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편파합격 일곱교회

 

요한계시록 1장 요약

 

앞의 서론에서 요한계시록을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자면

다 이루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게 없다입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공포의 지구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다 이루었다를 매일 매일 새록 새록 느끼게 되는 기쁨 중의 기쁨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끝에서 그것을 전해주고싶어서 요한계시록은 안달이 나서 나에게 알려주니까 말이죠.

 

그런데 같이 역사의 끝에서 보면 무지 무지 기쁜데

졸지에 모호하고 마침도 없는 역사 중간에 있다 보니까

그 기쁜소식을 전체로 누리지 못하고 자꾸 부분 부분으로 듣게 되는

우리 육체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오히려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으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듯 해도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다 이루었다가 그 차이를 보여주고자

눈에 보이는 것에 갇히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치 아직 때가 되지도 않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내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진짜로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함으로써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되니

제자들이 어찌된 이유이냐고 묻는 겁니다.

 

사람들이 늘 항상 동문서답한다고 주장하는데

참 재미있는 것은 여러답변 중에서 그럼 제대로 알아 먹은 답변이 왠일로 생겼다 칩시다.

가끔 그럴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고개를 끄덕 끄덕 하더라 말이죠.

다른 것은 못 알아먹었는데

이번 설명은 알겠다고 이번은 동문서답이 아니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은 답을 들은게 아니라

그 사람은 듣고픈 말을 들어서 끄덕 거리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 동문서답이 되어야 정상이다 말이죠.

인간은 원인을 원합니다. 그래야 결과가 온다고 여긴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육이고

영은 그 반대입니다. 원인이 없어야 합니다. 결과만 있어요.

내가 왜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으면 안돼요

아 이거 무지 무지 중요한데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책을 보는 이유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결과를 보는게 아니라

나는 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가를 찾더라 말이죠.

그게 신학이고 그게 교리가 되어버렸기에

늘 미완성이고 늘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만 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결과가 오면 나 라는 원인은 사라져요

그래야 이 다 이루었다가 기쁘고 감사한데

나 라는 원인도 있고 다 이루었다고 있고

이것을 억지로 본드를 붙일려고 하니까

기쁜게 아니라 감사한게 아니라

자꾸 원인과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리가 탄생하고 그래서 성화론이 탄생하는 겁니다.

종교가 발생하는 겁니다. 원인을 찾고자

 

그렇게 되다 보니 매일 매일 마약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와?

? 불안하니까! 오늘 겨우 겨우 지냈는데 내일 구원 못 받으면 어떻하지?

아 불안하다 내일은 이 말씀 지키면 탈락 못 시키겠지?

또 그 다음날 또 저 말씀 지키면 탈락 못 시키겠지?

이게 더 큰 문제는 아예 보편화 되어버려서

교리와 신학과 종교가 되어버리니까

졸지에 교회는 정신병자들만 모이게 되는 겁니다.

 

목사는 흐뭇하죠. 하여튼 목사는 예수 믿는 자가 제일 밉고

교회 나오는 자는 무조건 제일 사랑스러워요

왜냐? 나와야 돈 내니까 말이죠.

요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는 대학부 청년들이 제일 밉상이데요

돈도 안될뿐더러 미래가 보장이 안되니

밥만 축내는 놈들이라고 말이죠.

제가 한 두 교회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면 말을 안해

보편화가 그래서 사람잡는 거다는 겁니다.

전체를 한 묶음으로 묶어버리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다 이루었다가 전혀 감사와 기쁨이 안되는 겁니다.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나는 매일 매일 원인을 찾고 조건을 따지면서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다 이루었다를 끌여당겨 봤는데

기쁘기는커녕 감사는커녕 더욱더 불안해지는 겁니다.

 

다 이루기는 뭘 이뤄?

그러니 아무것도 할게 없다는 소리가 헛소리로만 들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보세요.

진짜 보편성은 뭡니까?

인간 한테 물어 보고 정해지는 것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역사의 끝을 정해버리고서는 그냥 통보해 버리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고

여기에 내가 뭘 행해서 보탬이 될게 없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창조 곧 알파도 그랬다 말이죠.

그런데 종말 곧 오메가도 역시나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안식하래?

누가 감사하고 기뻐하겠습니까?

 

이 불가능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를 말라 죽게 함으로써

주여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당신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군요.

처음과 나중 되시군요.

역사의 끝을 보여주시군요.

당신이 와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어찌된 연유냐? 이유나 좀 알고 보자

라고 제자들이 걱정어린 눈으로 묻습니다.

? 자기도 그꼴 날까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답을 들으니 답을 안들은 것 보다 더 못해

괜히 들었어 괜히 들었어 괜히 듣는 바람에

오히려 더 큰 걱정만 쌓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바로 이어지는 사건이

또 역시나 큰 자극이 되다 보니

금새 또 다 잊어버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안그러면 그 큰 걱정을 무슨 수로 풀겠습니까?

 

더 큰 사건? 더 큰 자극이 뭐냐고요?

 

마태복음 21장에서는 대놓고 성전에서 가르친다는 이유로 간따나 미움받는데

그러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제자들이 걱정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는 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매매하는 도구들을 뒤엎어버리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 장면이였고요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치시니까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하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12:33, 개역)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12:34, 개역)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12: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12:36, 개역)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7, 개역)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2:39, 개역)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개역)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12:41, 개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2:42, 개역)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자 결국은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라는 역사의 끝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완료를 말씀하시고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역사 속에서 이유와 조건과 원인을 따지는 식이다 보니 예수 당신은 우리가 문자로 수집해서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다는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자꾸 표적을 보여달래요 즉 이 말은 원인을 조건을 따지겠다는 겁니다.

조건에 맞는지 안맞는지? 그러나 바리새인을 위한 기적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약올리듯이 그들이 싫어하는 개같은 이방인, 원수 보다 더 철천지 원수인 매국노 세리, 등등

그들에게는 한없이 표적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서도 또 동시에 출교당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왜 나에게는 표적 안보여주냐고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동문서답입니다.

이사야가 증거하기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니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2:39, 개역)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개역)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12:41, 개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너를 위한 표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역사적으로 또 문자적으로 아무리 교리를 지켰다고 가장 많이 지켰다고 자부한다 하더라도

너를 위한 구원은 없다 오로지 주의 영광을 위한 것 뿐임을 이사야가 증거한 말씀으로 동문서답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이 응했고 다 이루었다 라는 일방적인 선포이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답변인 겁니다.

 

자 그럼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드디어 끝이 왔구나 라고 기뻐하는 겁니다.

물론 성령이 임한 자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으로 겁주고 협박해서

자기를 위한 구원을 듣고픈 자들에게,

자기를 위한 기적을 또는 종말을, 계시록을 듣고픈 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전혀 전혀 그 조건과 원인에 전혀 안맞습니다.

그것을 준다고 과연 감사하고 기뻐할까요?

깨진 항아리에 물 채워 붓는다고 물이 차냐 말이죠.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를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깨진 항아리를 도리어 깨뜨리니까

그 항아리 파편 조각 조각들이 물에 풍덩 빠져서

자아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영광만 남는

이것이 또렷하고 분명한 완료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나를 사라지게 하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데

약올리듯이 저쪽 개같은 이방인에게는 표적을 보여주면서

나 바리새인을 위한 표적은 단 하나도 안 보여주니까

오히려 불안한 겁니다.

 

이 불안을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협박하듯이 삥뜯는 놈들이 대부분의 목사들이다는 거죠.

아무것도 할게 없다는 소리를 못합니다.

목사 지도 불안하니가

감사치 못하니까

돈 삥 뜯은거 그것으로 만족 못하니까

불안하니까 더 돈을 뜯는 겁니다.

 

졸지에 요한계시록이 협박용이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문자로 협박하는 겁니다.

문자가 곧 계급이 되어

많은 문자를 수집한 자가 계급이 높아서 갑질을 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그런 놈들이다 말이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니까 그 다음부터 예수님만 쫏아다니면서

임금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이죠.

평생 배 고플 일이 없을테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도망친다 말이죠.

그런자들에게는 다 이루었다가 도망쳐요

요한계시록이 도망을 칩니다.

 

표적을 본 까닭으로 예수님을 쫏는게 아니라 먹고 배불러서

자기 배를 위해 임금 삼고자 함이니까 말이죠.

 

자기가 사라지는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자기가 또렷해 지는 자기 기쁨을 구하니까 말이죠.

 

요한계시록을 자기를 위한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가 사라지는 기쁨 곧 예수님만 남아있는 기쁨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만 남아 있는 기쁨과 감사에 동참시킬 뿐입니다.

다른 표적은 없어요. 오로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은 한마디로

 

다 이루었다 만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부유하는 문자를 소유한 나의 몸이 남아야 하는가입니다.

 

자 이제 1장 요약에 들어가겠습니다.

 

1-3절을 종말빼앗기 라고 일방적으로 쳐들어 온 천국의 침노처럼, 다 이루었다 의 침략이 되는 겁니다.

 

무슨 근거로?

여기에 대한 답변 또한 동문서답인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4-11

 

처음과 나중 되시며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의 일방적인 약속 성취 때문입니다.

 

어떤 누가 제게 시비쪼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순엉터리 얼토당토 않는 데

수학문제 풀이를 정식 공식으로 하지 않고

소 뒷걸음질 하다고 얻어 걸린 식으로 답은 맞췄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불만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진짜 큰일날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의 해석이 다 엉터리인줄 모르고

수학공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없는데.

그래야 원인 없는 결과일 뿐인데

그 사람은 공식 없는 결과는 없다는 식입니다.

전형적인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표현이다는 거죠.

 

정식 공식을 찾는 자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공짜로 주시는 답을 외면하는 겁니다.

그 완악한 마음 때문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발 고침을 받지 말아라꼬

깨달으면 큰일난다고 예수님이 두려워하시면서 답을 알려줬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 유대인들이 그 답을 답 갖지도 않은 답이라고 무시해버리니까

예수님이 휴 ~~~ 다행이다 ~~~~ (이적) 이라고 좋아라 하시는 겁니다.

 

긍휼스러운 탕자에게 먼저 주고 싶은데

어쩔수 없이 맏아들에게 답을 알려줬지만

맏아들이 치 피 흥 그런 답은 답이 아니다 라고 발로 차버리니까

맏아들 유대인의 완악함 때문에 둘째 탕자에게 답이 가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를 주니까 이게 무슨 답이냐고

이게 무슨 결과냐 라고 발로 차버리니까

처음사랑을 발로 차 버리니가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거다 말이죠.

 

율법도 지키지도 못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낫다고 해서 수건을 안 벗는 겁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온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이 답을 줘도 안 받아 먹어요. ? 나는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식인종이 아니니까?

선민이니까?

 

얼마나 다행이냐 말이죠. ~~~~ 다행이다 ~~ (가수 이적)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그들은 다 이루었다를 곧 처음과 나중 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심을 거부하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이 다루었다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일곱교회

8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은

 

저들이 잘나서도 아니요 달음박질 해서도 아닌

다 이루었다가 일방적으로 자기 오른팔이 나타나 버린 바람에

그 증상으로써 원인도 없이 일곱교회인 주의 오른팔이 쥐고 놓지 않는 자로써 놓여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 일곱교회의 특징은 잘났던 못났던 책망하는 간섭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생아에게는 매가 없잖아요.

일방적으로 고아 같은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아버지가 되어버리고

아버지가 있는 자식 대하듯이

사생아가 절대로 누릴수 없는 아버지의 책망

아버지가 있어야 책망을 듣던가 말던가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있는 자처럼

책망받고 간섭받는 자로써

 

멜기세덱의 반차 곧 허리에 접붙임 당한자처럼

주의 오른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0:16, 개역)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0:16, 새번역)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53:1(칠십인역)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의 지혜가 곧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유대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이방인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멜기세덱 되시는 분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전리품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곧

이방인 중에 한 이방인

 

유대인 과부 다 내버려두고

이방인 과부 다 내버려 두고

이방인 과부 중에 한 과부

 

유대인 문둥병자 다 내버려두고 오늘날 교회사람 다 내버려두고

이방인 문둥병자 다 내버려 두고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

 

곧 일곱교회에게만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 이루었다는 나누고자 하심이다는 겁니다.

 

기적을 베푸는 자를 임금삼는 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삭제시키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십자가의 나의 왕이다고

다 이루었다가 나의 왕이다고

 

그 자에게만 나타난 주의 오른팔이 꽉 쥔 일곱교회만이

이 다 이루었다 라는 원인 없는 결과를 밝히 보인다 말이죠.

 

이것이 자기 피로 이루신

자기를 기쁘시게 여기지 않으시고자 섬기신 자기 피 흘리심이다는 겁니다.

 

그럼 일곱교회는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 뿐입니다.

나를 삭제시키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것을 완악한 자들은 비웃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했거든요.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함이라

내가 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했기에

 

악한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에 속아넘어간 자들인 일곱교회가 아닌 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녀보면 어디에도 다 이루었다를 누리는 교회가 없어요.

물론 미완성이기에 당연하다 말이죠.

그러니 물리적은 것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참으로 말씀대로 강도의 소굴 답게

다 이루었다를 아주 싫어하고 짜증을 내면서 배격을 한다 말이죠.

특히 노골적인 성화론자들 말이죠.

대부분의 신흥이단들은 이런자들이 부러워서 막 따라하기 때문에

금방 티가 나지만

성화론자 교회는 처음에는 자유롭게 하라고 해놓고서는 그 다음부터

무슨 놈의 조건들이 그리 많이 들이대는지

사기를 치더라 말이죠.

 

다 이루었다를 말해 놓고서는

나중에는 은근슬쩍 막살면 안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지는 막살더라 말이죠.

 

자기도 못하는 짖을 남에게 짐을 지우는 겁니다.

할 줄 아는 것으로 남의 기를 팍팍 꺽어서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말이죠.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10, 새번역)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5:5, 개역)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5:6, 개역)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15:7, 개역)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15:8, 개역)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15:9, 개역)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11, 개역)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결국 이 논쟁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답을 찾으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막살지 않음에서 답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결코 답을 못 찾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절대로 막 살면 안되는 나 이기에

그런 나가 삭제 되면, 그런 내가 사라지게 하는 십자가가 고마울 리가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역설적으로 막살아라 라는 불가능한 표현을 강조하는 겁니다.

상대적인 놈들이 말려들라꼬

 

막살지 않은 내가 1초만에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십자가의 지혜를

과연 고맙습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춤추고

술한잔 하고 막 노래 부르고

바지가 맛 벗겨지고 그렇게 할 수 있겠냐 말이죠.

 

왕의 체통이고 뭐고 너무 너무 기쁜데

내가 왕이 아니고 저분이 나의 왕으로 나타났다는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는 것이 너무 너무 기뻐서

신나게 춤추다 바지가 벗겨지든 말든 너무 기쁜데

 

다 이루었다가 이렇게 기쁜데

 

웃음끼 하나 없는 막살지 않기가 뭐그리 좋다고

그 의문의 것을 붙잡냐 말이죠.

 

인간 자기가 사망과 음부의 키를 잡고서 자기가 갇혀있는 곳을 자기가 열쇠 여는 꼴이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나의 생명을 좌우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특히 완악한 절대로 막살지 않는 자에게

자기 생명을 그 타인이 좌지우지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 말이죠.

물론 막사는 놈에게는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 막사는 놈에게는 상관이 없겠지만

 

절대로 막산 적이 없는 맏아들에게서

타인이 나의 생명을 쥐착펴락 한다면

나의 막살지 않은 삶이 뭐가 되냐 말이죠.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의 나타남

곧 주의 오른팔이 나타남

멜기세덱의 나타남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근본 없는 자가 나타남이

원인 없는 결과가 나타남이

다 이루었다 가 나타남이 기분이 나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거리끼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는

이 십자가로

막 살아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로써

 

막사는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결국 이 두 패로 나누시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원인 없는 결과는 통보하는 겁니다.

무시험 합격을 통보하는 사도가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그 소식을 전하는 기쁨 속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 통지서를 받아든 자의 기쁨!! 이루 말할수 없는 거죠.
그 기쁨을 노래하는 증인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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