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 (시편 120)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20: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20:2, 개역)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120:3, 개역)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120:4, 개역) 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

(120:5, 개역)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120:6, 개역)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120:7, 개역)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먼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고 시편에 처음 등장 합니다.

아마 120편에서 134편까지 표제를 달았다고 말이죠.
성소 안에 들어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완료 속에서 보니 모든 시선이 뒤 바뀌는 겁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속에서 보니 그 동안 보았던 것이 오독이였다 말이죠.
성전(참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 안에 들어와서 보니 비로소 정독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앞의 글 시편 128편 글에서 자식의 자식을 보리라 라는 이스라엘의 평강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만

정작 신약의 내용은 자식을 위해 울라 라고 정반대의 내용으로 연결했습니다.

단절의 단절로써의 완성이다 말이죠.
불가능인데 그 불가능의 연속성 단절의 단절인데도 불구하고 완료이다는 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화친을 원하나 저들은 싸움을 벌릴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신약에서는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 말라
검(단절)을 주러 왔다는 말씀과 연결시킬려고 합니다
.

 

아니 문자적으로는 정반대이다 말이죠.

그런데 연결이 되냐 말이죠. 오히려 더 단절이 되고 차단이 된다 말이죠.

 

문제는 앞의 128편도 평강 오늘 120편도 평화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놀랍게도 거짓선지자가 늘 심심하면 외쳤던 평강이다 말이죠.

평강이다 평강이다 외치나 그러나 평강이 없는 거짓선지자의 외침 말이죠.

(렘 8:11, 개역)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시편 128편에서도 자식은 자식인데 원수 문제를 해결할수 없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듯이

평강은 평강인데 전쟁을 종식시킬수 없는 평강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전쟁을 끝낼 때 만이 평화이다 말이죠.

 

자 그런 점에서 볼때에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는데 있어서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7:4, 새번역) 그들 가운데서 제일 좋다고 하는 자도 쓸모 없는 잡초와 같고, 가장 정직하다고 하는 자도 가시나무 울타리보다 더 고약하다. 너희의 파수꾼의 날이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날이 다가왔다. 이제 그들이 혼란에 빠질 때가 되었다.

(7:5, 새번역)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7:6, 새번역)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

(7:7, 새번역)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린다. 내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신다.

(7:8, 새번역) 내 원수야,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서, 미리 흐뭇해 하지 말아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

(7:9, 새번역)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 참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내가 주님께서 행하신 의를 볼 것이다.

(7:10, 새번역) 그 때에 내 원수는 내가 구원 받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나를 조롱하던 그 원수가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내 원수가 거리의 진흙처럼 밟힐 것이니, 패배당한 원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원수, 곧 자기 식구를 원수 사랑 하듯이 사랑하면 되잖아요?

 

그럼 원수 문제가 종식 될까요?

종식이 되어야 정상 아닙니까?

그러나 원수 문제가 과연 해결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 쪽에서 백날 해 봐라 말이죠.
오히려 원수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해결을 커녕 더욱더 미흡함이 증폭이 됩니다.

결국 끝이 나지 않는다 라는 말은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인 미완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나 어미나 자식이나 이웃을 나 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

즉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였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니까 말이죠.

오직 합당한 것은 단 하나 주의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의 사랑 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완료이지

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모호한 의문의 미완료를 또 반복해야 한다 말이죠.

마침이 없고 종식 종결이 없는 미해결된 전쟁으로 남아버리기 때문에

늘 잠재성으로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질지 모른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안한 상태 입니까?


그 불안함을 또 이용해 먹고 장사하는 장사꾼들이 있지요

마약 장사가 바로 종교 장사 아닙니까?

가족 식구처럼 다정하게 다가오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하는 자들

거짓선지자가 장사를 할려면 일단 기분 나쁜소리를 절대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소리만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 모습이 바로 낚시를 하듯이 낚기 위해서 그렇게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속임수의 첫번째 단계이다 말이죠.

가족식구처럼 다가오면 모든 경계심이 다 사라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족식구처럼이 아니라 가족 식구 자체도 역시나 가짜 사랑으로 도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해체 시키는 겁니다. 해처모여 라고 말이죠.


그럼 진짜 사랑은 뭔데? 예수님 자신 밖에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도전적입니까?

새가정을 만들자 라는 식입니다.

나랑 결혼할래 아니면 전남편(율법)과 계속 살래 라는 식입니다.

이 해체 만이 꿈꾸는 것 같도다 를 맛보게 한다 말이죠.

 

가정 마저도 해체해서 다시 새 가정을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써 만들어진 가정을 꾸리자 라는 식입니다.
세상에나 이런 전복이 없다 말이죠.

그러나 더 나은 것이 먼저 있었다면 늘 수시로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전복사건.

 

과연 이것이 과거의 가족이나 현대의 가정에서 먹혀들 이야기 입니까?

그 가정의 확대 증폭이 국가 이거든요.

국가가 민족의 틀을 깨고서 새로운 국가로써 다민족이 한 식구를 이루자 라고 한다면

과연 평화가 올까요 아니면 계속 데모 시위 인종차별이 더 심해질까요?

 

이건 어떤 나라에서도 성공해 본적이 없습니다.

다민족이자 이민국으로써 미국 보세요.

택도 없습니다.

인종 차별이 100년 넘게 해결이 안됩니다.

다른데로 옮겨지죠 요즘은 아시안계로

역시나 인종 차별 당했던 흑인들이 이제는 아시안계를 더 인종차별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데 가정을 넘어서고

국가를 넘어서고

한 민족을 넘어서고

더 나아가 다민족까지 이민국가까지 넘어서는 그런 가정?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런 유토피아와 같은 천국과 마찬가지인데

그 유토피아를 그런 천국을 가정 속으로 침범하도록 만들까요?

과연 그것을 정작 사람들이 좋아라 하겠냐 말이죠.

서로의 소욕을 못 하도록 한다 말이죠.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지 천국이 임해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인간의 가족 입니다.

전형적인 가정이자 그 확대인 민족과 국가가 바로 유대인 입니다.

 

이미 자기 가정이 있는 이상

못 넘어선다 말이죠.

우리는 반드시 넘어설수 있습니다 장지질께요 라고 사기고백할게 아니라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흔히 교회가 그런 사기를 치는데 있어서

놀랍게도 가정을 넘어서는 한 가족같은 교회라고 우기는데

가정을 넘어섰다 치죠.

그런데 교회는 왜 또 못 넘어서서

다른 교회와는 하나가 못 되느냐 하는 점 입니다.

 

수많은 종파가 그래서 안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 아니냐 말이죠.

같은 교파 같은 교단 다 똑같은 바로 옆의 이웃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소리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본인이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그것을 외친다 라는 점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맹글께 너희들은 못했지? 나는 할수 있어 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미 완료해 놓고서 그 완료됨을 누리시는 방식으로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것이 바로 검을 주러 왔다 라는 겁니다.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는 말은

그 검으로 허구의 세상을 찢어 보자 말이죠.

어떤 허구? 바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서 하나되자 라고 외치는 허구

평강하지 않으면서 평화 평화 평강하다 라고 외치는 그 허구를

검으로 찔러 보자 말이죠. 도금인지 정금인지


껍데기를 찢어서 진짜 현실을 보자 라는 겁니다.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실상을 보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다는 겁니다.

합당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눈물과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처럼 단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진짜가 아니였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기 목숨을 얻을려고 하다 보니 잃게 되는

가짜 평안이요 가짜 자식이요 가짜 복인 그야말로 그것이 오히려 진짜 저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복을 설명할려면 저주를 반드시 한 세트로 같이 설명해야 합니다.

한 쪽만 이야기 하면 안되죠.

 

그러니 원수인 자기 집안 식구와

원수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차이가 나야 한다 말이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 자기 식구가 원수였고

그들이 원수로 취급하는 이방인이 오히려 예수님의 식구가 된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물에 물탄 듯 차이가 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복이냐 말이죠. 평강이냐 말이죠.

또렷하고 명확하게 갈라지는 그 차이가 나야 어린아이도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반드시 구원은 심판 속에서의 구원인 겁니다.

심판 속에서만 진짜 구원이 나타나더라 말이죠.

 

가짜 평안 가짜 식구의 특징은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이 없다 라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가짜 자식이 그렇다 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합당한 출발은 주의 인자하심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없는데 어떻게 평안을 누리냐 말이죠.

진짜 평안은 바로 그런 가짜 평안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저절로 차이가 나니까 구별이 되어버리거든요.

 

복음은 결국 처음부터 평강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복음 스스로가 나 외에는 평강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출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평강을 찾으면 안되는 거죠,

나 보다 어미와 아비와 자식을 더 사랑하면 안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출발 자체를 예수님으로 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다른 사랑은 다 가짜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차이로써 

복음 아닌 것, 평강 아닌 것과의 차이성이 저절로 또렷이 구별 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탕자의 비유를 보면 볼수록

이것 보다 더 또렷한 차이가 없다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맏아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겁니다.

우와 얼마나 솔직하기 그지 없게시리 중학생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차이를 발견해야 합니다.

 

진짜 자식과 가짜 자식을 한 세트로 구성했던

태어나기도 전에 형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태어나기도 전에 동생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던 것처럼

무엇이 또렷하고 영원하고 진짜인지를 말이죠.

 

우리에게 얼마나 이 내용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런 내용을 말씀하시냐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더더욱 불편하더라 말이죠.

두리뭉실하기는 커녕 딱 뿌러지게 둘로 명확하게 선이 그어지더라 말이죠.
너무나도 또렷하게 말이죠.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니까

다들 반응이 그럼 누가 구원 얻겠냐 라고 하더라 말이죠.

얼마나 솔직한 표현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아무도 구원 못 얻는다 라는 것이 복음이다 라는 겁니다.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

그 동안의 종교 교리나 소식들은 구원 얻을수 있다 라는 나쁜소식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진짜 복음은 그럼 누가 구원얻습니까? 라는

아무도 구원 못 얻는다 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선포하는 것이 복음 곧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그럼 아무도 이 복음을 거부할 줄 알았죠?

네 맞습니다.

아무도 이 복음을 믿는자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생겨요

말도 안되죠.

 

아무도 구원 못 얻는다는 복음의 외침을 믿는자들이 생겨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그 동안의 종교의 외침을 믿듯이 그런 버릇으로 생긴 겁니까?

아니면 인간 쪽에서가 아닌 주님 쪽에서 복음 스스로가 믿음을 줘서 믿은 겁니까?

 

인간이 선택한 겁니까?

아니면 복음이 걸러내서 선택한 거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믿더라 말이죠.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본인들도 왜 그런지 몰라요

안 믿겨져야 정상인데 저절로 믿겨지니까 본인들도 놀라는 겁니다.

 

자 이런 점에서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사기꾼들이요 장사꾼들임이 다 들통나는 거죠.

자꾸 인간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식인종과 같은 죄인입니다 라는 인식이 없는한

도저히 먹을수가 없어요.

 

먹는것에 환장한 먹방의 달인 조차도

먹는 행위를 포기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 조차도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말이죠.

 

먹는다는 그 누구도 잘 할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먹는다는 겁니다.

사람을 먹다뇨?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먹는 겁니다.

곧 이것은 예수님이 날 먹어도 상관 없다는 거죠.

 

먹거리 라는 것은 곧 최고의 이데올로기 이다 말이죠.

자기들 먹거리를 무시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무시 당한 거다 마찬가지로 여기니까 말이죠.

그런 점에서 자기 집안 식구라는 것은 먹방 공동체 이다는 겁니다.

먹는 것을 같이 하고 같은 것을 먹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에 초를 치는 겁니다.

먹거리를 달리해 버리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 라는 먹거리로

먹방공동체 밥상 공동체인 가정을 새로 구성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마다 먹거리가 달라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거리로 하는 교회가 있고

 

다른 것을 먹거리로 삼는 교회가 있다 말이죠.

 

그래서 설교 내용을 통해서

이 교회는 뭘 먹나 라고 먹는 재료를 살펴봐야 한다는 겁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의 긍휼만을 바라면서

짐승이나 먹는 꿀꿀이 죽을 달라고 할 정도이다 말이죠.

먹거리가 곧 그 사람의 상황이다 말이죠.

개 돼지 만도 못한 자이다는 겁니다.

 

그저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이라도 족하다는 겁니다.

본인이 부스러기 이다는 거죠. 찌그레기 쓰레기 만도 못한 놈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주겠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먹고 마시고 해서 먹는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애초부터 재산탕진하기 전에 먼저 있었던 것은

맨발로 집 멀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의 긍휼함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의사됨 때문에 환자가 되어야 했듯이

먼저 있었던 아버지의 맨발로 기다리는 긍휼 때문에

탕자는 집을 나가야만 했었고

탕진해야만 했었고

때마침 흉년까지 들어야만 했었고

꿀꿀이 죽도 못 먹을 정도로 되어야만 했었고

그래서 종이라도 삼아주십사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야만 했었고

안 그러면 돌아 올 리가 있을 리가 있겠냐 말이죠.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되돌아 와야할 정도로 결핍으로 맹글어 버리는 겁니다.

바짝 바짝 타버리는 흉년의 가뭄처럼 탕자를 목마르게 맹글어 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돌아왔더니만

아니 이게 웬걸

금가락지에다가 살진소에다가 새신발에다가 좋은 옷까정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3060100배를 누리더라 말이죠.

여기에 한 세트로써 맏아들이 반발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긍휼 곧 불쌍히 여겨주심에 대한 반발이다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반발

유일하게 기록된 것에 대한 반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에 대한 반발

주의 살과 피에 대한 반발로써

 

졸지에 먹거리 공동체에서 다른 먹거리를 주장함으로써 가족이 갈려지더라 말이죠.

 

즉 애초부터 가족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먹는게 달라요.

 

탕자는 아버지의 긍휼을 먹는데 있어서

맏아들은 아버지의 긍휼이 아닌

단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적 없다 라는 그 신념 그 행함 그 믿음을 먹고 있었다 말이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을 먹고 있었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는 부자청년이 먹던 그 먹거리를 먹었지

 

즉 의인들만 먹는다던 그 성화됨을 먹었지

 

죄인들만 먹는다는 주의 살과 피를 먹지 않더라 말이죠.

 

당연하지요 누가 주의 살과 피를 먹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럼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아무도 구원 못 받지

바로 그겁니다.

 

괜히 말씀 지키니까 결국 말씀을 어기는 겁니다.

그냥 저는 못 지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면

일단 모든 권한이 주님께 넘어가 버린다 말이죠.

주님의 손에 달려 버리게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괜히 말씀을 지키니까 절대로 모든 권한을 주님께 넘길수가 없게 되더라 말이죠.

주님을 뭘 믿고 넘겨 줍니까?

배신 때리면 어떻게 할려구?

보세요 탕자 아버지 보세요

맏아들이 자기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탕자 아버지를 거부하는 겁니다.

아부지 맞아? 그런데 왜 날 배신 때려? 라고 말이죠.

 

식구란 가족이란 자기 영역이 없이

모든 권한을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저 마다 자기 영역을 갖춘채로 가족을 형성해 본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 불안해 하면서

자기 영역을 따로 구축해 놓은 것이 그때 나온다면

애초부터 가족이 아니였다 말이죠.

 

괜히 말씀을 지켜서 난 십의 이조를 드렸는데

동생 탕자는 방탕하게 살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면서 저 세리와 같지 않게 살았는데

동생 탕자는 이것은 매국노 세리 보다 최순실 보다 더 심하게 방탕하게 살았으니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아야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겠지 라고 했을때에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마음에 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괜히 맏아들은 자기 영역을 구축해 놓으니까

괜히 자기 통장을 형성해 놓으니까

괜히 남을 7번 용서를 하니까

 

정작 770번 용서 받는 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주의 살과 피의 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기? 그것처럼 모호한게 어디있냐 말이죠.

과연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용서를 할수 있기나 할까요?

지 마음대로 두 번 세 번 네 번 이라고 손가락 세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기준도 지 마음대로 모호하기 짝이 없을꺼라 ~~~~

 

그냥 용서 라는 의미를

내 쪽에서 해석 조차 할 필요가 없이

해석할 권리도

아 저게 용서이구나 라고 판단할 권리 조차도

난 그저 용서 자체도 모르는 놈입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라고

용서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넘겨버리는

 

그래야 770의 용서 받는 세계가 천국이지

 

남을 7번 용서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불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

 

그렇기 때문에 먹거리 곧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했을때에

예수님을 먹어야

하나님의 아들을 먹어야 할 정도로

너는 쥐뿔도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난 인간입니다 그런 미개인이나 하는 짖 짐승같은 식인종이나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짐승이라니 듣는 짐승 기분 나쁘다 말이죠.

개 돼지 닭 등등은 우리 입에 들어오면서

먹거리로써 수에 칠 가치라도 있지만

인간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 말이죠.

 

개 돼지 닭은 수에 칠 가치가 있지만 인간은 수에도 못 들어가요

아예 없음 취급 당한다 말이죠.

 

결국 닭이 세 번 울어주지 않는이상 기쁨으로 단을 못 거두는 겁니다.

내가 우는게 아니다 말이죠.

내 대신 우는 자가 울어주어야만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꿈만 같은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 오는 입에 꿀처럼 단 말씀의 성취를 맛보아 아는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그 없음 취급 당해도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자에게 주님의 살과 피는

그때에 작용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앞의 글 중에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주여 빨리 죽어 주세요 라고

모세도 변화산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한다 말이죠.

이게 바로 주여 살과 피를 먹여주옵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주여 빨리 죽어주세요 라고 미리 장사를 치르는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이것이 제대로 사랑을 본 자들의 증상으로써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만 구원자가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 말이죠.

 

죄인만이 화목제를 곧 주의 살과 피를 바라고 있지

의인들은 그런 식인종이 되기 싫어해서

먹거리를 달리 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십니다.

상한심령을 원하신다 말이죠.

그 정도로 난 인간도 아닙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자에게만

주의 살과 피

곧 주의 인자하심이 필요하다 말이죠.

 

결국 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고 그 증상으로써 죄인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요.

 

그러니 교회도 사단의 회와 주님의 오른팔에 붙잡힌 일곱교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유대인의 모임과 같은 사단의 회는

번제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일곱교회는 바로 주님의 살과 피인 인애와 자비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도리어 먹고 도리어 받기만 할 뿐이다 말이죠
.

드리는게 없어요. 받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들은 자꾸 바치래
자꾸 드리래 자꾸 행하래 자꾸 실천하래

바치라는 사기에 놀아나놓고서는

자꾸 드렸다 라는 것을 자랑해?

전형적인 사단의 회의 특징이다 말이죠.

 

일곱교회의 특징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자랑해요

드린 것 없다 말이죠.

너 주님의 살과 피 먹어봤어? 라고

받아 먹은 것만 자랑한다 말이죠.

 

주님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다 말이죠.

 

(17:25, 새번역)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꼭 받은 것이 없는 놈들이 자꾸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드린 것을 자랑해요

얼마나 받은 것이 없었으면 말이죠.

주님의 살과 피를 먹여주시지 않으니까

사생아랑 똑같이 표현하고 생각하고 먹은대로 나오는 것이다 말이죠.

엉뚱한 것을 먹어 놓고서 말이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 라는 것을 막 토해내요

그런데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 라고 하니까

아 그거는 시험문제에 안나오는 것인데 라고

모든 오답을 다 외우고 나온자가 도저히 맞출수 없는 퀴즈에 실망하고 근심하면서 등돌리고 가더라 말이죠.

 

이 주의 인자하심을 안쳐다 보는

주의 살과 피를 안 쳐다 보는 자들은

또 이 표현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소리를

방종을 유도한다고 몰아버린다 말이죠.

그러니 생각이나 발상이나 표현이나 몸에 나타나는 증상 모두가 안 맞아요.

그 정도로 물과 기름처럼

사람의 원수는 자기집안 식구이다는 겁니다.

 

한 세트로 구성된 이유는 갈라서기 위해서 이다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사울과 다윗,

다 한 가정, 한 민족, 한 국가 이다 말이죠.

 

그래서 검은 곧 칼은 이것을 분리 시키고자

차이나게 하고자 둘로 쪼개는 겁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분리해서 따로 따로 살다가 갈라지는게 아니라

그러면 차이가 드러나지 않잖아요

분명 둘이 붙어 있다가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데려 감을 맞겠네 예수님 맞을 준비 됐나 라고

종말의 현상인 경계선이 분명해지는 사건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한 쪽은 정작 있음을 추구했는데 없음 취급 당하고

다른 한 쪽은 아예 없는자 취급 당했는데 있음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때문에

판이 뒤바뀐 해석이 되더라 말이죠.

 

오죽하면 욥의 마누라가 에라이 차라리 하나님 욕하고 디졌뿌라 라고 욕하더라 말이죠.

 

남편 욥이 자기영역 하나 없이 탈탈탈 털리니까 가족들이 외면하게 됩니다.

이거 어쩔수 없어요.

주님이 갈라버리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리셨으니까 말이죠.

 

또 룻기에서

어무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이상한 해석을 하는 며느리다 말이죠.

 

오히려 반대로 보고 있는 다른 며느리는 자기 영역으로 되돌아 갔다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탈탈탈 다 털어버리게 만든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라고 해석하는 그 해석은 도대체 어디서 왔냐 말이죠.

 

처음부터 있었다 말이죠. 존재가 아닌 비존재로써 기능(당위)으로써 먼저 있었다 말이죠.
그래서 그 차이성을 나타냄에 있어서

갈라버리는 겁니다.

 

오늘 시편 120편에서 나는 화친을 원하나 저들은 싸울려고 달려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민족들이 실제로 단 한번도 부딧힌적 없던 민족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정작 다윗은 자기아들 압살롬이 자기를 죽일려고 달려들때에

나의 벗이 그런다고 표현했었다 말이죠.

 

(38:11,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41:9, 개역)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3:18, 공동) 이것은 너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뽑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다. / 시편 41:9.

 

결국 다윗이 격어야만 했던 일들은 사실은 예수님이 격는 일들을 미리 격은 겁니다.

? 예수님만 말씀에 기록이 되어있거든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운명이였지 다윗의 운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다윗에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 다윗과 예수님과의 간극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이 간극을 무슨수로 좁히냐 말이죠.

 

같은 먹거리로 좁힌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먹거리입니다.

인애와 자비

탕자와 맨발로 이미 벌써 나와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간극은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어서 좁혀지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버지가 맨발로 나와서 기다렸기 때문에 탕자는 쫄딱 망했었었었었어야만 했던 것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탕자는 그저 아버지의 인애와 자비만을 먹는 겁니다.

 

먹거리가 달라요

 

그래서 원수가 됩니다.

 

먹는게 다르다 라는 것을 멀리 떨어뜨려서 그 차이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같은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붙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게 달랐다 차이났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들처럼 평강 평강을 외치는게 아니라

그런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이 아니라

 

또렷하게 차이나는 완료

다 이루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칼로서 두 패로 짤라 갈라버리기 위해서 오신거다 말이죠.

 

그 심판 속에서 긍휼을 바라는 자와

종말에서 번제와 제사를 드렸다는 둥 바쳤다는 둥

뭘 했다는 둥

뭘 지켰다는 둥을 내세우는 자를

 

갈라서

 

두 패로 나누어서

 

예수님 자신의 인애와 자비를 과시하는 겁니다.

피를 자랑하고파서

피를 먹은 자를

주의 살과 피를 먹는 자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자를

 

과시하고파서 자랑하고파서

 

살진소를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 새신발을 입히시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십자가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죽음이지만

 

왜 거리끼는 것일까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 밖에 안되는 것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드린 것이 다 헛수고이니까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한 것을 자랑하고픈데

770번 용서 받아야 함 앞에서 쥐뿔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니까 말이죠.

더 좋은 것을 택하지 못하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했다 말이죠.

 

왜 미련하고 어리석을까요?

섬김을 받는 것이 지혜이거든요.

그런데 십자가의 지혜는 섬김을 받는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와서

죽기 까지 복종해 버렸다 말이죠.

그럼 아무도 섬길려고 하지도 않고

무시 받는데 누가 섬길려고 하겠냐 말이죠.

 

그러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3일의 간극이란 것이 있다는 자체가 지혜를 쫏는 헬라인에게는 있을수 없는

어리석은 짖다는 겁니다.

섬기는 지혜를 본적이 없다 말이죠.

섬김을 받는 지혜만 주장한다 말이죠.

이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다 라는 겁니다.

백성이 임금을 위해 죽어야지

누가 임금이 백성을 위해 죽냐 말이죠.

그러니 어리석다 라고 하는 겁니다.

? 있을수가 없으니까

말도 안되니까 말이죠.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는 십자가는 새노래요 기쁨이요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다른 것은 영원하지 않고

합당하지도 않는

기록되지도 않는 것이지만

유일하게 기록된 것은 이 주의 인자하심인 십자가의 피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완료를 성전에 올라가서 노래하는 겁니다.

이 노래를 이 사건을 누리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거든요.

 

여러분이 오늘 드리고 바친 것이 아니라, 7번 남 용서가 아니라

받은 것을 마음껏 자랑해 보세요.

770번 용서 받음은 그야말로 어마 어마 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자랑이 넘쳐날껍니다.

 

십자가의 피 자랑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감히 꾀겠냐 말이죠.

감히 족히 비교 조차도 안될 정도이니

이 보다 더 자랑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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