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골라 당과 생명나무 과실 (2: 5- 7)

 


(
2:5, 개역)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개역)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것은

주님쪽에서의 구원이 그 정도로 명료하고 또렷한

주님이 하신 일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예로 출애굽은 그야말로 제대로 또렷한 구원사건입니다.

문제는 인간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약속임을 인간들은 조작해 버립니다.
이것이 완악할 수 밖에 없는 유대인의 수건 벗지 않기 입니다.


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구원을

자기 쪽으로 땡겨서 자기구원을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졸지에 조건이 되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로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구원이 되는 줄 모르게 되는 겁니다.

혹 땔려다가 도리어 혹 도리어 붙이게 되는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처럼 말이죠.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인간은 그 애굽의 멸망을 제대로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이 또한 주님이 제대로 구원하심을 보여준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왜그런고 하니

누가 봐도 이제는 멸망해서 사라지고 없는 애굽이다 말이죠.

그 없는 애굽을

사라진 애굽을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로 구원이 명료하기 때문에 이 구원에 대한 반발과 거부감으로써

명료한 구원이 애굽으로 등떠밀어 버린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구원을 다루는 줄 알았는데

구원이 여전히 살아서 자기를 애굽으로 발로 쭈욱 마 촸뿌까~~~~

애굽으로 등 떠미는 줄 죽어도 몰랐다 말이죠.

내가,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박하사탕) 가 아니라
말씀이 등떠밀어서 나타난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것은 나 이다 말이죠.

그런데 말씀은 문자요 언어이지 움직이지 않아요

내가 명료하고 말씀은 내가 읽어야 읽혀지지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다 말이죠.

그런데 도리어 내가 대상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말씀이 나를 다루지

내가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구원은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나무 과실은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롭습니다.

(새로움이란 이전 것을 체제전복이요 그것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반복까지 함으로써 새로움이다 라고 어떤 철학책에서 말하더라 말이죠.
차이의 반복

새로움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새로움은 늘 수시로 배반을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1초가 지났다 칩시다.

방금 지나가 버린 과거로써의 그 1초를 배반하지 않는 새로움은 새로움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졸지에 배신이 키워드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배신에 대한 진정한 충실성은 바로 죽은자에 대한 충성이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에 충성하시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충실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환자를 부르러 오신.
죄인에게 충성하시고 환자에게 충성하시는 이 배신
그러니 십자가는 매일 매일 사건을 터트리는데 충실하신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포로된자 잡힌자 얽매인자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희년
오직 이 기쁜 소식이라는 이 복음에 충성하심 말이죠.)

 

그런데 사라진 애굽을 다시 소환해서 찾아겠다고 하는 것은

익숙하고 친숙하고 습관화 된 나의 몸에 최적화 되어 있다는 증거로써

사라진 애굽

멸망한 애굽

그 지옥을 다시 찾는 겁니다.

내 몸 찾기입니다.

허상을 그들은 실상이라고 사라진 애굽을 현실로 보고 있고 약속을 허구로 거짓말로 봤듯이
생명나무는 이 애굽을 이 죽음을 허구로 허상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서로가 서로를 허상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즉 천국이 얼마나 제대로 된 천국이면

나(허상)랑, 내 몸에 안맞는 천국이기에

그 지옥을 다시 찾아내면서까지 돌아갈려고 하겠느냐 말이죠.

 

부자청년을 우리는 이해 해줘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다 나누어준다는 것은 곧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는 겁니다.

 

율법을 어릴적부터 온 내 몸에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안 맞아요

 

율법을 왜 지켰을까요? 살려고 지킨 겁니다.

 

그런데 정작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겁니다.

부자청년을 근심케 만들어 등돌려 버리게 하는 겁니다.
애굽으로 등 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누가? 천국이가!!

사랑은 죽음을 이기거든요.

어딜 죽음이 천국에 들어올려고 하느냐 말이죠.

 

거기에다가 더 불가능한(막장) 말씀을 더 이중 삼중 중첩시킵니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천국을 그 동안 띄엄 띄엄 봤다는 것을 폭로 시키는 겁니다.

 

죽음을 이기지 않는 자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는 자입니다.
(결국 거꾸로 생명나무는 우리가 스스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그 현실을 들통나게 해 준다는 거죠.
그것을 매일 매일 들키는 겁니다. 이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을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은 관계인 겁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입니다
.

그래서 거부감에서

기적 보고 따라왔던 자들이 다 등돌리고 돌아가버립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까지 너희도 가지 왜 남았느냐 라고 재촉합니다.

그 정도로 자신만만하다는 명료한 생명이다는 증거죠.

왜 너희들도 저들처럼 돌아가지 왜 남느냐?

! 가란 말이야 !! 낙엽 이빠이 뿌리면서 말이죠.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6:45, 개역)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46, 개역)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6:47,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6:7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6:71, 개역)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아무리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보고 따라왔어도

생명의 떡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는 자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입니다.

 

세례란 죽음을 이긴자 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세례 받았냐 못 받았냐 로 도리어 죽음에 갇혀 버렸습니다.

안식의 주인을 없고 안식일 지키기가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죽어도 상관 없는 자가

졸지에 죽으면 안되는 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세례 받았다 가 되는 식이 된겁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이미 들통난 것은 홍해를 걷넜던 자들도 다 죽은 이유입니다.


(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결국 세례가 마치 손 할례처럼 보증수표처럼 사고파는 매매꺼리

서로 인정해 주자 라고 속이고 꾀는 인간의 꾀로써 매매꺼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자체가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야곱이 천사랑 씨름하면서 죽음을 경험합니다.

환도뼈가 다 무너집니다. 평생 쩔뚝이가 됩니다. 죽은 자이다는 거죠.

내가 나를 악착같이 살리고 살리는 과거의 삶은 이제 뼈가 뿌려져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살려주심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는 죽은자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세례이다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나무와 상관 없는 자 이다는 겁니다.

생명나무는 우리가 스스로 죽음(애굽)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매일 매일 들통내고 있습니다.

 

기적 보고 예수님 따라왔지만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고 하니

다들 등 돌리고 많은 자들이 떠나가버립니다.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과 다른 방식은 낯설기 짝이 없는 방식이다 말이죠.

 

제자 너희들도 가지 왜 안가니?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겠냐 라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것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유대인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저 기적만 받고 끝 인 겁니다.

 

그러니 문둥병이라는 죽음의 병을 통과해본들 생명나무는 싫다는 겁니다.

죽음을 미워하는게 아니라 죽음을 사랑하고 있기에

어두움을 사랑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 어두움을 미워한다고 하시니까

예수님이 저들 마저도 미워하니 더더욱 저들은 예수님을 미워 할수 밖에요.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문둥병이 성경에서 왜 중요하게 다루시는가 하면

요즘으로 치면 제 일급 전염병이고 현대 의학으로 고칠수 없는 불치병으로써

살아있으나 죽은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격리 모든 것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는

저주 중에 가장 큰 저주 라고 보시면 된다 말이죠.

같은 선상에서 개같은 이방인 과 날때부터 소경 등등

그러니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그래서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난 자들에 대한 자부심은

더더욱 대단하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 종교의 신념과 부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생판 전혀 다른 딴판을 짜버리십니다.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는 판대기 말이죠.

 

그래서 제사장 에게 보이라고 라고 하는 것은

제사장 담당인데

제사장이 강도 만난자도 피해가는 판국에 문둥병자를 과연 안피할까요?

곧 죽음을 다루고자 하겠냐 말이죠.

같이 죽게 되는데?? 전염이 되어서 같은 문둥병자 곧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자가 되는데??

 

결국 죽은 시체 온 몸이 말라 버린 광야병

생명수라고는, 물끼 라고는, 촉촉한 탄력의 피부라꼬는 단 하나도 없는

그 죽은 자를, 그 말라버린 시체를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5:21,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들 바리새인들 말 마따나 하나님 외에는 할 자가 없다 말이죠.

 

결국 살린다는 것은 아예 죽은 자를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비실 비실 거리는데 아파가고 있고 죽어가는 도중에 살리는게 아니라

아예 죽은지 사흘이 되었는데 살리는 겁니다.

가망 없고

단절 인데 살려내었다는 겁니다.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이다는 거죠.

 

그럼 생명나무는 더더욱 스스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우리를 들통내는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겁니다.

즉 내가 그 말라버린 죽은자요 문둥병자이다는 것을 생명나무가 밝혀냄으로써

이 생명나무를 먹이시는 겁니다.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듯이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그런 생명나무가 자기 살과 피를 먹일때에

기존의 헌 것은 이 새 것 앞에서

완벽하게 전복이 됩니다.

 

그 정도로 또렷하기 때문에

애굽으로 즉 지옥으로 되돌아 가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등 떠밀어서 돌려보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말이죠.

 

즉 생명나무가 거부하는 겁니다.

그들이 생명나무를 거부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맞는 것은 선악나무라고

사라져 버린 애굽마저도 찾아가겠다고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생명나무인 살과 피에 안 맞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더 강조할께요

그들이 생명나무를 낯설다고 외면해서 미워하는게 아니라

생명나무가 그들을 미워해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사라졌는데도 말이죠.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그게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생명나무를 먹지 않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런 자를 놀랍게도 생명나무가 배치합니다.

과연 쫏아내는지?

과연 미워하는지를 말이죠.

 

그것이 니골라 당입니다.

 

니골라 당의 특징은 파를 만드는 겁니다.

파를 만드는 이유는 주님의 살과 피만 쳐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 만을 못쳐다 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쳐다보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곧 조건이거든요. 조건과 조건, 사람과 사람, 으로 역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이 지옥이요 애굽이다 말이죠.

 

구지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필요 없다 말이죠.

 

그럼 당연히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나무를 먹지 못했기에

당파를 만들어 경쟁을 유도하게 됩니다.

누가 누가 옳냐 라는 주장 말입니다.
(자꾸 조건을 따지고, 원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니골라당은 무엇을 못하는 고 하니

그 지옥에 그 애굽에 굴러들어온 돌 곧 걸림돌을 제시 못한다는 점입니다.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역시나 완악한 유대인처럼 벗어야 할 수건을 도리어 뒤짚어 쓰고 있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아닌 주제에 유대인처럼 쓰고 있다 말이죠.

처음 이방인으로써 유대인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6:5, 개역)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5, 새번역)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나중에 이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서 즉 파당을 만들어서

오히려 막살기를 진짜로 실천해 버리는 겁니다.

 

막살기란 불가능성으로써의 막살기 인데
즉 단절인데
(초자아의 외설적 명령 즐겨라 를 도리어 누가 훼방하는가 하면
그 명령이, 그 명령어 자체가 훼방한다 말이죠. 막살기 라는 주체가 막살면 안된다고 훼방하는 겁니다.
이 간극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 빈공간에 충실했던 겁니다.)

막살기를 가능성으로써 막살기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조건이 되어 버린 겁니다.
막살기와 동일화 일치성 합일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막살기를 진짜로 실천해 버리면 그것은 지킨 것이 된 안막살기가 된 거다 말이죠.

그래서 지켰으니까 나 옳잖아 라고 또 조건이 되어버린 겁니다.

막살기를 지켜버리면 그게 막살기 입니까? 안막살기 입니까?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뭘해도 막살기만 했을 뿐입니다 라고 뭘 해도 죄 뿐이다 라고

오히려 십자가의 피를 쳐다보게 되는 긍휼을 바라는게 아니라

 

법 지키듯이 행하고 실천하고 지켰으니까

피를 쳐다볼 필요가 없게 되더라 말이죠.

즉 이 말은 결국 피가 쳐다볼수 없도록 했다 말이죠.

생명나무가 장대높이 달린 인자를 못 보도록 해버렸기에

나타난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런 영지주의 성향의 연약한 육체의 합리화로

문제는 파당까지 만들어서 옳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졸지에 조건이 되어버렸고 법이 되어버린 겁니다.

 

법 안지키기를 지키는 법 이 된 거다 말이죠.

 

그러니 법 안지키는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법에 걸려든 겁니다.

법이라는 올무에 걸려들었다 말이죠.

 

사랑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긍휼을 쳐다볼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저들을 미워할 수 밖에요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든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고소하는

마귀의 송사와 똑같은 방식인 겁니다.

여인을 미끼로 삼아 사랑이신 예수님을 꺽을려다가

도리어 예수님이 긍휼로 여긴 여인을 통해서 마귀가 도로 역으로 잡히는 순간인 겁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해서 사단을 책망한다고 표현이 참 신기하죠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3:1,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3, 개역)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3:5, 개역)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예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 미움으로써 드러나야 하는 이유에서

그들은 주님이 미워하심으로써 들통나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주님이 이유 없이 사랑하기로 작정된 에베소 교회를

마치 사랑하기로 작정된 야곱(사기꾼, 약탈자)을 사랑하심이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관계입니다.

 

아무런 사건이 안 벌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오히려 이런 사건들을 들추어내시면서

우리 속의 스스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그 내막들을

생명나무의 실과가 이런 사건을 벌려서 들통냄으로써

니골라당과 같은 당파를 만드는 자들을 쫏아내시는 겁니다.

 

주님 혼자 다 하셔놓고

니골라당을 잘 쫏아내었다고 칭찬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는

처음부터 생명나무의 실과가 죽음을 이겼기 때문에

소급해서 이 이긴 승리의 기쁨을 줄려고 벌리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를 승리하셔서 죽음을 이긴 그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게 하시고자

이미 벌써 완료된 것을 누리게 해주고파서 이런 사건을 벌리시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살과 피는 더더욱 영광스럽게 빛나는 겁니다.

이 에베소 교회를 붙잡고 있는 주의 오른팔이 더더욱 감사하게 되는 거다 말이죠.

 

늘 수시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교회 내에서의 파당을

어떻게 주님의 살과 피는 다 이루셨다는 보여주시는지를

우리는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누림을 막 즐기시기를 ~~~~~~

 

그야말로 성경 말씀은 단 하나도 지킬게, 행할게, 단 하나도 없다 라는 사실

오로지 십자가의 피 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려 ~~~~~

 

교회가 막 누릴 것은 다른 것 없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만 누리는 겁니다.

십자가 상에서 외치신 그 [다 이루었다]를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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