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왕좌에 투입된 버가모 교회 (2:12-13)

 

 

(2:12, 개역)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개역)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3, 새번역)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2:13, 공동) '나는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너는 내 이름을 굳건히 믿고 있다. 또 나의 진실한 증인 안디바스가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2:13, 우리말) 나는 네가 사는 곳을 알고 있으니 그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도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2:13, 한글킹) 내가 너의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곧 그 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심지어는 나의 신실한 순교자 안티파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그 날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2:13, 현대어) 나는 네가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그 도시는 사단의 왕좌가 있고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어 버린 곳이다. 그런데도 너는 내게 충실하였고, 내 신실한 증인 안디바가 사단의 손에 순교당하였을 때도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도 곧 성령의 전인 교회는 자신이 살고 싶은 장소에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즉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 들어가서 그 꾸며진 장소에 들어가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 자체가 그 땅의 속성을 들추어내는 씨뿌리는 농부 비유 속의 씨앗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 뿌리는 성도라는 씨앗

그렇게 되면 성도 중심으로

구약으로 치면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 땅들이 재편성이 되면서 땅의 속성들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자체가 바벨론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 사자의 입 속에 있는 꿀처럼 성도는 사자 입 속의 꿀로써 이 사자 이 땅을 재편성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씨뿌리는 비유처럼

성도 자체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무조건 삼십배 육십배 백배 라는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고

그 나머지 땅들은 복음의 씨앗인 성도로 인해 그 땅의 속성들이 들추어지는 겁니다.
가시밭, 돌짝밭, 길가 라는 속성이 들추어지듯이 말이죠.

분명 원인 없는 결과라 했습니다.
성도자신은 좋은 밭이 되자 라고 해서 된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라서 삼십배 육십새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오늘 장소 개념으로 출발하는 이유는

교회 자체가 장소를 초월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씨앗입니다.

이들을 복음이 막 뿌립니다 막뿌려
복음이 주체가 되어서 성도라는 교회를 곧 씨앗을 이 세상에 막 뿌리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오히려 초월은커녕 장소에 매여살다 보니

늘 부동산 문제로 즉 돈 문제로 싸움이 벌어집니다.

몇 달전에 저의 글을 고소해 삭제조치를 한 자들의

경기도 분당 모모 교회도(사실상 교회가 아니지요)

자기들 끼리의 돈 싸움에 있어서
눈을 저에게 잠깐 돌려서 시선을 딴곳으로 돌릴려고 하다가

거기에 반작용을 노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자기들 끼리의 싸움이 더욱더 격해지는 겁니다.

오히려 더 완악해진 모습으로 돈 싸움에 열중하던 모습이던데

목사가 돈에 빠져 사니

교회를 장악할려는 싸움이 벌어져

서로가 교회 포기하라고 싸움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돈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지킬려는 교인들과

목사 편에 선 자들과

돈 싸움에 들어간 겁니다.

장소와 부동산을 초월하지 못하니 둘 다 똑 같다 말이죠.
둘다 발람의 꾀에 빠진자들입니다.

 

자기 눈을 자기 스스로 찌르는 법입니다. 오이디푸스에 말려든 거죠.

 

버가모교회는 주님께 아신바 되었다는 겁니다.

좋은 밭이 되자 라고 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이유 없이 아무런 원인 없이
무조건 용서하신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피로 산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신바 된 교회라면 사단의 왕좌와 멀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나요?

오히려 교회를 사단의 왕좌 속에 침투시키는 겁니다.

 

신천지 이단들은 거꾸로죠
교회 부동산을 노리고 역시나 돈 때문에 그 동안의 정통으로부터의 핍박에 대한 서러움을
보상받고자 그러는 겁니다. 유유상종이지요.

또 어떤 이단들은 남의 종교에 지신밟기 한다고 몇 년전에 뉴스에 나오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 사회가 불안정하다 보니 일자리 없는 청년들이 힘이 있다 보니

그 힘을 빌러서 그런짓을 하는 겁니다.

힘있는 청년들 없어 보세요

나이드신 분들을 그렇게 부려먹을수 없다 말이죠.
물론 국가는 다릅니다만 나이드신 분들도 이용해 먹지만 ㅋㅋ

 

더 웃기는 것은 진짜 사이비 집단인 북한에는 지신밟기 하겠다고 안 들어갑니다.

바로 죽는다 말이죠.

그러니 덜 죽을만한 곳을 찾아서

봐라 우리는 이렇게 말씀 지키잖아 라고 과시용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런 짖을 하는거다 말이죠.
절대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을테니 말이죠. 다 돈이거든요.

 

그래가지고 땅이 재편성 되겠습니까?

땅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다 말이죠.

예루살렘 변하던가요?

안 변합니다.

지금 보세요

아직도 여전하다 말이죠.

 

그냥 땅의 속성만 들추어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무지 무지 부지런히 변화무쌍하게 재편성 되더라 말이죠.

계시록 보세요 버가모 교회가 투입되었다고 해서

예루살렘 땅이 변하던가요?

아니지요

그런데 그 위의 하늘에서는 예루살렘 땅에서 죽은 성도들을 마치 산파처럼 받아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하게 바삐 움직이는지 말이죠.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이것이 이리 가운데 보냄이시다 말이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 라는 겁니다.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은 적 없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장소와 그 장소를 초월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장소를 보충물로 삼습니다.

 

마치 죽은태로 삼아서 그 속에서 아이를 성도를 생산하는 식입니다.

아니 순풍 순풍 잘 놓는 풍성한 그리심산을 태로 삼아야 아이를 생산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민둥산 에발산을 왜 태로 삼냐 말이죠.

 

즉 이중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 속에서 또 다른 이스라엘 곧 잃어버린 양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장소로써의 이스라엘(예루살렘)

껍데기로써의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양이라는 의미에 보충물로 작용합니다.

 

오늘 사단의 위 곧 사단의 왕좌라는 장소도 결국 보충물로써

주님의 아신바 되었다는 이 관계성의 보충물로 작용이 됩니다.

사단의 위(자리)라고 하니까

무시무시한 공포가 자리잡은 장소인줄 아는데

앞의 서머나 교회에서도 살펴봤듯이

유대인이 사단의 회로써

결국 유대인이 거하는 장소인 겁니다.

 

유대인이 바보라서 사단의 자리에서 살겠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죠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다 말이죠.

거기에다가 거룩한 율법 까지 소유했다 말이죠.

구원의 장치라고 할만한 것은 다 가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얼마나 우상화했으면

안식의 주인을 죽인자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이다는 겁니다.

껍데기는 아무리 완벽하게 거룩을 갖추어도

속 알맹이는 우상뿐이다는 겁니다

우상타파만을 평생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이 말이죠.

이 얼마나 역설적이냐 말이죠.

 

완악한 자로써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을 취하는 자들이 거하는 장소인거죠.

그들과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서머나 교회를 붙이듯이

 

오늘 버가모 교회에도 이들과 충돌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백이면 백 죽임을 당하게 되겠지요.

 

안디바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고 이름이 계시록에 기록이 됩니다.

 

(2:13, 새번역)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은

그것도 성경에 딱 한번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 없이

죽임을 당했다 뿐이다 말이죠. 이것이 성도의 의미입니다.

곧 이름이란 예수님은 이름을 앞세우고

누구 누구의 하나님처럼

 

상대적으로 저쪽 유대인인 사단의 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는다 말이죠.

 

하나님 VS 하나님의 이름의 충돌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들은

자기가 취사선택해서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열심을 냅니다.

 

그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피해 내려와서 하나님의 이름의 자리에 내려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배부른 까닭으로 임금 삼고자 함에 있어서 도망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입니다. 아무런 힘도 안되는 것이 이름이다 말이죠.

 

안디바 라를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조사한다 말이죠.

그래서 위인으로 따라잡기 할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죽었더라 뿐입니다.

아벨의 족보 죽었더라 족보 뿐이다 말이죠.

닮고 싶어도 못 닮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오늘날 성화론자들은 이런 자들을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행할려고 하니 행함이 없다 말이죠.

따라 할 수가 없으니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무시하라고 안디바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아신바 되었다는 것을 일방적인 주님의 선언이기에

원인 없는 결과이지

내 쪽에서 조건을 갖출수가 없다 말이죠.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표현 아닙니까?

 

남들에게 가르칠려고 ~~ 하라 라는 명령어를 외치고 싶은데

할게 없으니 말이죠.

 

한게 뭐가 있어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존재와 존재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이 이름이다 말이죠.

 

시편 115편에는 이것을 우리(존재)에게 영광 돌리지 마시고

하나님(존재)도 아닌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라고 하더라 말이죠.

 

(115:1, 개역)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이것이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상대적인 사단의 회를 대조해서

가인의 제사를 대조해서

사울왕이 이 땅에서 승패를 걸려고 하는 모습과 대조해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말이죠.

 

주님께서 아신바 되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은(안디바) 주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니

앞길이 탄탄대로로써 평탄하게 살겠구나 라고 하겠지만

정작 처음 죽임을 당한 주님이 아신바 된 아벨 조차도

장소문제로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음에 있어서 공간을 차지할려다가(인정받을려고 하다가)

쫏겨나 유리하게 됩니다.

 

제사 곧 번제와 제사는 공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으면 안된다는 식 아닙니까?

성전(공간)과 안식날(시간)

세상에 그런 제사가 어디있냐 말이죠.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심령입니다.

곧 인간에게서는 상한심령이 없어요.

그래서 상한심령이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사랑이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주여 저는 사랑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래? 너 사랑이 없구나 내가 너를 사랑하마 라고

사랑해 주심 용서해 주심 많이 탕감해주심이 많이 사랑한다 말이죠.

그래서 졸지에 시공간 개념을 날라가 버리고

(부유하는 문자, 떠도는 기호)은 날라가 버리고

관계성으로써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말이죠.

 

이 차이성이 차이로써 드러날려면

시공간을 주장하고 사수하는 자들과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겁니다.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이 그거 주장하니까 말이죠.

가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죠.

그러나 믿음안에서 사는 겁니다.

오히려 아벨은 죽인 가인 보세요

그게 사는 겁니까?

 

장소에서 쫏겨나니까 장소 장소 장소 돈 돈 돈 하면서

이 장소에 얽매여서 어떻게서든 정착해야 한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냥 장소가 되면 안되지요.

구원은 동쪽에서 오니까 동쪽방향의 집을 찾아야 하고

하여튼 복잡해요. 구원 받아야 하니까

즉 저주의 몸이다는 증거죠.

그래서 득남을 하니까 아이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도 똑같이 짖는 겁니다.

무슨 점쟁이 같지 않냐 말이죠. 최순실 보다 더 해요.

 

(4:17, 개역)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 정도로 불안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장소에 온갖 긍정적인 부적을 다 붙여놓듯이 행동한다 말이죠.

이것이 어제 올린 앞의 글처럼

과거에 얽매여서 나오는 과서의 산물이다는 겁니다.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원한을 품은 모습이다는 거죠.

그것이 진짜 내막인데 겉으로는 온갖 부적을 붙여서 부정을 쫏아내는 겁니다.

 

졸지에 아벨의 죽음이 부정이 된 거다 말이죠.

부정아 물렀거라 어이 어이 라고 영화 곡성에 나오는 무당이 굿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겁니다.

시공간에 얽매이는

과거의 산물 말이죠.

 

그거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미래완료에서 오는

십자가의 용서에서 다 이루었다에서 오는 것만 물으신다 말이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관계

상한심령이 되셔서 이루신 사랑만 묻겠다는 것인데

 

인간들은 자꾸 장소와 시간을 거룩하게하겠다는 둥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몸 아닙니까

이 몸을 거룩하게 하겠다고 성화하겠다는 둥

왜 그러냐 말이죠.

가인처럼 안절부절 못해서

온 장소를 부적을 붙이고

무당처럼 부정을 쫏아내겠다고 굿을 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니 살인을 해서 살인자가 아니라

미래에서 살인자로 살도록 되어 있기에 살인을 한 거다 말이죠.

 

그럼 상대적인 주께서 아신바 된 자는

거꾸로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자기 죽음이 아닙니다.

그런 죽음은 의미가 없어요.

인간의 죽음은 백날 순교해 보세요 죽음으로 쳐주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덮쳐진 겁니다.

자기 죽음이 아니라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시공간에서 못 벗어나고

과거의 산물인 행함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아벨은 졸지에 믿음이 덮쳐졌기에

믿음의 세계로 들어간 겁니다.

이것이 더 나은 제사

곧 인애와 자비의 제사이다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인 시공간에 매여서 드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누구 라는 상한심령이라는 인물을 보여주는 관계성이다 말이죠.

 

의문은

백날 백날 반복해도 인물이 안 나옵니다.

 

인물이 안 나와요

저분을 보라 볼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빈자리를 장소 공간 시간 재물 이상한 것들이 대체물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사단의 위가 있는 자리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장소 공간 또는 눈에 보이는 것들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체험이 되는 것들을 가지고서 약속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비언약으로, 보충물로 삼았다 말이죠.

 

이런 것들이 신약에서는 실상(인물)이 오심으로 인해 그 동안의 그림자의 역할로써 이제는 무대에 빠진다 말이죠. 누락 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오늘날로 치면 돈이 구약때는 황금 아닙니까?

왜 금이 돈이 되느냐 하면 영원불면성에다가 희소가치성 때문이다 말이죠.

오늘날 미친 듯이 돈을 끌어모은다는 것은

과거로 치면 황금을 끌어모으는 것이고

영원불멸을 모으는 것이고

구원을 거룩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다고 나이가 들지 않거나

피부가 늙지 않거나

아무리 겉으로 영원불멸을 끌어모은다고 해서 죽지 않느냐 말이죠.

속 알맹이는 이미 썩었는데

똥냄새가 나는데

정신을 치매상태인데

외형적으로 그런 불멸의 것들을 모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역시나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이것이 오늘날로 치면 돈을 이유 없이 끌어모으는 식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가인의 제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인의 세력에

주님은 아벨과 같은 주님의 일곱교회를 의도적으로 붙이셔서 충돌시키는 겁니다.

버가모 교회 투입

예써 버가모 교회 출동 하는 겁니다.

 

마치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에게 예수님이 3가지 시험을 통해서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시는 모습처럼 말이죠.

 

이것이 아벨의 운명이요

예수님의 운명이요

참선지자의 운명입니다.

이미 완료 되었기에 죽어도 상관이 없이

오로지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오히려 공격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공격하는 입장이다는 거죠.

 

꾀는 누구 곧 인간을 장악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세력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니까 감추어진 것이 다 드러나더라 말이죠.

 

바보같이 가인은 아벨을 동생이라는 위치라고 형이 높은 위치라고 여겨서

자기 보다 못한 위치라고 공격했지만

정작 트라우마는 주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이

오히려 지울수 없는 트라우마가 된 겁니다.

 

주님과 아벨의 관계성에서

가인 자신은 결핍에 놓여졌다는 거죠.

 

앞의 글 시편 101편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부재된 상태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재되지 않은 것을 들이대는데

나는 소외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데

그것이 과거로써 그 경험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미래는 경험한 적 있나요?

당연히 없지요.

미래는 다가갈수가 없거든요.

시공간에 얽매였기에

초월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모두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완료형입니다.

그러니 지킬 말씀이 단 하나도 없다 말이죠.

오히려 지키면 골치 아파요

 

말씀을 지키면 오히려 안믿고

말씀 지킨 자신의 경험만 믿는다 말이죠.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우상화 되는 겁니다.

탐심이 곧 우상이다는 거죠.

그런 자신을 포기 포기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것들이 모아 모아 모아져서 만들어진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사실상 모든 인간의 종교입니다.

유대교가 유대인이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세워졌다 말이죠.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 말이죠.

인간의 경험을 모은 겁니다.

시행착오를 무지 했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사단의 왕좌이다는 겁니다. 사단의 회 곧 유대인의 모임.

그들이 열심히 목숨바쳐 운동하는 묵시운동 조차도 사실상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말이죠.

한 발은 역사에 담군채

묵시를 한발 내 딛은 겁니다.

밑둥치가 짤린채가 아니라

여차하면 언제든지 발을 빼서 역사라는 안전빵에 돌아올수 있도록 말이죠.

(참고로 불교는 이런 율법 아래에 가둔 사회구조에서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니체 들뢰즈와 같은 사상이 법 바깥에서 놀면 된다는 거죠. 신 없이 사고해서 본인이 신이 되어버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법이든 신이든 초월하면 될 것을 말라꼬 바보같이 율법에 양심에 얽매이냐 라는 거죠. 더 긍정적인 세계가 나를 위해서 무궁무진하게 있는데?(리좀). 이게 현대의 최고의 종교인 불교입니다. 물론 지젝 쪽에서 반칙이다고 비꼬지만 말이죠.)

 

그런데 아벨은 시공간이 아예 빼앗겨 버림 당해 버립니다.

잃어버림 당해 버리지요.

그 시공간의 산물인 몸이 없어요.

몸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말하고 있다 말이죠. 행함의 제사가 아니라

더 나은 제사로 말이죠.

 

왜 바로 믿음의 제사라고 하지 않냐 하면

행함의 제사와의 비교를 통해서 더 나은 제사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나 저쪽 행함의 제사는 의문의 반복이라서 마침이 될수 없는 거다 말이죠.

왜냐하면 더 나은 제사가 따로 있기 때문에

이 더 나은 제사를 따라잡을수가 없도록

계속해서 트라우마로 경쟁심으로 적개심으로 시기케 하니까 말이죠.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3:11, 개역)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고후 5:7, 새번역)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10:38, 새번역)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11:2, 새번역)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 또는 '우리 조상은' , '이것으로' 또는 '인정'

 

(2:4, 우리말)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1:17, 우리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2:4

 

 

자 그렇다면 주님께사 아신바 된 버가모 교회는

바로 이런 운명 속에 놓여진 겁니다.

 

의인은 행함 곧 의문으로 사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고

즉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하신 분의 용서로만

십자가가 밝히 또렷히 보인다고 이 미래완료 다이루셨다 라는 선언 속에서만 사는 겁니다.

이것을 선물 곧 믿음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리고 그 보충물인 사단의 왕좌는 오히려 버가모 교회의 믿음으로 말하는 활동무대가 되는 겁니다.

역사는 묵시의 활동 무대로 활용이 되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 믿음은 저들 의문의 행함에 어쩔수 없이 죽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믿음으로 사니까

그러나 저들은 죽여도 죽여도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죽인들 다시 사니까 그 죽음이라는 무기가 의문이 되는 겁니다.

 

무기가 뭡니까 남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승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도 못 죽이고

이기기는커녕 맨날 지는 겁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승패를 거는 자들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미래완료가 다이루었다가 끌어주지 않으니까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14편 이였나요?

애굽 땅이 벌벌 떨고

바다 곧 홍해가 도망치며

요단강이 물러간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네 맞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거하는 이스라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주께서 아신바 된 버가모 교회를 만나서 그런거다 말이죠. 충돌이죠.

 

그러니 사단의 왕좌에 거하는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왕좌를 벌벌 떨게 도망치게 물러가게 하기 위한

구원사건 출애굽사건 곧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투입이 되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말이죠.

상대적으로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놓이는

이 사건을 재현하고자 버가모 교회는 투입이 되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사복음서 부분을 읽으시다가

마리아도 그렇고 한나도 그렇도

전부다 기도를 원수를 놓고 기도하더라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자꾸 원수 문제를 기도 속에 넣더라 말이죠.

아니 인간의 기도는 이 원수문제를 빼놓고서

구원해 달라

복달라

부족한 결핍을 채워달라 라는 식인데

 

주님의 기도는 항상 원수 문제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 사건인 십자가 사건은 원수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구원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이 원수 문제를 빼놓고 기도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 아니냐 말이죠.

왜냐?

본인들이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래서 눈에 비닐이 벗겨지고 난 뒤에

자신이 원수임을 고백한다 말이죠.

 

미래완료가, 십자가의 용서가, 다 이루었다가 덮쳐지니까

그 동안 했던 짖듯이 원수짖 배설물 우상숭배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거꾸로 증거합니다.

 

자기의 출신장소 출처를 공격합니다.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십자가를 증거한다 말이죠.

그리고 이방인에게 원수로 여겼는데 오히려 잃어버린 자 찾고 말이죠.

마치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그대로 이어 받는 식입니다.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처럼 말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즉 육의 열심자 중에 최고의 육의 열심자였기에

그 반대되는 영의 일인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자체가

거리끼는 걸림돌을 제시하는 거다 말이죠.

거룩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감사하라고 증거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이유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선민이고

이방인으로 태어난 자체가 버림받음인데

이것을 뒤짚어서 이방인에게 증거하고 있으니

 

사도바울이 180도로 거꾸로 증거하고 있으니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사도바울을 그렇게 활용하시고자 배치시키는 겁니다.

그런 장소 곧 유대인 구역 이방인 장소로 나누어진 것에

복음은 거꾸로 재배치 하신다 말이죠.

 

그렇듯 버가모 교회를 사단의 자리에 투입시키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만약 오늘날 가짜인 교회들처럼 사단의 자리에 투입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건짐을 받겠습니까?

누가 구원사건 십자가의 죽음사건을 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십자가에 달리지 않는 예수님이라면

강도가 구원사건을 어떻게 보겠으며

어떻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성령의 전은 그래서 교회를 투입시키는 겁니다.

 

반대로 가짜교회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처럼

사단의 왕좌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원수 문제를 물으셨듯이

원수의 성문을 얻는자가 복된 자입니다.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22:17, 공동)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시는 복도 바로 그겁니다.

 

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오히려 거꾸로 발람의 꾀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돈을 받고 축복과 저주를 주는 자 말이죠. 무당인데

오늘날 목사들이 무당 이다 말이죠.

 

이미 아신바 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바를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다 이루었다는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의 성문을 얻는 복을 거부하고

도리어 무당에게 복과 저주를 빌어주는 무당을 찾는 겁니다.

 

순실사건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는 이야기를 하시더라 말이죠.

이 땅에서 승패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죽은 사무엘선지자를 불러내는 겁니다.

아니 신접한 여인이 엘리야 불러냈으니까 옳지 않느냐?

에구 에구 이정도로 우리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저주받아 마땅하다 말이죠.

맞추면 뭐합니까? 지옥가는데!!

사무엘 불러낸 것 맞잖아

맞으면 뭐해요 사무엘 선지자가 뭐라 하던가요?

나를 괴롭히지 말라 하더라 말이죠.

 

(삼상 28:3, 개역)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삼상 28:4, 개역)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삼상 28:5, 개역)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삼상 28:6, 개역)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7, 개역)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삼상 28:8, 개역)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삼상 28:9, 개역)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삼상 28:10, 개역)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 28:11, 개역)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삼상 28:12, 개역)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삼상 28:13, 개역)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삼상 28:14, 개역)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삼상 28:15, 개역)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삼상 28:16,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삼상 28:17, 개역)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삼상 28:18, 개역)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삼상 28:19, 개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28:20, 개역)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삼상 28:21, 개역)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삼상 28:22, 개역)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삼상 28:23, 개역)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삼상 28:24, 개역)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삼상 28:25, 개역)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이미 결정된 바 인데

다윗이 여호와가 아신바 되었는데

 

무슨수로 판을 뒤집냐 말이죠.

 

미래완료가 당겨주지 않는 사울왕은 차악책으로

가인처럼 이마표 이마표를 받듯이

구원 구원 내구원 이라고 구원의 장치를 찾더라 말이죠.

아무리 황금을 영원불멸을 끌어모아본들 본인 자체는 허 한 겁니다.

채워도 채워도 소용이 없더라 말이죠.

 

7천명이 땡겨주지 않으면

나만 남았아니다 라고 그 속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버가모교회는 이미 아신바 된 7천명을 누리기 때문에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심각함에 빠지고 싶어도 못 빠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원수의 성문을 얻은 기쁨

 

이것이 버가모 교회가 받은 복입니다.



발람의 꾀

사단의 자리에 투입된 버가모 교회

교회를 왜 사단의 자리에 세우실까?
그것은 인간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도 아닌

예수님의 원수를 들추어내기 위함이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이 아신바 된 자들이다.
그래서 아벨의 운명에 놓이게 하기 위해서

가인의 제사가 넘치는 곳에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우신다.

그런 교회가 발람의 꾀에 빠져 책망을 듣게 된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의 모습처럼 말이다.
발람의 꾀는(거짓선지자) 인간의 배고픔과 결핍을 파고든다.

순실아 외롭지? 그네야 외롭지? 돈이 최고야
돈이 실력이야

친구 없어도 돼
이웃 없어도 돼
돈만 모으면 다 무릎 꿇게 만들수 있어

그런데 외로움을 달래줄 돈을 모으면 모을수록 더욱더 외롭다.
밑빠진 장독대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다.

뭘 해도 죄인 인줄 안다면
모든 것이 감사 뿐이다.

발람은 돈에 따라 권력에 따라 눈치보고 축복하고 저주를 하는 무당이다.

남 눈치는 보는 자이다.

예수님은 눈치 보지 말라고
자기 목숨을 다 내어주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심판의 저주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 뿐이다.
그 목숨 값을 받았다면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다.

이제 이 목숨 값을 누릴 차례이다.

외로울 틈이 없다.
배고플 틈이 없다.

너무 너무 넉넉해서 나누어주기 바쁨을 누릴 뿐이다.

얼마나 뻔뻔스럽고 당당한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너무 너무 확실하고 또렷하게 보이기에
그 부요함을 누리기 바쁜데 말이다.



본향(천국=미래완료)가 땡기는 자와
땅에서 모든 승부를 거는 자

이 땅에서 승부를 거는 자들이 있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이 땅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다.
실패하면 안된다는 자들 말이다.
의문의 반복에 말려든 자들이다.

본향이 땡겨주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이 전부다.
그래서 이 땅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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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외치는 자들을 보면서 ~~~~

지나고 나면 심각한 것이 아닌데
마치 심각한 것냥 보이도록 속이는 것은

의문의 제사(번제와 제사)를 반복하기 위한 것에 붙들어 매고자 함이겠죠.(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나네요 ㅋㅋㅋ)

정작 우리는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기에 헛된 의문의 반복에 말려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 그 이유를 보면서

왜 무화과 나무를 때도 되지 않았는데 저주를 하시는 그 이유를 알게 하시는 것이겠죠.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되도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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