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교회 그리고 흰 옷과 생명책 (계 3; 1- 6)


(계 3:1, 개역)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2, 개역)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 3:3, 개역)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4, 개역)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5, 개역)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6,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를 그냥 하나의 교회로 보면 이것은 인간들의 손에서 조작된 교회라 보시면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기에
부지런히 머리되신 예수님이 이 교회를 둘로 두 패로 나누시는 사건을 벌리십니다.

앞의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거짓여선지자 이세벨의 행음을 쫏는자와 그들의 대세 속에서 주님이 빼내시는 이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를 따로 챙기십니다.

마치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갔는데
한 사람은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자와

성전 구석에서 고개도 못 들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자

자 이렇게 성전 자체가 교회죠
교회 자체가 예수님이 머리 되시기 때문에
늘 항상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를 볼게 아니라
그건 눈에 뻔히 다 보이는 교회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속에 교회를 쳐다봐야 하는데
주님이 두 패로 두 쪽으로 갈라버리는데 있어서
한 쪽과 다른 한 쪽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사데 교회에 대한 두 패 나누기에 있어서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두 패로 가르는데 있어서의 기준이 된 것은 바로
살아있다고 우기는데 있어서 사실상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이 정죄 받는 이유인데
마치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음을
나야 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제대로 된 신앙자이다 라는 식이
사실상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이다는 겁니다.

결국 살았다 죽었다의 기준이 나에게 생명이 있냐 없냐
즉 생명 다운 윤리성이 있냐 저 세리처럼 없냐 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피발림 되었으냐 아니냐로 결정 되는 것이 교회인데
말만 교회이지 살았다고 우기는 세상사람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 종교도 그런 판단을 합니다. 바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해서
다들 감사해요
저 최순실 같지 않음을 감사
저 그네언니 같지 않음을 감사 한다 말이죠.
저런 비 양심적인 인간 같지 않고 지극히 양심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감사한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자 이다는 겁니다.
왜 이런 오판을 하는고 하니
바로 옛것을 기준으로 해서이다는 겁니다.

새것의 기준이 아니기에 모르는 겁니다.

그럼 살았다 죽었다는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깊은 것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옷을 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된 겁니다.
이것이 새피조물이요 교회이다 말이죠.

그런데 교회가 마치 구약의 성전처럼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인간의 손으로 짓고자
또 역시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 되게하는 또 그 의문의 반복을 
옛것을 다시 한다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그 옛 버릇에 대해서
주님이 양보할까요?
안 합니다.
그래서 새 것 새피조물 오늘 나온 흰 옷에 대해서 주님이 포기하지 않고자
바로 그런 옛것을 가지고서 교회를 장악할려는 자들에게서
끊임없이 분절시키는 교회 속의 교회를 또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런 교회는 바로 저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바라보는
흰 옷 입은 자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는 겁니다.

즉 이미 말씀이 응했는데 뭘 또 지키냐 말이죠.
말씀이 응한 것을 안 지키니까
옛것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겠다고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자기 생명 기준에서 살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누가 봐도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이 무엇의 잘못 되었냐 말이죠.
누가 봐도 저 토색하는 세리 매국노 친일파가 잘못되었지 않았냐 말이죠.

자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옛 것의 기준이다는 겁니다.

제가 어머니께 빌라도나 가룟유다에게는 없고
오로지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했지요?

그것이 바로 불의한 재물 바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다는 겁니다.
닭이 대신 울어주지 않았기에 가룟유다와 빌라도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않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가룟유다에게는 없어요.
새옷을 입지 않았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입게 된 흰 옷을 안 입었거든요.

누가 이 흰 옷을 입었습니까?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지 않고 말씀 잘 지키고? 매국노 짖을 하지 않고?
비윤리적이지 않고 지극히 윤리적인 삶을 산 자?

아니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입니다 라고 하는 매국노 세리가 흰 옷을 입었습니까?

새언약 새옷의 기준이 아니라
자꾸 옛 것의 기준에서는 이 새 옷 흰옷의 기준이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도적같이 오는 기준이 새로 설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었다고 할 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라고 하시잖아요.

즉 옛것의 기준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생명책 기준으로 말씀함에 있어서
우리의 행함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우리의 행함이 사실살 죽은 자이고
옛것을 기준으로 쌓아 올리는 행함들이다고 우기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죽은자의 모습입니다.

그럼 죽은자 모습의 행동 하지 말고
산자의 모습 살아있는 자의 모습으로 행동하자?
그게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죽은자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고 말씀을 지키라는 취지가 아니라

이 말씀을 제대로 다 이루신 유일하게 산 자를 보자 말이죠
알고보니 내 손에 의해 죽었던 분이 유일하게 산 자이다는 겁니다.
그냥 산자가 아니라 내 손에 죽었던 분이 산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았다 라는 것은 구체적 보편성이어야 한다는 거죠.
어떻게
남이 아닌 내가 죽인 자 였다는 겁니다.
내가 남을 죽이든
또는 남이 나를 죽이든
죽임 그 다음에는 다시는 다시 사는 것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산 분이 유일하게 산 자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산 자 살아있는 자의 모습을 행하면 되니? 라고 할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무시하는 닭이 세 번 울어야만 하듯이
우리가 무시했던 그 매국노 친일파 세리가 쳐다봤던 그 유일하게 산 자를 쳐다보는 겁니다.
즉 우리가 욕하는 친일파 매국노 세리나 우리나 실상은 죽은자 인데
우리는 안 죽었다고 살아있다고 우기고
세리는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고개도 못 들고 오히려 새언약을 쳐다봤던 겁니다.

그래서 항상 이 두 패가 한 세트가 된다고 했지요.
오히려 부정적인 탕자가 긍휼을 쳐다보고
긍정적인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삶으로 자신이 살아있네 라고 여겼다 말이죠. 그러나 탕자를 통해서 실상은 죽은자였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아버지의 사랑이였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두 패를 가지고서 한 세트를 이루시면서
새 기준 새언약의 기준으로 옛 것으로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을 죽은자로 들통내시는 겁니다.

앞의 교회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그리고 오늘 사데 교회 또한 이 두패 속에서 새언약이 무엇인지?
거룩이라는 차별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오늘 사데교회에서는 흰 옷과 생명책으로써 옛것과 새것으로 나누시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나누지도 못할 뿐더라 나눌 생각 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교회에서 이렇게 두 패로 나누어지길 바라겠냐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 새로운 기준이 도적 같이 낯설지가 않는다 말이죠.
진짜 낯설기 짝이 없는 도적 같은 새로운 기준이 될려면
사실상 우리는 죽은자 이다는 것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실상은 죽은자 이라는 것을
들통내시는 주님의 낯설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새삼스럽게 감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흰 옷은 그 어떤 누구도 살아 있어서 살아서 만들수가 없는
그렇다고 죽어가면서도 만들어 낼수 없는
오로지 흠 없는 분이 어린양의 피로써 흰 옷을 입히셨다는
뭐 한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뭘 해도 죄 밖에 지은 것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겨주심에 있어서
이 흰 옷을 입혀주신 그 새 기준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는 겁니다.

이 새 기준이 싫은 자는 여전히 옛것을 기준으로 해서
살았다고 우기는 그러나 실상은 죽은자인
그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사단의 회와 다를바가 없는 모습이다는 것을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응하심이
뭘 해도 다 죄 뿐인 우리에게
이 낯설기 짝이 없이 그저 용서해주시고
탕자와 같은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신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바로 생명책 이라는 흰 옷이라는
새 피조물이 되게 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 라는 것을
사데 교회는 기뻐하면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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