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깊은 것과 하나님의 깊은 것 (2:24-29)

 


(
고전 2:10, 개역)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24, 개역)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25, 개역)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6, 개역)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개역)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개역)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개역)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고전 2: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개역)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3, 개역)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 2:4, 개역)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개역)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6, 개역)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개역)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개역)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9, 개역)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10, 개역)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개역)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2, 개역)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3, 개역)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개역)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5, 개역)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6,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십니다.

그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려면

사단의 깊은 것 곧 악의 모든 것을 알아야 겠지요?

이것이 하나의 세트가 되는 겁니다.

 

야곱을 알려면 한 세트인 에서를 알아야 합니다.

이유 없는 편애를 알려면 한 세트인 이유 없는 편파저주를 알아야 겠지요.

 

이 두 노선이 한 세트를 이루어서

그 차이를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 곧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난 두 언약은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하나는 땅의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종 하갈의 아들, 종의 아들

또 하나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 곧 약속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한 세트를 이루어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핍박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 한 세트이니까!!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하나의 세트로써 서로 원수지간이 된다는 겁니다.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지난 시간에 두아디라 교회에서 졸지에 두 선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지난 시간에 말한 이세벨 거짓선지자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고

 

또 하나는 오늘 말하고자 하는 그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

 

(2:24, 새번역)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2:24, 공동) 그러나 티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비밀을 배우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으니

 

 

곧 이 두 노선으로 교회 안에서 갈린다는 겁니다.

 

결국 다들 사기를 치는데 있어서

교회에서 이런 두 가지 노선이 생기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주장이지요

 

평강 평강을 외치는 거짓선지자와

이스라엘 멸망을 외치는 참 선지자

이것 또한 한 세트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선지자는 오늘날 촛불시위자들처럼 평강 평강 정의 정의를 외치는 겁니다.

? 자기 유익을 거스리는 자가 생겨 버렸거든요.

조금전까지만 해도 같은 패 거리였는데

이제는 자기 재산이 자기 돈에 불이익을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 정의를 외치는 겁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오히려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습니다.

즉 도장 도장끈 지팡이라는 불의한 재물로 심판의 날 종말을 준비하는 겁니다.

자기유익에 따라 움직이는게 아닙니다.

죽음 뒤의 심판을 대비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과 자비를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계시록 두아디라 교회에 새벽별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새벽별이란 우리가 시편을 지금 하고 있듯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이라는 의미입니다.

악인은 아침이 안옵니다.

어두움을 통과해서 아침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성실하심이라는 밤은

바로 이 종말을 이 심판을 외치는 참선지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이란 우리를 자꾸 죽음 속으로 몰아가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

아침에 주의 긍휼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다는 거죠.

그래서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불의한 재물로 우리를 친구 삼는 겁니다.

?

우리를 죄인 만들기를 한다는 겁니다.

 

죄인 이니까 라는 핑계를 삼기 위한 죄인이 아니라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이 불의한 재물에 부합되는

의사에 부합되는 환자 만들기를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누가 죄인이 되고 싶고

누가 환자가 되고 싶겠냐 말이죠.

 

누가 770번 용서 받는 자가 되고 싶겠냐 말이죠?

 

그러나 참선지자는 이 770번 곧 칠천명이라는 남은자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건강한 자 되고 싶고, 의인이 되고 싶어 하고, 남을 7번 용서하는 그런 의문의 반복을

이런 사단의 깊은 것의 세계에서 빼내는 구체적 보편적 지혜를 펼친다 라는 겁니다.

버림 받는 지혜를 펼친다 말이죠.

 

아니 지금 같으면 애굽은 오늘날로 치면 미국이다 말이죠.

다들 노예가 되든 말든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이 다들 축복으로 안다 말이죠.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계급을 변화시킬수 있다 말이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다들 돈이 있는 미국에 간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 나의 허락도 안 맞고

그 미국을 쫄딱 망가뜨려 버리는 겁니다.

애굽을 망하게 했다 말이죠.

 

구원이 날라가 버리는 구원

구원을 배신하는 구원이 되어버린 겁니다.

 

더 좋은 잉여가 있다는 겁니다.

더 좋은 재물이 알고보니 도장 도장끈 지팡이 이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불의한데 더 좋은 재물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재물이 나를 건지는 겁니다.

 

지혜를 배신 하는 지혜가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아이 엄마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의 왕의 지혜가 괴팍합니다.

아이를 두 동강 내라니요?

왕 맞냐 말이죠?

 

이것이 참 선지자입니다. 부정적입니다. 불의합니다.

아이를 두 동강 내라는 지혜 앞에

 

역시 지혜 답습니다 라고 박수를 치는 숨어있는 마귀를 상대로 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귀는 아기를 두 동강 내라는 지혜의 판결에 박수를 치면서

법대로 하세요 법 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율법 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는 사고방식입니다.

 

그 범인이 바로 너다 너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법 대로 합시다 법 이라고 박수치는 자이다는 겁니다.

정의 대로 합시다 정의 대로 정의

 

이 마귀를 이 숨어있는 마귀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지혜는 가짜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 마귀가 지혜에 숨어 있다 말이죠.

 

김기춘 보세요 법무장관까지 했기 때문에

법의 틈을 기가막히게 잘 안다 말이죠.

법대로 합시다 법 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주의 성실하심이 밤에 빛을 비추시니까 검고 어두운 실상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도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세 번 부인하세요

그게 성도 맞습니다.

아이를 두 동강 내는데 어떤 어미가 가만히 있을 어미가 어디있으며

박수를 치는 어미가 어디있냐 말이죠.

반발 하세요

그것이 바로 솔로몬 왕이 아 저 어미가 진짜 어미이구나 라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어미이다는 겁니다.

 

가짜 어미는 법대로 법 이라고 박수를 치니

오히려 가짜 이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는 이 세가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못 삼아요

심판도 못하면서 심판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판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긍휼과 자비 라는 십자가의 불의한 재물 속으로 몰고가는 겁니다.

이것이 참선지자입니다. 솔로몬은 참선지자입니다.

 

결국 보편적인 진리란

진리를 배신하는 진리이다는 겁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거죠.

? 마귀는 하나님의 판결에 하나님의 심판에 박수를 치거든요.

맞습니다 맞고요 참 옳으신 판결이십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배신하십니다.

그 옳은 판결을 거부하시고

부조리하게 그 옳은 판결을 뒤짚어 엎어버리고

법이 아닌 용서

두 기생 중에 누가 눈물을 흘리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 독생자 예수를 원수들에게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그 찢어지는 상한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셨던 겁니다.

 

긍휼을 바라는 자만이 눈물을 흘리고

죄인으로 몰리는 겁니다.

버림 받죠.

그 버림 받은 자만이 되찾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첫사랑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것이 부활 곧 머리를 드심이다 말이죠.

이 머리를 드심이 아니면 구원 없습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는 자꾸 우리를 버림받는 잃어버린 자로 만들어 버리고

(물론 아무도 그렇게 잃어버린 자 되기 싫어서 정작 참선지자 본인들이 잃어버린 자 가 되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 선택 받았는데 왜 잃어버려? 난 잃어버린 고아 아니야, 환자 아니야, 죄인 아니야, 하나님의 원수 아니야? 아니 왜 내가 그래야 돼?????)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이유가 없다고

선민을 강조합니다. 이 선민이라는 사상이, 선택받음이 졸지에 지옥행입니다.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지혜는

지혜를 배신하는 지혜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돌이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

부활의 몸을 만드시지

지금 이 육체를 더욱더 보강시켜주는 몸 만들기

교회 만들기에 관심 없습니다.

이미 주의 오른팔에 붙잡혔는데 뭘 또 만들어요???

 

보세요 두아디라 교회 곧 주님의 오른팔이 붙잡은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비정상이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오른팔이 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한 세트가 등장해야 합니다.

 

거짓노선을 주장하는 자들과

참 노선을 주장하는 자들이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순간에도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합니다.

한 쪽 강도는 법 대로 하자 법 저 예수 양반도 결국 사기치다 잡힌거야 죄인이야

다른 한 쪽 강도는 무슨소리냐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죄를 짊어지시는 분인데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너 미쳤군 죽는 놈에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

 

강도를 배신 하는 강도가 구체적 보편성이고

 

한 쪽 강도는 법대로 하자 라는 대세만을 주장하죠.

 

당연히 대세는 거짓선지자가 대세입니다.

 

그러니 그런것이 대세가 된 교회를 배신 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는 겁니다.

당연히 그런 자들에 의해서 핍박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만이 새벽별 곧 예수님을 이미 만난 자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새벽별 되신 예수님을 본다는 겁니다.

 

이미 만났기에 교회의 대세인 거짓선지자 이세벨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성도가 새벽별을 봐야 하기 때문에 미움 받아야 하는 겁니다.

 

교회는 이 두 노선들이 벌어지는 사건 공간이다 말이죠.

그러니 끊임 없이 분절되어서 나아와야 하는 겁니다.

 

교회 뿌수고 또 나오고

나온 그 교회 또 부수고 또 나와서 분절 되고

또 나온 그 교회에서 또 부수고 또 나오고

 

왜냐하면 교회는 십자가만 주장하지

교회를 주장하지 않거든요.

 

법 대로 법을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긍휼과 용서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깊은 것이란 십자가가 필요없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 더 이상 필요 없다 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대세입니다. 교회는 교회만을 쳐다볼 뿐이지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배신 하는 교회를 주님은 찾으시는 겁니다.

99마리 양 필요 없고요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 찾는 겁니다.

양을 배신하는 양 말이죠.

 

대세가 된 교회는

율법의 네 배 대로 갚으라 라는

법대로 법 으로를 주장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즉 매일 매일 주님이 붙잡아주심이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자 이렇듯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 교회와

주의 발등상 위에 놓여진 원수가 한 세트로써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는 겁니다.

 

앞의 교회들의 문제점들이 다 뭡니까?

교회가 교회를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를 주장하지 않고 말이죠.

 

교회는 이 배신의 구체적 보편성 지혜인 십자가를 외치지 교회를 외치지 않습니다.

 

기가막히게 니골라당, 또 발람의 교훈, 이세벨 거짓선지자,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 등등의

이런 사단의 깊은 것들은 모조리 다 교회를 주장한다는 겁니다.

나 구원 받은자 맞잖아

나 이스라엘 맞잖아

나 옳잖아

나 성도 맞잖아

나 교회 맞잖아

 

이게 무슨 의사가 찾아다니는 환자 입니까?

건강하다고 우기는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를 자랑하는 놈이지?????

 

그들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죠.

그들은 오히려 건강한 자기에게 더 건강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뿐입니다.

자신이 의인 됨을 위한 정보들을 수집해서 더더욱 의인되고 성화 되기 위해서 말이죠.

 

거짓선지자의 정의 정의 평강 평강 과 같죠.

 

그러나 참선지자는 이유 없이 그냥 모조리 일괄처리로 환자 취급해 버리고

죄인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을 소개하는 겁니다. 너거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못 받으면 죽어

너거들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 쳐다보지 않으면 죽어

너거들 인자가 높이 달린 십자가 쳐다보지 않으면 죽어

 

이스라엘 곧 교회가 지금 부랴 부랴 누구의 심정으로?

아이가 두 동강 나야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주님의 긍휼을 쳐다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십의 이조 내는 인간이다

내가 구원받은 인간이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인간이다

 

완전 극과 극의 모습으로써 한 세트를 이루고 있으니

 

누가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자 이냐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인애와 자비를 바랄 것 아니겠습니까?

죄인만이 구원자를 바랄 것 아니겠습니까?

환자만이 의사를 바랄 것 아니야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시편에서 외치는 것은 오로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인애와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만 다윗아 지겹다

세월호 지겹다 고만캐라

최순실 지겹다 고만캐라

박그네 지겹다 고만캐라

 

다윗아 죄인 죄인 원수 원수 고만캐라 지겹다 라고 하지만

 

다윗은 이것 보다 새로운 것이 없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이 다윗의 노선에 참선지자가 이 죄인 죄인을 지겹게 외치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또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지겹게 외치는 겁니다.

 

저들이 지겹다고 불평하겠지만

저들은 오히려 의문의 반복만을 하고 있어요

지겹지도 않은가 봐요

 

새로운 것이 없는데

사랑이 없는데

 

법 대로 법 이라는 마일리지 쌓는 재미인가봐???

그런 자기 사랑의 중독이 재미냐 말이죠. 억지지

 

그래서 참선지자는 이런 새벽별을 통해서 저들의 사단의 깊은 것을 폭로시키면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곧 십자가의 지혜

곧 지혜를 배신하는 지혜

구원을 배신하는 구원

배신의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의 지혜를 나타내시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는 것 보다 더한 배신이 어디있습니까?

구원자는 의인을 안 부르고

배신 때리고

반대를 위한 반대인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

 

그런데 우리가 생각한 그 의인들이 모조리 다 주의 발등상 위에 놓여진 원수들이였고

 

우리가 생각한 더 철천지 하나님의 원수인 세리 강도 사마리아인들이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바 된 신부된 교회라는 겁니다.

그들이 법 대로 법을 주장할까요? 긍휼과 자비인 하나님의 깊은 것 곧 십자가의 피 용서를 주장할까요?

 

교회는 이 두 노선이 치열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를 쳐다보거나 신경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새벽별 곧 어두움을 들추어내면서 십자가의 광채를 비추이는

이 새벽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교회이기에

 

끊임없이 교회에서 빠져나오는 교회

출애굽 하듯이 출교회 하는 교회를

새벽별이 부르시러 오신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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