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문자와 몸, 그리고 다 이루었다 (서론)

 

요한계시록 서론

 


흔히들 성경해석은 성령으로 한다고 합니다
.

요즘 이단들이나 정통주의나 신흥이단이나 모두다 다 이렇게 성령으로 한다고 합니다.

즉 저마다 다 자기가 증인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동시에 그런 증인된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쪽은 증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거죠.

 

결국 우리는 똑같은 쌍둥이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어야 할 입장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우리들 조차도 그런 사고에 말려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똑같은 쌍둥이라고 해도 둘 다 증인이 아니면 어떻게 됩니까?

괜히 두 쌍둥이를 놓고 진짜냐 가짜냐를 분별할려고 한 것이

헛된 일이 되고 만 것 아니냐 말이죠.

 

이단 감별사들이 그런식으로 나서는 겁니다.

참 쓸데 없는 짖을 골라서 하는 놈들이다는 거죠.

그렇다고 안한다고 의인 되는 것도 물론 아니고

그놈들은 그것으로 돈버는 것이 됩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말로는 성령으로 한다고 하지만

결국 성령은 성경에 가두어 놓고 본인이 주체가 되어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차피 안 보이는 성령이니

주체로써의 활동상황을 볼수가 없다 말이죠.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예수님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해 놓고서는

그들에게서의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다 말이죠.

그 기준이 바로 부유하는 문자

붕떠있는 떠돌아다니는 문자를 자기가 포착한 만큼 자신의 신체 몸에 담아서

많이 담은자일수록 많이 알기에

그리고 혼자가 아닌 조직적으로 바리새파를 결성해(객관적이며 합리적이다고)

또 여러파가 문자를 포착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게 해석을 해서

그 해석을 기준으로 해서

문자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메시아야 아님을 아무리 해석을 해도 안맞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문자해석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위협적인 존재로 해석한 것 또한

바로 문자해석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즉 인간 신체와 안 맞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유하는 문자와 인간의 몸의 일치성은

곧 역사가 되는데 이런 역사는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이라서

마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부유하는 떠도는 문자요 몸이요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도대체 뭘 이루었는데?

십자가의 피 용서 곧 알파와 오메가로써 기록된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곧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사랑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문자 곧 몸 곧 역사를 붙잡고써 씨름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

뭘 이루었는지에 대한 원인에 따른 결과로 볼수가 없기에

다 이루기는 뭘 이루어 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들 기준의 문자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똘아이 하나가 다 이루었다고 생뚱맞게 선언해 버리니까?

무슨 원인이 있어야 이루거나 말거나 할거 아니냐 말이죠.

원인도 없이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소꿉놀이 하다가 해질녁 어머니 소리를 듣고

밥 먹어라 라고 외치는 소리에

아이고 끝났다 라고 손 털고 집에 가는 것과 같은

애들 같은

소꿉장난 같은 소리인

뚱딴지 같은 소리이다는 거죠.


아이(잉여)는 원인 없는 결과로 끝났다 를 선언하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는 어떻게 해서든 원인만을 찾도록 되어 있기에 역사를 도서관 뒤지듯이 거기서 찾도록 되어있습니다.
 

어른들은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해가 지지도 않았고

처리해야할 서류가 산더미 같이 많아서

끝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누가 와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 말이죠.

사실상 그것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는데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요한 계시록 이후에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그 선언에서

거꾸로 문자를 곧 역사를 곧 바리새인의 해석을 파고들어 가봐야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 라고 우기면서 말이죠.

역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며 결국 자신들의 신체인 몸과 문자는 여전히 진행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의 해석이 다 이루었다 라는 역사의 끝에서 곧 역사의 마침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해석을 해 보게 되면

 

말로는 성령이라고 했던 것이

알고보니 육적인 해석이였다는 거죠.

 

왜 정통이든 이단이든 모조리 성령으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하냐 말이죠.

인간의 해석은 안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진짜 인간의 해석이 왜 안되는지에 대한 것은 없이

성령으로만 이라는 말만 슬로건으로 내밀고서는

정작 자기들의 육적인 해석으로 도배를 해놓고서는

성령의 해석이라고 우긴다 말이죠.

 

역사의 마침에서 해석하는 근거가 하나도 없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에서 해석하는 근거가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의 피로써 해석하는 근거가 단 한 개도 없다 말이죠.

 

그러니 그런 육적인 해석은 놀랍게도 불교도 성경을 공부하니까

불교도 다 할 줄 아는 해석이더라 말이죠.

 

불교도 자기들 영빨로 해석했다고 우긴다 말이죠.

도닦은 도의 영빨. 기를 모아서 기빨로

 

그러니 유대교와 불교가

쓰는 용어만 다를 뿐이지

문자를 몸 신체가 소유해서 해석하는 것은 원리는 같은방식이다는 거죠.

그리고 실천이라는 동일시의 행동들 행함들

우리가 유교를 격어봐서 알잖아요.

유교 보다 몇배나 엄격한 것이 유대교 이니까

문자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자부심이다 말이죠.

곧 실천 여부의 질과 양에 따라서

계급이 나누어 지는 겁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라는 말은

그 정도로 계급중에서 가장 높은 레벨의 신체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도바울이 나 무지 높은 계급이였어 라고 자랑하듯이 간증하는게 아니라

그 정도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겁니다.

그 헛짓에 제일 어리석은줄도 모르고 제일 지혜롭다고 착각했다고

문자해석의 대표자 최고의 권위자가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배설물만 잔뜩 모아놓은줄도 몰랐다 라고 말이죠.

바로 그 신체 중심의 문자해석
신체의 등급으로 매겨지는 문자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럼 왜 사도바울은 무슨 근거로 남들이 갑이 못되어서 안달하는 그 높은계급을

자신은 무슨근거로 배설물 똥냄새 난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그 근거가 바로 역사의 마침,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역사의 끝, 역사의 마침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보게 되니 배설물이였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역사의 끝에서 보아야 하지

문자를 포착해서 해석하는 해석은 다 엉터리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무슨 수로 역사의 끝에서 봅니까?

다 이루었다에서 봅니까?

십자가에서 봅니까?

 

당연히 안되기 때문에 성령으로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안된다는 겁니다.

 

즉 성령이라는 의미는 인간배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 이루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게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런 자만이 역사의 끝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역사는 더 이상 없다 말이죠.

 

역사가 있는 사람은 더더욱 문자를 소유해야만 연명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할려고 말이죠,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고 등등

 

그러나 역사의 끝에 서 있는 자

물론 자력으로 그런 자는 없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등떠밀린자는

역사의 끝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 [다 이루었다]를 봐 버려서, [다 이루었다]가 덮쳐져 버려서

그것을 누리게 되니까 말이죠.
(누리고 즐긴다는 것은 실천의 의미가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인 무시험 합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이죠.)

 

저번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썩을 것을 못 누리는 팔자 라고

하늘의 썩지 않는 것을 누리는 팔자 라고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이 땅에서는 거지나사로 이다는 겁니다.

자살한 목사의 말처럼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고 해서 거지나사로가 되는게 아니라

그것은 여전히 역사가 끝나지 않은채로 자기 숙제인 거지나사로 되기 라는 실천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의 반복이고

 

거지나사로가 될 필요가 없이 거지나사로로 태어났기에

이 땅에서 부자로 살아도

이 땅의 것이 썩어질 것을 알기에

하늘의 썩지 않을 영광을 누려야 할 팔자로써

거지나사로로 태어난 것을 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해석하는 문자해석자들을 보면 더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겁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려고 문자를 파고들고자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붙잡아서 증인이 된 자는 (사도요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필요가 없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알아서 다 하거든요.

그렇게 알아서 다 한 것을

사도를 통해서 스피커로 삼아 표현한 것 뿐입니다. 발설한 것 뿐입니다.

 

사도요한이 뭐 요한계시록 해석할려고 달려든적이 있던가요?

신학공부해서 공부한 결과를 말한 겁니까?

아니잖아요.

 

만약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녀서 습득하고 체험하고 경험하고 공부했던 그런 것을 모아서 해석하고자 했다면

왜 사복음서가 각기 다른주장을 하냐 말이죠.

같은 주장을 해야지

왜 사건내용이 다르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문자를 포착해서 해석한다는 것을 알기에

포착 불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다양성이라고 해서

성령의 다양성이라 주장하는데

그것 마저도 인간의 자기 몸을 변호하기 위한 방식이지

정작 인간은 성령을 변호할 수가 없다 말이죠

결국 성경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성경을 해석하는게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나의 신체, 인간의 신체를 변호하는 식이 되다 보니

그 신체를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는 예수님의 신체를 죽이게 되는 겁니다.

참 어리석게도 예수님의 신체를 죽이면 진짜로 죽어 끝나는 줄 알았는데(이것이 신체를 목적으로 한 인간 육의 한계적 해석인 거죠.)

오히려 더더욱 살아나 오히려 그 예수님의 신체를 퍼트린 꼴이 되는 겁니다.

결국 떠도는 문자를 포착하는 인간 몸의 해석은 결국 그 때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게 아니라

여전히 판도라의 상자를 매일 매일 열고 있는 셈인 거죠.
자기 몸을 여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문자를 담은 신체인가를 게임한 몸에 담은 탁구공을 몸을 열어서 하나 하나 끄집어 내어서 누가 누가 잘했나를 따지는 조건의 몸이 된 겁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아 그럼 아무것도 할게 없으니까 안하면 되겠네

라고

아무것도 안하기를 행하는 실천을 또 하는 겁니다.

자 이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제불능이다는 겁니다.

 

그럼 우짜라 말이냐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바로 이것이 인간 하기 여부에 달렸다는 식으로 보는 거다 말이죠.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이런 어쩔수 없는 인간의 신체를 다루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면 됩니다.

마치 오늘 사도요한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죠.


사도바울이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것 다 해봤다 말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모잘라 ~~
그러다가 졸지에 [
다 이루었다]를 만난 겁니다.


자기 쪽에서는 오히려 할게 너무 너무 많고

인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주변에서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것으로는 택도 없다 싶어서

끝까지 올라가고자 했다 말이죠.

그래서 이단 예수를 척결하고자

가장 선봉에서 나사렛 예수를 믿는 이단들을 다 차단하는데

가장 열심히였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자신은 아직 멀었다고 열심을 다했다 말이죠.

 

바로 그랬던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못보게 되어

말에서 떨어집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라는 뜻은

내가 분명 이단을 잡으러 갔는데

내가 도리어 그 이단을 증거하는 가장 선봉자가 되었다는 뜻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다 이루었다 라는 뜻입니다.

즉 이 모순의 간극을 메울길이 없다 내 쪽에서는 안된다 라는 뜻이지

 

아무리 아무것도 할게 없다 가만히 있어라 해 본들

심지어 아무것도 못하도록 꽁꽁 밧줄로 묶는다고 해도

인간은 반드시 그 묶은 밧줄을 풀고자 한다 말이죠.

가만히 있기를 실천한다 말이죠.

 

그러다가 다 이루었다는 만나니까 충격을 먹는 겁니다.

아뿔사 다 이루었다가 맞네 라고

자기가 한 것과 비교하니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오히려 자기것이 머리에 숯불을 얹은 것처럼 부끄럽게 여겨질정도로

똥냄새가 가득하다는 것을 그때 느낀다 말이죠.

 

이것이 다 이루었다가 신실하게 충실히 성실하심으로 나를 꺽는

나의 수건을 벗기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도 나의 이 모순됨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지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니까 진짜로 아무것도 안하기를 실천하라는 뜻이 아니다 말이죠.

막살아라고 하니까

자기가 할 줄 아닌 영역의 막살기만 할 줄 알았지

우와 내 보다 심한 놈을 보면 그 막살기는 도저히 못 따라하는 겁니다.

노는 놈도 돈이 있어야 노는 것이지

돈 없으면 놀지도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 자기 해석을 따로 자기 신체 곧 자기 형편에 맞게 막살기가 설정이 된다 말이죠.

그럼 그게 무슨 놈의 막살기냐 말이죠.

사람이란 선천적으로 자기신체 기준으로 긍정적인 자기유익을 구하지

부정적인 자기손해를 구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 부정적인 막살기 보다

긍정적인 제대로 살기를 바라고 바라는 것이 자기 신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막살기는 불가능해요

오히려 나 보다 더 제대로 사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막살고 있어

예수님은 더 심하게 막살아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 술을 즐긴다고 별명을 붙을 정도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에서 보는 시선이 바로 막살기 이다는 겁니다.

 

역사 속에 있는 자들은 막살기 자체를 할수 없어요.

제대로 살기 밖에 못한다 말이죠.

 

역사 끝에 있는 자만 막살아요

다 이루었다 라는 이제 역사는 없거든요.

묵시만 있거든요.

알파요 오메가 뿐이거든요.

십자가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해석 자체가 달라요.

역사 속에서는 문자 외에는 다른 시선이 없어요.

문자만 붙잡을 수 밖에

그러니 번제와 제사만 반복

의문의 것만 반복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 뿐이다는 거죠. 사실 원인만 있지 결과가 없어요. 마침이 없어요.

 

그러나 다 이루었다에서 출발하는 해석은

문자 라는 신체 밖의 다른 몸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율법의 완성인 몸에서 해석합니다.

그러니 원인 있는 해석을 못해요

원인 없는 해석만 해요

원인 없는 결과만을 외친다 말이죠.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막사세요 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죄 밖에 없었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게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으니 나 옳제 라고 하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왜 다 이루어졌지? 무시험 합격이 되었지? 아 저분이구나 라고

나의 신체에서 떠나 다른 몸

인간의 몸 밖의 다른 몸을 보고 그 몸에서 나오는 해석을 보는 겁니다.

그 분의 해석이 무조건 옳다 라는 겁니다.

나의 해석은 무조건 틀렸다 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흔히들 유행을 타던 호기심의 주제들

666 뭐 십사만 사천

뭐 한때 두때 반때 등등등

이런 것들은 역사 속에서 해석이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 계산 할 수가 없어요.

계산 하지 마세요

계산 안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계산할 수 밖에 없는 본능이겠지만

이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계산 밖의 것을 그냥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위치 곧 역사 끝 역사의 마침에서 계산한 것을 보면 아 이래서 항상 틀렸구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문자로 해석하는 유대인의 수건을 벗기는

완악한 마음을 꺽는

종의 모습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심이다는 거죠.


그 정도로 우리의 곧은 목이 너무 너무 꼿꼿하기에

문자로 해석하는 그 방식에서 못 벗어난다

육체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계급화 되어있고

그것으로 해석 잘했니 못했니로 계급을 짖는 율법화된 구조에서 못 벗어나는

역사 속에 갇힌

육체 속에 갇힌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선지자 되신 예수님이 이런 사도바울을 꺼꾸러 뜨리는 방식이(종으로써 예수님)

힘에는 힘이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이겠습니까?

 

느닷없이 사도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밝히 보이는 것이 없는데 누가 나를 꾀냐고

방금 좀 전까지만 해도 사도바울 자기가 남을 십자가 외에는 많은 것이 있다고 꾀고 다녀놓고서는

입 싹 딱고 뻔뻔스럽게
이제는 십자가 외에는 밝히 보이는 것이 없거늘 누가 나를 꾀느냐 라고 말한다 말이죠.

결국 모순되는 이 간극이 크면 클수록

이 단절성을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자신이 참선지자를 핍박하는 자인 완악한 자에서

도리어 참선지자의 영을 받아 핍박받는 종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히틀러가 반때? 한때? 세때? 에 나온다는 둥의 역사 해석이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석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뭘 해도 다 죄니까)

그것을 해도 안해도 무관하게 전혀다른 시선이 역사의 끝(다 이루었다)에서

역사의 용어로 표현 못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표현되니

오히려 역사는 오해해야만 하는 용어로 침노하는 겁니다.

그 용어 그대로 역사에 표출시키는 것이 요한계시록이고

그것을 문자로 받아서 해석할려고 달려드는 것이 인간의 육체이다는 거죠.

 

그러니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인간의 문자 해석을 오히려 깨드리는 식으로 오는 거죠.

그러면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다 이루었다는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

건방지게 문자 이것을 실천했다는 둥 등등의 것으로 [다 이루었다]를 맞이할게 아예 없는 겁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내 쪽에서 준비가 되어서

뭔가의 조건을 갖추어서 맞이하게 된겁니까? 아니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맞이하게 된 겁니까?

내가 주님을 영접한 겁니까? 주님이 나를 영접한 겁니까?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만약 그렇게 되면 유대인과 같은 완악한 자이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다 이루었다에서 다 이루었다를 보내셔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을 보낸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기껏 해 봐야 육체에서 육체로, 행함에서 행함으로,

문자에서 문자로 된 것을 포착해서 나온 사랑이기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 밖에 안 나옵니다.

 

그거 하지 말자가 아니라 그거 해서라도 바닥을 치자 말이죠.

엉터리 임을 알자 말이죠.

그리고 뭘 해도 요한계시록 해석 엉터리임을 알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엉터리인지를

다 이루었다에서 보여주시는, 그 지적을, 그 간섭을 누리자 말이죠.

사생아가 아니다 라는 매 맞음을 통해서 기뻐 뛸 것일 겁니다.

 

처음부터 바른 해석하겠다고 달려들게 아니라

아 이래서 항상 틀렸고 항상 엉터리임을 지적해주시는

다 이루었다가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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