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시편 63)

 

광야 예수님의 찬양 : 다 이루었다

 

아웃사이더 예수님이라고 해서 중앙과 상관없이 주변에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중앙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3년 동안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주변 변두리에서 맴돌다가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일주일 만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리고서는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제외 하고는 계속해서 변두리로만 맴돕니다.

그 이유가 바로 중앙을 깨기 위한 겁니다.

바로 예루살렘 말입니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중심 예루살렘이 공중 분해 해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입니다.

마치 가나안 민족들처럼

거인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성전입니다.

권력과 힘이 모여 있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구원의 문 아닙니까? 바벨탑!!!

 

(13:33, 개역)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변두리에서 곧 광야에서 나셔서

이제 중앙을 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있어서


이 중첩된 장소인


예루살렘이 바벨탑이자 동시에 구원의 문인 이 의미를

회피하는게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셔서 구원이 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이 아닌 겁니다.

원수의 성문에 들어가서

그 원수의 문에서 구원을 펼치는데 있어서

오직 구원은 예수님 자신만이 구원이다는 것 외에는 다른 기대치가

오히려 모조리 다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십자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괜히 유대인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보는게 아닙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구원의 요소는 없기 때문입니다.

 

2000년 동안의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 속에서 괜히 혜택을 누린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누구 보다도 구원의 의미를 그것도 자신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약속했기에

어떤 누구보다도 자신했습니다. 즉 믿었다는 겁니다.

믿음의 민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따 봐도 십자가 속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 내린 결론입니다.

 

오히려 구원에 방해 되는 것만이 가득담겨 있는 것이 십자가 라는 결론이다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구원만 챙기는데 있어서

몰래 밤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신랑을 찾는 방식인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과 합한 여자의 방식입니다.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다짜고짜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 라고 단절을 외치시는 겁니다.

니고데모 너는 뭘 해도 하나님나라 안돼

구원 안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서는 그 유명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려 하려 함이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인간 쪽에서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찾아오시는 방식이 바로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리고서는 주님 쪽에서 찾아가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우물가의 여인이야기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사건을 성경말씀이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밤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와의 대조로써 말입니다. 차이로써 말입니다.

주님 쪽에서 찾아가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조인 겁니다.

 

오죽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이상하게 여깁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피해가지 않느냐?

아무리 지름길이라고 해도 유대인들은 저 더러운 이방인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삥 둘러서 돌아서 가는데

왜 예수 당신은 불쑥 불쑥 당신네들이 거룩을 위해서 금지한 금지구역에 막 함부로 막 들어오느냐? 그렇게 막사는게 옳은가? 오히려 내가 걱정이 되네????

 

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는 겁니다.

그런 유대인은 없다는 거죠.

 

돌연변이가 나타났다고 이상하게 쳐다 보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오히려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고 하니

그 어떤 유대인도 그런 적이 없는데

절대로 말도 붙이지 않고, 절대로 가까이도 오지도 않는데

이상하다! 당신은 오히려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오는데??

오히려 내가 더 낯설기 짝이 없다 라는 겁니다.

 

(4:1, 개역) 예수의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4:2, 개역) (예수께서 친히 침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4:3, 개역)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4, 개역)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4:5, 개역)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 개역)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4:7, 개역)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8, 개역)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을 가지고서 갑자기 물 이야기는 붕떠 버리고

영생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분명히 니고데모에게는 그것도 모르냐 라고 이스라엘 선생 맞니 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계속 물 이야기만을 하는데

예수님은 영생 주겠다고

서로 동문서답식인데고 불구하고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에게 계속해서 찾아가는 사랑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물 걱정없이 구원 이야기나 하자 라고 하는

니고데모에게는 처음부터 넌 심판받았어 라는 식입니다.

벌써 심판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주님이 찾아온 이상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식으로

기여이 구원 받게 영생 얻게 만들겠다는 식입니다.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한 쪽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자기 쪽에서 구원자 삼겠다고 임금 삼겠다고 해도

주님 쪽에서 거부하시고 반드시 빛을 미워하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식입니다.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쪽에서 찾아간 사마리아 여인은 정작 예수님을 믿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쪽의 선하심 때문에 진리를 쫏을 수밖에 예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도록

물동이를 던져버리면서 선지자를 만났다고 찬양케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바로 주님의 뛰어나심인데

인간 쪽에서의 선함이 주님은 악으로 보시고

인간 쪽에서 악으로 여기는 것을 예수님은 자신의 선으로 감싸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을 가짜 야곱,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설명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종교와 정반대입니다.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화론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종교의 경전과 비슷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사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조작을 펼칩니다.

자기 설정의 복음인 사적복음으로 말입니다.

개인 복음입니다. 마치 밤에 몰래 직접 목숨걸고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말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한 겁니다.

 

예수님이 선택한게 아니라 말이죠.

 

오늘 어머니께서 성경 이 부분을 드디어 읽으셨습니다.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시편을 지금 나누고 있기 때문에

강조를 하셔서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랴 하리라 라고 크게 읽으시는 겁니다.

 

어머니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왜 예수님은 시편을 달달 외운 민족의 손에. 시편을 외운 자의 손에 죽으셔야만 할까요?

시편 그대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것을 풀어낼 수 있는 자가 없어요!!!!

 

이 역설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자가 없습니다.

 

즉 풀면 안된다는 겁니다.

설명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는 겁니다.

 

정 설명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로써 외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 자만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겁니다.

 

그러니 누가 나서겠습니까?

성화론자들에게서는 결국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성화론자에게서 만약 나온다면

예수님을 살인한 경험을 평생 외치는 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 그것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네 맞습니다. 바리새인 사도바울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는 겁니다.

괜히 죄인 중의 괴수 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화론자들은 죄 죄 죄 그만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개인에게서는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 라는 말 자체가 말입니다.

 

자기 쪽에서 예수님 곧 신랑을 찾아가는 방식이니

죄는 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거든요.

삥 둘러서 사마리아인 주거 지역을 피해 가야 하거든요.

그래야 하나님 나라 가거든요.

 

그러니 예수님은 다짜고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 라고

자꾸 벌써 심판이다고 단정 지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 되심에서는

 

믿고 싶지도

구원 받고 싶지도

영생 얻고 싶지도

신부 되고 싶지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안달이 나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그래서 시편대로 주님 홀로 다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악은

짐승은 자기 쪽에서 시편을 외운 자들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성경이, 나를 읽는게 아니라

내가 읽은 말씀을 외운 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악으로, 미워 하기 마련이다는 겁니다.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악은 빛이 옴으로서 드러나는 의미이지

빛이 오기 전까지는 악은 악으로 안 드러나는 겁니다.

빛이 오니까 악은 빛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만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시편 63편은 광야에서 다 이루었다

시편을 다 이루었다 라고 오히려 광야에서 다 이루었다고 찬송을 부르고

정작 성전 정중앙을 차지한 자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여라 라고

불안하기 짝이 없기에 힘을 붙들고 권력을 잡고

드디어 무기를 잡아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안해서)

살인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나무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괜히 말씀을 아는 바람에 말려들게 된 겁니다.

 

(21:23, 개역)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정작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 다니엘의 세친구는 춤추고 노래 부르고 찬양합니다.

오히려 불안한 쪽은 불속으로 등 떠밀었던 불 바깥의 사람들입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지금 시편 63편에서 아들 압살롬에게 쫏겨나 광야에서 다윗이 노래를 부릅니다.

광야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자가 높이 달리게 되니

다 이루었다 라는 찬양을 넉넉히 부릅니다.

 

그런데 정작 등 떠밀었던 자들은

시편을 달달 외운 자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어서

찬송이 없습니다.

도저히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찬양이 덮쳐져야 하거든요.

인간이 부르는 찬양은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이 인간을 다룹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시편이 덮쳐지지 않으니까?

아무도 노래 못 부릅니다.

 

예수님만

광야에서 장대 높이 달린 자만

불속에 들어간 자만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겁니다.

 

찬송의 옷이 입혀 지는 겁니다.

 

찬양 부르고 싶나요?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정작 내가 그 십자가에 의해 와르르 무너졌음을

예수님이 나보다 옳았음을

나는 매일 매일 가짜 맞습니다를 고백하시면 됩니다.

 

나의 중앙이 무너짐으로써만 부르게 되는 찬양이다는 겁니다.

나를 무너뜨린

나를 이기신 주님의 십자가 였다고 ~~~~~~~~~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입술이 도저히 노래 부를수 없는 상황 속에서

찬송을 부르게 하실 겁니다.

 

(63:1, 개역)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2, 개역)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3, 개역)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4, 개역)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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