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야!! 육신의 정욕을 (탁 탁) 부탁해 ~~~~~~

죄요리는 세프에게 떠 넘겨버리기 ~~~~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개역)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5:21, 개역)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제목: 육체와 성령

 

안녕하세요?

김대식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안것도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근호 목사님 말씀듣다가 우연히 선생님의 싸이트를 방문하게되었고, 사무실에 있을때에는

주로 선생님 칼럼들이나 말씀들을 읽습니다.

그글을 통하여 많은 은혜 받음을 항상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로 선생님이 전하시는 말씀은 그래도 이근호 목사님보다는 이해가 좀되며, 기존의 믿음을 파괴하는

말씀들 뿐인것같습니다.

내가 지금의 교회를 다니면서, 지금시무하시는 목사님의 말도 않되는 설교를 듣으며 은혜를 느낄수있는것도

생각은 이교회를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있지만, 주위 환경이 여의치않아 못나가는것도 전부 주님의 은혜임을

느낍니다. 때가 되면 내가 아닌 주님이 빼주실것이라는 믿음도 생겼고요

단지 내가 이상황을 너무 즐기는 그런 변태가 된건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항상 감사할뿐입니다.

얼마전, 갈라디아서를 읽던중

갈라디아서5:16~26

읽으며 의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성령을 받으면 육체의 정욕을 이길수있다는말인지?

아니면 성령이 육체의 것들을 물리쳐준다는건지?

아니면 성령을 받았으니 육체의 정욕을 이길려고 노력해야하는지

궁굼합니다.

한마디로 위 구절에 대한 설명부탁드립니다.

이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실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정말 궁굼합니다.

김대삭 선생님께 주님으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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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육체와 성령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저는 아무 직분도 아니니 선생이라는 표현은 부담스럽네요

그저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쥐뿔도 아는 것 없이

오늘 하루 받은 것만 그대로 발설할 뿐이지

이런 은혜도 언제 떠날지 모르며 제가 붙잡을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미 답은 나온 거지요.

육체의 정욕을 이기면 과연 그것이 정답이겠냐 말이죠.

과연 며칠을 갈까 말이죠.

사단의 가시를 시원하게 뽑아버리면 그러면 그것이 복음다울까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내 쪽에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내 쪽에서는 아무리 해도 이길수 없다는 것이 명료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명료합니다.

오히려 이겨버리면 또 모호해지고 의문만 더해져

더 큰 유혹 앞에서 또 이겨내어야만 하는 부담감만 더할 뿐이지

주님과의 관계는 신경 못 쓰게 됩니다.

나만 나를 더 내가 원하는대로 다듬고자 하는 나만 더 크게 보일 뿐이지

어떻게 주님이 크게 점점더 크게 보이겠습니까?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다 이렇잖아요

제가 직접 격어봐서 알거든요

모호함만 더하더라 말이죠.

그들은 그런 맛에 사는 종교성(마약)일 뿐인데

방금 글을 올려 놓고 메일을 보게 되었는데

방금 올린 글에서

오히려 마귀를 동원해서 나의 그런 가면을 벗겨주시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냥 마귀에게 잡혀오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기기는커녕 못 이긴다는 거죠.

못 이기니까 그것을 또 정당화 하라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더 지을수 없듯이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 개념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개념 차원이지

사단의 가시라는 주님의 차원을

아무리 사도바울이라도 생각지 못했던 낯선 은혜 아니였겠습니까?

결국 십자가는 우리가 이미 알아내버린 지식에 머물지 않고

매일 매일 낯선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를 주시고자

오히려 그 속에 놓여지게 하신다는 거죠.

이것이 저들에게는 죄를 정당화하고

방종을 유도한다고 하겠지만

오히려 저들은 주님과의 관계를 불안하게 여겨서 그런 겁니다.

왜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기지 않은 맏아들이 아니라

탕자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겁니까?

탕자가 육체의 정욕을 단 한번이라도 어겼던가요?

그렇다고 탕자가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정당화 했습니까?

사도바울도 그런 차원에서는 답이 없고 의문만 더할 뿐이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그러나 육체로는 죄의 법을

그러니 이 의문에서 벗어날수가 없어서

나는 곤고한 자다

그야말로 지옥의 몸뚱아리구나 라고 했는데

그런 원인을 찾아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방식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에서 밝혀주시는 명료한 사랑 때문에

원인 없이 결과를 누리게 되는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원인을 도출해서 결과를 소유할려는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거죠.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용서

곧 미래에서 덮쳐져서 만들어진 결과이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이 아니다는 겁니다.

질문하신 분의 질문도 과거에서 현재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진행하니까

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의도적으로 내 쪽에서 그럼 미래에서 현재로 방향성을 바꾼다고 해도

결국 내 쪽에서 곧 과거의 산물인 나 를 기준으로 하니까

여전히 의문에서 못 벗어나는 거죠.

그럼 의외로 간단합니다.

나를 빼버리고 생각하면 뭐든지 쉬워집니다.

말이 쉽지

나를 뻬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죠.

현대 불교가 인간에게서 신을 빼내는데 성공했다고 좋아라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서 나 를 빼내는데 실패했기에

결국 신을 빼내는데 역시 실패한 겁니다.

그것 조차도

주님 소관인데

참으로 다행히도

아무리 무식한 저도

십자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원인 없이 결과로 믿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믿는 겁니다.

종교의 신앙처럼 믿는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제 나를 내가 더 이상 다듬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십자가가 나를 다듬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원했던 나와

십자가가 원했던 나와의 충돌을 매일 보게 되는 거죠.

내가 원했던 나가 단 한 개도 만들어지지 않고

(자 이것이 너무 심해져 버리면 자포자기하고 남탓하기 쉬운 우울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정당화 할수 없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고자 하는 십자가가 나를 다듬는

십자가의 믿음 보게 되는 겁니다.

(와 이카십니까 주님! 왜 이런 벌리시는 겁니까? 그럴수록 몸에 새겨지는 겁니다. 욥이 격게 되는 까닭없는 애매한 재앙도 결국 십자가의 용서를 보게하기 위한 주님의 조치였다는 것을

미래에서 덮쳐진 사건이라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과거가 형성한 나를 내가 그 미래사건을 해석할려고 달려드니까 알 길이 없는 거죠. 그런데 보여주심 때문에 실로암소경을 눈뜨게 하시듯 보여주심 때문에

뭘 보느냐? 바로 주의 얼굴 때문에 이 의문들이 한순간에 싹 다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 의문을 처음부터 안 가진다 가 아니라

의문이라는 육체 때문에 격을 수 밖에 없는데

못벗어나야 의문에서 못 벗어나야 정상인데

의문에서 벗어나는 십자가의 용서가 명료하게 밝혀주심이 있다는 것에서 눈 녹듯이 녹는다는 거죠.

갈라디아서는 바로 의문에서 벗어났다 라는 주제로 증거되거든요. 그래서 율법을 가지고 십자가와 비교하니까 말이죠.

내가 율법지키듯 내가 나를 다듬는게 아니라

이제 내 손을 떠나서

십자가가 나를 마음껏 다듬는겁니다, 양파 껍데기 벗기듯 자꾸 자꾸 발가벗기듯이 말이죠.

이런 관계성을 말하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말입니다. 율법적관계에서 더 깊게 들어간겁니다. 이제 빼도박도 못해요 글쎄 ~~)

그런 표현으로써 갈라디아서가 표현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믿음이 나를 막다루는 겁니다.

병줬다가 약줬다가

십자가가 나의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고

우리는 의문의 것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라는 것을

안 격는게 아니라

격으면서도 불구하고

주님 쪽에서 나를 다루시는

바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십자가의 용서를 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나 잘남이 아니라

나는 매일 구스여인처럼 못난이 중에 못난이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온유가 떠나지 않는 그 이해할수 없는 용서 때문에

하루 하루를 누린다는 겁니다.

사랑받는 자는 결국 얼굴빛이 빛납니다.

자기자신이 원하는 자기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언제 얼굴이 바뀔지 모르니까 말이죠.

사랑하는 자가 나를 다듬는 얼굴로써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얼굴이 되는 거죠(내가 원했던 내 얼굴이 아니라).

자 그렇게 되면 남의 시선에서

남을 의식하는 나는 이제 없는 겁니다.

결국 나 라는 존재도 타인의 욕망에서 형성된 나의 시선이기에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기 위한 나를 괴롭히기는 없는 거죠.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 라는 즐거움

오늘 나를 어떻게 만드시느냐 라는 설레임만 있을 뿐입니다.

 

두서 없이 막 떠오른데로 벅찬감동으로 적었습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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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도 않되는 복음

 

ㅎㅎ

선생님이란 명칭을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매일 김대식님의 블러그상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진짜 말도 않되는 이복음을...

처음에는 많이 놀라고, 어색하고, 머리에서 천둥번개치고...ㅋㅋ

복음을 알고부터 제일 힘들었던게

은혜를 받으면 뭔가를 해야하는데 뭔가를 하면 할수록 말도않되게 교만해지고,,,

그렇다고 종교적행위를 않하면 뭔가 불안한...

그래서 속마음 숨기고 겉모습으로 하나님께 찬양들였던 나의 옛모습을 선생님의 답글덕에 생각해봤습니다.

은혜와 행위는 종이 한장차인데 너무 엄청난 결과들을 봅니다.

제가 육체의 정욕에 대하여 질문드린것은

말씀을 안다고 막사는것은 "영지주의" 느낌을 지울수없고

말씀을 순종하며 말씀대로 사는것은 율법속에 다시 돌아가는것 같고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사람과 똑같이 사는것 또한 아닌것같고

도대체 행위의 범주가 어떻게 되는지 정말 궁굼한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말도 않되는 질문이라는걸 알고있다는겁니다.

저도 제가 죄인이라는걸 너무 잘압니다.

옳다고하는 일을 해도 나의 맘속엔 다른 흑심이있는걸 주님이 보여주셔서

제가 하는 모든것이 악하고 죄라는걸 너무 잘알지요

근데 이해가 안되는건 그걸로 끝내주시면 되는데, 옛습관(저의 과거)이 불쑥불쑥 육체적으로 치밀어

너무 힘들고, 참다참다, 기도하다,기도하다....

결국 육체의 정욕에 넘어간다는겁니다.

전에는 양심이 있어 자괴감도 깊게 들어 몇날을 고생했는데, 요즘은 뻔뻔하기 그지없어(예수님을

떠나면 않된다는 사실을 알아) 주님을 바라보는 나의 반복되는 모습....

어떨때는 나의 교묘한 마음이 그런 심리상태를 이용해 합리화시켜 스스로 육체의 정욕에 내어주더란 말이지요...

이건 뭐 종합세트지요, 악마의 축제같은 느낌이라고할까...

그렇다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런 육체적인것들이 혐오스럽고, 싫어지는게 아니라

좋더란말이지요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할때는 그래도 그런생각이나 유혹들은 이길수있었는데

지금은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며 맘을 놓아버리니까, .... 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것을 알고부터 나의 생활들이

더 복잡해진것같아요

굳이 육체적인 정욕을 해결안해도 내가 죄인됨을 너무잘아는데, 이렇게까지 스스로에 대한 망신과 리얼한

나의 모습을 알게해주시는 주님이 이해가 않됩니다.

세상사람들 몰래 더 세상사람과 같이 사는 나의 악마성...

저도 굳이 육체의 정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맘속에 일기시작하면, 걷잡을수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오리무중입니다.

이런것도 내가 뭔가를 할력 하는 그런 것이겠지요?

그냥 다윗처럼 그래도 주만 바라보며 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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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말도 않되는 복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윗처럼 주를 바라보는 나 이니

얼마나 성경적이냐 말이죠.

그 동안 주서들은 성경지식을 다 동원해서

성경적으로 만들어낸 나의 모습이니 말이지 말입니다.

(물론 본능이니 어쩔수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주님이 시원하게 깨뜨려주십니다.

다윗도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 아닙니다. 꿈에도 몰랐지요.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할 줄 그런데 그것이 피 자랑 때문이다는 겁니다.
피의 자작극에 말려든 겁니다. 이게 은혜 입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언약을 보면

특히 욥기를 보면

시대상으로는 아브라함 시대이니 아브라함 언약에 해당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언약의 지혜문서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언약에서는 원수 곧 마귀의 등장 때문입니다.

특히 시편에서는 사울왕이나 압살롬으로 구체화 시켜서 원수라고 하지 않고

애굽의 속성이면 다윗조차도 포함된 의미에서 원수인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애굽에 포함된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직접 뽑은 12제자들도 마찬가지 이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저마다의 원하는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는 좌편 또하나는 예수님의 우편

그것도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르르 다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주입니다.

내가 붙여서 주인이 아니라

내가 임금 삼고자한 주()가 아니라(그건 배부른 소리이고)

주님 자신이 직접 알려주시는 섬기시는 주입니다.

내 속의 악마를 건드리겠다는 선언(섬김)인거죠.
주인을 결박해서 늑탈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내가 알아서 주님을 따르겠다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나를 마귀로부터 빼앗겠다는 도둑으로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는

충돌로써 표현한 겁니다. 전쟁, 싸움 말입니다.
출애굽구원사건 말입니다.

 

그것도 죽음을 죽도록 미워하는 사랑이다는 겁니다.(죽음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 아가서)

내가 생각하는 차원의 사랑이 아니다는 거죠.

 

인간 상대 안합니다.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겁니다.

결국 내가 바라는 나의 신앙적인 나의 모습은

바리새인들처럼 마귀를 거치지 않은 겁니다.(이게 진짜 육신의 정욕입니다.)

또 마귀라고 해봤자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뽑아낸 교리 에서의 마귀

또는 신학에서의 마귀겠지요.

바리새인 수준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귀는

인간으로써는 포착 불가능한 마귀입니다. 원수입니다.

마귀도 이렇게 포착불가능한 판국인데

그런 마귀와의 차이성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은 더더더 불가능합니다.

포착불가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마치 메일주신 분의 심정처럼 도통 포착이 되지 않으니

얼마나 주님이 제대로 일하시는 겁니까?

나만 답답한 것이지

제자들은 그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이해한게 단 한 개도 없다는 겁니다.

맨날 욕먹는 거죠 뭐

 

 

이런 예수님을 무슨수로 예수님으로 알아보냐 말이죠.

더군다나 말세에는 지나개나 다 자기가 예수를 제대로 증거한다고 나온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들 지나개나도 성경에 있다고 외치지 않냐 말이죠.

진짜로 성경에도 나오고요.

그러니 성경은 마귀 읽으라고 준 것이다 라고

마귀가 얼마나 말씀을 준수할려고, 말씀을 지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단 사랑은 관심없다는 거죠.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십자가는 절대 못 쳐다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마귀들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변을 둘러 보세요 다 그런 환경밖에 없습니다.

갇혔고 포로된 바인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믿고싶어해도 유대인(믿음의 달인들)은 십자가가 마귀사상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마귀사상이 십자가입니다.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이라고 예수님을 몰아세울수 밖에요.

자신들이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예수님이 하시니 말이죠.

그래서 다윗언약을 통해서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겁니다.

마귀를 거치면 누가 원수이다?

다윗이죠.

사울이 아니라

압살롬이 아니라

그런데 사울은 내버려두고

압살롬은 내버려두고

왜 다윗은 원수아닌데 사랑하시는가가 아니라

원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느냐입니다.

 

아무리 내 쪽에서 원인을 찾으려 해도 원인이 없어요

결과 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사함받는 자의 행복(4)

이것이 다윗언약의 하이라이트입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울왕과 다를바 없이 우리야장군을 철저한 계획아래에서 죽이고

그것을 모세가 모래 덮듯이 아무리 덮을려고 해도

오히려 더더더 밝히 들추어 드러나듯이

다윗처럼 살인해서 은혜받으시겠습니까?

아무나 감당이 안되는데!!!!

모세처럼 살인해서?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해서?

사도바울처럼 스데반집사를 죽여서?

다들 일급살인범 아닙니까?

왜 그런데 이들은 같은 잘못을 해도 용서가 되느냐 말이죠?

주님 자신의 피 자랑 때문이다는 겁니다.

나의 신앙 자랑이 아니라

그렇다면 오히려 거꾸로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사고방식인데

신앙 잘해서가 아니라

말씀 잘 지켜서가 아니라

신앙 자랑이 아닌

 

피 자랑 때문에 그들은 일급살인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충물로써 마귀의 등장이

주의 얼굴의 상대적인 의미로 등장한다는 거죠.

 

욥기에 숨어 있는 예수님이듯이

숨어있는 마귀가 욥기에 출현합니다.

다윗언약으로써 말입니다.

 

그 마귀가 욥을 민낯으로 발가벗깁니다.

욥 잘못 아닙니다. 세친구들은 자꾸 너가 잘못한 원인으로 이런 결과가 나타났으니

회개하라고 억수로 생각해주는 것 같지만

지금 그런 차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욥은

 

사도바울 참 뻔뻔합니다.

내 속의 죄가 그런 짖을 했다고 죄탓으로 돌립니다.

즉 자기 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얍삽하게 바로 로마서 8장에서는 그런 죄 보다 더 큰 분이 있다고

졸지에 인물을 소개해버립니다.

 

그 인물로 인해서 동네가 바뀝니다. 두 개로 갈라진 동네를 보게 됩니다.

저쪽 동네("율법 아래" 라는 이름의 동네)에서 운운하는 차원과
(저쪽 동네에는 내가 주인공으로서 나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야기만 운운하는 겁니다. 내가 정욕싸움에서 매일 지는데 우짭니까? 라는 등등 맨날 나 중심의 사건입니다.)


이쪽 동네("피" 동네)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주고받고 나누는 것들이 전혀다른것들만 운운합니다.

(그러나 이쪽 동네는 예수님만 주인공으로써 나에게 저 양반이 무슨짖을 했는가만 운운합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세요????????????????????? 평생을 물음표를 매일 매일 달아야 하는

내가 반드시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왜 당신이 주인공인거죠????????????)

동네가 달라요 동네가

의문의 동네에서는 아무리 말씀을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또 의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물음표 하나 안달렸는데 나만 주인공 됨이 확실한데 의문은 점점 더해져가는)

그런데 예수님의 피자랑 동네에서는

말씀 하나 지킨적이 없는데

오히려 일급살인자인데

오히려 피 자랑이 더 크다는 겁니다.

(매일 매일 피 라는 주인공 땜에 나 라는 주인공이 아작나는 명료성만 더해감

그 증거가 당신 도대체 누구요? 라고 물으심 바 되며

부르신 바 된다는 겁니다.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의문의 동네의 시선에서는 일급살인자는 절대로 피 자랑 못할꺼다고 여겼는데

정작 본인들은 피 자랑 한 번 못하고

일급살인자가

날때부터 소경인자가

단한번도 주의 이름을 불러본적이 없던자가

하나님도 단 한번도 모르던 자가

 

탕자가

주님의 피 흘리신 그 피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니 동네가 달라요 달라

의문의 선악 동네는

그 피를 자랑하는 피동네는 자기시선에서 보듯이 여전히 의문이고

피동네의 은혜에서는

일급살인자 됨 조차도 은혜가 벌린 자작극이였다는 것을 알고

뻔뻔스러워지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이니가 피 자랑한다고 우짤래 라고 당당하다는 거죠.

지금 나는 어떻게

내 모습은 어떻고

내 지식 수준

내 재산 수준

내 신앙 수준 어떻고 하는 문제는

의문의 동네이니까

거기서는 백날 따져봐야 답이 없어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네입니다.

육체라는 몸을 가진 우리는 어쩔수 없어요

그런데 피 동네를 보니

그런 것들이 하등 문제꺼리 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라고 따지는 그 심각성이

피 동네에서는 목숨이 7천번이나 남아있으니

겨우 한번 죽는 목숨까지고 전전긍긍 끙끙 거리지 않는 겁니다.

목숨이 한 번 뿐이니까 내 삶 내 인생 내 목숨

소중히 조심 조심

바른길로 가야한다는 둥 등등이

7천번의 목숨을 가진 자에게는

그 따위 목숨 버려라 라는 함부러 막말하는 뻔뻔스러움이 되는 거죠.

가짜목숨은데 목숨도 아닌데 목숨인척하니 웃끼는 거죠.

그 정도로 심각한게 없기에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동네가 바뀌니까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로만 들리는 겁니다.

우리는 진짜로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를 해야만 합니다.

말 되는 소리 하면

바리새인입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숨어있는 마귀를 인간이 무슨 수로

숙주일 뿐인데 말이죠.

그러니 불가능한 말을 지금 하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 보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겁니다.

예수님과 자신은 동일시 하는 겁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럼 다윗언약은 이 원수를 거침으로써

동일시가 아니라 차이성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가시가 박힌 것이

심각한게 아니라

내만 남았다는 둥 열심히 특심이다는 둥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가시로 더욱더 은혜를 누리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가 주체가 아니라

사단의 가시를 박으신 주님이 은혜의 주체라는 거죠.

그럼 우리는 이 원수덕분에

사단의 가시 덕분에

주님과 차이나는 차이성을 누리는 겁니다.

그 원수가 바로 나 이며

나는 늘 십자가의 원수로써 용서받는

원수사랑의 실현을 예수님이 나라는 원수를 가지고서 실현한다는 겁니다.

보통 원수사랑은

내가 있고

원수가 따로 있고

그 원수사랑을 했는지에 대한 합격도장을 가지시고 판단하시는 주님이 따로 있잖아요?

문제는 원수가 없어요.

내가 원수를 사랑 하는 것을 실천할려면

원수를 새삼스럽게 맹글어야 하는데

아무리 눈씻고 봐도

원수를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우짜죠?

그러니 나만 남았나이다 원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원수사랑 안하면 지옥가고 천국 못가지

원수를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 이지

주님 간단합니다.

나를 원수 만들고자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을 제시해 버리니까

바로 우리는 원수로 돌변해 버립니다.

제자들도 고맙게도 원수가 되어 줍니다.

제자들 대표 베드로님께서 꼴좋게도 마귀에게 잡혀와서

그 송사에 도장찍으라고 마귀가 예수님께 다구칩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양상이

동네가 달라요 달라

바리새인 동네는 안식일 지켰냐 안지켰냐 인데

피 동네에서는 마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도 안보이는

마귀만을 상대로한다는 겁니다.

그 마귀를 거쳐서 인간을 보시는 시선이다는 겁니다.

주의 얼굴 곧 주의 시선

스케일이 달라요 달라

저쪽은 의문이라는 죽이는 것으로

행함을 따지고

역사를 따지고

 

여기는 살리는 영으로

영의 스케일입니다.

묵시 스케일입니다.

시공간을 날려버리는 스케일

빈터 빈공간 블랙홀 스케일 입니다.

다윗언약은 바로 묵시적 스케일입니다. 우주적 스케일입니다.

우주 전쟁입니다.

참선지자는 막 우주전쟁을 혼자해요.

거짓선지자와는 스케일이 달라요 달라.

사도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우주전쟁을 해요.

대형블록버스터

피 동네 예산이 목숨 그것도 아들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로 쏟아 부어 만든 영화이고

저쪽 바리새인 동네는 독립영화 2-300만원 저 예산 영화입니다.

시골동네 양아치들 팻싸움 텃새싸움일 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수천억 수억조의 목숨이 1초에 날라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스케일입니다.

그 정도로 집단적이고

행함의 동네는 겨우 칼부림으로 한 명이 죽어서

경찰이 동원되고

공범을 찾니 마니 하는

뻔하디 뻔한 역사동네이다는 거죠.

개개인을 따지는 동네이다는 겁니다.

너 뭐니 ~~~~ 라고

사도바울처럼 스데반집사 하나 죽여도 눈하나 깜짝 안할수 있겠습니까?

다윗처럼 우리야장군 하나 죽여도 눈하나 깜작 안할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살인하라를 권유하고 있나요?

그런 겁니까?

그런데 기가막히게도

예수님 하나 죽이는데는 다들 암묵적 동의를 합니다.

아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다들 동참하고서는 입싹 딱는 겁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말이 오고간 것도 없이

증거 하나 없는데도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집단적으로 암묵적 동의를 하는지 안 신기합니까?

 

?

인간이 아니거든요.

? 신도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였다는 것이 인간의 시선입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시선에서도 인간은 인간도 아니요 신도 아닌

마귀 그 자체이다는 시선입니다.

십자가가 더 명료하게 밝혀버린 겁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럼 스케일이 달라진 겁니다.

 

이쪽 동네 저쪽동네가 십자가로 분명하게 또렷이 갈라진 겁니다.

 

시골동네 팻싸움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주전쟁입니다.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나를 쭈물떡 쭈물떡 거리게 할거야 ~~~~

그런 시골동네 시선에서 쳐다보냐 말이죠.

그런짖 하지말라고

아예 예수님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 죽여놓고서는 뭐! 죄책감(양심) 느끼자꼬?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자꼬?

그럼 너는 지금 당장 살인해도 된다는 논리가 아니냐?

아니 제가 언제요?

지금이 아니라

이미 당신이나 나나 살인했잖아요

야이 이 살인마야?

a. 너는 살인했다고 인정할지 몰라도

난 안했다.

b. 에라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굴 속일려구 ~~~~~~

자 지금 제가 이야기의 차원을 우주로 넓혀버렸습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에서 7천명이 남아있는 우주로 넓혔습니다.

시골 동네 이야기 하실래요?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 ~~~

우주 동네 이야기 하실래요?

 

그야말로 미친 똘아이가 되지 않고서는 우주 동네 이야기 못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시골 동네에서 자기에게 미쳐 살뿐입니다.

그럴빠에

스케일을 나 라는 육체동네에서

우주로

우주의 사고방식에서 놀자 말이죠.

저쪽 동네는 답이 없어요. 우주를 못 심어요

그냥 내버려두세요

나를 내버려두세요 어차피 의문만 맴돕니다.

그냥 냅뚜고

이쪽 우주 동네를 구경하자 말이죠.

자꾸 우주선 쏘아 올려서 우주에서는 어떤 언어가 통하는지?

어떤 사고방식이 통하는지?

왜 저쪽 동네와 다른지

그 차이를 누려야죠

아니 지옥과 천국이 사고방식이 같으면 말라꼬 갈라지겠습니까?

언제까지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심각한 문제

그거 답 없어요.

백날 따져도 답 없는 모호함 의문 뿐입니다.

내 육체의 정욕을 해결했다는 순간 또 미끄러져 버립니다.

답 없으니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니라

저쪽에서 이미 완성된 답만을 즐기면 됩니다.

그것을 다윗은 참으로 뻔뻔스럽게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장군을 죽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 때문에 찾은 답 바로 상한심령이다는 겁니다.

제사에서 답 못 찾습니다.

번제에서 답 못 찾습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못하는 답을

이미 주님이 또렷하게 완료했습니다.

바로 상한심령입니다.

 

내가 안 죽는 이상

아니 죽어도 지옥이면 어차피 의문에서 못 벗어나니

나에게서 답을 찾지 말고

나를 통해서도 답을 찾지 마세요

그런 나를 찢는 회개라는 주체 곧 예수님이 오시면 저절로 답이 됩니다.

내가 회개 하는게 아니라

회개가 나를 다루는 겁니다.

상한심령이 나를 다루는 겁니다.

나는 백날 상한심령 되어봤자 상한심령 안됩니다.

주님이 다 상한심령이 되셔서 오신 겁니다.

십자가라는 우주가 나를 십자가에 그 정과 욕심을 못 박을때에

비로소 답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우주에서 노니까 말이죠.

 

우주 세프에게 죄요리를 육신의 정욕을 부탁하자 말이죠

요리도 못하는 내가 요리 할 생각말고

그 정과 욕심도 자꾸 나쁜 것으로 보는데 알고보니

내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고 있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마귀적이였다는 것을 우찌 알았겠습니까?

 

안식일 지키기가 육신의 정욕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1사랑 2희락 3화평 4오래참음 5자비 6양선 7충성 8온유 9절제

성령이 하는데 왜 자꾸 내사랑 내희락으로 만들고자 하는 육신의 정욕을 펼치느냐 말이죠.
마귀를 거치지 않은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과 반대이어야 하는데 육신의 소욕도 성령의 소욕도 똑같은 동일성이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육신의 소욕도 매일 매일 꿈꾸는 9가지 열매인데?
그래서 마귀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이 하는데 왜 자꾸 내사랑 내희락으로 만들고자 하는 육신의 정욕을 펼치느냐 말이죠.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자를 죽이느냐 말이죠.

의문으로 막 죽여요

성화론자 짖이 이런데도 하고 싶으신가요?

자꾸 포르노 야동만 육신의 정욕으로 보는데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을 기쁘게하는 그것이 오히려 더 심각한

육신의 정욕이다는 겁니다.

내가 남을 7번 용서했다는 그 육신의 정욕

내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절대로 십자가에 죽으시면 안된다는 그 육신의 정욕이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죽이는 의문이거든요.

 

그거 살리는 영으로 하시는 겁니다.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은 내가 사랑 온유 화평 등등의 9가지를 추구할려는 육신의 정욕을 깨뜨리겠다는 겁니다.

 

너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진짜 내가 사랑할려면 화목제물 내어놓아라 말이죠.

내 목숨? 아닙니다.

내 목숨 보다 더 아끼는 내 아들 이삭을 바치라 말이죠.

어떤 누구도 자기 아들 바치는자 없어요

자기를 바치겠다는 인간은 많아요 어쩌다가 생겨요

그러나 자기아들은 죽어도 못 바치거든요.

 

그렇다면 사랑은 없는 겁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사랑부터 안되는 겁니다.

 

주여 나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라고 상한심령이 되어야 할 판국입니다.

 

7천명이 아닌 이상

770번이 아닌 이상

다 엉터리인줄도 모르고 정상이라고 여겼고

안식일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인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더 심각한 육신의 정욕이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성경을 너무 너무 무시하면서 보는 겁니다.

작은 동네인 나 라는 육체에 성경을 끌어 들일려고 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 풍덩 빠지면

우주에서 놀게 됩니다.

누가 빠지겠습니까?

죽기를 무서워 하는데

 

뒤에서 확 등떠밀어야 합니다.

성령 뿐입니다.

자진해서 들어갈 인간 없습니다.

2천년 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고

내가 달리기도 하고(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하고)

내가 못박으라 라고 외치기도 하고

내가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때를 보게 되기도 하고

내 손으로 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칼로 6조각 내어야 하는

그 숨막히는 사건도 직접 격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인 겁니다.)

출애굽의 그 길도 없는데서 길을 만든 그 없는 길도 걸어야 하고

죽음의 길인데 우리는 룰루 랄라 라고 신나게 걷고

죽음 위를 막 걸어요 ~~~~~

광야에서 원망도 해야 하고

내가 사도바울처럼 스데반 집사를 군중을 동원해서 쳐죽어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증거하다가

매맞아 쓰레기 통에 던져지기도 하다가 또 다시 벌떡 새벽에 일어나

다시 복음을 증거해야만 하고

안 바쁩니까?

바쁘다 바뻐

언제 내가 나를 다듬을 시간이 어디있습니까?

지금 누리기 바쁜데

막 우수수 막 떨어지는 것 먹기 바빠요

사도바울도 누려야 하고

아브라함도 누려야 하고

모세도 누려야 하고

실로암 소경도 누려야 하고

즐기기 바빠요

아니 즐길소냐 말이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막 떨어지는 것 주서먹기 바쁜데

안보이니 안바쁜거고

안바빠서 딴짖 공상만 늘어놓는 겁니다.

현실입니다. 현실

 

허구는 오히려 육신의 정욕이 없는 나를 꿈꾸니까 허구에 놀아나는 겁니다.

현실이 또렷한데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누가 육신의 정욕을 니 힘으로 해결하라 라고 했나요?

그 놈이 육신의 정욕이 님에게 외치는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 모세 다윗 보세요 현실을 보세요

명료하게 밝히 보이는 것을 보라 말이죠.

그들이 제대로 된 인간들이였던가요?

아닙니다.

주님이 만든 작품입니다.

순 엉터리 인간들인데

신약에서는 편파해석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고(11)

성경이 거짓말 한 거냐고요?

네 맞아요 거짓말 맞아요

그 거짓말이 아니면 다 지옥 가거든요.

이것이 선하심입니다.

이런 선하심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런데 단 한번도 거짓말 한 적이 없는 맏아들은 지옥 갔습니다.

이거 우찌 해석할려고요????

바리새인 동네, 역사 동네, 행함 동네에서는 이것 못 풀면 지옥 갑니다.

이거 해석 못하면 지옥가요

해석 불가인데 우짜죠?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 문제 해결 못하면 지옥

죄의 소원인데 무슨 수로 감당하죠!!!

그런데 피 동네에서는 죄 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에서 놀고 있는 우주차원이다 보니

신경 쓰는 것이 다른 겁니다.

이 죄를 해결해주신 이 피를 어떻게 하면 자랑하지?

자랑 의 차원에서 놀고 있고

저쪽은 죄의 소원을 감당해야 하는 차원에서 놀고 있는 거죠.

죄 안짖는다는 말이 아니라

늘 바닥에 빨간 피가 이미 흥건히 적셔져 있기 때문에

먹보다 더 검은 죄가 이 피 앞에서는

쨉도 안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걱정은커녕 이 피 자랑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한 즐거움 뿐이다는 겁니다.

자랑 할 것 생각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겁니다.

죄책감 따위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마귀에게 잡혀와도

피 동네에서는 묻는 것이 다릅니다.

묻고 따지는 것이 서로 다른 동네이다는 거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물음 아닙니까?

의문의 동네 같았으면 벌써 왜 안식일날 고치노 라고 물었을텐데

묻고 따지는게 달라요

그럼 나에게도 묻고 따지는게 달라야죠

우와 오늘은 다윗의 입장에서 피 자랑했는데

너무 너무 신나더라 라고 말이죠.

날때부터 소경인자는 자기 죄냐 부모 죄냐 그 딴거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심각성인데

실로암 소경에게 저렇게 묻고 따질정도면 바리새인 자기자신에게 얼마나 자해를 하듯이 괴롭혔겠느냐 말이죠. 겨우 자신만만해서 물었지만 정작 자신들 입으로 스스로 불안함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동네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아니 소경 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 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급 살인자 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의문의 동네에서는 답을 못 찾아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 말이죠.

말이 안되니까

그런데 피 동네에서는 그것은 누구나다 다 아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답이다는 거죠.

그 정로도 의문이 없을 정도로 또렷하고 명료하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말이 되니까?

어떻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냐 말이죠.

예수 안에는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거든요.

어느 동네에서 놀고 싶나요?

없는 나를 눈에 보인다는 이유로 붙잡고

다마꼬지 놀이처럼 나를 다듬어서 놀려고 하니까

그것이 전부인 사고방식인 겁니다.

성화론자들 맨날 이런 정신병자놀이를 하고 있어요

물론 저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정신병자이지만 ㅋㅋㅋㅋ

그런데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자는

다마꼬지 놀이라는 어린아이 일을 버리고

막죽는 일을 하는 겁니다.

막 실로암소경이 되고

막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되고

막 탕자가 되고

성화론자들이 이 말 들으면 귀를 씻을려고 할꺼다 말이죠.

안 들을란다 라고

성경에 다 이런 이야기 뿐인데 ㅋㅋㅋ

목베임을 당하는

스케일이 넓은 겁니다.

헐리우드 영화배우 안 부럽습니다.

스파이더맨? 웃끼는 거죠. 다마고치입니다.

그들은 가짜로 연기하지만

우리는 진짜로 연기합니다.

주의 병에 담고자 말이죠.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말이죠.

부요함에도 처하고

가난함에도 처하고

진짜 막 가난해지고

진짜 막 부요해지고

감당이 불감당이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을 누리는 겁니다.

안 보이는 세계와 놀아요

보이는 세계와 놀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나 와도 안 노는 겁니다.

나와 놀지 마세요

성화론자들입니다.

자기랑 놀지 말아요

우주랑 놀자 말이죠.

십자가와 놀자 말이죠.

걸림돌과 놀자 말이죠.

내가 뭐 어떻고

다윗처럼 살아야할지

방종하면 안될텐데

살인하면 안될텐데

미워하면 다 살인인데

마음 속에 음욕을 품으면 다 간음한 것인데

얼마나 시시하게 봤으면

이렇게 넓게 우주적으로 확대한 (산상수훈:율법강화)

예수님의 해석을 어떻게 감당할려구~~~~~~~

내가 내 스스로 성경을 참고해서 나를 따듬는 차원과

예수님께서 아예 십자가로 나를 따듬는 것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냥 예수님께 맡겨버리면 속시원하게 잠잘수 있는 겁니다.

베드로 보세요

감옥에 잡혀가도 잠만 잘 자잖아요.

감옥에 잡혀가면

언제 나가게 될지

처자식은 잘 있는지?

내팽계치는 남편과 부모가 되면 안될텐데!!!

나중에 보니 왕에게 시집가서 더 잘먹고 더 잘살줄 누가 알겠습니까?

다윗 왕에게 시집가서 말이죠.

 

다윗 곧 예수님 아닙니까?

이런 불륜이 ~~~~

 

우리야 장군이 천국에서 자기 아내 빼앗겼다고 분노하던가요?

시집 장가도 없는 천국인데???

 

우리야 장군은 천국에서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천군천사들과 함께 나팔을 불며 잔치를 벌릴겁니다.

죄인 다윗 하나 돌아왔다고 ~~

 

뿌뿌뿌 ~~~~~~

 

(81: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81:2, 개역)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81:3, 개역) 월삭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에 나팔을 불지어다

 

그 정도로 귀하디 귀한 하늘에서 별따기 라는 그 죄인입니다.

 

자기는 졸지에 우리야 장군이 되어버린 꼴인데

억울합니까?

속시원합니까?

아이구 제대하게 되어서 억울합니다 그런 군인 없습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속시원해 하지요.

차원이 다른 겁니다.

다른 차원에서 통하는 이야기들이다는 겁니다.

허구의 이야기가 안통하는 현실(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완료된 명료함, 의문이 없는, 살리는)

억울하면 예수님이 더 억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야 너가 나를 왜 세 번 부인했니

너만은 믿었는데

라고 물으셨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그래 되라꼬 입이 있는게 아니라

베드로야 너의 입술로 외쳐라

너가 나를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물으신바 되며

부르신 바 되며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얼마나 뻔뻔스러운 우주적 차원입니까?

스케일이 다르잖아요

쫌생이 같은 우리와 달라요

그 차이를 매일 매일 지적 당하면서 누리는 겁니다.

주의 얼굴의 그 따가운 시선

왜 뻔뻔하지 못하느냐 라는 얼굴과

다 발가벗겨진 얼굴로

마주 대하여 보는 맞짱뜨는 대범함으로 만드시는

담대함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얼굴 앞에

과거는 하등 중요한게 아니니(1초 지나면 무조건 다 과거일 뿐)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을 누리자 말이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자 말이죠.

주의 얼굴만 바라보고 나아가자 말이죠.

지금 그 주의 얼굴을 마음껏 누리자 말이죠.

우주적으로 놀자 말이죠.


안 보이는 것을 주물떡 거리면서 신나게 즐겨 봅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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