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와 이십사 보좌 이십사 장로 (4: 1- 5)

 


(
4:1,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2, 개역)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3, 개역)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4, 개역)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4:5, 개역)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천국은 보좌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창세전에 생명책 곧 영생책에 기록된 것은 이 보좌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이 세상 곧 땅은 이 보좌로부터 곧 영생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입장이 됩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도 물리쳤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결국 생명책에 기록된 거룩이 아니면

곧 더러운 것은 배척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보좌 중심으로 영원하게 돌아가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거룩한 보좌가 아니면 영원할 필요가 없고

더럽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이나 마찬가지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 보좌의 주변에 있는 24보좌에 앉은 24장로는

그 영광의 면류관을 누구에게 도로 반납을 하는 겁니까?

영광은 오로지 예수님 홀로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즉 이 거룩에
24장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홀로 영광받으심이 마땅하다는 고백으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겁니다.

괜히 반납하는 겸손 떠는 척 하는게 아니라

이것이 회개 입니만
곧 아무리 봐도 더럽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영광을 받겠냐 라고 오히려 영광되신 영원하고 거룩하신 보좌만이 영광 되어야 한다고

겸손이 아니라 영광만 더 초과잉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영광을 더 영광스럽게 하기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반납해 버린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회개만이 마귀가 안돼 라고 반발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까 라는 화답의 찬양만이

마귀가 가장 듣기 싫은 고백인 것처럼 말이죠.

 

십자가에 달린 한 쪽의 강도가 다른 강도가 고백한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오냐 오늘 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말을 들어야

비로소 반발하는 겁니다.

곧 마귀 들으랍시고 하는 회개요 찬양이다는 겁니다.

 

즉 천국은 바로 이런 고백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주의 음성에 대한 화답이 이 고백의 찬양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즉 이 세상의 더러움이 가득한 자들은

자꾸 거룩에 보탬이 되겠다는 둥

거룩을 추구하겠다고

저 더러운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천국에서 배척하는 고백으로써 천국을 채우겠다는 심뽀죠.

배설물을 천국에 도배하겠다는 것이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괜히 배설물이라고 고백한게 아닙니다. 진짜 더럽다 말이죠.

 

즉 24장로의 고백과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음성이 나옵니다.

사실 이 음성으로부터 인해 시작해서 음성을 듣고 이 계시록을 기록하고

그 음성대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음성이 뭔가 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소리 파동 음성 고백 말 언어 노래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마침 노래를 검색하다가 I'll Be There 라는 팝송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부른 자들이 억수로 많습니다.

여러 가수 버전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유독 눈에 띄게 검색된게

잭슨 파이브의 I'll Be There 입니다.

아 맞아 청아한 어린아이가 부른 노래가 있지

머라이어 케어만 생각하다가 떠올랐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어린아이가 바로 마이클 잭슨입니다.

얼마전에 죽었다 말이죠

 

맞습니다. 제가 왜 언급하는고 하니

죽어버린 잭슨의 어린아이때 부른 노래인데

막상 그 녹음된 음성을 들으니

지금 음성은 없는 겁니다.

물론 지금 음성이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음성이 아닙니다.

살아 있어도 인간 자체가 이미 죽은 상태이다는 거죠.

결국 인간의 음성은 한계성이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음성은 사라집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녹음이 되어서 영원히 그 노래를 들을수 있다고 손 치더라도

살아있는 음성을 그때 그때 들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설사 살아 있다고 우겨도 이미 늙어버린 얼굴이요 늙어버린 백인이 되고파 했던 음성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그 음성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영원하다는 겁니다.

결국 영원하지 않는 음성은 가짜 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라고 촛불시위를 통해서 천만명 5천만명 1106070100억이 목소리 높여 외쳐도

문제는 사라져 버리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휘히힝 바람이 휙 불면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리는 꺼져버리는 겁니다.

 

수학에서는 이 음성을 파동학으로 계산하여서 학문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수학은 곧 진리학이다 라고 까지 철학자들이 붙여버립니다.
철학자들이 물리학자 출신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수학자들이다는 거죠.

논리학이 곧 계산학이다 말이죠.

공식이 없는 논리는 비논리로써 우주가 나서서 하는 붕떠는 소리가 되니까

무슨 소리인지 알수가 없다 말이죠.

그렇게 아무리 논리가 명료한 소리요 파동일지라도

그 파동은 언젠가는 사라지지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논리학은 결국 녹음기와 같아서 조금 연장시켜서 반복을 할 뿐이지

조금 시간을 연장 시킬 뿐이지

영원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인간이 한계성이 있기에 그거라도 이용을 해야 역사를 이어 갈수가 있을테니 말이죠.

 

과거의 유산으로써의 음성은 필요할때만 그때 그때 끄집어내는 녹음기인 것이지

영원해서가 아니다 말이죠.

 

지금 현재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음성이 아니다 라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현재도 앞으로도 영원히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서

영원히 파동치는 그 음성은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바로 주의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 음성의 부르심으로 인해 불려나오고 호명이 된 것이 바로

교회인 성도이고

신부된 교회는 이 음성을 선포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 나머지 음성은 곧 파동은 영원히 팽창하지 않는 소리이고 중간에 사라집니다.

돌맹이 하나를 들어서 호수가에서 옆으로 던지면

돌맹이가 물 표면을 통통통 튀면서 파동을 일으켜서 물결이 일어나다가

조금지나면 바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그 파동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요동한다 말이죠.

그 돌맹이가 튀어서 파동을 일으키는 시점이 바로 사건의 발생지점이고

그 사건의 발생 지점에서 파동이 영원히 물결친다 말이죠.

 

우리가 시편을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다윗은 이 출애굽사건을 외침으로써 파동을 일으킵니다.

마치 증폭기를 눌러서 간따나 센 파동에 증폭기를 가동해서 더더욱 세게 또 증축시키듯이 말이죠.

왜냐하면 다윗의 가문의 보좌가 임해버렸기 때문이다 말이죠.
보좌에서 땅을 요동케 하는 겁니다.

이제 출애굽이라는 애굽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출인간 이라는 인간을 출 탈출하는 사건을 봐버린다 말이죠.

그게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완성한 십자가 사건입니다.

결국 이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아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라 라는 겁니다.

 

마치 기생 라합이 자기민족과 자기백성 자기 신들로부터 탈출하듯이 말이죠.

이게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교회인 신부처럼 말이죠.

 

이제 이 인간은 인간은 자신을 천국에 들고 갈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 인간으로써 천국에는 못들어가고

교회로써

신부로써

여자가 아닌 예수님의 아내로써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교회란 신부란 인간의 연속성이 아니라

마치 외계인처럼 전혀 다른 존재인데

왜 그런고 하니

십자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말이죠.
새피조물입니다. 피조물에서 탈출한자만이 새 롭다 라는 새를 붙이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부터 탈출한 자만이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과거의 이스라엘이 약속으로부터 태어났기에 불지르러 돌아다닌다 라고 앞의 글에서 언급했지요.

 

그렇기에 성도는 인간으로써 사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연장으로써 사는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로써 천국의 사람으로써 사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24장로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데

성도는 주의 영광으로 삽니다.

자기 영광으로 사는 것처럼 모호하고 의문덩어리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이 없다 말이죠.

그러나 성도는 또렷하고 명료한 주님의 영광인 십자가로만 살기에

늘 면류관을 반납하는 삶만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히브리서에서 언급되어 있고

앞에서 일곱 교회를 이야기 했습니다. 곧 일곱교회죠.

 

그렇다면 상대적인 사라질 자들은 자꾸 영광 되지도 않는 것들을 내세우니까

도리어 일곱교회를 괴롭히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럴때마다 성도는 이 보좌만을 바라보는 겁니다.

성전에서 세리는 구석에서 고개도 못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더라 말이죠.

24장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 혼자 영광받도록 해 주소서 라는 고백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고백이자

천국의 고백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미리 앞당겨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영원하기에 말이죠.

오로지 주의 음성 외에는 들리지 않는 겁니다.

나머지 인간의 괴성은 다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아무리 고함을 쳤고

그 주장으로 달성했다 손 치더라도

공허한 메아리처럼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더 이상 그 음성은 나타나지 않더라 말이죠.

 

그런데 영원한 주의 음성은 심지어 저렇게 외친 인간들의 파동에, 소리에

휩쓸려 사라짐을 당했다 손 치더라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십사 장로들은 이 음성에 면류관을 도로 반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음성이 될수 없기에

감히 그 거룩에 비할 수가 없기에 그 영광 도로 반납한다 말이죠.

 

오늘날 한국 교회 같으면 바로 자기가 그 면류관 챙겨버리고 말텐데 말이죠.

 

제가 우리나라에서 소위 이름있다고 한 성화론자와 조금 어울려봤는데

면류관을 반납하지 않고 마치 자기 영광처럼 여기니까

주변에서 우와 하고 다들 우러러 보더라 말이죠.

수건을 벗지 않은 완악한 자들을 한국의 가장 위대한 성도라고 하니

우상숭배가 따로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당장 도망치듯이 나와 버렸다 말이죠.

면류관을 반납하기는커녕 그것으로 생계보장을 꿈꾸던데

더러워서 똥내가 나던데

소위 지식층 엘리트들이 거기에 빠지는 것 보면

아무리 천재이고 머리 좋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떠받들어주고 인정해 줘도

주의 음성이 함께 해 주지 않기에

저렇구나 라는 것을 봤다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선한 모습이고해도 광명한 천사가 따로 없더라 말이죠.

지식층이다 보니 그 결핍이 더더욱 컷을텐데

그 결핍을 채워주겠다는 사기꾼에게 재대로 말려들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말이죠.

 

그 정도로 구원자들이 새때까리로 넘쳐나는데

그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시는 음성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음성이요 영원한 음성이다는 겁니다.

 

죽어보지 않은 음성이 무슨 놈의 음성이냐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음성은 오로지 말씀 뿐이다는 겁니다.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말이죠.

제 말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왜 제가 이런 글들을 아무도 듣지 않는데 왜 쓰겠냐 말이죠.

아무도 듣지 말라고 쓰는 겁니다.

제발 듣지 말라고 말이죠.

어차피 주의 음성이 있는데

주의 음성만 영원한데 말라꼬 인간의 말을 듣냐 말이죠.

 

결국 보좌에서 음성이 나와 파동을 일으키면 즉 요동케 하면

그 음성을 듣는 공명이 된 짝꿍만이 그 음성을 듣고 기뻐한다 말이죠.

 

(10:1,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개역)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10:5, 개역)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다른 음성이 들리면 도망쳐라 말이죠.

왜냐하면 영원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영원한척 거룩한척 하기에

천국에서 오는 음성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상대적인 마귀를 보란 듯이 펼쳐지는 거다 말이죠.

예를들어서 이스라엘의 의미 조차도 그 기능이 하나님의 군대인데

군사가 지니는 모든 것들은 적에 대한 무기로써 작용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왜 불을 주느냐 말이죠.

당연히 불 지르라고 적에 대한 것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영원한 십자가 라는 보좌 때문인데

적에게 써야할 무기를 그 무기의 기능이

졸지에 자신을 향해 버리니까

기능이 역전이 되는 겁니다.

자기를 향해서 무기가 작동이 된다 말이죠.

 

은사는 24시간 마귀만을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마귀를 이겼다고 외칠수가 없는 거죠.

마귀를 이겼다고 하는 순간에 마귀에게 지는 것이니까

그것처럼 모호하고 의문의 적이 어디있겠습니까?

영원한게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24장로가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 자체가

은사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마귀보란 듯이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라는 겁니다.

마귀는 너가 업적을 남겼으니 너가 영광 받아도 돼 라고 한다 말이죠.

그것이 천국에서 과연 있을수가 있냐 말이죠.

그러니 이런 24장로의 고백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천국이기에

그 천국을 미리 앞당겨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는 겁니다.

자기 음성이 아니라

오조리 주님의 음성만이 넘쳐다는 겁니다.

인간의 음성은 어차피 사라질 뿐이니까

그것 보다 허무한게 없다 말이죠.

 

안개를 왜 자랑하냐 말이죠.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보좌에서 나온 것이다 말이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의 음성으로

모든 것의 근본을 다 이루셨기에 말이죠.

다른 것은 영원하지도 못하면서 거룩한척 영원한척 할 뿐이다 말이죠.

마귀도 피조물일 뿐인데

주님의 자신의 영광 받기 위해서 동원이 된 부정적인 도구일 뿐인데

왜 마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냐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인간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의 삶을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산다는 자체가 이미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크리스찬이 촛불시위 참여해야 하나 라는 것에

그냥 참여하면 몰라도 어차피 장난이기에 말이죠

꼭 그리스도인으로써 참여해야 한다고 하니

반대를 했더니만

바로 짤라 버리더라 말이죠.

 

왜 인간의 음성을 듣냐 말이죠.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을 왜 안 듣냐 말이죠.

 

마귀들끼리 싸우는 그 속임수가

보좌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니까

거기에 다 넘어가는 겁니다.

 

충분히 정의롭지도 않는 것에 정의라고 이름 붙이고

충분히 악 도 되지도 않는 것에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우기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빛을 빛이라고 주장하니

어두움도 비추지도 못했던 여태껏 어줍짢은 빛을 빛이라고 우기니

참 가관이더라 말이죠.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다고 했는데

선이 뭔지도 모르고서 다 속아 넘어가더라 말이죠.

선은 딱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 외에 밝히 보이는 것은 없고

이 십자가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거다 말이죠.

 

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저런 것들의 꾀임에 넘어가냐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도 되지도 않는 영원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오늘 본문에 영원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보좌입니다.

이 보좌는 누가 앉는 분인가를 말해줍니다.

바로 영원하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어린양입니다.

(5:6, 개역)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개역)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5:8, 개역)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12, 개역)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사신 분 말입니다.

이것만이 영원하고 즉 거룩하고 그렇지 않은 비거룩은 이 보좌로부터

추궁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는 비거룩한 것들은 말이죠.

 

24장로들도 비거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영원하지 않기에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영광돌리는 판국이지

자신들이 영원하지도 않을 뿐더라 도리어 혜택을 받을 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영원하고 거룩한 것이다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12편에서 영원한 것만 거룩한 것만 들리더라 말이죠.

거룩하지 않은 것은 들리지 않습니다. 높임을 받지 못한다 말이죠.

 

인간은 그런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창세전의 생명책의 기록된

영원한 거룩을 만들어낼수 없습니다.

시간에 이미 갇혀 있는데 무슨 수로 창세전의 것을 만들어낼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아무리 거룩을 행해도 배설물임을 고백해야 할 판국임을

진짜 영광을 봐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무한 영광됨에 있어서

자신의 마땅히 심판 받아 마땅한 비거룩한 자이기에

죄인이기에

도리어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모습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회개가 바로 진짜 영광을 봐 버린

초과잉적인 사랑의 풍성함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성령의 은사죠.

 

그러니 오늘 계시록 41-5절의 내용을

누가 복음 18장 성전의 두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얼마나 초과잉적인 사랑의 풍성함을 말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즉 마귀가 진짜 사랑에 배아파 죽어야 할 판국처럼 말이죠.

 

24장로는 고개도 못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진짜 사랑인 십자가에 달리신 죽임당한 어린양을 보고

진짜 심판을 봐 버렸기에

초과잉적인 사랑을 본 입장에서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는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되는

아무리 해도 미천하기 짝이 없는 거룩일 뿐이기에

영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영광스럽지도 못한 입장에서

보좌로부터 추궁을 받아야 할 입장 뿐임을 고백하지만

 

정작 마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보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좌로부터 거룩하지 못함에 대한 추궁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부자청년도

순엉터리 거룩임이 들통나는 판국에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는 삶이라는

거룩이 아닌데 거룩이라고 주장하는 그 완악함이

 

도리어 들통나게 만들어 버리는 거룩한 보좌 앞에서

끝까지 내 뭐가 잘못되었는데 라는 식으로

나 거룩 지켰잖아

말씀 지켰잖아

시키는대로 했잖아 잔아 잔아 잔아잖아 라고

 

보좌 앞에서 거룩이랍시고 들고온 것이 배설물을 들고오는 것에

오히려 보좌를 모독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안 보이는 겁니다.

 

어린양도 죽는 판국에

24 장로가 그런 것을 들고오겠냐 말이죠.

 

뭐가 장대 높이 들렸는지 전혀 안 보이는 겁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비거룩이요 가짜요 사기꾼이기에

뭘해도 안되기에 불쌍히 여겨달라는 모습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으로 보좌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두 패로 나누는

 

거룩을 보고 불쌓이 여겨 달라는 면류관을 반납하는 24장로인지

아니면 거룩이랍시고 들이내밀꺼리는 갖추고 들고와서 그것을 주장한다든지

 

죽임 당한 어린양이 영원하고 영광스러움을 봤다면

안 타죽는 것이 신기할 판국인데 말이죠.

 

족히 비교 할 수도 없는 더 나은 영광이요 더 나은 거룩인데 말이죠.

 

아니 면류관 뻔히 반납할 줄 뻔히 알면서 주기는 왜 주냐 라고 따지고 싶겠죠

이런 행동 하나 하나가 괜히 자작극처럼 펼쳐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모든 것이 사랑의 초과잉성 때문에 오바액션을 하는 겁니다.

마귀 보란 듯이

 

그래야 지옥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우리가 앞에서 마태복음 22장의 천국비유인 어떤 임금의 자기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 살펴봤듯이

 

(22:2, 현대인)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다.

 

아무도 이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을려고 했다 말이죠.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안 기쁜 잔치 인 겁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잔치

 

그런 배경 속에서 이 계시록이 천국잔치처럼 곧 혼인잔치가 펼쳐지는 겁니다.

 

이 계시록 때문에 종말론이 발전하고 묵시문학을 살펴보고

노아 방주를 만들어서

종말을 대비하겠다는 심뽀를 가지고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 없던 신앙을 억지로라도 짜내겠다고 하지만

 

전제가 아무도 이 천국 잔치를 기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라고 초대 하니까

다들 바쁘다고

시집 장가 가야 한다고

밭에 일하러 가야 한다고

 

아무도 안 왔다는 것이 전제가 깔린 거다 말이죠.

아무도 이 복음을 기뻐하거나 좋아라 하지 않았고

도리어 싫어했다는 겁니다.

이 전제성이 깔린 상태라면 당연히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임이 전제로 깔린거다 말이죠.

 

(22: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개역)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22:6, 개역)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22:7, 개역)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개역)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22:9, 개역)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22:10, 개역)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래서 어머니께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잔치에 오라고 초청하니까

오기 싫어했고

심지어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죽였다 말이죠.

 

누가 생각 납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참선지자를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혼인잔치 초대장을 보내는 종들을 다 잡아 죽였다 말이죠.

이것은 마치 애굽의 바로왕이 모세에게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보내주겠냐고 하는 모습입니다.

출애굽잔치 곧 유월절 어린양 잔치를 거부하겠다고 말이죠.

이런 이방의 왕의 애굽와 바로왕의 모습과 참선지자를 죽인 이스라엘 모습이 중첩되어 있고

다시 예복을 입지 않아 쫏겨난 자들이 이를 가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는 이스라엘 모습과 일곱교회 속에서 이런 유대인 곧 사단의 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으로써 중첩(교집합)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그냥 비유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벌어진 실제상황이다는 거죠.

 

자 그러니 시편에서 다윗이 왜 자꾸 출애굽을 계속 강조하고 그 외침을 반복하느냐 하면

다윗의 집의 보좌를 봐 버렸기 때문에

 

다윗 자기 잔치가 아닌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벌리는 그 보좌를 봐 버렸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 혼인잔치의 하이라이트가 마치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어린양의 영광이고

그 영광의 증폭성이 바로

원수가 주의 발등상에 놓여져서

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배아파 죽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이죠.

 

맞습니다. 출애굽입니다.

유월절 잔치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마침 구원전쟁의 종식인 평화 곧 혼인잔치이다는 거죠.

그런 구원전쟁으로써 혼인잔치

유월절 어린양의 잔치로써 보는 것이 계시록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신나는 기쁜소식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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