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의 소굴 보다, 피난처(3일 성전) 문지기가 더 좋사오니 (시편 84)

 

 

(84:1, 개역) [고라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84:2, 개역)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3, 개역)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84:4, 개역)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84:5, 개역)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6, 개역)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84:7, 개역)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4:8,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84:9, 개역)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4:10, 개역)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84:11, 개역)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2, 개역)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냥 바로 따로 똑 떼어놓고 독자적으로 주의 장막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교와 대조로써 뭐 뭐 보다 더 낫다 더 좋다 라고

앞의 것을 대조하는 식입니다.

즉 이 표현 자체도

시편 84편 전체 자체도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거죠.

 

그럼 뭐를 반대 하는가?

 

그야 당연히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강도의 소굴이라는 의미는 뒤의 것이 오기 전까지는

강도의 소굴인지

악인의 장막인지를 우리로써는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그야 당연히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 지는 것이 당연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뒤에 오신 분으로 인해

그것이 강도의 소굴에서 나온 책임감, 열심이였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


그래서 열심히 했고

그 내 열심이 특심이기에

잘못 된 것 단 하나도 없다는
모든 사람 또한 다 같은 생각이기에

마지막 아담이 오기 전까지는 당연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 소원을 못 이기는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 아비에 그 후손인 거죠.
 

시공간 곧 성전

이것은 결국 우리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왜 강도의 소굴이고

악인의 장막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런데 알게 된 자가 생겨버렸습니다.

졸지에

그것도 우연히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구원받은 강도입니다.

 

자신의 몸이 그냥 강도였지 강도의 소굴이라는 집단적인 의미가 아니였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인생 끝짜락 몇초 만에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만나버리고서는

[3일이]를 만나버리고서는 그만 3일이 자기에게 벌어져버린 겁니다.

 

아 나는 강도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

죄인 중의 괴수였구나 라고

이 인물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3일이는 내가 평생 강도짓을 했는지를 묻지를 않습니다.

완전 딴판의 질문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뭘 해도 가짜 임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내가 강도인줄 뻔히 다 아시면서

그 강도가 달리는 십자가의 저주에 같이 매달리러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오셔서

죄를 물어도 아주 마땅히 묻는 자리가 아닌

재판관 입장이 되고도 남는,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면서 물으시는 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

 

이게 말이 되는 소리 입니까? 여러분!!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른 강도가 비아냥 거리면서 조롱합니다.

하도 하도 기가막히고 코가막혀서

말 되는 소리 좀 하자 제발 제발 아 제발요 라고 나서는 겁니다.


날 구원해봐 그러면 믿어준다니깐 ~~~~~~~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마 27:3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자 오늘 시편 84편을 보면서

우리는 말 되는 소리로써 시편 84편을 보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이 말 안되는 소리로써 시편 84편을 누리는 겁니다.

주의 장막이 왜 아름답습니까? 왜 어찌 그리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까?

즉 내 쪽에서 봐서 아름답다고 평가하고 가치를 매겨서 아름다운게 아닙니다.
우리가 누가 누가 더 아름다운가를 뽑는 심사위원장이 아닙니다.
오디션 참가자를 점수 매기는 입장에 놓여진게 아닙니다.

완전정반대의 위치에서 아름다움을 졸지에 만난 겁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얼마 못가 다시 실증이 나버립니다.

 

아름다움 자체가 나를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이 주체가 되어버리니 거기에 뿅가서

쇠잔할 정도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비로소 아름다움의 노예가 된 겁니다.


아름다움은 그 정도로 폭력적인 겁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강도말이 맞습니다.

다른 강도에게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말입니다.

누구 눈에만 아름다움입니까?

아름다움이 씌여진

꽁깍지가 씌여진 자의 눈에만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

그 정도로 올인해 버릴정도로 강력하다는 겁니다.

죽어도 좋아 할 정도로 말입니다.

 

얼마전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루는 강의를 들어봤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욕망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욕망이란 우리 입장에서는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왜 욕망할 줄 모르느냐

욕망에 빠지면 그 하나 때문에 온 몸이 상해져 버릴 정도로 쇠잔할 정도로

올인해 버리는데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야 하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하나가 아닌 여러개의 강요된 선택을 받기 때문에

새로운 상품에 의해서 욕망할 기회를 다 빼앗겨 버린다는 겁니다.

 

하나에 올인 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도록 새로운 상품들이 더 좋은 것으로 마구 마구 쏟아져 버리니까

목숨을 걸 때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 인문학자들이 욕망하라 욕망하라 라고 자꾸 외치는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욕망할 기회를 물질 자본주의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즉 욕망이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용어로 바꾸면

사랑하라 사랑하라 라고 외친다는 거죠.

 

구원받은 강도가 주의 장막 곧

주께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어봐 주심 때문에

뿅 가버려서

 

참성전 되신 예수님이 너무 너무 아름답다는 겁니다.

당신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은

당신의 더러운 발이 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보다 백배나 천배나 만배나 아름다워서

내 목숨같은 머리카락을 향유로 부어 발을 씻겨도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여자에게서의 머리카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 이거든요.

 

그 정도로 아이쿠 눈부셔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것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의미 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그녀의 이야기가 기념이 되도록 하셨으니 말입니다.
 

여자가 아니신 분들은 그럼

 

이사야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의 장막이라는 예수님 그 자체의 영광을 보는 바람에

내 눈이 뿅 가버려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 아름다운 영광 앞에

나는 쥐 뿔도 아무것도 아니였구나

난 망해도 싸고 죽어도 쌀 정도로

눈부신 영광 한 번도 보고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구나

 

나의 죽음 조차도 그 아름다운 영광 앞에서 운운할 가치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옆의 여섯날개 달린 천사들도 감당이 불감당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는 문지기로도 좋다 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겁니다.

 

말 되는 소리입니까?

말 안되는 소리이지 않습니까?

 

이런 20%의 여유분 잉여가

옆의 강도의 소굴이 비로소 분노를 하면서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다고!

 

아이고 예수님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받아주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도 미쳤군요.

저 강도만 미친줄 알았더니

둘 다 맛이 갔구만 ~~~

 

이것이 46년 동안 성전을 짓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써

그 반대를 위한 반대로

 

주의 장막이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요?

아름답다는 결국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십자가 빼고 나머지는 다 더럽고 악하다 라는 말입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래도 다 더러운게 아니라 아름다운것도 있다.
이래 나오면 안됩니다.
아름답다는 오직 하나 뿐이어야 오늘 시편 84편에서 왜 아름답다고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장막 되신

성전 되신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다고 채찍질로 양도 비둘기도 쫏아내고 환전책상을 엎어버리는데

 

정작 강도의 소굴인 자들은 무슨 표적 보여줄껀데 라고 합니다.
뭐가 아름다운 것인데 라고 묻습니다.

 

3일을 보여주마

 

3일이 뭔데

3일이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너희를 허물고 다시 세우는 아름다운 나 예수를 세워주마

 

이게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퍽퍽퍽
난 또 뭐 그리 아름다운가 했더니
흠모할 모양이 단 하나도 없구만 에라이 퍽퍽퍽

 

시편 84편을 보세요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짖겠다 라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솔직하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라고 해야 제대로 된 반응입니다.

곧 나의 몸은 그 아름다운 주의 장막을 원하는게 아니라

그저 돈 돈 돈 만을 원하는 강도의 소굴과 같은 몸뚱아리 임을

이 시편 84편을 통해서 들통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84:10, 개역)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사람 말입니다. 곧 예수님이지요. 다윗 아닙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솔로몬의 영광을 구해서

솔로몬이 입은 옷을 돈 주고 사서 그렇게 입고 지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 문지기는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는게 아니라

 

(84:1, 개역) [고라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84:2, 개역)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3, 개역)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84:4, 개역)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의 장막에 집짖는 참새, 제비를 더 부러워해서

몸이 망가질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양반은 오히려 솔로몬의 옷이 안 맞게 된 겁니다.

입혀줘도 옷이 안 맞아요

너무 너무 부러워 해서

저 참새

저 제비

저 공중나는 새를 부러워해서 몸이 고장나버려


솔로몬의 옷을 입혀본들 태(옷 맵시)가 안나는 겁니다
.

뭘 입혀도 귀티가 나질 않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장막에 빠져 자신이 소멸될 정도이고, 소실될 정도로

아름다운 성전이요

아름다운 3일이다는 겁니다.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아무리 봐도 안 아름다운데

 

구원받은 강도에게만은 너무 너무 아름답고

 

이사야 에게는 오죽 하면 화로다 화로다 난 이제 끝났구나

나를 사라져 버리게 할 정도로 저 영광스러운 빛이 나를 다 덮어버릴 정도이니

감당할 길이 없으니 난 끝났군 이라고 기분좋은 허무주의이다는 겁니다.

난 없다 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정도로

저 아름다운 영광에 매료되어 빨려들어가 사라질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문지기가 차라리 더 좋다 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46년 동안 천년동안 강도의 소굴에 있을 빠에

차라리 3일만에 세워지는 성전의 문지기가 더 좋다는 겁니다.

3일 지나면 우에 되는데

사라질는지 우에 될는지

아예 관심이 없을 정도로


그 뒤의 나 라는 존재 자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아름다움에 뿅 갔다는 겁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얼마나 이 아름다움에 뿅갔으면

너무 너무 좋아서 얼마나 좋았으면

아무도 그 누구도 그 상황에서 꺼낼수 없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이 말은 곧 주여 저 악마의 자식 맞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강도 맞잖아요

그래서 처형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이 십자가에 왜 오시는 겁니까?

왜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시는 겁니까?

 

이거 뭐 지 혼자 오바를 해도 너무 오바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은 더 기가막힙니다.

어 너 눈치 챘구나

그래 나 너 건지러 여기까지 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 하나 건질려고 말이다.

 

여기에 뿅 갑니다.

 

문지기는 억수로 좋은 자리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낮은 자리일지라도 그게 어딥니까? 대박이지요.

 

지옥의 천년 보다

천국의 1초가 더 낫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닙니다.

물 한 방울도 없는 곳에

천년 동안 살아서 뭐하게요?

엄청더운 8월 대구 찜통 더위에
물 한 방울 없으면 그 목마름을 무슨 수로 버팁니까?

천국과 지옥

바로 이 간극을 벌리기 위해서

문지기 라는 표현으로써

3일의 간극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의 간극은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극과 극인데

 

우리의 의문의 몸은 이 3일 보다

이 요나의 표적 3일 보다

 

46년을 우려먹고

천년을 우려먹고 재탕 삼탕 반복하는 겁니다.

그거 천년 동안 반복해서 뭐할려고요

의문의 죽이는 것 밖에 더 하겠냐 말이죠.
그런 의문을 반복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영광?

솔로몬이 입은 옷?
의문 일 뿐입니다
 

공중의 새 보다 못합니다.

저 들에 핀 백합화 보다 못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이 3일의 간극을 벌리기 위해 동원이 되어서

허무에 복종합니다.

 

그 허무가 얼마나 기분좋은 허무인데?

문지기로 있는게 좋을 정도로 기쁜 허무인데

3일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천년 만년 허무에 복종하고자 3일의 간극을 벌리러

모든 피조물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천년 만년을 모든 피조물을 잡아먹어가면서 까지 강도의 소굴을 지을려고 하냐 말이죠.

 

모든 피조물들이 외칩니다.

이 성전을 헐라 ~~~~~~

 

내 입 속으로 들어오면서 외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

 

그래서 참새는

그래서 제비는

 

나에게 집을 안 짖습니다.

강도의 소굴에 왜 짖습니까?


솔로몬 성전에 안 짖습니다.
솔로몬 영광에 안 짖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우냐 말이죠.
인간이 새 보다 더 멍청합니다.
엉뚱한데 집을 지으니 말입니다.

참새와 제비는 

3일의 성전에 집을 짖습니다.

 

솔로몬 조차도 사실상 3일의 성전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속았지요.

솔로몬이 바보 멍충이가 아닙니다.

선지자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짖는 자는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연기자로써 등장한 겁니다.

헛되다 라고 말이죠.

지는 누리고서 헛되다 라고 하면 우리도 한번 누려보고 헛되다 라고

말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공평하지

 

그래 그래 공평 많이 누려봐도

그 허탈감이 이루 말도 못할 정도인데

그거 누릴려구? 그거 따라 할려구? 말라꼬 지옥의 마음을 따라할려고 하느냐 말이죠.


쓸데없는 의문과 쓸데 없는 갈증을 일부러 할 필요가 어디 있냐 말이죠.
 

다 헛됩니다.

진짜 진짜 천년 만년 헛됩니다.

 

차라리 하루가 낫습니다.

그 정도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얼마나 놀라우면 아무도 모를 정도입니다.
아니 누가? 공중의 나는 새가 정말 정말 부러워서 몸이 쇠하여 질 수 있겠냐 말이죠
.

 

물론 이것도 못 따라 합니다.

사실상 이 몸이 쇠하는 문지기는 예수님 바로 자신이거든요.
상한 심령은 예수님 뿐입니다.
영만이 살리지 육은 의문 만 반복합니다.

 

그러니 이 말도 안되는 이 소리는

이 시편 84편의 소리들은 다 예수님이 하시는 소리입니다.

 

왜 몸이 쇠합니까?

 

왜 몸이 십자가에 달려 갈기 갈기 찢겨지시는 겁니까?

 

이유 없습니다.

이미 결과가 원인 없이 덮쳐져서 그런 겁니다.

 

주의 장막이 아름답거든요.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아름답거든요.
 

모세가 구스여인을 사랑했는데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아무도 토를 못 답니다.

 

그런데 토를 다는 자가 나타나야 그 차이를,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마리암이 우리를 대변해서 달려들다가 얻어터진겁니다.

 

그리고 아 맞네 이유 없네 라고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이유갓지않은이유입니다.

 

레 레 레 옹 ~~

 

 

그러니 시편에 이렇게 주의 전을 사모함이 쇠잔할 정도이니

얼마나 시편을 달달 외우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따라했겠습니까?

우리 보다 먼저 다 해봤다 이거죠.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자들이 바로 대제사장 사두개인 율법사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주의 전을 사모해야 하기 때문에 주의 전이 허물어 지면 안되는 거죠.

허물어져 버리면

 

누가 문지기가 될수 있냐 말이죠.

 

시편이 더더욱 부추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지기는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주의 아름다운 장막도 예수님이고

예수님 지 혼자 감독 주연 조연 다 해먹는 겁니다.

 

우리는 끼일 장소가 없어요.

 

우리는 몽땅 일괄처리로 강도의 소굴에 해당될 뿐입니다.

 

나는 강도 맞네 라고 인정해야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이 시편 84편이 제대로 보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강도의 입장에서

강도의 소굴이 맞는데

다른 강도와 다르게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강도 아니라서가 아니라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로 앞의 글에서

누가 이 성전을 헐라 라는 소리가 기쁘게 들리겠습니까?

누가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소리가 기쁜소식으로 들리겠습니까?

 

강도의 소굴로 평상시에 봤던 자 아닙니까?

 

강도의 소굴인줄 알면서도 어떻게 빠져나올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대안도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외치시는 저 말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짖겠다 라는 말처럼 기쁜소식이 어디있겠습니까?

 

마치 기생라합처럼 간담이 서늘하게 그 말에 눈 녹듯이 녹았을 겁니다.


 

향유를 깨뜨린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비싼 향유가 하나도 안 아까운 겁니다.

 

오히려 아깝다고 여기는 자들이 바로 강도의 소굴을 늘 꿈꾸고 강도의 소굴을 짖는 마음이 들통난 겁니다.

 

어느 정도로 아름다우냐? 이 죄인 이 창녀 같은 나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고

미리 장사를 치를 정도이다는 겁니다.


이 분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러 오셨어요 라고 외치는 행위이다는 겁니다.
 

목숨 값이

비싼 향유와 족히 비교가 되냐 말이죠.
예수님의 목숨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행동을 오히려 정죄하기 바쁩니다.

그 정도로 딴 집을 짖고 있기 때문이요

예수님이 전혀 아름답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싫어버린바 되어 고개를 돌릴 정도입니다.

 

다들 흠모할 모양이 없다고 고개를 돌려 버렸으니 말이죠.

 

(84:8,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84:9, 개역)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4:10, 개역)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84:11, 개역)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2, 개역)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다시 만드십니다.

다시 세우십니다.

3일의 자리를 반복하시는 겁니다.
이 아름다운 자리를 반복하시는 겁니다.

 

이 간극이 아니면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지적하심이 아니면 말입니다.

다 지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3일의 간극을 벌리십니다.

 

야곱의 하나님 본인이 이스라엘을 끝까지 책임지시고자

흠모할 모양이 없이 말입니다.

아니 흠모할 모양이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아름답다고 문지기가 되고 싶어서 쇠하여지는가 말이죠
완전 인생 실패가 아닙니까?
완전 심판의 자리요 쫄딱 망한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름다운 자리요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입니다.
참! 말 되는 소리 하나 없습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아름다운 사랑 
이 아름다운 주의 장막을

아무도 끊을자 없습니다.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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