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 교회와 사단의 회(자칭 유대인) (3; 7-13)

 


(
3:7, 개역)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3:8, 개역)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9, 개역)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개역)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개역)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개역)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사단의 회와의 차이점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즉 이 차이는 인간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낼수 없습니다.

고로 인간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자신의 믿음은 뭘 해도 거짓이요 가짜라는 것을 알기에

주님의 믿음만 쳐다 봐야 하는 겁니다.

내 믿음은 늘 모호하고 의문의 번제와 제사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오늘 본문에 다윗의 열쇠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생명이 아닌데도 생명처럼 가치 있게 여기는가?

바로 자기의 믿음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겁니다.

방금 언급한 가치 있게 여기면 안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생명이 아닌 것인데 생명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명예살인이라고 율법을 어기면 이슬람에서 여성에게 머리에 뒤짚어 쓰는 것을

조금이라도 노출 시키면 당장 마을 장들이 모임을 열어서 벌을 내리고

이교도 즉 기독교인과 결혼 또는 연애 또는 사귀는 사이가 들통나면

오빠나 아빠가 직접 살인하는 등등

이것이 이슬람의 문제 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이런식으로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치는 레위인 제사장들처럼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성도가 아닌 겁니다.

주님의 믿음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에 흠집이 난 것에 대해 가치 여부를 따지니까 말이죠.

 

왜 다윗의 열쇠일까요?

그 문이 열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문을 능히 열고 닫고 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마치 앞의 계시록 1장에서 일곱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음부와 사망의 권세의 키를 쥐고 있다 라는 표현이 생각나듯이

생명을 쥐고 있다는 겁니다.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없는데서 생겨난

인간 세계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교회입니다. 곧 성도입니다.

성도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이 잉태하심으로써 태어난 자들입니다.

생명의 열매 들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교회는 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 되신 예수님만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지

자기 믿음을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믿음은 의문의 반복일 뿐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사단의 회인 유대인은 예수님 즉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주로 안 믿습니다. 주가 될 수 없는 인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안본다 말이죠.

 

그럼 결국 다른 존재가 쥐고 있다고 본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이 성경의 문자적인 하나님이지

문자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아니다 말이죠.
인간 자기 투사로써의 신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유대인의 하나님의 실체를 들추어내니까

알고 보니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였다 말이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간인 유대인이 마귀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고 할 정도이면

모든 인간은(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 결국 자기를 투사한 신을 믿고 있는

마귀를 믿고 있는 것이

바로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종교 사상은 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나타납니다.

그들의 메시아 구원자 사상은 이 마귀의 요구 3가지 이다는 겁니다.

한 치도 벗어나는 모습이 없다 말이죠.

 

적어도 대통령이라면 이런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촛불집회를 열어서 모여드는데

그것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이런 메시아가 이런 구원자가 되어다오

촛불집회자들이 대통령에게 이런 대통령이 되어다오 안그러면 하야 하라 퇴진을 외친다 말이죠.

 

바로 그런 국민들의 촛불집회에 한치도 양보 없는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박그네 보다 더 뻔뻔스러워요. 그네언니는 명함도 못 내미는 겁니다. 당연히 열쇠가 없으니 말이죠.

그러나 다윗은 이 열쇠만 붙잡을 뿐입니다. 어딜감히 꾀냐 말이죠.

하나님의 깊은 것 곧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반복을 들이대냐 말이죠.

이스라엘 국민들은 사울왕과 같은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다윗이 열쇠를 쥐고 있지

이스라엘 국민들이 열쇠를 쥐고 있는게 아니다 말이죠.

 

다윗은 그러면 어떻게 이 열쇠를 쥐게 된 것입니까?

다윗이 쥔게 아니라 그 열쇠를 손에 예수님이 쥐여주셨습니다.

그럼 다윗은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이다 라고 가리키는 몽학선생처럼

나 쳐다 보지 말고 저 분 쳐다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말이죠.

저분이 생명이다고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향한 방향을 보니 미래와 연결이 되다 보니

볼수가 없습니다.

못 본다고 다윗이 미안 미안 너거들 참 못보지? 라고 손가락 취소하냐 말이죠.

안 합니다. 양보 못합니다.
다윗이 죽어도 손가락은 계속해서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다윗의 노선을 따라서 나오는 참선지자 이지요.
물론 여기서 또 본격적으로 가짜 손가락도 등장하지요 참 헷갈리겠지요.

그러나 다윗 이후로 나라와 민족과 국가 곧 이스라엘 자체를 해체시키는 바벨론 포로가 되어도

이 손가락이 취소가 안된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니까 같이 사라져 버렸지만

이 손가락은 곧 열쇠는 곧 약속은 취소가 안되더라 말이죠.

국가도 없고 땅도 없고 민족도 없는데

이상하게 계속 적으로 내려옵니다.


오히려 잉태치 못한 자여 젖을 물려본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넘쳐납니다.

정반대로 순풍여자들은 자식들이 그렇게 많더니만 다 죽고 없다 말이죠.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갈 4:27,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 54:1』


의인에게 왜 충성하겠습니까?

불의한 죄인에게만 충성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는 말이죠.

 

마치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주셨듯이 말이죠.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불의한 베드로에게 말이죠.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가 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생명을 얻고자 무슨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베드로는 사망과 음부에 갇힌자 입니다.

죽음도 못 이기는 판국에 어떻게 생명의 키를 쥘수 있냐 말이죠.

그래서 생명의 키를 쥔 분이

베드로를 친구 삼고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신 겁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 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자가 새피조물 베드로 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받고자 태어난 겁니다.
베드로가 주체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가 주체입니다.

자 이렇게 다윗이 그렇게 태어난 겁니다.

여디디야(솔로몬)가 태어난게 아니라

이삭이 태어난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태어난 겁니다.

믿음의 자식으로 말이죠. 이것이 믿음의 조상이듯이 말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우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써 어찌할꼬 하던 자가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이 교회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자기 교회 됨을 가치있게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의 열쇠를 쥔 분만을 가치있게 여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 내가 책임질께 라고 대신 형벌 받았다 말이죠.

이 하나님의 저주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명의 키를 쥘수 있겠냐 말이죠.

생명의 키를 왜 생명이 있는 분이 왜 또 구지 열쇠를 가질려고 또 쥐고자 죽으셨냐 말이죠.


그게 바로 인애와 자비입니다. 하도 하도 불쌍해서 말이죠.

그래서 생명을 부어주시고자 말이죠.

생명이 넉넉한 분이 굳이 따로 생명의 키를 쥘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넉넉하신데

구지 구지 십자가의 죽음으로 친구 삼고자 하나님의 저주에 뛰어드셨던 겁니다.

간따나 넉넉한데 더더욱 초과잉적으로 넉넉해 져버리는 구체적 보편적 진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마귀가 입이 천만개 만만개라도 반박을 못해요.

마귀가 못할 정도로 음부의 권세가 이지 못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했다 난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장지지겠습니다 라는

우리 쪽의 사랑이 빨리 빨리 부셔져 버려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적어도 난 장지지겠다가 성립될려면 화목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흠이 너무 많아

3초도 안되어서 예수님을 세번 부인해 버렸넹 우짜지~~~

화목제물 자체가 안되요.

어디를 가도 화목은 커녕 불화꺼리 밖에 안되는 새는 바가지일 뿐이다 말이죠.

오로지 화목제물만이 화목 곧 사랑을 이룬다 말이죠.


이것이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듯이

하나님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이 믿음이지

우리가 믿는게 믿음이 아니다는 거죠. 우리는 믿고픈 것만 믿을려고하는 사기치는 믿음이니까 말이죠.
사랑이 없어요. 지키고자 하는 법(살인의지) 뿐이지 화목제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대신 죽어야만하는 화목제물을 보고서 울어야 합니다. 상한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을 보고서 울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슬픔 대신 희락을

재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으로 채우시는 십자가의 지혜 입니다. 


그래서 그냥 아무조건 없이 불쌍히 여겨주신 주님의 믿음이 곧 선물로써 성령이 부어진 겁니다.

그러니 소유물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마치 소유물처럼 이야기 하심은 [][저희]로 구분하기 위한

저희를 의도적으로 옆에 붙이시는 겁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의 회를 의도적으로 옆에 붙이심으로써

그 차이성으로 증거하신다 말이죠

 

결국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베드로야

다윗아

너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구나 라는 것인데

생명을 소유했구나가 아니라

생명이 다윗을 소유했구나

생명 되신 예수님이 베드로 너를 소유했구나 라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조차도 다윗 조차도

이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권리가 없게 되는 겁니다.

아무도 열고 닫고 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강력한 주님의 의지를 표현하심입니다. 주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시는 강력한 주장입니다.

다윗의 열쇠임에도 불구하 다윗이 열고 닫고 못해요

? 다윗의 열쇠이니까 다윗이 소유한 열쇠가 아니라

생명의 열쇠가 소유한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시 성전의 기둥으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3:12, 개역)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즉 앞의 글 시편 120? 아니 사데교회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그런 표현을 했는데

도둑처럼 낯설기 짝이 없는데

도둑이 집주인을 결박해서 그 집 세간을 강탈하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전쟁으로써 빼앗는 도둑이라는 부정적인 낯선 표현을 했는데

 

성도를 성전 기둥으로써 마치 세간 집 물건처럼 소유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저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이다 전리품이다 라는 거죠.

그리고 다시는 나가지 못하도록 빼앗기지 않고자

고정화 시키는

성전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다가 그것도 모잘라서

도장 찍고 복사하고 약속의 약속을 때려붓는 겁니다.

 

그래서 탄생한 생명의 잉태물이 바로 다윗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다윗을 탄핵하고자 전국민 이스라엘이 들썩 들썩 한다 말이죠.

우리야 장군을 살려내라!! 밧세바를 취한 다윗은 물러가라!! 이름없는 아이를 살려내라!!!

과연 그렇게 외치는 자들이 과연 우리야 장군을 사랑해서일까요?

세월호 아이들을 사랑해서 살려내라 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그럼 왜?

나의 거룩한 신념의 세계에 너 같은 더러운 것 들여놓기 싫다 라는 겁니다.

내가 이럴려고 다윗 대통령을 뽑았나 자괴감이 들어서 못살겠다 라는 겁니다.

 

사랑은 없지만 정의는 외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은 다윗에게 이 생명의 열쇠를 손에 꼬오옥 쥐어주신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손에 생명의 열쇠를 꼬오옥 쥐어주신다 말이죠.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가짜 교회가 이미 있습니다.

바로 사단의 회 유대인입니다.

그 유대인 손에 죽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용서해 주면 안되는 자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용서를 해 줘도 우리가 용서해 주어야지

? 말씀을 지키는 자 이니까

 

용서를 예수가 하면 율법이 개판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개판이 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살인해 버리는 겁니다.

율법 지키겠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살인입니다.

믿겠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살인입니다.

율법을 사수하고자 명예살인을 하는

모든 인간은 가인의 제사에서 못 벗아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한치도 가인의 살인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니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님을 또 두 번 죽이는 겁니다.

 

내 믿음은 뭘 해도 안되니까 그냥 예수님의 믿음만을 보시면 됩니다.

 

그 믿음이 백날 내가 나를 도닦듯이 성화를 하겠다고 행함과 실천을 백날해도 안되는 생명의 열쇠를

 

도리어 탕자처럼 살았는데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삶만 살았는데

다윗처럼 밧세바 취하고 우리야 죽이고 이름없는 아이를 아무리 눈물 금식 회개 기도로 살려볼려고 해도 못 살렸는데

 

도리어 그런 나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열쇠를 주셨다는 그 자체가

 

마귀들 열받게 하시고자 마귀들 보는 코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더 약이 바짝 오르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월척을 그렇게 어렵게 잡아왔는데

그런 마귀 코 앞에서

마귀가 아무리 밀 까부듯 초정밀 조사를 해서 송사를 하고 결제 받을려고

예수님 빨리 도장 찍으소 라고 아무리 협박해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했다고

이미 믿음이 다 떨어진 자에게 믿음을 부어주시는 이 말씀 자체가

마귀를 약올릴려고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셨다는 겁니다.

 

마치 사단의 회 유대인들 보란 듯이 약을 바짝 올리는 표현이

성도를 성전의 기둥으로 삼았다는 둥

더 열받도록 약을 바짝 올리게

금가락지 살진 소 새신발처럼

이 세가지 물증처럼

성도를 성전 기둥 삼고

거기에다가 이름을 새기는데 두 이름 곧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새 긴다고 했을때에 누구 들으랍시고 하신다?

 

(3:12, 공동) 나는 승리하는 자를 내 하느님의 성전 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가 다시는 그 성전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이기는 자 위에 새기겠다.

 

새 이름을 우리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 이름 자체가 헌 이름 옛 이름과의 차이성으로써 등장하고 있으니 옛이름에 빠져 사는 옛것을 기준으로 하는 자들 들으랍시고

곧 유대인 사단의 회 이죠. 의도적으로 표현하신다 말이죠.

 

자 이렇게 나와 저희를 구분 시키는 겁니다

어디 속에서? 빌라델비아 교회 속에서 말이죠.

 

마치 앞의 사데 교회에서는 흰옷과 셍명책에 이름 기록을 언급하셨듯이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 앞에 언급된 두아디라 교회는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언급하셨고

또 그 앞에 언급된 버가모 교회는 감추어진 만나와 흰돌을 주시고 그 흰돌 위에 새 이름을 새기겠다고 하셨다 말이죠.

 

(2:1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또 그 앞에 언급된 서머나 교회에는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 라고 하십니다.

또 일곱교회 중에 처음으로 언급된 에베소 교회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2: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자 이렇게 생명이 주어짐에 있어서 상대적인 죽음의 세력 앞에서

생명을 부어주심이 바로 성도에게 곧 교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는 겁니다.

 

이런 교회가 자기 신앙이 좋아서

자기가 이겨서 따낸 선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들을 이기셔서 주신 결과요

우리는 그저 전리품으로써 예수님이 도적처럼 빼내신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 결과물

곧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닌

원인 없는 결과물에 다윗이 해당되기에

다윗은 이 열쇠를

저들이 아무리 하야 하라고 외쳐도

아무리 돌삐 던지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에게 돌 던지듯이 던져도

우리는 이 열쇠 곧 생명의 열쇠만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일방적인 편파 해석을 하시는 겁니다.

 

(3:8, 개역)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따라할 수 없는 행위이다는 거죠.

 

어머니에게 누가복음 4장 희년 선포로써 눈먼자 포로된자 갇힌 자

즉 고아 과부 나그네 라고 가난한 자라고 하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한 자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 그럼 마음이 가난한자?

마음이 가난한자 라고 하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라고 시작하는 찬양을

어머니 성가대가 한복을 곱게 입고서 부르던데

그것도 마음이 가난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누가 봐도 평생을 가난함을 맛 본적이 없는 금수저로 태어났어도

주님께서 가난한자.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일방적으로 편파 해석하면 마음이 가난한자인 겁니다.

 

내가 가난하다 하면 가난한 거야 토토토 달지마 배신이야 배신 이다 말이죠.

 

즉 교회를 일부러 작은능력을 가진자 라고 표현하시는 이유는

 

세상이 곧 저희는 크다 라는 가치만 쫏는다 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표현한 거다 말이죠.

그럼 저희는 누구다? 당연히 자칭 유대인 사단의 회입니다.

 

큰 가치만을 쫏는데 있어서 그 허구와 허상의 의문의 반복인

가인의 제사이다는 겁니다.

 

상대적인 아벨의 제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무능한 모습입니다.

여기에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인 더 나은 제사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의미를 부여해 버리니까

졸지에 큰 가치를 쫏는 큰 능력을 쫏는 가인에게 맞아 죽게 되는 거다 말이죠.

결국 의도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써의 작은 능력이다는 겁니다.

 

[저희]는 큰 가치 큰 능력을 쫏으니까 말이죠.

 

앞의 글에서 나는 화평을 원하고 저희는 전쟁을 원한다고 했을때에

저희는 큰 가치가 되는 전쟁이 낫지

화평은 약자 코스프레처럼 보이니까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큰 능력되신 예수님이 화평으로 오셨는데

아무리 봐도 작은 능력으로 밖에 안 보이니까

큰 능력을 쫏는 자들에게는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바로 이것이 악한 세대는 기적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렇게 작은 능력으로

저희들이 쫏는 큰 가치 세상사람들이 쫏는 힘 되는 것을 쫏는게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바랬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외친

다윗의 열쇠인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생명되신 예수님이 쥔 키 열쇠이다는 거죠.

그 분에게만 키가 열쇠가 있기에

그분을 쳐다 보고있지 다른 것은 일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게 아니니까 말이죠.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그러니 이 작은 능력 곧 무시받는 십자가의 능력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요 마귀처럼 정죄할려다가 도리어 돌삐 놓고 다 도망치게 만드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요.

헬라인 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 지혜가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버림받는 돌이

우리에게는 능력이요 머릿돌로써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되는

생명의 키가 된다는 겁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 이렇게 저희 사단의 회와 차이나도록 구분되는

십자가사건의 오른팔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죽음에 충성하지 않는데 누가 생명에 충성하겠는가?


불의한 율법이 친구 삼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기


율법 자체는 불의하지 않다 그 반대다 거룩하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율법 외에 다른 한 의를 쳐다 보라는 몽학선생 취지인 것이다.

그럼 몽학선생은 이 죄아래 가두는 율법에 충성한다.
그래야 시선이 뒤집어 진다.

죽어가는 불치병을 앓는 아이를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시선을 도리어 안타깝다고 쳐다보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 충성하고 이 시선으로 친구 삼는 것이다.

시아버지 유다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죽는 자를
며느리 다말 쳐다 보듯이 하나님께 저주 받아서 그렇다 라고 몰아갈려고 했다.
에구 에구 재수도 없지
상대적으로 나는 복을 받아서 피할수 있었지

그러나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며느리 다말은
그 다음 시아버님 차례인데 우짜죠? 라고
그 증거물을 세가지 내어놓는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맞다 불의하게 딴남자랑 바람피워서 아이를 밴 여인을
당장 불태워 죽여야 하는데

알고보니 자기의 분신인 자기의 아이였다.
내 아이를 내가 불 태워 죽여야 했다는 것이 들통났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생명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비윤리적인 개같은 이방여자 때문이다고 바라보는 그 시선
그 생명은 가짜다.

그래서 생명을 부여 받기 위해 죽은자로 들통나야 하고
율법 외에 한 의로
율법으로 치면 당장 죽어야만 하는 시아버지 이지만
율법 외에 한 의로
즉 반칙으로
즉 불법으로
생명을 인공호흡하듯이
내가 불때워 죽이고자 아이로부터 도리어 부여받아야 한다.
다윗도 그래서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꼬끼오 세 번 외쳤다.
아브라함도 비웃었던 아이로부터 웃음 이삭으로부터 인공호흡처방으로 살아났다.
죽었던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겠는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신 분 때문이다.
죽음에 충성하지 않는데 누가 생명에 충성하겠는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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