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 (시편 85)

 

얼굴과 얼굴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

 

(85:10, 개역)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85: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85:2, 개역)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

(85:3, 개역)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85:4, 개역)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85:5, 개역)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85:6, 개역)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85:7,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85:8, 개역)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85:9, 개역)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85:10, 개역)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85:11, 개역)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85:12, 개역)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85:13, 개역)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얼굴이라는 것은 서로 마주 보라고 있는 겁니다.

그 얼굴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서로 마주 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얼굴을 돌렸다는 것은

도저히 서로가 볼수가 없는 상태 곧

간극과 균열과 분열과 싫어버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단절 등등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쪽은 그 얼굴을 마주 보고파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타게 말입니다.

얼마나 애간장이 다 녹았으면

상한심령

곧 상하고 썩어 뭉드러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지난 시간에 주의 아름다운 장막에 집을 지은 제비와 참새가 너무 너무 부러워서

몸이 망가져 쇠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쇠한 몸뚱아리로
악인의 장막 곧 강도의 소굴의 천년 보다

주의 장막에 단 하루가 더 좋고,
문지기라는 가장 밑의 천하고 낮은자리가 더 좋다고 합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자 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요

애통하여 그 눈물을 흘려 주의 병에 담는자 요

온유함으로 주의 장막의 집 곧 기업을 얻는 자 요

 

등등 팔복에 해당되는 자인데

문제는 우리는 여기에 끼일수가 없는 입장인데

자꾸 끼여들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없습니다.

 

참신기하게도 저도 그렇고요

아무리 다른 사람을 찾아 봐도 그렇고요

심지어 성경에도 그렇던데

제가 직접 찾아봤거든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는 단 한 명도 없더라 말이죠.

그런데 제가 왜 참신기하다고 하느냐 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이상하게 갈취하는 자들로써 등장한다는 점에서

성경에도 그렇고

제가 만나본 자들도 그렇고

저도 물론 그렇기 때문에 안 그런자를 찾아 봤지만

정작 신기하게도 나야 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니게 많아요.

오히려 심했으면 심했지

분명 많다고 하는데, 그렇게 자부하는 자들이 많은데


없어요.

 

없어.

말이 안되지요. 많다고 하는데 없다고 하니 ~~~~

그저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지식이 많고, 재산이 많고, 권력 또한 많고
저 보다 많다고 우기는 자들은 항상 그딴거로 밀어붙이더라 말이죠.
딴 사람한테는 좀 덜 우겨도 이상하게 저 한테 만큼은 무지 무지 우기더라 말이죠.

아무리 봐도 없던데 ~~

 

제가 그 원인을 살펴보니까

오히려 이 말씀

팔복 자체가 그것을 유발하더라 말이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이상하게 갈취하는 자들로써 등장한다는 점에서


저번에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오히려 약자를 갈취한다고

시편 몇편이더라? 자주 기록되었는데 말입니다
원래 약자였던 이스라엘이, 그런 처음자리였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깡패로 언급되는 앞의 시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말씀 자체가 더 유발케 한다 말이죠.

 

괜히

있는 사람은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글을 올린게 아니라

여기에 안 말려드는 인간이 없더라 말이죠.

 

율법사가 그랬고.

소경아니다 라고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신학교리 놀이하는

이 사람의 죄는 자기 죄일까? 부모 죄일까 라고 장난 치는 놈들처럼

이 범주에서 벗어날 인간이 단 한 놈도 없다는 점에서

 

있는 사람은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말씀이

나를 다루고 있지

내가 이 말씀을 해석할려고 달려들다가 왕창 깨진다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아니 너는 뭐 당연한 것을 가지고 찾냐

당연히 없지

없는 것을 왜 찾냐?

 

그런데 자꾸 있다고 우기는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우기는 놈들이 괜히 끝까지 우기는 게 아니더라 말이죠.

악령을 부음 받으니까 그렇게 되더라 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령 받았다고 우기지만 말입니다.

아무나 악령 받는게 아니거든요.

누가 봐도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당시에 가장 존경받던 바리새인이 그렇다면

오늘날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말입니다.

 

앞의 글에서도 말했지만

악령을 받아야 하고 그 악령을 부으신 것은

마귀가 아니라 주님이시니까 말입니다.

마귀가 마귀를 부을수 없죠.

마귀 지가 무슨 권한으로 말입니까?

 

마귀는 주님의 허락 없이는 못 움직이는 그 어떤 권리도 없는 놈입니다.

 

자꾸 마귀를 독자적인 존재로써 자유롭게 지 마음대로 한다고 들 말하던데

웃끼는 소리입니다.

 

철저한 주님의 부정적인 보충물 도구입니다.

절대 지 마음대로 못합니다.

 

창조주 단 한 분만이 자유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

창조주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되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겠다고 직접 뛰어든 것은

결국 자기 얼굴을 마주할 자기가 심은 자기 얼굴을 찾겠다고 직접 뛰어든 것이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찾냐 말이죠.

그 방법이 바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의 불륜이라는 방법인데

 

3일의 간극이라고 했죠?

 

얼굴을 예로 들면

얼굴이 있는 자는 더 받고,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고,

얼굴이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겁니다. 즉 가면 쓴 것 마저도 빼앗긴다는 거죠.

 

그럼 두 얼굴이 있는 거죠. 얼굴과 가면

앞의 글에도 말했던 두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거짓선지자의 이스라엘

참선지자의 이스라엘

열매를 보고 나무 곧 주인을 아는 겁니다.

 

하늘영광 다 버리고 뛰어든 얼굴을 찾는 얼굴

자기를 찾는 자기 가 되는 거죠.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살아나는 3일 만에 다시 사는 얼굴입니다.

얼마나 또렷한 얼굴입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짓선지자가 말하는 의문의 얼굴인 가면

잃어버렸다가 되찾음도 없고

3일의 간극도 없는 가면인 거죠.

의문의 죽이는 것인데

도대체 의문의 죽이는 것이 뭔데?

그것이 바로 거짓선지자가 주장했던 이스라엘이요

바리새인들의 주장했던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3일의 간극도 없는 즉 잃어버렸다가 되찾음도 없는

그저 46년 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정통이니 역사이니 우려먹는 재탕 삼탕하는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치는 이스라엘 절대 망할 리가 없다는 그 이스라엘

 

즉 잃어버렸다가 되찾음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그런 이스라엘

 

이렇게 두 이스라엘로 갈려진다는 겁니다.

사실상 두 이스라엘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데

다른 한쪽 이스라엘은

하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말하기 위한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즉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어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왜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있는가를 말하기 위한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결국 야곱이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정작 껍데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도 아니면서 이스라엘이라고 우겼구요

물론 역사와 정통이 뒷받침하니까 그 의문을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역사와 정통에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단절된 이방여자가

이스라엘도 아닌데 잃어버린 이스라엘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부터 예수님은 이단이 되는 겁니다.

 

그 개같은 이방여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이 됩니까?

그것도 잃어버린 이스라엘??????

 

결국 예수님 자기의 속성이 담긴 얼굴이 바로

팔복처럼

나 이런 얼굴을 찾고 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얼굴이 소리치기를 나 이런 얼굴을 찾을래 라고 말입니다.

어떤 얼굴인데?

응 이 얼굴이 이렇게 말했대

 

주여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개 같은 이방여자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 85편 본문의 내용은 잃어버린 내 얼굴 찾기입니다.

여기에 내 얼굴은 우리가 아닌 예수님 얼굴 말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을 펼치는데

그거 성화론자의 트레이드 마크죠.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그러니 다들 속아 넘어가죠.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회복이라는 말도 말이 안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은 잃어버렸어요.

싫어버린바 되었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은 아무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 자기자신의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면을 누가 싫어합니까?

다들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가 좋아라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주체가 이미 가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가면을 쓴 얼굴이 아니라

가면 자체가 주체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제일 좋은 가면!! 마치 아이언맨 가면이다 말이죠.

그것이 왜 회복 되어야 합니까?

 

아이언맨 가면을 왜 회복시켜야 합니까?

회복시켜서 뭐하게요?

 

싫어버린바 된 적이 없는 데

이것 보다 제일 좋은 가면이 없는데

그래서 성화론자들의 하나님형상 회복 운동을 가만히 보면

아이언맨이라는 가면 쓰기 놀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쓰면 정의의 사도가 되거든요.

악당을 무찌르는 자가 되지, 정작 악당이 되면 안되니 말이죠.

늘 영웅은 이 악과 싸운다 말이죠.

악당이 되어 본적이 없는 가면이기에

다들 그 가면을 쓰겠다고 달려들잖습니까?

 

묵시 운동까정 해 가면서 말이죠. 하나님나라 운동이지요.

바리새인이 그 짓의 달인들 아닙니까?

의문의 반복인

정의도 아니면서 정의로운 척

악인의 장막, 곧 강도의 소굴의 반복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눈에는 그 악당이 바로 예수님이다 말입니다.

강도의 소굴을 허물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 자식의 눈에 마귀로만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의 부정이지요.

 

자 이런 의미에서 시편 85편은 바벨론 포로되었다가 돌아오는 장면들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모인 이스라엘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바로 누구 라는 인물이 이런 모습이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경험이다는 거죠.

그러니 자신들이 잘못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는 둥

또는 자신들이 이제 제대로 되어서 포로되었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둥

그런게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데

졸지에 이스라엘이 그 체험을 맛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대로 오시잖습니까?

그런데 시편을 이 시편 85편을 안다고 하는 자

달달달 어릴적부터 다 외었다고 하는자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자가

바로 이 인물을 거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경험 조차도 역사가 되고

기념비가 되는 자랑

곧 육의 자랑이 되기 때문에

체험해봐도 인간은 역시 안된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포기 합니까?

인간이 그러든 말든

예수님은 이전 것은 다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결국 앞의 경험들이든 또 그런 경험을 해 봐도 역시나 인간은 어쩔수가 없다 할지라도

 

이런 모든 것들이 주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보충물로써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전 것은 다 지나가고

의문의 반복도 지나가고

죽이는 육도 지나가고

 

보라 새 것

또렷한 살리는 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의 얼굴인지 뒤의 얼굴인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얼굴과 얼굴이 만날 때

우리의 가면을 벗겨주는 얼굴이어야 하고

또 우리 가면을 벗겨주는 얼굴은 바로 이런 3일의 간극을 실행하시는 분으로써

잃어버렸다가 되찾은바 되는 얼굴로써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가면을 안 쓴게 아니라

우리도 역시나 가면을 썻는데

그런 단절된 자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보게 만드심으로써

얼굴과 얼굴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을

성사 시킨

그 십자가의 밝히 보이심

그 또렷함

의문이 없는 명료함을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나무에 달린 인자를 보기위해서

우리의 가면을 낱낱이 들통당하는 이 3일의 간극을 통해

잃어버렸다가 되참음을 통해서

그 사랑의 확정을 누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 46년의 가면 그 좋은 가면이 다 허물어져도

마치 광야에서 나 돌아갈래 ~ 박하사탕, 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쳤던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서 갈기 갈기 찢어버린 그 아이언맨가면을

허물어져서 너덜 너덜해진 가면을 그래도 끝까지 다시 쓰고서는

성화론을 하겠다고 ~~~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겠다고 ~~~~

묵시 운동, 종말 운동을 하겠다고 ~~~~

 

역시나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십자가 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고전 13장에서 말하는 사랑

곧 얼굴과 얼굴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은

 

뒤의 15장의 부활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 부활이 소위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또는 인간의 영생불멸을 욕망하는 그런 차원이 아닌

 

잃어버렸다가 되찾은바 된 입장에서의 관계성이지

따로 내 생명을 따로 챙기듯이 소유하듯이

휴대폰 밧데리 수명을 구닥다니 옛날폰이 아니라

최신 신상 영구 밧데리로 교체하듯이 소유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내 생명 밧데리 자체는 신상품으로 교체해본들 어차피 또 의문의 반복으로써

떨어뜨려 수명단축시키고 화를내다가 던질게 없어서 폰을 던져 밧데리 깨뜨리고

그러니 영구수명밧데리 교체해 본들 무슨 소용이냐 말이죠. 부품교환해 본들 어차피 ~~~

 

내 생명 밧데리는 의미 없다 라는 것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영생이란 관계이지

내 개인의 영생불멸의 영구 수명, 영구 밧데리 에너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영생은 없다 말이죠.

 

그러니 내만 남았나이다 라는 그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이유는

그래야 7천명이 내 개인에게 속해서

또는 그 7천명 속에 내가 속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똑 떼어내어서 나의 소유품으로

또는 내가 너무 너무 지혜롭게 그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그냥 나 라는 것을 손놓듯이 놓아버리게 하는 사건

안되죠 물론 안되죠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고맙게도 나를 못박아버리는 겁니다.

오늘 시편 85편에서 이 과정을 격고 있는 이스라엘 조차도

지금 불가능의 세계를 헤엄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는 그 느낌처럼

얼마나 신날까요?

분명 평상시에 그 지점에 있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죽음 속을 걷고 있는데 안 죽어요

누가 안 죽이도록 하신 겁니까?

 

부활이란 죽음 속을 걷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리 봐도 내가 잘나서 내 쪽에서 믿음이 좋았다던지

그런데 아예 없거든요.

그런데도 안죽는다는 것은

내 쪽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의 조치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인데

무슨 놈의 영생불멸이니 등등

웃끼지도 않다 말이죠.

그래서 처음 제목을 심판 속의 구원, 진노 속의 구원,

죽음 속의 구원 이렇게 할려고 했는데

중간에 구절을 발견하다 보니 새롭게 고쳐서 그렇지

원래 다 같은 의미입니다.

 

죽음과 별개로 부활이 아니다는 겁니다.

 

부활은 관계성으로써 얼굴과 얼굴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동안 그겋게 되지 못했는가?

얼굴이어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가면을 쓰고

아이언맨 가면

성화가된 가면

하나님형상회복된 가면 따위를 쓰고

예수님 얼굴과 입맞출려고 하니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더라 말이죠.

그렇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안됩니다. 누가 감히 죽음 속에서의 부활의 첫열매가 될수 있겠냐 말이죠.

 

오히려 우리는 그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가면

우리의 얼굴이 가짜임이 들통남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활도 못하면서 즉 죽음 속에서 살아남지도 못하면서

진짜라고 우겼던 그 가면을 홀라당 불에 태워짐을 당해야 합니다.

그럼 얼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싫어버린바 되지요.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인자가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유일한 치료인데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보라고 하니 웃끼는 소리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성경은 다 그런 식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

불뱀에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 보라고 하니 말입니다.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다들 가면을 쓰는 이유도 이런 이유입니다.

가면 자체가 그만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가면을 벗기면요

새까맣게 타버린

불에 타버린

불뱀에게 물린 그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가면을 안 쓰면 견디질 못하거든요.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가면을 또 다들 쓰고 난리입니다.

 

어떤 철학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마이클 잭슨이 왜 백인의 피부로 가리우고 싶어서 성형을 하는가?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인데

유럽 백인의 얼굴이 그만 현대남성의 표준이 되고 만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다는 거죠.

그래야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니 유럽의 개혁주의가 먹혀드는 겁니다.

 

특히 한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종차별이 아주 극심하죠.

오로지 백인의 흰 피부가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권력이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그런 권력보다 훨씬 세거든요.

그런데 권력을 쫏고 힘을 쫏는 것 보면

자신의 2% 부족한 아름다움을 오히려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배설물 똥을 얼굴에 쳐바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구스여인 술람미 여인이 그래서 성경은 역설적이게도 사랑받습니다.

2%가 너무 너무 부족해서

거기서 잉여가 나오는데 ~~~~

 

시편 85편의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게 아니라

그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이 치욕을 잊지말자 라고 해서

그 이후의 자손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 국가 회복

마치 시오니즘처럼

그런 모습으로 똘똘 뭉치다 보니

 

예수님께서 그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3일의 간극의 반복하심을 거부하고

 

그 치욕을 반복할까봐

시도 때도 없이 독립운동

이스라엘 회복운동

로마로부터 해방운동을 벌리는데

그 당원 중에 하나가 가룟유다인것처럼

자기 독립운동에

자기 하나님나라 운동에

쓸모없다 싶어서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시편 85편을 읽은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은

정작 그 취지의 반대인 의문의 반복으로 빠져버린 겁니다.

그러니 성경박사라고 해서

아무리 정확한 해석을 한다고 자부해도

 

이 말씀 자체가, 이 시편 85편 자체가

미끄러짐을 유도하는

3일의 간극을 빠다 바르듯이

버터를 잔뜩 발라서

 

시편 85편 나는 읽었다 하는 순간

이게 무슨 의미인줄 알았다 하는 순간

 

순간

제명이 되는

 

쭐꾸덕 미끄러지는 그 치욕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 아니면 우리는 안쳐다볼꺼 잖아요

 

미끄러지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치욕을 당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쳐다보라고 물리게 하신 겁니다.

미끄러지게 하신 겁니다.

 

안그러면 말라꼬 쳐다보겠습니까?

미끄러졌기 때문에 쳐다보게 하신 것 아닙니까?

 

안물릴 것 같으면 왜 보겠습니까? 멀쩡한데

물려야

마귀에게 잡혀와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게 하시지 않냐 말이죠.

 

물려 온 놈 한테만 의미 있는 음성입니다

 

홀라당 다 타버린 에봇이어야만 의미있는 흰옷이다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해당 되는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환자에게만 해당 되는 의사이다는 겁니다.

 

새까맣게 다 타버린 얼굴한테만 해당 되는 주의 얼굴이요 주의 오른팔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자와 긍휼을 반칙으로 뒤짚어 씌우는 진리의 만남이요

 

의롭지도 않는데 오히려 죄인으로 비로소 들통난 죄인 중의 괴수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허물을 덮으셔서 자신의 의로 자신의 피로 덮어씌운, 그런 의의 옷을 입혀짐 당한자와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신바 된 화목제물이 되셔서 화평과 입맞추게 하셨다는 겁니다.

즉 남을 7번 용서하는 긍휼을 베푸는 자와 진리되신 예수님의 만남이 아니라
정반대로 도리어 7에 70번 용서받아야할 자와 진리 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에게 왔다 말이죠.

십자가 라는 모든 허물을 덮는 
화목제물인 3일의 간극으로써의 만남 이지

46년 동안의 의로움이 허물어 지는, 의문의 46년의 반복과의 만남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남을 살리지 못합니다.
요나의 표적 만이 남을 살리는 의문으로 하지 않는 입맞춤이다는 겁니다.
니느웨 백성에게 주님의 심판이 찾아올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으면 입맞춤으로 화답하더라 말이죠.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히려 이 여인의 행동에 짜증을 내었고
요나의 표적 당사자 요나 선지자 조차도 오히려 니느웨 행동에 짜증을 내었던 겁니다.
그 정도로 명료하기 때문에 의문의 죽이는 것이 살리는 영에게 먹혀 들지 않았던 겁니다.

니느웨 백성이 어찌 주의 화평에 입맞출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나는 주님이 뛰어드셨다는 것을 알고 삐지지만 말이죠.
요나 조차도 입맞춰야 할 입장인데 말입니다.
구스 여인을 시셈한 미리암 처럼 온유 곧 주님의 기도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참선지자라고 해서, 예수님의 12제자라고 해서 주님의 화평 곧 충돌에서 예외가 되는게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의문 따위가 있으며 부족하고 미흡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뭔가 부족하다고 성화론자는 몸이 건지러워 죽습니다.

기여이 쪽팔리니까 뭔가 더 채워 넣어야 한다고 우긴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85:12, 개역)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85:13, 개역)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땅과 기업

이거 시편 65편에서 살펴봤지요?

주님은 인간을 다루지 않고 땅만 상대한다고!!

 

즉 약속의 땅만

신약으로 치면 약속한 성령

이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성령이라는 기업을 주신다 말이죠.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고

방명록에 사울왕은 왜 성령 받았느냐 라고 물었는데

원래 없는 자이기 때문에 그 있는 것도 빼앗기고자

 

다윗 왕을 말하기 위한 보충물이다고

야곱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된 형 에서는 보충물이다고 말이죠.

 

이들 보충물들의 특징이 바로 없으면서 있는척 하는 것이 특징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결론적으로 시편 85편을 살펴보면서

이것을 보았던 이스라엘이 읽고 쓰고 외우고 몸에 새겼던 그 이스라엘이

정작 이 시편 85편대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것에서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비밀이다 말이죠.

그 비밀을 풀게 아니라

그 비밀 그대로 주님에게 떠넘겨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풀어봤자 또 의문일 뿐입니다.

관계가 중요하지 나 풀었다가 중요하지 않아요.

단 하나도 못 풀어도 천국 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풀었는데 지옥가는 인간은 뭐냐 말이죠.

 

그런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은 비밀입니다.

긍휼과 진리의 만남은 그야말로 비밀입니다.

의와 화평의 만남은 정말 정말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 신비로움을 벗겨버렸다고 해서 벗겨지느냐?

더 꽁꽁꽁 둘러쳐져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의가 되어서 우리의 성화가 되어서 화평과 화평케 되는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관심사가 나 가 아니라

화목제물입니다.

 

이 화목제물이 있다면

나는 삭제 당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화목제물만 또렷하고 반복이 되지

나는 반복이 안됩니다.

즉 나는 영생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억지로 나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화목제만 반복합니다.

또렷하고 살리는 영이거든요.

 

그래서 긍휼과 진리의 만남만을 반복하십니다.

의와 화평의 입맞춤만 반복하십니다.

 

얼마나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겁니까!

화목제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꾀냐 말이죠.

 

이 외의 나머지는 다 의문일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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