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 (5: 6-10)

 


(
5:6, 개역)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개역)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5:8, 개역)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9, 개역)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5:10, 개역)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비밀이란 감추어졌다는 뜻이고

숨겨졌기에 더더욱 들추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유발케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감추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에게는 공개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두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안되는 감추어진 비밀이자

동시에

누구에게는 활짝 열려 개방되어 다 알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에수님 맞을 준비 됐나 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가

한 사람만 가고 한 사람은 남겠네

예수님 맞을 준비 됐나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마 24:32, 개역)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 24:35,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개역)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개역)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개역)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개역)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40, 개역)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개역)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43, 개역)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개역)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 24:46, 개역)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마 24:48, 개역)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9, 개역)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개역)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개역)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눅 17:26, 개역)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7, 개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17:28, 개역)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17:29, 개역)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눅 17:30, 개역)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 17:31, 개역)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눅 17:32, 개역)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 17:3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눅 17:35, 개역)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6, 개역) 『(없음)』

(눅 17:37,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신나게 어린아이들이 찬양하지만 가만히 내용을 뜯어보면

살벌하기 짝이 없는 노래를

그것도 젖먹이들이 부르고 있다 말이죠.

 

종교음악으로 분류 되어서 안따지지

인권운동가들이 들으면 기가막히는 노래를 하는 거다 말이죠.

이런거 지적 안하고 뭐하냐 말이죠.

기독교가 독선적인게 아니라

복음 자체가 독선이다 말이죠.

왜 천국과 지옥을 맹글어서 이렇게 분류하냐 말이죠.

이것 자체가 이미 거부감이 든다 말이죠.

 

갑자기 애들 노래로 이렇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24장로가 뭔가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의외로 말만 기독교이지 복음을 모르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말이죠.

 

그럼 너는 알아서 그렇게 교만을 떨고 건방진 소리를 하느냐?

 

물론 저도 쥐뿔도 아는게 없는 머리 나쁜 자이지만

그래서 좀 알아 볼려고 했는데

실상 교회라고 우길뿐이고 기독교라고 우길 뿐이지

도대체 뭐가 기독교인지를 알수 없더라 말이죠.

말만 개신교다 말이죠.

천주교랑 다를바 없다 말이죠.

사단의 회 이다 말이죠.

 

아니 그렇게 수천년 된 종교이다고 우려먹기만 했을 뿐이지

도대체 뭘 안다고 그 동안 그렇게 사람들의 삥을 뜯어먹었나 싶더라 말이죠.

하나님이 앵벌이 같아 ~~~ 예수라는 앵벌이를 앞장세워서 삥뜯는 인간들이 포주 같더라 말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짐승이다 말이죠.

 

24장로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로 해석을 주로 하던데

대부분 대세가 된 해석이
천사들의 무리 라고 해석을 하지만 그런데 근거는 희박하다고 하더라 말이죠.

희박하다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냥 모르겠다 하면 되잖아요

 

저도 몰라서 살펴보고 지금 알게 된 것이

사실상 모르겠다 라고 말하라고 있는 것이 24장로이다 말이죠.

즉 비밀이다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이 비밀을 누구에게는 감추어졌고

누구에게는 알려주신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속성을 가지지 않고서 24장로를 설명하면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결국 역사적으로 24장로가 뭔지를 교육했을때에 누구든지 24장로가 아 이런 사람들이구나 라고

퀴즈 풀 듯이 답을 맞춰 외운다고 해서 24장로를 파악할수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아무리 머리 나쁜 사람도 교육시켜서 암기시키듯이 하면 다 알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24장로라는 비밀은 그 어떤 누구도 해석이 안되더라 라는 겁니다.

 

단절이다 말이죠.

 

어 그런데 공부한적도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즉 원인 없이 알게 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24 장로 라는 속성을 부여받은 자들 이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야 도대체???

 

즉 출처를 따져 보자 말이죠.

역사적인 시공간의 1234 순으로 해석할게 아니라

인물로써 거꾸로 해석해 들어가는 겁니다.

 

먼저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좌를 이동하는 네 생물의 천사가 있다 말이죠.

왜 넷 인가? 동서남북 보좌라는 꽃가마를 짊어진 짐꾼으로 보시면 된다 말이죠.

 

그리고 그 주위에 24 보좌와 그 보좌에 앉은 24장로가 있고

 

그리고 그 주위에 천사들의 무리가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무수한 백성들이 있다 말이죠.

 

그림이 그려지지요?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다시 그 동그라미에 더 큰 동그라미를 물방울 떨어뜨려 동그라미를 점점점 여러개 형성하듯이 그 중심 첫 방울 때문에 파장으로 퍼저가는 식처럼 말이죠.

 

자 여기서 우리는 그 개인 하나 하나의 인물이 누구인가 라는 존재 보다

왜 이런 배치로 구성이 되어 있는 기능인가를 보자 말이죠.

 

그 기능을 따졌을때에

앞의 시편 117편에서 어머니께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찬양대의 배치가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온 열방이 다 이 찬양 속으로 다 빨려들어가는 식인데

이 찬양대가 바로 하나님의 군사 배치이다고 말이죠.

그래서 144000 이다 말이져.

그러니 찬양이 곧 마치 군대 군인 또는 계시록의 전쟁무기처럼 나오는 거다 말이죠.

 

이 십사만 사천에 집착하는 이단들이 억수로 많아요

여호와증인도 그렇구 신천지도 그렇구

마치 안식교가 안식일 강조하는 거랑 같은 겁니다.

 

그냥 솔직하게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묻더라 말이죠.

에이 십사만 사천명 너무 적지 않느냐

이제껏 지구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 지금 인구,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서 죽을 인구 따져보면

이건 뭐 세발의 피처럼 너무 너무 적은거다 말이죠.

차라리 이게 솔직한 거지

 

그 극소수 속에 기여이 나는 구원받고야 말겠다는 심뽀가

십사만사천에 집착하는 탐심을 그대로 노출하는 집단이다 말이죠.

그것이 그들 전도의, 포교활동의 핵심 홍보문구가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야 빨리 기득권을 쥔 집단과 맞서서 신흥그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말이죠.

신흥그룹 금방 새롭게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그런 미쁘심(믿음직스러움)이 없는 모습에서 탈퇴하고픈 욕망을 드러내는데

오히려 십사만사천을 통해서 드러내더라 말이죠.

저들은 감춘다고 한 것이 더 드러내는 것인거죠.

24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 전체 다 그렇습니다. 포착하면 할수록 더더욱 미끼러지는 겁니다.
소유욕을 오히려 감출려고 하다가 들통내는 식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12지파 다 사라지고 자기 유대 지파만 남았기 때문에

나머지 11지파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말이죠.

물론 유다 지파만 남으면 나머지 다 회복된다고 믿었겠지요.

그런데 그 나머지 한 지파인 유다 지파 조차도

인간의 힘으로 남길수 있는 능력이 안 될 정도로 버거운 판국에

예수님까지 이 유대인을 삐딱하게 보니

제일 먼저 제거 대상이 되더라 말이죠.

유대인을 하나로 결집해도 모자라는 판국에 하나로 모으는 일을 도모하기는커녕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과 어울리는 포도주를 즐기며 먹보에 춤꾼에 죄인의 친구가 되니

유대인을 오히려 분열시키고

또 이 엄격한 율법을 개판으로 만들 그야말로 위험인물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죽였거든요.

 

자 여기서 중요합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 즉 모든 인간입니다.

그 살인자 중에 누구도 있느냐 하면

바로 24 장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거 빼먹을려는 목적으로 보니까 다들 이상한 해석들을 하는 겁니다.

용기있게 신흥 이단들은 해석을 내놓아야

사람들을 끌어당기지요.

그러나 기존의 교단들은 입을 다무는 겁니다.

괜히 내놓았다가는 있던 사람들 빠져나가 버릴까 싶어서 말이죠.

 

24장로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속해 있습니다.

어디에?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 속에 말이죠.

 

그러니 첫 번째 동그라미 보좌가 있고 그 다음 동그라미 네 생물 천사

등등의 존재로 그림을 그릴게 아니라

기능으로 무엇이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

 

첫 번째 동그라미 보좌에 누가 앉았는가? 그 인물이

존재로써의 인물이 아니라

어떤 기능 즉 어떤 흔적이 담겨져 있는 인물인가?

아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이더라 말이죠

 

왜 일찍 죽임을 당했는데? 라는 식으로

그런 사건

그런 기능

그런 내용이 담겨진 것으로 보자 말이죠.

 

왜 일찍 죽임을 당했느냐 하면

바로 방금 우리가 24 장로를 누구일까 라고

그 누구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나도 그 인물을 포착할수 있는 해석을 할 줄 알아

또는 나도 그 인물 속에 속하고 싶어 라는

 

이런 알수 없는 욕심이 이미 전제로 깔려 있는 상태에 놓여져 있기에

그것을 역사라고 하는데

마귀가 그런 역사를 조작해 놓은 거죠.

그 역사를 깨고자 죽임을 당하신 분으로써

남이 아닌

내가

모든 인간이 이 마귀가 조성한 역사 속에서 벗어날수가 없는데

그 역사에 빵구멍이 이 일찍 죽임 당한 십자가 사건 때문에

졸지에

역사가 마치 화장실 욕조에 마개 뚜껑을 당겨버리면

역사라는 물들이 이 구멍에 빨려들어가

역사가 다 말려들어가듯이

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때문에

마귀가 조성한 역사가 패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전쟁의 상황인거죠.

그리고 우리는 마귀가 조성한 역사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속에 24 장로도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도 다 속해 있었는데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24장로나 제자나 우리들을 어떻게 빼내시느냐

그것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하는 어린양으로써 빼낸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는데

왜 이런 문법? 이런 언어 구상을 표현한 단어가 있지 싶은데

뭐냐 하면 이중부정처럼 말이죠. 이율배반처럼

고요 속의 외침처럼

고요한데 뭔가 외침이 들리더라 말이죠.

그럼 고요한게 아니잖아요.

~ 아닌데 ~ 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문법이나 규칙? 뭐라 하지 싶은데

아무튼 그런거 말이죠.

패러독스, 역설, 뭐 그런거 말이죠.

 

실상은 살았으나 죽은자 이고

가난한 자이나 부요한 자 이다는 그런 표현이

문법법칙으로 뭐라 하는지 몰라도

아무튼 무슨 소리인지 아실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도리어 살았다고 우기는 죽은 우리를 살리고

이 일찍 죽임 당하는 어린양의 살해에 가담했던 그 속에 24장로가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인데 이 핵심을 안 빼먹는 역사적 해석이 없더라 말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이 24 장로들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제물로 바친 그 십자가라는 더 나은 제사로 인해

단번에 죄 씻음을 받은 혜택을 입은 신랑의 신부로써 꽃단장으로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이십사 보좌에 앉은거다 말이죠.

 

(4:4, 개역)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오죽하면 이 흰옷을 돈 주고서 라도 사 라고 합니다.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물론 돈 주고 못 사는 것 뻔히 알면서도 왜 기록했느냐

그 기능 때문이다 말이죠.

이 흰 옷 아니면 천국의 공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조성한 역사가 현실이 아니라

실상은 부요한 옷을 입었으나 벌거벗은 자이다는 겁니다.

흰 옷 곧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자랑하고 싶어서 꽃단장 시킨 그 옷 안 입은 자는

그 어떤 옷을 입었다고 우겨도 실상은 벌거벗은 자이기에 얼마나 수치스럽냐 라는 겁니다.

 

즉 천국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24 장로가 무슨 일을 한게 있냐 말이죠.

오히려 예수님 죽인 죄인일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이 천국을 구성하는 자리에 놓여졌다 말이죠 그런데

즉 천국에 합격한 자들로써

그 합격 조건에 부합되는 일을 뭐 하나라로 한 것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신학이나 교회 교리들이 엉터리이다는 것이

뭔가를 자꾸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맞지 않으니까

계시록이 기쁨의 복음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겁니다. 찜찜한 겁니다.

성화론이 대세의 해석인데 그 해석을 벗어나면 이단 취급 당한다 말이죠.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버리면 억지로 해석한 티가 나고

하기는 해야하는데 늘 보류 시키고

 

반대로 신흥세력들은 무리해서라도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역시나 새롭게 세워지자 마자 반짝 인기 끌다가 바로 몇 년 만에 사라져 버리고

역시나 돈 장사를 하는 티만 팍팍 내게 되더라 말이죠.

어딜 감히 재벌 교회 교단에게 도전하다니 말이죠.

역사성이 없으니까 반복한다 말이죠.

괜히 저들에게 역사성을 쥐여준게 아니다 말이죠.

저거들 짐승끼리 싸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 역사 라는 구조인 겁니다.

이런 의문의 반복을 쉼이 없도록 해서 벗어날 수 없게 한 겁니다.

 

그러니 이 역사성을 깬다는 것은 자기 존재 조차도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앞에서

천주교니 개신교니 장로교단이니 또 그 속에서 합동이니 통합이니

그딴 배설물을 들이대냐 말이죠.

인간이 기껏 내어놓는것들이

존재감 있는 것

가치로 여겨서 가치있게 만든 것을 내미는데

똥내가 진동하더라 말이죠.

그리스도의 향기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뿐이다 말이죠.

 

?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봤기에

이것이 새 노래이다 말이죠. 성도의 기도

 

자기는 방해꾼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24 장로들의 면류관 반납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성도의 기도이다 말이죠.

새노래 이다 말이죠.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역사성을 깨면 자기존재가 깨어지는데

어떤 신학이든 어떤 교리든 자기 신학이 깨어지기를 바라겠냐 말이죠.

겨우 겨우 갈라먹기 해서

너는 장로교 너는 침례교 한국을 놓고 선교사들끼리 싸우지 말자 라고

지역을 갈라서 선 넘지 말라고 상도덕에 어긋난 일이다 라고 하겠냐 말이죠.

역사성에 갇혀 있기에

마귀가 조성한 역사에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을 깨는 것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입니다.

그럼 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라는 기능 곧 사건을 중심으로 배치된

동그라미 구성이기에

존재가 아니라서 어떤 기능만을 발설하겠냐 말이죠.

 

제가 앞의 글 시편 117편과 시편 125편의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셔서

우리를 피로 사신 것처럼

약한 자를 감당하고자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바울이

이방인을 제물로 바쳐서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찬양케 만들고자 함이다 말이죠.

 

이 희한한 방식이 바로 새노래 또는 기도 오늘 표현되어 있는 향기 라고 되어 있다 말이죠.

 

(15:16, 개역)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5:7, 개역)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5:8, 개역)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9, 개역)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것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니까 그런거지

독자적인 성도의 기도가 아니다는 겁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인한 성도의 기도이니 말이죠.

 

자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바울은 이것 때문에 이방인들아 나처럼 죽어라 라고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받았다고 외치자 마자 로마에서 죽임당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열방이 주를 찬양케 하는 주의 인자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워진

이방인의 사도이다 말이죠.

 

이방인을 제물로 바치기는커녕 본인이 제물이 되는 식처럼 보인다 말이죠.

 

사사 입다의 인신제사가 구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약은 더 살벌하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신나는 그야말로 즐기는 복음의 정수이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도 제사장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5:10, 개역)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제사장이 왜 제사장입니까? 제사를 주관하는 자 아닙니까?

그 제사에 제물이 있다 아입니까?

그런데 그 제물이 곧 제사장 본인이다 말이죠.

 

제물 따로 제사장 따로가 아니다 말이죠.

 

십일조 낼 생각 말고 십일조 되세요 라는 식입니다.

목사가 돈인지 돈이 목사인지? 아니면

목사가 희생물인지 희생물이 목사인지를 딱 보면 압미다 라는 거죠.

 

존재냐 기능이냐 말이죠.

 

세례요한 따로 예수님 따로가 아니다 말이죠.

종노릇 따로 왕노릇 따로 있는게 아니다 말이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겁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주님은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겁니다.

 

마치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되자 마자 나는 방해꾼 밖에 안된다고

퍼뜩 퍼뜩 죽임을 당하고 누락되는 것처럼 말이죠.

 

유리한 계수대로 눈물을 주의 병에 담은 것만 기록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으로

곧 잃어버림과 되찾음이라는 간극으로

마귀가 조성한 역사라는 세계를 빵구멍을 뻥뻥뻥 내어서

욕조에 담겨진 물들이 그 구멍에 빨려서 빠져나가듯이 주의 인자하심으로 공격하더라 말이죠.

 

이 공격 자체가

이 전쟁 자체가 이미 승리 그 자체이기에

그 승리의 전리품처럼

공격으로 인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산물이 바로

마귀가 조성한 역사를 복음이 공격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

천국이다 말이죠.

 

그러니 역사와 천국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역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24 장로도 마찬가지인데

모순되게

역설로써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 자체가

24 장로라는 전리품을 이미 만들어내었다는 그 증거로써 증상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24 장로이다 말이죠.

 

그것이 오른 손에 사로잡힌 신부된 교회요

새노래이고 거문고이고 기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 기능 조차도 이 마귀가 조성한 역사를 공격하는 어린양의 흘리심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아니 벗어날수가 없는데 어떻게 공격하죠?

 

같은 범죄자요 살인범인데

그 범죄의 뿌리를 뽑고자

같은 범인을 미끼로 삼는다 말이죠.

 

함정수사에 미끼

 

그러니 저들 마귀의 입장에서는 배신자요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 성도입니다.

신부입니다.

흰옷을 꽃단장을 마귀 보란 듯이 펼쳐서 자랑하시거든요

예수님 자신의 피로 만든 피 옷을 입혀서 신부를 자랑하는

이런 나쁜놈도 넉넉히 씻어내시는 십자가의 용서라고 말이죠.

 

그래서 피로 사심으로써 마귀가 형성한 역사의 사고방식을 깨지

피로 사지 않으면 역사가 구멍이 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들을 탄원케 만듭니다.

어서 원수 갚아 달라고

이 새노래가 글쎄 구멍을 뻥뻥 내고 있는 겁니다.

일곱 뿔 달린 어린양과 결탁 되어 있기에 말이죠.

 

웃스께 소리로 미팅에서 폭탄제거 또는 구멍이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래서 구멍을 제거하니까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큰 구멍이 생겨서 제거가 안되는 식이다 말이죠.

 

바로 그런 미끼로써 탄원하는 겁니다.

 

(6:9, 개역)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시편도 그렇잖아요.

 

시편은 원수 갚아달라고 탄원하는 시 뿐입니다.

분명히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뿐이어야 그 자체가 기쁜소식의 희년입니다.

원수 문제 해결 되지 않는데

 

아니다 탄원시 아닌 것도 많다!!!

 

어떻게 따로 따로 탄원 아닌 시도 있다고 주장하겠냐 말이죠.

탄원 자체가 이미 승리를 전제로 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탄원시 따로 기쁨시 따로 따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이 모든 것 자체가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새노래라는 기능이다 말이죠.

우리 성도 자체가 새노래로써 예수님이 부르는 노래이다 말이죠.

물론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 새노래를 부름으로써

비로소 마귀의 세계가 깨어지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이 새노래가 아니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겠냐 말이죠.

그래서 노래 부르게 할려고 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뭐 부자로 살라꼬?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노래하라고 노래의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뻔뻔스럽게 말이죠.

그래야 마귀가 나를 잡은 보람이 팍 팍 팍 생길 것 아니냐 말이죠.

마귀는 마귀 다워야 하니까 말이죠.

 

이것이 피로 사심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증상으로 태어난 성도입니다.

이 현실 밖에 없습니다.

 

오직 피만 십자가의 피만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거든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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