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 미움의 사단의 회(유대인) 속에서 빼내시는 편파 분리, 구별, 구분 일곱교회 (2, 3장 요약)

 


구별이란 거룩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룩을 인간이 해석할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으로 부터 해석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성령이 교회에 임하게 되면 두패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 갈라지는 거룩의 기준이 바로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로 거룩이 펼쳐지는 겁니다.

 

마침 사데교회를 언급한 저의 글에 누가 댓글을 달았는데

흰옷을 우리 인간들의 거룩한 행실로 엉터리 해석을 해서

저에게 거룩한 행실을 해야

말로만 입으로만 교회 또는 성도가 아닌 진짜 교회라고 댓글을 달았더군요.

 

방금 제가 서두에 성령이 교회에 임하게 되면 이라고 표현했는데

교회를 어떤 특정 단체나 조직 또는 인간으로 볼게 아니라

주님 자신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바를 실행하는 그 어떤 환경이라고 보시면

이것이 인간의 거룩한 어떤 행동이 아니라

상황, 사건 된다 말이죠.

 

성령이 임하면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를 성령을 속인다고 책망하자

그 부부가 죽어버리는 그 상황, 그 사건이 바로

거룩이 덮쳐져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거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대상 소문자 a로써 사물이 하나의 사건으로서 거룩이다는 거죠.

거룩이 덮쳐지면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데

인간에게만 국한된게 아니라

 

예를들어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열매를 내지 않아 저주 받아 말라 죽은 무화과 나무가

하나의 사물로써 거룩이 벌린 사건으로 나타나는 그 상황이 바로 거룩이다는 거죠.

 

참 제가 설명을 할 줄 몰라 논리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데 아무튼 그렇다 말이죠 ㅋㅋㅋ

 

또 아침부터 일어나자 마자 계속해서 맴도는 생각이 마침 이글을 적는데 딱 안성맞춤이다 라는 감격에 부푼데

뭔고하니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갔는데

한 사람은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리고

또 한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주여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기도하더라 말이죠.

 

이 때 성전은 곧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사실상 심판대에서 심판 받는 그 사건을 미리 앞당겨서

미리 심판이라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이 벌어지는 공간으로써의 사물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사물이란 아무것도 아닌 무능하게 일상에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상 이런 놀라운 거룩을 벌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가르는 일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철저한 사물 곧 무능한 잉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배치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란 사물로써의 무능한 대상 소문자 a 이다는 겁니다.

 

교회는 멍청하게 가만히 있고

나는 그 교회를 건물로써 내가 다니면 의미가 있고

내가 안다니면 찝찝하게 다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내가 어떻게 하냐 라는 내 하기 나름이 되는 그런 교회로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그래서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말하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와

그런 기도와

 

반대로 무능한 사물로써의 교회가 주체가 되어서

매국노 세리를 저런 바리새인 보란 듯이

머리를 못 들고 주여 죄인입니다 라고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교회를 곧 성도를 곧 성령의 사람을

배치함으로써

졸지에 심판이 구체화 되고

정작 세리는 그 심판을 보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함으로써

거룩이 곧 두 패로 갈라지는 사건으로써의 거룩이

사물로써의 세리가 배치됨으로써 벌어지는 사건으로써의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물로써의 세리고

사물로써의 기도이고

사물로써의 성전이고

사물로써의 교회가 되니

 

철저하게 명확하고 또렷하게 구별 되는 것이

바리새인 스스로가 구별 구분 거룩을 외치는 것에

대비되는 반대만을(반대를 위한 반대 거룩) 형성하는 거룩으로써

더 나은 또렷함 명료함 구별이 됨으로써

자기 스스로(바리새인) 거룩을 펼쳤기에

버린 돌이 머릿돌 되는 구체적 보편성이 됨으로써

거룩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귀 곧 바리새인 입장에서도 반박을 못하도록 되어 있는 거룩이어야

즉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거룩이어야 하기에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매국노 세리에게 거룩을 입혀버리시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반드시 바리새인이 있어줘야 이 말씀이 다 이루었음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 먹었을 겁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편파적으로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교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발등상에 편파적으로 놓여진 가짜교회가 반드시 놓여져야함으로써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거룩을 꽁짜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심판을 보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는 교회 속의 교회를
거룩으로 덮어버려서 가짜 교회를 반드시 배치시켜 그 가짜를 타 넘어서 넘어오심으로써 말씀을 이루시는 겁니다.


자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들이 이런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와 거짓교훈의 가짜 교회를 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얼마나 해석 불가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끊임없이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벌어지는

분리 구별 분절로써의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물로써의 교회로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 매일 매일 벌어지는 사물이다는 겁니다.

 

분명이 생명이 없는 건물이요 장소인데

끊임없이 생명의 사건이 분출이 되어

오히려 바깥으로까지 쏟아져 흘러내리는 초과잉의 생명이 흘러 넘치는 곳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마치 가짜교회처럼

오히려 바깥의 거짓선지자의 교훈이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 자체가 바깥의 돈사랑 보다

더 교회가 앞장서서 돈 사랑에 모범을 보여주는 모범 단체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특이하게

돈 사랑 단 한번도 한적 없는 바리새인이

저 세리처럼 돈 사랑 하지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십의 이조를 드리는 역설적인 사건으로써 구분이 벌어지면서 말이죠.

 

그러니 돈 사랑 안했다 라는 행위가 오히려 돈 사랑이 되는 편파해석으로 구별, 거룩이 심판하고 있고

오히려 돈에 푹 빠져 사는 세리가 돈 사랑하지 않았다고 주님의 편파해석으로 거룩이 덮쳐져서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건으로써 기도 곧 하나님의 집을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집을 증거함에 있어서 도리어 두 인간이 배치 됨으로써

거룩 곧 구별 분리를 말하고 있다 말이죠.

 

정작 세리는 이 구별 분리 거룩에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거룩 자체의 판단에 도리어 심판의 대상물일 뿐이고

 

오히려 거룩은 바리새인이 자신의 거룩한 행실로 심판의 대상물이 되는게 아니라

심판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으로써의 역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들의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심판의 대상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룩의 주체로써 도리어 심판을 퍼부음으로써 거룩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게 참선지자로써 행동을 정 하겠다면

정작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처럼

거짓말을 하는 기생라합처럼 행하거나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처럼 행하거나

36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엘리야처럼 행하거나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 참으로 다행인데

그것은 또 하기 싫어

그랬다가는 자신이 짤릴까봐 말이죠.

 

정 안되면 방금 언급한 매국노 세리처럼 매국노 짖을 하거나

 

그러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가장 문안하고 편안하고

서로가 불편하지 않는 방법인

결국 기껏 거룩한 행싱을 한다는 것이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삶을 거룩한 삶이라고 우긴다 말이죠.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일까요?

일곱 교회 중에 자기들 멋대로 칭찬들은 교회만을 간판으로 달지

욕먹은 교회는 절대로 때려죽어도 간판을 달수가 없는 겁니다.

 

몇 년전에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의 간판을 단 목사와 부딧힌적이 있어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던데

참 거기는 목사가 아니라 형제 라고 표현함으로 우리는 이렇게 계급주의를 없애버렸다고 우기던데

그런데서 벌써 사기를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제는 아예 그 사기를 숨기고자 장로회로 들어가 버렸다고 하던데

 

아무튼 그런 간판을 단다는 자체가 이미 사기죠.

누가 사데 교회라는 간판을 다는 교회 봤나요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간판 달던가요.

두아디라 교회라는 간판 절대 안 답니다.

 

서머나 교회는 너무 가난하다 보니 눈치 보면서 달고

그래도 그게 어디냐 말이죠. 일곱 교회 중에 간판으로 달 교회가 없으니

이거라도 감지덕지 하면서 달더라 말이죠.

 

그러니 솔직히 딱 깨놓고 보면 일곱 교회 다 마음에 안든다는 겁니다.

인간들도 이런 판국인데 예수님은 오죽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흘리신 피만 바라보고 주의 오른팔로 붙잡는다 말이죠.

 

결국 인간들도 보기도 싫어하는 일곱교회의 모습이고

예수님도 오죽하면 자신의 피로써 덮어버림으로써

인간들도 일곱교회의 모습을 싫어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거룩의 기준이 사실상 없다는 기정 사실에서

주님은 인간의 그런 해석이 아닌

바로 주님의 발등상에 놓은 원수를 통해서

그 구별작업인 거룩사건을 자신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펼쳐진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란 자신의 거룩한 행실로써 구별이 되는게 아니라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로써 갈라지는 사건이

끊임없이 교회에서 벌어진다는 것에서

정작 마귀들은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외부의 것이 교회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마음껏 물들인다고 해서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주님이 뭐 하나 아쉬워 하는 것 없이

그래 교회 물들였구나

그럼 교회 분절 시키는 겁니다.

분절 시켜도 초과잉적으로 내부에서는 십자가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겁니다.

? 뭘 해도 죄 밖에 없음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심판을 보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단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주님은 기뻐하시니

99마리 양을 다 빼앗아 가든지 말든지

주님은 언제든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데만 열심히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숫자의 량에 좌우되지 않는다 말이죠.

 

오히려 마귀가 달려들면 들수록 더 좋다 말이죠.

아닌 것은 빨리 떨어뜨려야 하니까 말이죠.

 

주님의 관심사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 이지

인간 구원에 아예 관심이 없다니깐요.

애달은 놈은 마귀일 뿐이다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의 피만을 겨냥한 행동만 할 수 밖에 없도록 기능이 되어진

프로그램화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마귀가 마귀 짖 외에는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부지런히 이 분절의 사건인 십자가로 인해서

계속 끊임없이 분절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놈의 구원 그 이후가 어디 있냐 말이죠.

구원 그 이후 라는 시간적인 의미는 없고

구원 자체가

구원 카니까 또 바리새인처럼 생각할테니 용어를 바꾸어서

십자가 자체가 얼마나 초과잉적이면 지금까지 그 여파

파장

여운

물결의 파도가 아직까지도 우주에 까지

계속 그 파장으로써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땅을 가르고

천지가 요동하고

땅이 흔들리게 하는

 

마치 얼마전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듯이

본진과 여진 이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는데

여진이 하루에도 770번 무한대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무슨 놈의 지진 그 이후라는 말이 어디있냐 말이죠.

계속 여진이 땅을 흔들고 있듯이

십자가가 곧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가

지금까지 우리를 죽을때까지

죽어서도 남아있는 자손들까지

천지가 끝날때까지

그 여진으로써 땅도 하늘도 우주도 흔들어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라고 여기는 그 어떤 장소 공간

환경 그 어느 곳이 되었든


주의 발등상이 아닌 곳이 없으니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성전 곧 교회는 장소 개념이 아닌

십자가의 죽음이 벌어지는 사건으로써의 카페트로 배경으로 깔리는 겁니다.

정작 교회란 스데반 집사가 죽는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이 되듯이 말이죠.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바로 그 사건 현장에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는 바로 이런 십자가의 피 사건을 재현하는 카페트로써

끊임없이 분절 되고 분절되는 사건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기준이 되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 기준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편파 편애로써의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붙잡힌바 된 일곱교회는

바로 편파 미움으로써 주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로부터 분리되었기에

 

일곱교회는 자신이 뭘해도 죄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원수들로부터 빼내주심에 대한 감사로써만 십자가의 피용서를 누리면서

 

사물로써의 성령의 전 됨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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