죄인에게는 구원자가 생기는 문제이고
안식일에는 안식의 주인이 생기는 문제입니다.
책임지는 섬기는 주인이 생기느냐를 따지는 동네이다는 겁니다.
순종의 동네에서는 말이지 말입니다.
주인 자신의 영광을 위해 동원되는 사건 뿐이다는 거죠.
그것이 민낯의 세계입니다.
더 좋은 더 나은 가면을 쓰는 동네랑 너 어떤 가면 섰니? 라고 가면 자랑이 아니라
정반대로 있던 얼굴 마저도 벗겨버리는 누가 누가 제일 못생겼느냐로 그 얼굴 벗기는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거죠.
내 죄를 글쎄 저 의사가 고쳤어 라고 의사를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게 나를 개입시켜서 운운하는게 아니라(동질성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배제 되고 소외당하고(차이성, 단절성)

어떤 인물의 초대 때문에
저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환자 죄인 고아 과부 나그네

선물(성령- 살리는 영으로 하지,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을 격도록 하게 한 겁니다.

 

이제야 다윗언약에서는 바로 민낯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이지 말입니다.

그 싫어버린바 된 주의 얼굴을 대하면서 말이지 말입니다.

 

분명 그 얼굴은 아브라함 언약때(야곱)
모세언약 때 로 치면 그 얼굴 봤다가는 죽는 겁니다.

그 죽음을 제거해서 주의 얼굴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대하는게 아니라

죽음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겁니다.

그러면 활활 타오르는 주의 영광 아래에서

주의 얼굴 아래에서

여호와의 불 속에서

이제 의문의 것들은

그 불순물들은 다 제거된채로

민낯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이 얼굴을 이 영광을

여섯날개 가진 천사도 감당하기 어려워

타죽을까봐 여섯날개로 감싸는 가운데

 

우리 인간은 무슨 수로 이 영광을

이 얼굴을 대하여 보겠습니까?


누가 버틸수 있겠습니까? 몸이 타 버리는 데!!!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 속에서

유일한 것은

주의 긍휼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십자가? 불가능 합니다.

십자가를 믿을수 있다고요?

구라치지 마세요

구원장사 하는 버릇처럼

십자가로 용어만 바꾸어서 또 사기치는 겁니다.

십자가는 믿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입니다. 거리끼는 겁니다.

유대인도 안되는데 우리 이방인이 무슨수로 말입니까?

 

그 불가능 속에서 그 어떤 원인 없이

그러니까 불가능하죠

원인이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덮쳐진 것으로 십자가를 믿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내가 믿는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나를 믿는 겁니다.

졸지에 믿음이 나를 대상물로 삼았지

내가 믿는다고 대상물로 삼아서가 아니다는 거죠,

 

십자가가 나를 대상화 했다는 겁니다.

 

결국 나를 용서해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언약

얼굴언약

곧 긍휼언약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그냥 사랑했다는 겁니다.
이유 있으면 사랑 아닌 거죠.
그것은 조건이지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양탈늑대무리에서 그 문장을 그 단어를 그 말씀을 이용해서 또 조건을 다는 겁니다.

조건을 안 달면 그들은 불안하거든요.

사랑으로 한 말씀을 그들은 조건으로 바꾸는 겁니다. 기가차죠.

 

지금 베드로가 마귀의 밀까부듯이 까부는 송사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에게 잡혀온 베드로는 죄책감도 사치일 정도로 엉첨난 송사 앞에

죄책감보다 수천배 더한 무거운 짐을 짋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마음껏 베드로를 농락합니다.

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

예수님은 너를 몇 번이나 살려줬니

그런데 너를 스승을 배신하고

너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쳐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장담을 했잖아

이 거짓말 쟁이야

이 배신자야

이 은혜도 모르는 놈아


너 지옥 가도 싸지?
예수님에게 결제 받아야 하니까
니 스스로 시인해!!!

그게 바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누가 벗어날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완전 좋아라 하니 모든 무기로 쏘아붙입니다.
 

혼자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도 엄청난 무게인데

거기에다 마귀의 송사는 수천배나 더한 무게로 짖누릅니다.

 

여기에다가 이제 예수님 앞에 서면 이제는 마귀의 송사 보다 더 수만배나 더한 무게겠지요?

 

그래서 고개도 못 듭니다.

 

그런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내가 말을 먼저 하기 전에

베드로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먼저 하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앞서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주님의 섬기심이 먼저 오시는 겁니다.

주인이 말입니다.

우리는 종으로써 드디어 사랑의 노예가 된 겁니다.
사망의 종노릇이 아니라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을 목겨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 사랑언약입니다.

 

새언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민낯의 얼굴을 예수님께 못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화장이라는 가면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수건 곧 얼굴에 광채나는 그 영광스러움을 우찌 부인하겠습니까?
자랑하고 싶어 미치는데 그 정도로 영광스러우니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81편에 나오는 원수가 그 가면을 벗겨 줍니다.

베드로를 잡아온 마귀가 그 가면을 벗겨 줍니다.

배드로의 가면을 말입니다.

마귀는 베드로를 잡았다고 좋아라 하겠지만

정작 베드로 좋으라고 하는 줄도 모르는 겁니다.

 

마귀에게 완전히 발가 벗겨진 베드로의 민낯을 보시고

주의 얼굴을 비추시는 겁니다.

그 영광의 얼굴

사랑의 얼굴 말입니다.
섬기시는 주 그리스도의 얼굴을 말입니다.

더 이상 구차하게 다른 것들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그 사이에 둘것이 없습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것도 중간에 낑기면 안됩니다.
이레에 두번 금식 했다는 것도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다는 것도 중간에 낑길수 없는

아무것도 예수님의 얼굴과 나의 발가벗겨진 민낯의 얼굴 사이에는
그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로 태워보세요 남아 있으면 그것이 영원한 겁니다.
그런데 불에 다 소멸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죄도 소멸되고
잘남도 소멸됩니다.
졸지에 재만 소멸된 증상만 있을 뿐입니다.

빈 공백 입니다.(십자가)

 

우리는 그 불속에서 주의 얼굴을 보면서 춤을 춥니다.

주님이 피리를 부르시니 안 출수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사하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우물 바가지 던지면서 좋아라고 기뻐 춤춥니다.


주님이 사랑하느냐 라고 먼저 물어주시니 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괜히 마귀가 남(베드로) 좋은일만 한 거죠.

 

자 바로 이런 사랑언약 곧 구원사건을 반복하시는데 있어서

오늘 시편 81편은

그 구닥다리 같은 과거의 출애굽사건, 그 구원사건을 다시 언급합니다.

즉 과거가 아니다는 겁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는 겁니다.

구닥다리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는 겁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에게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베드로 꼴이 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쫄딱 망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귀한테 잡혀오는 가장 큰 월척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출애굽 사건을 다시 벌이겠다는 말은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과 주변국가의 상황이

출애굽때의 배치상황으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봐도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는 겁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이스라엘 본인이 애굽인줄 모르니까 말이죠.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사탕아 물러가라 어딜 감히 사루비아같은 달콤한 말로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느냐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있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썩 물러가 훠이 훠이 ~~~~~

 

오늘날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의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이 안 벌어집니다.

십자가 사건을 옛날 구닥다리처럼 취급하거든요.


아니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 불안증을 땜빵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성화론이다는 거죠.
개혁주의 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한테 이미 잡혀온 베드로 신세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뭔짖을 해도

이스라엘 스스로가 죄를 자력으로 씻어낼 재간이 없는 상황의

역사적 배치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마귀세상 속에서 말입니다.

거짓선지자의 말이 맞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쫄딱 망할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그러니 거짓선지자의 말만 들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라는 주님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이나 했겠냐 말이죠.
그 동안 왜 따라다녔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하고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간 그 모든 시간들이

다 날라가버릴려고 따라 다녔겠냐 말이죠.


이게 의문의 동네에서 벌어지는
예수님나라가 침략한 구원전쟁이다는 겁니다.
출베드로 사건입니다.

이 충돌 이 가면벗기기 민낯만들기의 섬김이 없다면 

오히려 의문의 가면만 더더욱 두꺼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통해서

즉 애굽을 통해서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영광 받으시듯이

 

마귀 곧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를 통해서

그 가면을 발가벗기는

민낯으로 만들고자(쫄딱 망하도록, 실패케 만드시는 겁니다.)

출애굽사건을 재현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곧 사랑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죽일놈의 사랑 때문에

실제로 죽음 속에 들어가서

민낯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사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물론 사랑이 나를 사랑해야지 말이지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이런 출애굽과 같은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미 구원을 따 놨다고 하니 이런 사건이 일어날수가 없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왜 성경은 계속해서 이 십자가사건만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는데

왜 오늘날 교회는 그 무수한 무한반복의 십자가사건이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뿌리가 아니다는 거죠.

 

이미 저들은 다른 뿌리를 둔 겁니다.

마치 사울왕에게 뿌리를 둔 것처럼

안식일 지키기 라는 의문의 법에 뿌리를 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의문이 없는

모호함이 없는

가면이 없는

민낯으로 대하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다윗언약에 뿌리를 둔다면

이 사랑사건이

이 십자가 사건이

매일 매일 벌어지는 겁니다.

 

무한반복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늘 발가벗기는 가면벗기기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은 마귀는 주님이 벌리시는 구원사건의 보충물입니다.
이용꺼리 입니다.

부정적인 도구입니다.
 

분명 시편기자가 쓴 이 때에

애굽의 존재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애굽의 존재를 마치 있는냥 다시 소환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애굽을 소환했으니

출애굽 사건도 언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놀랍게도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에게 먹혀들까요?
시대상도 다르고
모세때가 아닌 다윗때이고
그땐 노예였지만
고아였지만
과부였지만
잃어버린바 되었지만

지금은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으니 기업이 있으니 임금이 있으니
고아도 아니고
과부도 아니고 
나라의 왕이 있으니 나그네 떠돌이가 아닌데 왜 그날을 언급하느냐?

희년이라는 잔치를 벌릴려고
절기(기념)에 나팔 불려고
춤 출려고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출애굽 사건의 상황이 아닌데???

다윗 지 혼자만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다윗도 몰랐죠.

막 먹고 막 춤추고 막 마시고
옆에 있던 신하가 아니 방금까지 쫄딱 망했다고 울고
쫄딱 실패했다고 울고

왜 지금은?????

다윗에게 구원사건이 십자가의 용서 사건이 벌어졌거든요.
출애굽 사건

그래서 나팔을 안 불수가 없어요.

왕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다윗)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 떠돌이였는데

이제 십자가의 용서로 졸지에
아버지가 생겼고
남편이 생겼고
섬기는 임금 곧 용서의 왕이 생겼으니

여디디야 여디디야 안 춤추고 배기겠느냐?
희년 은혜의 날이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갑자기 생뚱맞게 자기 혼자 이 시편 81편의
구원의 날을 기념하는 춤을 춥니다.

남들은 하나도 안 기쁜데
자기 혼자 말이죠.

 

안식일을 지키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실로암소경을 안식일날 일부러 고쳐서

출애굽 곧 구원하신다면

 

이 바리새인에게 출애굽사건 곧 구원사건이 먹혀드냐 말이죠.
희년이 먹혀들겠어요?
바리새인은 자신이 아무리 봐도 고아도 아니요 과부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닌데!!!

실로암 소경만 신났어요
얼굴을 드디어 보게 되었으니까

주의 얼굴 뵈오리 ~~~~

자신은 얼굴을 볼수 없는 얼굴이였잖아요 ~~
얼굴이 있어도 소용없는 얼굴이잖아요
자기 얼굴도 한번 못 봤는데
드디어 나 보다 나의 얼굴을 만드는
내 얼굴 보다 먼저 그 섬기는 자의 얼굴을 드디어 보는 겁니다.
누구 얼굴이 더 보고 싶겠어요?
자기 얼굴이겠습니까?
주님 얼굴이겠습니까?

춤 안 추고 배길수 있을까요?
막 마시고 막 먹고 막 노래 안 부르고 견딜수 있겠습니까?
섬기는 자를 드디어 만났는데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임금을 만났는데
세상 부러울것 없이 이제 다 가졌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얼굴을 주셨는데
마주 볼수 있는 얼굴을 말이죠.

 

그 분을 놀랍게도 바리새인들 자기들 입으로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 이래로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친자는 아무도 없다고

자기들이 말해놓고

딴사람이 아니예요 남이 아닙니다.
마귀가 너를 고친 자는 예수라고 말해줍니다. 어머 실수죠.

자기들이 먼저 그래놓고

위기의식을 느껴 예수님이 고친 소경을 쫏아냅니다.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우겠다는 식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우리 속에 마귀가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있어서 우리 또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려고 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 쫏아낸다고

교회에서 출교시킨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없던 일이 됩니까?

출애굽사건이 안 벌어집니까?

구원 사건이 없던 일이 되느냐 말이죠.

 

십자가 사건이 안 일어나느냐 말이죠.

유대인은 그렇게 똑똑하다는 유대인은

십자가 사건은 벌어진적 없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우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없다 라고 십자가를 더 말할수 밖에 없는 보충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남 좋은 일만 해요 ~~~~~

 

사도바울이 하도 기가차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뭐 손으로 가려?

십자가 없다 ~~~~~ 영구 없다 라고 없으면 말 안하면 되는데
십자가 없다 라고 십자가를 더 선전하고 있는 겁니다.

 

세계 어떤 구석 구석이든 십자가 사건이 안 벌어지는 장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수는 그것을 가리울려고 합니다.

 

뻔히 밝히 보이는데

실로암 소경은 이제 보는데

저들은 [안보이는데 안보여] 라고 우기는 겁니다.
저기 저 십자가는 안보이는 거야 없는 거야 라고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안 그러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안보이는데 안보여 라고

자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우면서 외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손바닥으로 얼굴 곧 안보겠다고 가리우는 그 방향을 보고

오 그래 고마워 저기있다 이거지? 그래 저쪽 맞네 라고 ㅋㅋㅋㅋ
가르쳐주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주의 십자가는 그 어떤 훼방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죠.
 

바로 이런 현상을 오늘 시편 81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적 구닥다리 이야기냐?

출애굽사건 또 벌어질 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구원만 챙기는 의도라면 당장챙기겠지만

구원이 아니라

원수를 통해서

마귀를 통해서

발가벗기는 용도라면

싫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굴과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전히 주님의 얼굴이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 되는 겁니다.

다들 고개를 돌리는 겁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우는 겁니다.

 

뻔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햇빛에 그을린 얼굴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

 

왜 그렇게 되었느냐 말이죠

 

내 때문에 아닙니까?

 

그래서 대신 매 맞은 겁니다.

대신 형벌을 받은 겁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말입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 허물을 발가벗기시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를 동원하는 겁니다.

 

되도않는 안식일 지키기라는 의문이 아니라

이제 또렷하게 보이는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마귀에게 잡혀오는 죄인 베드로로 들통나는 겁니다.

가면이 시원하게 벗겨져서

아예 알몸이 되니까

비로소 예상치 못한 그리스도의 옷이 예비 되어있었던 겁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제사장 의복 에봇을 이제 세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육체를 내가 내 스스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빨아야만 깨끗해지는 차원의 옷은 이제 없습니다.

 

새옷은 찬송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죽음이 먹혀들지 않는 믿음의 옷입니다.

 

그 찬송의 옷을

그 구원의 옷을

 

지금 찬양자는 외치는 겁니다.

 

(81: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81:2, 개역)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이 구원사건이 즐겁지 않느냐

이 십자가 사건이 신나지 않느냐?

 

노래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출애굽사건이다는 겁니다.

 

광야사건까지 다 포함해서 출애굽사건이다고 했지요? 구원사건

 

그러면 이제 더 이상 광야때의 원망한 사건이 싫다고 다시는 안할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리셋해봐도 어차피 반복입니다.

 

(81:16, 개역) 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그러나 원망했다고 구원사건이 취소되냐 말이죠?

원망할 것 뻔하다고 구원사건이 안 일어나냐 말이죠?

 

예수님은 이제 만나(밀의 아름다운)를 먹었던 자도 다 죽었지만

내가 주는 양식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시 81:16, 개역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반석을 두번쳐서 마셨던 꿀생명수를 먹어도 죽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겁니다.

 

결국 더 풍성하게 다시 반복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시편에 기록된대로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을 달달 외운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면 어쩔수 없습니다.

 

그런다고

인간이 어쩔수 없다고

십자가의 용서가 취소 되냐 말이죠?

마귀에게 잡혔다고

십자가가 손바닥으로 가려지냐 말이죠?

쓸데 없는 손바닥이라는 의문 치워버리자 말이죠.

손 짤라버리자 말이죠.

좀 과격했나요?

손도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손은 100살도 못 넘어서 썩어 없어지는 사라지는 겁니다.

결국 의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천년 만년 영원히 심지어 천국에서 까지 찬양이 됩니다.

어느것이 또렷합니까?

명료합니까?

손은 짜를 필요가 없이 이미 없는 겁니다.

사라질 겁니다.

그러니 가려봤자 안가려진다는 겁니다.

 

차라리 온몸으로

알몸으로

민낯으로써

 

주의 얼굴

주의 영광

 

밝히 보이는 또렷한 십자가의 사랑의 빛에

 

이 몸이 홀라당 다 타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 기쁨을 누리자 말이죠.

 

그 동안 의문에 의해서 시달렸던 몸뚱아리

차리리 진짜 사랑에 홀라당 다 타버려도 상관없는 자유를 누리자 말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이 먼저 물어오시는 그 물음에 의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밝히 보이는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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