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봉인된 책을 펴는자가 누구랴 (5: 1- 5)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5:1, 개역)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개역)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5:3, 개역)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5:4, 개역)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5,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지난 시간의 계시록 4장 네 천사의 여러개의 눈을 언급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계시록이 어렵기 때문에

에스겔이나 다니엘부터 시작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리고 나서 계시록을 해야 되지 않았나 라고 요한계시록을 시작할 때 생각했는데

오히려 에스겔부터 시작했다면 이건 뭐 초장부터 네 천사로 시작을 하니

더 손을 못대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둘 다 불가능합니다만

그래도 적어도 에스겔 구약은 문제지이고

신약은 그래도 답안지라서 답보고 문제지를 보는

어릴적 초등학교때 동아전과 표준전과 뒷부분 부록의 답안지를 보고

문제지를 보면 좀 나은 입장처럼 말입니다.

 

시편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신약과 연결을 하지 않으면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길이 없듯이 말입니다.

 

칼빈은 천재이지만 계시록에는 아예 손을 못 대었잖아요

그렇다면 사실상 에스겔 다니엘 묵시문서 뿐만 아니라

지혜문서 욥기 등등도 손도 못 대는게 정상이다 말이죠.

 

결국 제가 말하고픈 것이 무었이냐 하면

성경 말씀 자체가 인간에 의해서 해석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웁니다.

 

제가 이 글 뒤에 시편 125편을 올릴껀데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구약에서 예언된 인물로써 동원이 되는데

정작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 되자 마자

그는 죽임을 당해 버립니다.

 

아니 주의 길을 평탄케 해야지 왜 죽나요

도움이 되기는커녕 퍼뜩 퍼뜩 죽어버리느냐 말이죠.

 

퍼뜩 퍼뜩 하니까 여러개의 눈을 가진 천사들이

보좌를 인간들의 믿음에 포작이 안되도록 부랴 부랴 이동시키는 모습

곧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까지 먹어 영생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들에게

마치 선악과 따먹기를 기다렸다는냥 퍼뜩 퍼뜩 부랴 부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을 치워버리고

불칼을 들고 사방으로 보디가드 천사를 배치시켜서

더더욱 잔상이 남도록 더더욱 결핍성이 남도록 만들어 버리는 식으로

그렇게 여러개의 눈을 가진 천사들의 보좌를 빨리 이동시키는 활동이 생각난다 말이죠.

 

그렇게 사도요한이 내가 왜 태어났나 라고 좌괴감이 들정도로

빨리 빨리 허무할 정도로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리는 빨리 빨리 누락되고 포착되지 않도록 하는 모습이 은사로써

기능으로써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렇게 세례요한의 기능이 누락되듯이

사도요한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이 책을 누가 펼것인가 라고 하니

펴야 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즉 말씀의 기록된 대로 펼쳐져야만 하기에

마땅한 기능이기에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능히 펼자가 없다는 겁니다.

땅에만 없으면 다행이지요 하늘에 가능성이 있으니

그런데 하늘에도 없다 라는 것이

첩첩이 이중불가능성으로써 책을 펼자가 없다는 겁니다.

없게 되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되는거 아니냐 말이죠.

믿음도 헛것이고

십자가도 헛것이고

그런데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했기에

봉인된 말씀을 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아무도 없다는 이 단절성에서 울어야 합니다

나도 안되고 너도 안되고 그 누구도 안된다는 것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거죠.

그러나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비록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이방인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 말이죠.

주님 스스로가 번제와 제사를 원치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고 주님 스스로가 말씀하셨다 말이죠.

 

즉 아무도 책을 펼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 죽어서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울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것도 말씀대로 되는 것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정작 더 마땅히 펼쳐져야 하는 말씀은

긍휼입니다.

인애와 자비의 책입니다.

이 책이 펼쳐져야 더 마땅하다는 것에 사도요한은 웁니다.

 

의문의 제사와 번제 보다

주의 자비와 긍휼의 책이 더 더 더나은 긍휼의 책이 마땅히 펼쳐져야 함에 있어서

아무도 책을 펼자가 없다는 것에 울고 울고 또 우는 겁닌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세리는

머리도 못 들고 하늘을 감히 우러러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다 말이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3, 새번역)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8:13, 공동)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8:13, 킹흠정)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8:13, 한글킹)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18:13, 현대인) 세무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8:13, 현대어)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카톨릭 쪽 설교를 이 부분에서 특이하게 설명하기를 성전 밖에서 그런다고

반면에 바리새인은 성전 안에서

 

이것을 힌트 삼아 이것이 상당히 이율배반인데

그럴꺼 같으면 왜 성전에서 기도하냐 말이죠.

어차피 안 들어올꺼면서 성전에 오기는 왜 왔냐 말이죠.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따위 기도할 것 같으면 왜 왔냐

그럴꺼면 차라리 나처럼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치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관원 비리 공무원처럼 토색하지 않은 것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기도 드려야지?

 

누구 말이 맞냐 말이죠.

바리새인 말 맞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이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바로 존재 라는 겁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그럴꺼면 왜 성전 왔냐? 성전 안에도 들어오지도 않을꺼면서

그럴꺼면 왜 세례요한은 왜 태어났냐? 복음이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려 누락되어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도 전에 다리미질 하기도 전에 고장나 죽어버리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능이다는 겁니다.

 

존재 보다 앞선 기능

 

왜 우냐? 우는 것이 기능이거든요.

아니 왜?

책을 펴야 하는데 아무도 못 편다는 것을 말하는 기능과 단절성이지요.

펴기는 펴진다는 기능과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는 된다는 것

너희는 안되나 주님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기능

 

이것 때문에 울어야만 하는 겁니다.

 

저번에 시편 56편 할 때 주의 병에 내 눈물을 담습니다 라고 할때에

제가 연기하듯이 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아니 제가 연기하는게 아니라

다윗이 연기하듯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더라 말이죠.

그때 제가 뭐하고 표현했느냐 하면

 

시편 69편을 설명할때에 주의 병에 눈물을 담는 연기라고 표현했습니다.

 

http://crosslamb.tistory.com/1681

 

자세한 것은 살펴보시고 여기는 생략하고요

 

즉 슬퍼서 우는게 아니라

단절성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울고

그리고서는 따로 기뻐서 앗싸 주의 병에 내 눈물을 드디어 담았지롱

말씀에 드디어 기록이 되었지롱 이라고 신나서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기뻐하는 모습

 

이것이 사실상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나 결국 같은 말이지요.

 

너희는 안되나 나는 된다

그냥 나는 된다 라고 하면 우리가 수긍을 하는데

너희는 안되나 라는 전제를 깔게 되니까

우리가 수긍해 드리겠다는 것 조차도 허용치 않는 단절성이자

동시에 말씀은 또렷하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한 세트로 구성하는 겁니다.

예서는 미워했으나 야곱은 사랑했다 라는 식으로

이율배반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 보다 더 또렷한 기능

곧 말씀의 완성은 없다는 거죠.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주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광이다 라고 말이죠.

그냥 우리에게는 영광이다 라고만 하면 될 것을

구지 앞에는 뭐 뭐 아니요를 반드시 붙이는 것은

단절성을 거쳐서 말씀의 또렷함을 보여주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능인데

 

보통 인간들의 성령론은 바로 개방성을 추구해 버리니까

단절성을 거치지 않으니까

한 세트를 구성하는게 없다 말이죠.

왜 불편하거든요.

 

부담스러운 것 다 빼버리고

믿고픈대로 믿고 보고픈대로 보고 듣고픈대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걸림돌이 될 수 밖에요.

 

그러니 세례요한의 퍼뜩 퍼뜩 누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런식으로 해석하면 말씀이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어차피 책을 펼 것 같으면 왜 봉인하냐 말이죠.

봉인 한다는 것은 열쇠로 잠구어서 아무도 못 열어보도록 하겠다는 취지 아니냐 말이죠.

 

이것은 마치 여러개의 눈을 가진 천사가 보좌를 부랴 부랴 이동시키듯이

여러개의 눈으로 보는 천사에 의해서 이동하는 보좌에서

세상 모든 일이 감추어지지 않고

이 보좌에서 움직이고 있다 라는 겁니다.

 

만약 인간이 이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된다고

보좌에 앉아서 이 일을 수정하겠다고 마치 타임머신처럼

리셋하겠다고 손을 댈려고 한다면

당연히 천사는 보좌를 이동시켜 버릴꺼다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최순실이 당 딴나라 당에서 벌린 일이 잘못되었다고

이런 일은 벌어지면 안되었었다고

영화 제목 뭐였더라

주인공 이름도 생각이 안나네

그래서 리셋 톰아저씨 라고 검색하니

 

엣지 오브 투모로우

라는 영화 제목인데

리셋의 초능력으로 지구를 외계인으로부터 구한다는 뭐 그런 공상과학 이야기인데

하여튼 리셋 코리아처럼 리셋 버튼을 눌러서

잘못된 사실 잘못된게 아니라 지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수정하고파서

리셋 버튼을 눌러서 수정해 보겠다는 심뽀인데

그래서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택도 없는 소리죠.

 

그럴꺼 같으면 그 따위 사고방식으로 치면

예수님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냐 말이죠.

십자가 사건 일어나지 않게 되돌려 리셋 버튼을 눌러야 될꺼다 말이죠.

 

그런데 그 부끄럽디 부끄러운 십자가가 너무 너무 자랑스러운 이유가 뭐냐 말이죠.

 

그것은 존재를 위한 존재에 의한 존재의 사건이 아니라

존재 이전의 기능인

창세전에 말씀에 기록된 것이기에

 

오히려 더 기뻐서 주의 병에 눈물을 담아서

앗싸 기록되었다 라고 더 기뻐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믿음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것은 오히려 단절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오히려 지적 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말이죠

 

괜히 맞습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당신은 보냄을 받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어차피 이방여자를 허락해 줄 것 같으면

왜 앞의 그런 소리를 왜 하냐 말이죠.

이율배반이요 모순 아니냐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냄은 받은게 아니잖아요

개같은 이방여자를 허용해 준 것 아니냐 말이죠.

 

아닙니다. 개같은 이방여자를 허용해 준게 아니라

더더욱 단절에다가 더더욱 단절의 단절을 시킨 겁니다.

즉 이 개같은 이방여자가 진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기에

예수님이 규칙을 어긴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따로 있고 규칙이 따로 있어서

예수님이 규칙을 지켜야 율법이 완성 되는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규칙 그 자체요

예수님 그 자체가 율법의 완성 그 자체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나머지 그 외는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반발합니다.

그럼 내가 자식들에게 부모에게 하는 사랑은 사랑 아니냐 말이냐

네 아닙니다.

 

적어도 사랑이 될려면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이 사랑을 실천할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여기서 은근슬쩍 자신이 없어서 빼는 겁니다.

 

사랑 지키기

기도 지키기

말씀 지키기는 자신이 있는데

 

말씀 그 자체는 아니다는 것에는 자기도 수긍하기 때문에

율법의 돌삐를 든 자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을 돌로 못 치고

은근슬쩍 한 발 빼더라 말이죠.

 

법 그 자체가 될 자신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생각 말고

주님은 무모할 정도로 인간에게 감히 인간에게 도전합니다.

기도할 생각 말고 기도가 되어라 라고

기도 그 자체가 되라고

 

당연히 못 되죠.

 

그렇다면 기도 받기만 하라 말이죠.

기도할 생각 말고

기도로 태어났음을 믿어라 그리고 믿는고로 말해라 라는 겁니다.

 

마땅히 기도 안하고는 못배기는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라는 것을 말이죠.

 

안 그러면 자꾸 뒤로 한 발 뺄려고 한다 말이죠.

기도의 조건에 맞는게 하나라도 부족하면 근심하고 등돌려 가더라 말이죠.

아니 왜 어릴적부터 지킨 율법이면 왜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왜 못주냐 말이죠.

즉 언제든지 한 발 뺄려고 어릴적부터 지킨 것이 들통난 겁니다.

차라리 나는 사랑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주여 사랑해 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가 주님의 재산을 받아야 할 가난한 자입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교회가 안 가르쳐요

물론 교육이 안되죠 불가능하죠

그래서 오히려 정반대로 가르치는 겁니다.

사단의 회입니다.

어릴적부터 말씀을 지키는 부자청년 만들려고 환장한 사단의 회가 오늘날 교회다 말이죠.

 

물론 다행스럽게 주님께서 그런 교회와 한 세트를 구성한

따로 숨겨놓은 주의 오른팔로 붙잡은 바 된 교회가 있습니다.

존재로써의 교회가 아닌 기능으로써의 교회가 따로 있다 말이죠.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팔에 쥐어진 책에 기록된 교회가 있기 때문에

비록 봉인이 되어 있어서

아무도 못 보는 기록물이지만

죽임당하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이 책을 펴시는 겁니다.

 

즉 이 분이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되신 분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여시는 자격이 되는 유일한 분으로써

그 분인 칠일 만에 천지를 만드신 일곱 봉인을 떼실 분이다 말이죠.

그러니 하늘에서 열자가 없는 이유가

땅에서 죽임을 당하고도

하늘에서 주가 되신

즉 의문의 제사와 번제로 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의문의 반복일 뿐이니까

또렷한 십자가의 지혜로써만 천지를 7일만에 지으셨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이신 사랑으로써만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그 분만이 유일한 심판주이자 창조주요 긍휼히 여기실 자로써

이 분 때문에 모든 것들이 영광 돌리고자 피조물로써 지음 받았고

이분께 영광 돌리고자 동원이 되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땅 아래에서 이 책을 펼칠 자도 없거니와

심지어 본다고 해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달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존재는 안된다 말이죠.

차라리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소경입니다 고쳐주소서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기능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존재 이전의 기능 말이죠.

 

그러니 주의 병에 눈물을 가득 담는 이유는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이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의미 없는 거다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지시러 가시는 겁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어라 라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다 심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것 때문에 십자가 지시겠다는 데

인간들은 나도 같이 십자가 지겠다는 둥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지지겠다는 둥

사람의 일 곧 지 생각만 하더라 말이죠.

 

주의 병에 담기는 눈물 만이 말씀에 기록되는 줄 모르는

십자가 생각

하나님의 일 생각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내용을 생각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용서를 생각지 않고

율법 지킬 생각이나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걸림돌로 여겨서 리셋 버튼을 눌러서

자꾸 이 십자가를 치워버리고 삭제해 버리고픈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광이다 말이죠.

 

사람들은 저마다의 책에 세상에 가치있는 것을 자신에게 마저도 가치있다고 여겨서 기록하고 있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체의 책입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신체에 남기고 행함의 책에 기록한다 말이죠

그래야 가치 있다고 존재감을 느끼는 겁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신체를 모조리 회계장부로 만들어 버렸다 말이죠.

돈 있는 놈은 웃고 돈 없는 자는 우는 겁니다.

오죽하면 돈에 미쳐서 자자손손 먹고살려고 했다는 최순실을 제대로 심판 하나 못하는 이유는

같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식으로 하면 티가 날까봐

속으로는 부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염병하네 라고 욕하고

정유라의 무슨 땡땡 패션을 따라하니 불티나게 팔리는 거다 말이죠.

돈이 오늘날 유일하게 가치가 있기에 돈으로 신체의 책에 기록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지나개나 다 기록할 수 있고

봉인 해제도 너무 너무 잘 됩니다.

최순실 이름만 입력해도 인이 금방 떼어지고

그 내용도 못 알아 먹을 내용이 없습니다.

아 얼마 얼마의 돈이 있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누구든지 그 기록된 내용을 알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생명책은 아무도 봉인을 해체 못할뿐더러

그 책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조차도 모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십자가가 무슨 영광입니까?

아무리 봐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련한 행동의 지혜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완악한 수건을 도리어 못 벗도록 하는

완악한 수건을 벗어버리면 존재감이 사라져서 못 버틴다 말이죠.

가치 없는 십자가를 무슨 수로 믿냐 말이죠.

믿음 하면 믿음의 대가들이 유대인들이 뼛속까지 믿음 믿음맨 인데

유독 딱 하나는 못하는 겁니다. 십자가

 

믿음 자체가 모순이 되어버리는 이율배반의 십자가가 되는데

무슨 수로 믿냐 말이죠.

 

그러니 그들 조차도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봉인된 이 책을 볼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 못 보는 자들과 말 썩어써 뭐하게요

답도 모르는 인간들인데

 

그러니 울어야지요

아무도 없다고

신나서 울어서

그 눈물을 병에 담아서 기록된 말씀만 나타나도록 되어 있음을 기뻐 신나하자 말이죠.

 

?

그분 만이 승리 했기 때문에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말이죠.

 

우리는 죄도 못 이기고

말씀은 더더욱 못 지키고

주의 산에 오를자 누구랴 맘 청결한 자 손 깨끗한 자 조차도 못 되고

뭐든지 실패 땡 탈락 질 수밖에 없지만

유일하게 이기신 분 승리하신 분이 있다는 그 자체

승리 그 자체이시기에

 

그 어떤의 인간의 말 조차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로지 유일하게 승리한 분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3, 새번역)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8:13, 공동)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8:13, 킹흠정)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8:13, 한글킹)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18:13, 현대인) 세무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8:13, 현대어)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어 이거 아니다

 

이거다 ㅋㅋㅋ

 

(5:5,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5, 새번역)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5:5, 공동) 그러나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5:5, 킹흠정)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내게 이르되,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기셨으므로 그 책을 펴며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5, 한글킹) 그 장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책을 펴고 또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리라."고 하더라.

(5:5, 현대인) 장로 한 사람이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자손이 이겼으므로 그분이 일곱 군데의 봉할 것을 떼고 그 책을 펼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5:5, 현대어) 그러자 스물네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셨으니 그분이 이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고 펼칠 것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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