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와 네 생물 천사와 그리고 면류관 (계 4: 6-11)

 

존재(기독교)? 기능-이름(복음)이냐?

 


(
4:6, 개역)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4:7, 개역)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4:8, 개역)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4:9, 개역)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4:10, 개역)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개역)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제가 고3 되기 전 고2 말기 쯤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전에 어릴적 예수님을 알기 전에 어떤 교회 건물이나 성당의 건물 마당터에서 놀다가

우연히 높은 지붕위에 있는 이상한 돌모양의 형상을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늘 놀던 동네이다 보니 그냥 그렇게 지나가듯 보았는데

어쩌다 우연히 높은 언덕의 놀이터에서 아래로 보게 되는 동네 높은 언덕 계단에서

조금 자세히 보게 되니

 

교회 건물 사각형 꼭지점 지점에

사람 모양의 형상과

독수리 모양의 형상과

송아지 모양의 형상과

사자 모양의 형상이

 

마치 불교의 사찰이나 옛고전 건물의 향교터에 있는 큰 모양의 해태 상처럼 있으면 또 몰라도

그렇게 크게 하지도 않으면서 아기 크기 정도로 건물 사각 꼭지점에 붙어 있어서

그 동안 잘 보이지도 않게 박혀 있는 겁니다.

이왕 할꺼 눈에 잘 띄이게 하던가

잘 안 띄이게 하면서 왜 구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지 라고

낯설기 짝이 없는 건물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교회 건물이나 모든 성당 건물에 다 있으면 또 몰라

없는 곳이 워낙 많다 보니

그렇게 어릴적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오늘 본문에 네 생물의 천사가 나옵니다.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얼굴 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어릴적 봤던 돌형상의 네 생물에 눈이 가득한지는 전혀 안 보였습니다.

아기 크기 만한 정도였고

왠만한 높이에 올라가지 않으면 잘 식별도 안되는 판국에

눈이 가득한지는 전혀 파악할 수가 없는데

 

에스겔서에 나오는 보좌가 오늘 계시록 4장에 나오는데

천사의 눈이 앞뒤로 가득하다 라는 겁니다.

( 1:18, 개역)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1, 개역)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1:2, 개역)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1:3, 개역)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1:4, 개역)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1:5, 개역)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1:6, 개역)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1:7, 개역)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1:8, 개역)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1:9, 개역)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10, 개역)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1, 개역)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1:12, 개역)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13, 개역)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1:14, 개역)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1:15, 개역)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16, 개역)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7, 개역)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1:18, 개역)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19, 개역)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1:20, 개역)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1:21, 개역)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1:22, 개역)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1:23, 개역)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으며

(1:24, 개역)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1:25,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1:26,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7, 개역)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1:28, 개역)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3:24, 새번역)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 살아 있는 피조물; 날개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됨(1:5-12; 10:21)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인간과는 다르다 라는 겁니다.

 

즉 존재로 파악할게 아니라

기능으로 보자 말이죠.

 

즉 인간은 눈이 두 개 뿐이라서 눈이 어둡다 라는 겁니다.

좁은 시야와 좁은 식견으로 인해서

자기 존재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모든 사태와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밝히 볼수 없는

의문의 흐릿한 모습만 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눈이 어둡기 때문에 모호하고 흐릿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마치 제가 어릴적에 본 교회 건물 제일 높은 네 개의 육면체 꼭지점에 있는 형상 조차도

수십번을 스쳐 지나가면서 뭔지 몰랐고

가까이 가서 봐야 할 정도로

인간의 눈은 어둡다 라는 겁니다.

밝히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몽고 사람의 매의 눈을 가진 천리안이라고 우겨도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둡다 말이죠.

 

이것을 보안하기 위해서 인공위성 띄워서

초고도의 망원경을 우주관찰에만 쓰는게 아니라

스파이 위성에 장착해서

지구 구석 구석 쥐 한 마리 이동하는 것 까지 밝히 본다고 우겨도

 

이 네 생물의 여러개의 눈을 가진 천사 보다 밝히 볼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은 존재개념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그 정도로 밝히 보기 때문에

인간의 어둡고 흐릿한 눈으로 실수나 오독이나 그런 것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정확하고 또렷하고 명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천사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천사 역시 존재로 파악할게 아니라

오히려 비존재로써의 기능으로 봐야 하는데

마침 시편 114편에서 제가 어머니께 존재와 기능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80세 되신 어머니께서 이 어려운 의미를 알아들으실까 싶어서

앞으로도 자주 언급하고 반복해서 설명해야 겠다 싶은데

 

제가 이렇게 존재와 기능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존재는 태어나고 난 뒤에 이름이 붙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기능이 아니라 그냥 식별번호입니다.

마치 주민등록번호처럼 번호이다 말이죠.

학교에서 1020번 칠판에 적힌 문제 나와서 풀어 라고 하듯이

일종의 번호이다 말이죠.

 

그러니 존재는 독자적이다는 겁니다. 혼자 라는 개념이 되는 거죠.

몇번? 10번은 개인 입니다. 존재는 개인 혼자죠.
그러나 기능(이름은 집단입니다. 누구 누구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 라는 기능입니다.)

 

결국 저런 존재가 있고, 그 존재 뒤에 이름이 붙는 누구 개인 이름이 아니라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에게 이미 벌써 이름(기능)이 있어서

태어나기도 전에 애굽은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아 참 자꾸 애굽이래 ㅋㅋㅋ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 받기로 되어 있다 라는 기능이

존재 보다 먼저 있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가 그런 기능을 수용할수 없습니다.

독자적이거든요.
집단적 운명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면류관을 반납하는 집단적 운명을 수용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왕 바로왕을 통해서 영광 받기로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바로왕은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합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5:2, 개역)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존재로써 독자적이기에

누구 누구 라는 관계성 곧 기능이 없다고 주장하는 존재가 애굽왕이다 말이죠.
형 에서이고(동생 야곱과 대립된), 맏아들(탕자와 대조)이고
미움 곧 멸시 받기로 작정이 된, 나는 존재이다고 주장하는 자들인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너 애굽왕은 너가 존재하기도 전에

너의 기능을 부여했기에 그 기능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영광받으심입니다.

역시나 개인 미움, 개인 강퍅도 없다 말이죠 집단 미움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의 온 군대와 함께 집단적으로 말이죠.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애굽왕은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기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증상으로써 거꾸로 애굽이 그 당시 최고의 나라가 되고

최고의 왕이 되어야 하는
개인 왕 하나 잘 되어서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징후로써 활동이 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 독자적인 존재로써

그 존재에 이름이 파라오 곧 태양의 아들이지

미움받아야 할 놈 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존재를 위한 이름을 붙인다 말이죠.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이 개입하게 되니까

이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 위해서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말이죠.
그래서 장자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개인 안 죽입니다. 장자 곧 씨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단절

존재 뒤에 감추어진 기능이 드디어 존재를 깨고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이것 역시 설명하기 어려워서 제가 이렇게 어머니께 표현했습니다.

손이 있는데 손은 존재입니다.
눈에 보입니다.

이름을 손이라고 붙였습니다.

손은 독자적입니다. 발과 다르다 말이죠.

그런 차이로써의 손과 발이 아니라

 

손과 손이 마주 칠때에 짝 이라는 소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짝 하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몇 달전에 외국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지하실에서 손만 나타나서 짝하고 박수소리를 내고 사라지더라 말이죠.

손만 나타나도 무서운데 그때 눈이 어두우면 안 보이면 그만이겠지만

짝 하고 소리가 나니까 공포감이 몇 배나 더하더라 말이죠.

소리 자체가 괴물이 되는 겁니다.

 

눈이 두 개인 인간에게 눈이 여러개의 천사를 보면

나의 존재와 다르다 라는 이유로 이질감을 느껴서 괴물로 보이듯이

항상 나의 존재를 기준으로 내 눈 두 개를 기준으로 해서 보기에

눈이 여러개면 낯설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말이죠.

 

자 그렇듯이

 

독자적인 손으로써만 남으면 짝 하는 소리가 안나고

관계성으로써 기능으로써 손이 두 개가 마주치면 짝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짝 하는 소리가 바로 기능이다 말이죠. 그게 이름입니다.
눈에 안 보입니다. 잠시 소리 났다가 사라지는 임의로 부는 바람 같다 말이죠.

 

예배때 찬송가 불렀던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라고 했을때에

짝 하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증거물이 될 수가 없다 말이죠.

오로지 존재가 아닌 관계성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참선지자는 광야의 소리 라고 합니다. 소리는 포착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기 때문에 잡을수가 없어서 증거물 즉 존재물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존재는 독자적이지만

기능은 관계성이기에

누구 누구 이름과 연관이 됩니다.

존재는 개인 구원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능은 개인 구원 없습니다.
지옥이 땡기는 자로써 지옥과 짝꿍입니다.

그러나 기능은 집단 구원입니다. 덩어리채로 구원입니다.
동행 입니다.
죄인이라는 덩어리로써 구원자 곧 의사와의 관계성으로 동행으로 함께 하심으로 구원되는 거지
개인 구원을 위한 복음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 성화는 엉터리인 거죠.
판대기 한덩어리로 구원 뿐입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이름이 개입해야만

애굽왕은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강퍅함을 드러내고

이스라엘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긍휼이 여김받음이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죄인은 독자적인 존재론적인 죄인이 아니라

의사 때문에 환자로써 관계성이라는 기능이 바로 환자이듯이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그 구원의 이름 때문에 죄인이라는 의미 곧 기능으로써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는 겁니다.

 

어떤 장로가 저에게 죄를 지을줄 모른다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자랑을 하던데

왜 죄인이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지 혼자 자랑을 하기를

골프를 칠줄 아니까 죄 지을줄 안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그럼 골프 치는 사람 다 죄인이겠네요

아침에 운동삼아 골프채로 제가 몇 번 휘둘러 봤는데

어디서 중고 하나 구해왔던 모양인데 제가 한번 잡아 봤다 말이죠.

그럼 죄인이 되냐 말이죠.

그 놈은 죄인이라는 개념을 존재로 본 겁니다.

 

기능으로 못 봤다 말이죠.

기능이란 누구 누구와의 관계성인데

그 누구 누구도 존재로써의 누구가 아니라

기능으로써의 예수 라는 이름과 연관된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포착할 수가 없는
불가능한 단절의 기능으로써의 죄인이다 말이죠
.

성령이 임해야만 죄인이 되지

골프 친다고 죄인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무식한지 막 가르치겠다고 달려들어요

그게 바로 눈이 어두운 자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그냥 소경입니다 라고 하면 고쳐주시는 이름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자신에게 굴복하라 라는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가막혔다 말이죠.

아직도 그짖을 하고 돌아다녀요 글쎄

 

자 그런 의미에서 눈이 여러개이다는 것은

이렇게 존재로써 자꾸 포착할려는 인간들에 의해서 포착당하지않고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죄인이라는 기능은 아무리 인간이 죄를 짖는다고 해서 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포착불가능하다 말이죠.

 

참 웃끼는 것은 눈 두 개 밖에 없는 어두운 인간은 포착할수도 없는

불가능한 보좌를 포착했다고 우기고 있고

마치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음 등등으로 포착할려고 우기고 있고

 

정작 눈이 여러개 달린 네 천사들은 보좌를 수시로 부지런히 정확하게 명료하고 밝히 봄으로써 보좌를 수시로 이동시킨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단절 시키는 겁니다. 그 단절성을 느낀 자만이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내 속에 의는 없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임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존재는 자꾸 보좌를 포착해서 보좌를 고정화 시킬려고 하고

다윗이 그랬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런 보좌는 없다고

그런 보좌는 존재가 생각하는 존재로써의 보좌이고

 

보좌는 존재가 아니라 이동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라는 말처럼

보좌는 수시로 이동한다 말이죠

에스겔 1장의 요지는 이동하는 보좌이다는 겁니다.

 

눈이 여러개 달린 네 생물의 천사가 동서남북에 위치해서 보좌를 부지런히 이동시킨다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두 개의 눈이 포착해봤자 얼마나 포착하겠습니까?

포착해도 다 엉터리만 붙잡아 놓고서

마치 포켓몬 고? 맞나 그거 잡았다고 우기는 식이지 않냐 말이죠.

 

더 이상한 것은

포착 안 당하겠다고 너무 너무 빠르고 명료하고 정확하고 밝히 보이는 보좌는

절대 그런 인간의 존재성의 활동에 일체 그 어떤 연결 고리

즉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철저한 단절성을 보여주고자

너무 너무 바삐 움직인다 말이죠.

 

부랴 부랴 에덴동산을 치워버리듯이 말이죠.

 

어차피 못 들어가는데

왠 오바 액션을 그렇게 초과잉적으로 하냐 말이죠.

 

마치 기다렸다는 식으로

빨리 빨리 퍼뜩 퍼뜩 선악과 따먹어라 따먹어라 제발 제발 하고

엄청나게 고대하고 기다렸다는 식으로

막 따먹자 마자

부랴 부랴 화염방사기를 들고 불칼을 들고 있는 천사들을 배치시키고 

부랴 부랴 에덴동산을 치워 버리더라 말이죠.

 

그 기능이 오히려

 

에덴동산의 잔상으로 더 또렷하게 각인이 되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유토피아를 건설할려고

아직도 촛불시위를 하고 있더라 말이죠.

 

한번 뇌에 각인이 된 것을 못 지운다 말이죠.

 

자 이렇게 부랴 부랴 이동하는 보좌이다는 겁니다.

 

이 보좌만 영원하고 이 보좌만 거룩하기 때문에

눈이 어둡고 밝히 보지못하는 인간은

이 보좌로부터 추궁을 당하는

더럽기 짝이 없는 죄인으로써 심판받아 마땅함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그래서 24장로가 면류관을 반납하는 거다 말이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의 어두운 눈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을 봤습니다.

실로암 소경이 졸지에 이 이름 때문에 죄인인 것을 봤고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존재성처럼 실로암 소경을 존재적인 죄인으로 파악할려고 하다가

도리어 이 실로암소경이라는 미끼를 물다가

말려들게 되더라 말이죠.

 

그것이 보좌를 급히 급히 이동시키는 네 생물의 천사가 이동시키는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나온 기능이다는 겁니다.
즉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보좌로부터
심판 받아 마땅한 더러운 자임을 추궁당하는 기능 말입니다.

실로암소경을 죄인으로 몰고자 추궁하다가 도리어 본인들이 추궁당하는 기능에 말려드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영광 받으시고자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그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두 패로 갈라지게 되는 기능을

이름의 개입으로 나타나더 말이죠.

 

그러니 교회 곧 일곱교회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가짜 교회를 동원하시는 이유인 겁니다.
그래야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긍휼이 여김을 받는 일곱교회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주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가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에서 다윗이
없는 원수를 자꾸 언급하고

심지어 자기자신마저 원수의 자리에 놓으면서 까지

출애굽을 자꾸 자꾸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 다윗의 보좌인 예수라는 이름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애굽

존재하지 않는 원수를

자꾸 언급함으로써

 

이미 완료된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외치는 거다 말이죠.

 

이 이름 외에는 영광 받을이가 없으니

 

다른 이름은 보좌로부터 곧 예수의 이름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입장에 놓여진 것이

구체화 되는 사건만이 있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인 구원전쟁이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오로지 자기 존재가 아닌

그 존재 때문에 명예와 위신, 체면, 자존감으로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는

마땅히 박살이 나야할 백번 만번 심판 받아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는 자가

24장로의 면류관 반납이다는 겁니다.

 

24 장로는 존재로써가 아닌

기능으로써

면류관 반납하기 위해 등장하는 겁니다.

그들은 존재로써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능으로써 잠깐 등장하는 겁니다.

? 이름 때문에 말이죠.

복음 떄문에 등장하는 기능인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자기 체면 위신 잘남 심지어 못남 실패와 절망감 따위에 사로 잡혀 사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인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런자들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이 교회 곧 일곱교회는

지상에서 가짜 교회와 부딧히고 충돌하면서

끊임없이 이동당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끊임없이 출애굽 출이스라엘 출인간 출기독교를 하는 겁니다.

존재로써가 아닌

기능으로써 늘 끊임없이

존재라는 자리를 사수함이 아닌

언제든지 존재의 자리를 탈탈탈 털리는

떠돌이 나그네로 말이죠.

 

존재로써의 떠돌이 나그네가 아니라

기능으로써

곧 주의 이름 떄문에

이 불가능한 나그네로써

이 땅에 24장로처럼 면류관을 반납하는 기능으로 사는 자들인 겁니다.

주의 이름 때문에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서

긍휼을 바라는 자들인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뭘 해도 죄인일 뿐입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천사보다 못하지만

천사가 부러워 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기능으로써의 일곱교회인 겁니다.

 

주의 머리 드심 때문에 말이죠.

주의 보좌의 영원하심 떄문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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