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와 사단의 회 (2: 8- 9)

 

십자가의 스캔들을 못 누리는 사단의 회(유대인 모임)

(2:8, 개역)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개역)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시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누구는 미워한다고 라고 항상 말씀 하시는 겁니다.

즉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십자가는 곧 거룩은 이렇게 둘로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다 라고 하셨듯이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불공평 하냐 말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두 패로 갈라서

하나는 편파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편파 미움이니 말입니다.

얼마나 불공평하냐 말이죠.

간따나 불공평한데 더 더 더 불공평 하니 말이죠.

부정한데 더 부정케 하는 이중부정입니다.

(말 1:1, 개역)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 1:2,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개역)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게 무슨 놈의 사랑의 하나님이냐 라고

 

유시민 씨가 그렇게 불평을 하던데

민주주의 운동가들 대부분이 그렇게 외친다 말이죠.

 

그럼 그 둘로 나누심에 있어서 그냥 둘로 나누는게 아니라

이 둘의 충돌로써 알리바이를 형성하시는 거죠.

후차적으로 알리바이를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미래에서 종말이 소급해서 쳐들어오는 식입니다.

 

그것을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덮치는 겁니다.

동생 야곱을 이겨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괜히 야곱을 건드린 것이 종말을 건드린 셈이다 말이죠.

졸지에 종말을 즉 심판을 이겨먹어야 할 판국이다는 거죠.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8, 개역)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팥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는 입장에서 무슨놈의 종말까정 이기겠냐 말이죠.

그러니 알리바이가 형성되어 뒤집어 씌우는 편파 미움이다는 겁니다.

종말이가 개입할 줄 몰랐다 말이죠.

 

물론 상대적인 야곱의 편파사랑도 말도 안되는 뒤집어 씌우기입니다.

알리바이를 뒤집어 씌워서 거 봐라 내가 사랑하는거 맞잖아 라는 식이다 말이죠.

뒤늦게 가위 바위 보 해서 뒤늦게 내게 되니까 뭐든지 예가 되는 겁니다.

아니라 함이 없게 되는 거죠.

세상의 끝인 [처음과 나중] 되신 분이 개입 할 줄 뉘 알았느뇨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날 줄 꿈에도 몰랐다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마귀에게 먼저 잡혀 오고

뒤늦게 예수님의 오른팔이 가위 바위 보 해서 뒤늦게 내시니까

무조건 이길 수 밖에 없는

부조리 불륜인 십자가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 보다 명료한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이 원인 없는 결과 때문에 동원이 되는 사물이 장자권과 팥죽 한 그릇이다 말이죠.

시편을 보면서 왠지 이런 사물과 비슷한게 있던데

바로 주의 병에 담기는 주의 눈물입니다.

다윗의 눈물이 아닙니다 주의 눈물입니다.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말씀에 기록된 것은 주의 눈물만 기록되어 있지

나머지 다른 것은 기록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인간의 노력 힘씀 말씀지킨 것 등등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미래 완료가 말씀에 기록된 대로

처음과 나중되신 주님이 결정하신바 대로

미래완료에서

곧 다 이루었다 에서

곧 종말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그 기록된 말씀대로 적용하실때에

그냥 둘 다 각각 따로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하신다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둘을 충돌시킴으로써 그 원인 없는 결과에 합당케 만드신다는 거죠.

 

그러니 반드시 한 쪽만 사랑받기로 끝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다른 한 쪽도 주의 발등상에 놓이는

원수를 미워하심에 놓여져야 한다는 겁니다.

 

앞의 글 시편 99편에서도 말했듯이

원수를 구체화 시키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양쪽이 반드시 갈라져서 드러나도록 하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미움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도록 되어 있고

사랑하는 자는 미움받는 자로부터 훼방 받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미움받는 자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원인 있는 결과죠.

편파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인 겁니다.

 

이것은 원인 없는 결과 때문이지

원인 있는 결과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나 예수를 미워 하는 것이다고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7,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10:24, 개역)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10:25, 개역)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10:26, 개역)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세상을 악하다고 규정하신 유일한 분이다고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분명 원인 있는 결과이면

세상을 너희를 미워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다 라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함이 아니라

나를 미워함이다 라고

갑자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인 서머나교회를 미워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비가시적인 현상으로써, 증상으로써의,

서머나 교회와 사단의 회의 충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즉 내가 저들 사단의 회를 미워했기 때문에

저들 유대인인 사단의 회가 너희를 훼방하는게 아니라

나를 훼방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즉 예수님의 원수이기에 예수님이 원수로 삼았기에

예수님을 훼방함이지

너희의 원수가 아니니 원수 갚기를 할 필요가 없이

거룩으로써 둘로 갈라놓기 위한 충돌시키는 것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아브라함 자손도 아니요
(차라리 돌들을 통해 아브라함 자손 삼겠다 말이죠.)

유대인이 아니고 실상은 사단의 회 이다 라고

주님은 더 깊게 저들은 사탄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저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실상은 사단의 회 라고 말이죠.

그러니 껍데기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이다는 거죠.

 

유대인 곧 이스라엘의 의미는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빈공백의 의미입니다.

없어요

시간과 공간 속에 없어요.

그럼 언제? 언제라는 표현도 말이 안되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데

그럼 이스라엘은 어디???

바로 사건 속에만 볼수 있습니다.

지진 속에

요동 속에

요동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없는데 그것을 있음으로 억지로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육적 유대인 육적 이스라엘이니

이들은 사단의 회가 되는 겁니다.

사건이 아닌 것에 비가시적인 것을 억지로 가시적으로 보여서

이스라엘이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악한세대는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봐라 나 이스라엘 맞잖아 라고 우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인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 사건 뿐이다는 겁니다.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을 미워하는 훼방의 짖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걸림돌인 십자가를 제시하니까

거리껴서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그럼 제거해야 하는 의무를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실상의 반대인 허상을

저들 사단이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훼방하는 이유는

 

십자가 라는 밝히 보이는 실상을 원치 않고

허상인 번제와 제사를 고집하는 의문의 반복을 주장하니

십자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저절로

철천지 원수관계가 되는 겁니다.

 

소욕이 달라요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이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육의 소욕 하니까 자꾸 저 토색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는 바리새인의 주장처럼

나쁜 짖을 육의 소욕으로 보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것이 육의 소욕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또렷한 실상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 앞에 그런 의문의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십자가가 아닌 그 모든 것은 다 허상입니다.

남을 살리지 못하니 말이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부자청년에게

율법의 실상을 외치십니다. 그렇다면 남을 살려 봐라 라고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말이죠.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고자 준 것이다 말이죠.

갇혀 버림 당했으면 도리어 남을 살리시는 주님이 생명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는 백날 해도 남을 살릴수 없다 말이죠.

그럼 율법은 뭡니까?

내가 살고자 하면 남은 죽습니다.

남이 살고자 하면 내가 죽습니다. 내 전재산 다 주면 난 죽어요

이것이 율법이다 말이죠.

그럼 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은

누구 뿐이다? 사랑 뿐이다는 겁니다.

남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자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분

이것 보다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런데 왜? 쓸데 없이 의문의 허상들에 희망을 거냐 말이죠.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자 그러니 유대인은 사단의 회가 되는 겁니다.

말이 심한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고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증거하는 자들는 사단의 회인 겁니다.

허상을 주장하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니까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중간에 율법을 통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 자기 자신들을 통해서

중간에 연결시키는 통로인 제사장 역할을 자신들이 하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문둥병자를

강도만난 자를 다들 피하는 겁니다.

대신 부정한 자가 되어야 할 판국이니 말이죠.

그런 의문의 반복만 하다가

 

졸지에 그만 예수님이 개입함으로 인해서

졸지에 또렷한 생명되신 예수님이 경쟁자가 생겨버린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니 그 걸림돌을 제거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소유권 다툼에 졸지에 말려든게 된 겁니다.

드디어 이 허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명료한 다 이루었다 곧 종말이 왔다 라고

손때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할 판국에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니

졸지에 예배 드리는 인간들을 다 예수님한테 다 빼앗기는 겁니다.

돈을 못 벌어요 돈을

헌금 다 빼앗기는데~~~

 

어제처럼 부동산 집값이 다 떨어지는데 말이죠.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졸지에 율법의 통로가 아닌 (번제와 제사의 통로가 아닌-의문의 반복)

십자가의 피 용서 라는 (인애와 자비의 통로-자기목숨 내어주심, 율법의 마침[10: 4])

엉뚱한 통로가 생겨버려서

이 아벨의 제사가 아니라

아벨의 피를 받음으로써(아벨 자체가 제물이 되어버리는 실상)

 

가인의 제사라는 허상이 깨어지는

실상의 개입이 졸지에 생겨버리게 되니까

안색이 변하여 아벨을 죽이게 되는 살인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시간 순이 아니지요. 사건 순 즉 역순으로써의 종말의 개입 다이루었다의 개입순이다는 겁니다. 믿음의 순서입니다.)

 

결국 인간의 번제와 제사는 살인이다는 겁니다. 허상입니다.

원인 만 있고 결과는 없어요. 그러니 허구입니다.

율법 지키는 것이 남을 살리는게 아니라 남을 죽이게 되는 꼴인 겁니다.

 

지난 시간에 니골라당이 막살기를 지키기 하게 되니까 십자가라는 또렷한 실상이 되는게 아니라

 

허상을 다시 세우는, 허물어진 허구를 다시 세우는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 코 앞에서 다시 세우더라 말이죠.
십자가가 장자권처럼 사물이 되어서 그렇게 뒤집어 씌우는 식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으니 그 빈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를 채우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지 못하니까 말이죠

 

결국 지난시간의 에베소 교회를 에베소 교회임을

주님쪽에서 증거함에 있어서 니골라당을 의도적으로 붙이시듯이

 

오늘 서머나 교회는 서머나 교회가 왜 서머나 교회인가를

주님 쪽에서 십자가의 피의 증상물로써 증거하기 위해

사단의 회를 의도적으로 대립시키는 겁니다.

 

야곱이 창세전에 사랑하기로 작정된 이유를

에서를 대립시켜서 그 원인 없는 결과를 말씀하시듯이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누가 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십자가가 밝히 보임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그러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대립되는 자들은 저 또렷한 밝히 보이는 것에 대비되는

의문의 것, 모호한 것, 마침이 없는 것을 반드시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간판을 그렇게 적고서는, 서머나 교회 라고 말이죠.

사단의 회와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단의 회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충돌의 사건이 없어요!

십자가 사건이 없어요!

마귀로부터 미움받는 사건이 없어요!!

 

기가막히게 마귀들은 서머나 교회라는 간판을 달아버림으로써

사단의 회와의 충돌을 없애 버리는 식이 되니

그러니 사단들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피를 자랑하는게 아니라

똥을 자랑하는

배설물을 자랑하는

나는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라는 그 허상을, 그 배설물을 자랑하는

(십의 이조를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았고 기타등등 ...)
사단의 회 임을 자랑하는 서머나 교회라고 간판 지은 사단들이 한 둘이가 아니더라 말이죠.

 

그들 유대인들의 회가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으로써 주장하는 것들이 바로

 

다 이루었다 앞에서 자꾸 뭔가를 해야 한다 라는 허상을 자꾸 주장한다는 겁니다.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주장들 말입니다.

막살던 안막살던 그런것들은 의문의 것이고

마침이 되는 또렷한 것을 주장 못하는 겁니다.

 

바로 제사장 나라 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둥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둥

 

아니 사단의 회가 그럼 맞는 말만 하지 틀린 말 하겠냐 말이죠.

그렇게 되면 사단의 회가 아니잖아요

유대인의 모임이 언제 틀린말 했던가 말이죠.

문제는 왜 그들이 사단의 회 이냐 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거부요 경쟁 때문입니다.

 

그들 사단의 회의 시선에서는 예수님은 거짓된 일만 할 뿐입니다.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니 말이죠. 약을 바짝 올립니다.

다른 날은 왜 안고치냐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의 눈에는 예수님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목요일의 주인이 아니라

금요일의 주인이 아니라

월요일주인 화요일 주인 일요일 주인이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거든요.

그러니 안식일날만 골라서 지킨다 말이죠.

그래야 두 소욕이 충돌할꺼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바리새인의 눈에만 사단의 회의 눈에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일 수 밖에 없도록 보이는 겁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막살았으면

저런 부정한 자들과 친구 먹냐 말이죠.

 

우리 바리새인들은 저들과 절대로 친구 먹을 수가 없는데 말이죠.

 

그러니 더더욱 미운 겁니다.

미움의 조건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무조건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사단의 회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던 겁니다.

이유가 있어서 사단의 회가 되는게 아닙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된 겁니다.

 

천국을 가는 자도 이유 없듯이

지옥을 가는 자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난 뒤에 알리바이를 형성해서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고 후차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에서도 그렇듯이 가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움은 이유가 없어요.

가인이 언제 딴 사람과 경쟁해서 죽였던가요?

남을 살인하고 싶어서 환장한 그런 자, 그런 살인마 였던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죽임을 당할까 싶어서

남들이 자기를 죽일까 겁이 나서 늘 주여 날 보호해 주세요 라고

늘 구원의 장치

보호의 장치

케어할수 있는 모든 보호 장치란 장치는 다 인터넷 구매를 했다 말이죠.

그래서 구매한 것이 이마표 아닙니까

그 이마표를 근거로 해서 성을 짖는 겁니다.

바벨탑의 원조이죠.

국가의 원조인 출발점입니다.

 

괜히 이마표 받았어 ~~~~

 

누구든지 가인을 건드리면 맞는다 라는 부적 말이죠.

그것이 확대 재생산이 되어서

라멕이 가인을 건드리면 벌이 7배 이지만

나 라멕을 건드리면 벌이 77배이다 라고

지 멋대로 허구에 허구를, 의문에 의문을, 똥에 똥을 쳐 바른다 말이죠.

 

정작 아벨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족보이고

가인은 벌이 7777777777... 낳았더라 족보 곧 칠칠이 족보이다 말이죠.

그때부터 칠이 행운의 숫자인줄 알았나 보죠?

자기는 그래야 편히 쉬겠다는 심뽀죠.

남이 저주 7배나 받아야 나의 마음이 진정할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다들 이런 자들입니다.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는 이유가

남을 저주하기 위해서 말이죠.

 

죽었더라 족보인 아벨족보와

칠칠이 족보인 가인족보의 대립 충돌 대조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 가인과 아벨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한 발짝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건 속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현재까지도 벌어진다 말이죠. 앞으로도 미래도 말입니다.

어딜 감히 약속에서 벗어날 수 있겠냐 말이죠.

 

신약에서는 이것이 죄인 중의 괴수 족보인 탕자 예수님 족보이고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 두 번 금식 족보인 맏아들 유대인의 회 곧 사단의 회이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실상이고 일곱교회는 이 실상인 믿음만 쳐다보고

나머지는 믿음이 아니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이라는 유대인의 회는 의문의 사라지는 것을

수건으로 가리우듯이

허상의 행함, 의문의 수건을 주장하는 겁니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을 사수하는 겁니다.

 

율법 지킨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꾸 완악하게 수건을 벗지 않겠다고 말이죠.

사도바울이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배설물이라고.

예수님 앞에서 실상 앞에서 다 버렸다고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1:5, 개역)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6, 개역)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니 자랑할게 없어서 배설물을 자랑하냐 말이죠.

허구, 안개, 사라질 허상을 자랑하냐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할 정도로 그 정도로 당찹니다.

사도바울 앞에서 금수저 자랑했다가는 아이구 똥수저 똥수저 냄새난다 안치우냐 라고

남들은 부러워서 난리인데 바울은 코를 막고 빨리 버리라고 난리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손할례당, 개들, 결국 개같은 이방인이 개가 아니라

정작 진짜 개는 율법을 완벽하게 흠없이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이다는 겁니다.

막살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개들이다는 겁니다.

개들에게 진주를 던질수 없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 심하게 표현합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회 라고

아 그럼 유대인은 빠지는 구나 가 아니라

유대인들은 없어요.

유대인이란 없는데 그 없음의 자리에

그 유동적인 자리에

자기들이 고정적으로 앉아버리니

오히려 법궤 뒤에 숨은 자를 블레셋아 법궤 뒤에 숨은 놈 있다고 외치는 겁니다.

누가 고자질하냐 말이죠?

법궤가 블레셋에게 고자질한다 말이죠.

그러니 없는 유대인 자리에 앉았다고

선민이다고 우기는 그들

곧 유대인들이 사단의 회 라는 겁니다.

차라리 돌들을 취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말이죠.

이중부정! 이중으로 기분나쁘게 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3:1, 개역)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3:2, 개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3, 개역)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3:4, 개역)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개역)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3:7, 개역)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3:8, 개역)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3:1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러니 서머나 교회는 늘 이 사단의 회인 유대인의 모임과 충돌이 되는 환경에

늘 노출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을 늘 고소 고발하는데

정작 자기들이 쭐꾸덕 미끄러져지는

그런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실족해 넘어져본들 다시 일어나 고소 송사한다 말이죠.

그들이 부여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미가서를 읽으시다가 느낀 내용을 듣고

제가 1대 다수 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말이죠.

즉 부정적인 참선지자 딸랑 한 명과 긍정적인 거짓선지자 다수

 

400? 40? 하여튼 다수의 거짓선지자는 틀린말 하지 않습니다.

항상 바른소리 하는 자들이다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따집니다. 우리가 400? 다수인데 다 거짓영을 받았다고??

미가는 그들이 바른소리하든 틀린소리하든 관심없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거짓영이 임하는 것을 봐 버렸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이지

우리가 이렇게 바른 소리를 하는데 왜 우리 여러명의 다수가 거짓선지자냐? 이냐고

그럼 너 딸랑 한 명은 뭔데??????? 누가 딸랑 한 명의 주장을 들어주겠니?

일방적인 주장인데 !!!

객관성이 없는데 ~~~~

 

그러다 보니 당연히 충돌로 인한 핍박이 있을 수 밖에 없죠.

늘상 수건을 쓰고 있는 그 완악한 자들에게서

성도는 정작 실상만 바라보게끔 하시는 겁니다.

반대로 저들은 허상을 가지고서 공격하고 말이죠.

 

이 충돌을 주님께서 시키시는 겁니다.

? 이미 서머나 교회가 완료 되어 있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의 오른팔로 끄집어 내셨으니까 말이죠.

그 구약 때의 충돌이 지금 현재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완료되었기에 더더욱 확장 되는 겁니다.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선물이 뭡니까?

 

(2:10, 개역)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바로 그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니까

마귀로부터 받는 핍박이다는 겁니다.

결국 서머나 교회야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는 선물인 겁니다.

예수님도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 말이죠.

실상(예수님)도 그런 고난 받았는데

우리야! 그 까짓꺼 받을 정도이면

얼마나 사랑하시는 증거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거짓선지자 쪽인 사단의 회는 그러니까 너가 저주 받으니까

너는 마귀이다 라는 식입니다.

 

거룩은 이런 식으로 구별 차이를 두는 겁니다.

그러니 저들 허상과의 간극을 벌리시는 겁니다.

차이 구별을 하시는 방식이 바로 실상을 누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실상은 허상에게 거짓취급당해서 죽임을 당하고

허상이 실상인척 하는 것이

실상 되신 주님께서 판을 짜놓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거짓으로 몰 때

참선지자를 거짓으로 몰 때

오늘 서머나 교회를 거짓으로 몰 때

바로 기존의 해석법인 바로 원인 있는 결과 라는

힘과 다수와 권력이라는 누구든지 다 알수 있는 방식인 역사적해석을 근거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법이 권력이 되거든요.

보편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뚱딴지 같이 십자가 라는 저주

오늘 본문의 서머나 교회에게서는 핍박 받는 그것으로

저 보편성과 충돌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죽으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싸움이 되는 식입니다.

 

누가 봐도 누가 이긴다?

 

그럼 누가 봐도

서머나 교회가 핍박받는 모습을 보면 거짓이라고 허구 취급하게 되고

 

반대로 누가 봐도 사단의 회는 그들을 핍박하는 모습으로써

참이라고 우기게 되는 실상인 척하는(빈 보좌에 앉는, 빈자리인 이스라엘의 자리에 앉는)

그 상황을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

 

바로 실상 되신 예수님이

곧 보이지 않는 믿음(예수님)

충돌을 시켜서 벌어지는 사건 상황이다는 겁니다.

거룩이니까 두 패로 갈라서게 하는 겁니다.

거룩 자체가 두 소유를 드러내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 말입니다.

 

자 서머나 교회가 받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 무엇이다고요?

바로 유대인이라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사단의 회와의 충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서머나교회를 구분 구별 케 하시는

거룩이 덮쳐진

주의 오른손이 붙들고 있는 서머나 교회의 모습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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