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을 미워하는 자 (시편 129)

 


(
129: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129:2, 개역)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129:3, 개역)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129:4, 개역)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129:5, 개역)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129:6, 개역)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129:7, 개역)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줌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129:8, 개역)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129:1, 새번역) 이스라엘아, 이렇게 고백하여라.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다.

(129:2, 새번역) 비록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으나, 그들은 나를 이겨 내지를 못했다.

(129:3, 새번역)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그들이 나의 등을 갈아서, 거기에다가 고랑을 길게 냈으나,

(129:4, 새번역)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

(129:5, 새번역) 시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고 만다.

(129:6, 새번역) 그들은 지붕 위의 풀같이 되어,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고 만다.

(129:7, 새번역) 베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고, 묶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아

(129:8, 새번역)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베푸시기를 빈다" 하지 아니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은 곧 누구는 미워했다는 말입니까?

에서죠 형에서

 

이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것도 훨씬 이전인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알리바이로 뒤짚어 씌웁니다.

 

자 그럼 대뜸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

예정론 또는 운명론 숙명론 등등을 떠올릴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그거 다 거짓입니다.

예정론 따위는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결국 인간에게 회귀하는 겁니다.

즉 인간을 위한 예정론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것은 뭐냐?

그러니깐요.

그들 야곱과 에서의 운명을 예정한게 아닙니다.

 

오로지 약속 곧 단 하나의 인물인 예수님만 예정되었다는 겁니다.

둘을 가르는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신의 피 흘리심으로 말이죠.

 

그래서 알리바이로 뒤에 뒤짚어 씌우는데 있어서

? 형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겁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개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 흘리심을 통해 사랑하시고픈 자에게 피 발라서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그럼 형 에서는 왜죠? 피 발림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목으로 삼은 시온을 미워했다는 겁니다.

약속을 미워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겼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형 에서의 입장에 서서 따져 봅시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탕자를 향한 사랑에 반발한다 말이죠.

 

그럼 우리가 결과를 이미 알았다 치고

그것을 몰랐던 맏아들이나

또는 형 에서에게 기회를 주자 라고 해서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정 안되면 타임머신을 타고서

형 에서에게 힌트를 줘서 그 상황을 피하도록 하자 말이죠.

피했다 칩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사건 곧 두 패로 가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야야야 에서야 너 절대로 팥죽으로인해 장자권을 팔면 안돼
라고 알려주고 에서가 수긍했다 치자 말이죠
.


그러면 다른 일들로 인해서 그런 사건 곧 무엇이든지
소홀히 여겨서 팥죽이든 오렌지 주스든 배고플 때 아니 배가 부를때든 상관없이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냐 말이죠
.

나비효과 라는 영화처럼

과거로 돌아가서 잘못된 시점을 수정하면

그럼 그것이 다른 데서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냐 말이죠.

역시나 튀어나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즉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동생 야곱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말이죠.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은 의외로 깊숙이 감추어져 있지만

친형제에 대한 경쟁심은 바로 바로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방심한 틈을 노려서 오거든요.

 

그것은 바로 존재감 때문인데

어찌되었던 간에 차이성을 인간은 나타낼려고 한다 말이죠.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다가 한 사람 바리새인이 있는데

세리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말이죠.

세리가 등장하니까


내 보다 못난 놈이 등장하니까 반드시 그 차이성을 말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


나 보다 못난 놈 이라는 것이 바로 방심할수 밖에 없는 틈이다는 겁니다.

이 틈만 노려요!!
만만하기 떄문에 소홀히 여길수 밖에 없어요. 미워할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야곱과 에서가 예정된게 아니라

이를 둘로 나누는 예수님이 예정된 거다 말이죠.

인간은 의미 없어요! 도리어 인간은 이 예정이 말려들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 시온만 예정되었고. 이 십자가만 곧 주의 인자하심만 예정된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를 예정했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뿐입니다. 마귀 자식이다 말이죠.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말이죠.

철저하게 갇혔다는 겁니다.


주님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사태가 안 벌어질리가 없다말이죠.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죽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주의 전(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킨다 말이죠.


아무리 예루살렘에 곧 시온산에 살아도 그 자체가 이미

악마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시온)에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말이죠.

부자 청년처럼 어릴적 부터 율법 지켰다는 모태율법행함 자임을 자부했다 말이죠.

(주의 산(시온산)에 오를자 누구랴 맘 청결한 자)

(시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렇게 입으로 시온을 찬양했는데 실상은 시온을 미워했던 자임이 들통나고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해서 화목제를 곧 주의 인자하심을 준비했는데

그것이 미우니까 그 화풀이를 사마리아인에게 하는거다 말이죠.

나를 예정해야 하는데 화목제를 예정해 버리니까 미워하는 마음인 살인을 벌리는 겁니다.

도리어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갈 정도로 근처도 가지 않았는데

그 사마리아 구역의 사마리아인이 정작 주의 인자하심을 받게 될 쭐이야?????
유대인에게는 아무리 예수님이 찾아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찾을수가 없었는데

개같은 이방여자에게서 그것도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찾던 잃어버린 양을 찾을줄이야??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원수 사마리아인에게 긍휼을 베풀면

자동적으로 시온을 미워했음이 드디어 들통이 나는 겁니다.

화목제물을 싫어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니 긍휼을 바라고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야 하는 판국인데
어딜 감히 번제와 제사 라는 의문의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과연 율법 어릴적 부터 다 지킨것 맞어? 전재산 가난한자한테 줘 볼래?


뭐 너는 박그네와 다르다고? 최순실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실로암 망대 무너진 사건)


일본이 꼬시다고 막 한국을 비웃다가

일본판 최순실 사태가 나니까

자기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더라 말이죠.

어딜 감히 모호하고 흐릿한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왜 그런 의문의 것들이 설쳐대냐 말이죠. 십자가를 진적도 없는 것들인데.

왜 그런 것에 가치를 두냐 말이죠.

생명책에 기록 되지도 않은 헛된 것을 말이죠.

사람의 구원은 헛되거든요.

그래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저 왠수 최순실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요 저 세리가 못하는 십의 이조를 드렸고요

최순실 박그네 이명박이 싫어하는 촛불집회까지 제사 까지 드렸고

저는요 저 세리가 하지 못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요

저는요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구요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이것 보다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나게 느끼는 경우는 없거든요.

 

결국 이런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이 등장해서 이런 기도를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구름 타고 예수님이 등장해 버리면 그 어떤 누구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이죠.

짐승 구유에 태어나고 요셉의 아들 아니냐 하고 전혀 특별한 것이 없기에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기에

누가 봐도 매국노

지나 개나 다 돌던지고 욕하는 원수같은 놈

성전 짖는데 끝까지 반대한 사마리아인과 다를바 없는

세리가 등장해 줘야만 이런 기도가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무엇을 미워하는 것으로써 알수가 있고

무엇을 미워하는 지는 무엇을 가치있고 사랑하며 귀히 여기는 가를 통해서 알수가 있다 말이죠.
십의 이조를 드린다고 해서

주의 성전을 사모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예수님(십일조 되시고, 안식일 되시고, 참성전 되시고, 하나님이 되신)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내가 그로다 라고 하니까 대제사장이 크게 울부짖으면서 옷을 찢는다 말이죠. 회개를 한다 말이죠.

나 그 소리 안들은것으로 할래 왜? 거룩하지 못하니까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귀를 씻듯이 자신의 손을 씻는것처럼

나는 너 예수의 그 참람한 말 안 들은걸로 할래

왜 나는 거룩을 유지해야 하니까 그런 더러운 말이 나에게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얼마나 시온을 미워하는 마음입니까?



오늘도 시편 129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고 합니다.


(시 129: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시 129:1, 킹흠정) 『(위로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할지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들이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시 129:1, 한글킹) 『올라가는 노래, 이제 이스라엘은 말할지라. 그들은 나의 젊은 시절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시 129:1, 현대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이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내 원수들이 나를 몹시 괴롭게 하였다.』

(시 129:1, 현대어) 『[주님과 함께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 이스라엘아, 말하라.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젊어서부터 너를 괴롭혀 왔는지.』



예루살렘에서의 나의 본 모습은 결국 예루살렘을 미워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시온이 되어
미움받는 시온이 되어서 격어 보라는 겁니다.

괜히 시온 중심으로 주님의 일을 벌리는게 아닙니다.
신약으로 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실로암 소경 중심으로 돌아간다 말이죠.
틈이다 말이죠. 틈
부정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부정한 불결한 정결치 못한 소경 주제에
손마른자 주제에 어딜 거룩을 넘봐 ~~~

아 그런데 이런 자에게만 희년이 성취되더라 말이죠.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 3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망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3
고아 과부 나그네 3

그렇게 되니까 다들 미워하더라 말이죠.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왜?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 고침을 받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소경임이 들통나니까 말이죠.
희년과 무관한 주의 살과 피와 무관한 자로 들통이 나니까

이것이 성전에 올라갈때 벌어지는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된 거다 말이죠.


즉 완료성을 보여준다 말이죠.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 곧 나팔 불기 곧 찬양(사건) 이다 말이죠.

거룩이 이미 덮쳐진 겁니다.

그리고서 차이성이 드러나는데

주님 쪽에서 차이내는 것과

인간 쪽에서 차이내는 것과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차이의 차이죠.

 

항상 다윗은 출애굽을 외칩니다.

이미 훨씬 지나가버린 과거의 출애굽을 왜 외칠까요?

당연히 그 출애굽 구원 사건을 또 격게 되니까 말이죠.

곧 바벨론 포로 이고 귀환입니다.

즉 이것은 주의 인자하심인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출애굽을 언급한다? 라고 하면

아 이 출애굽의 현재판이(다윗 당시나 시편기자 당시에서의 완료로써의 약속은)

바로 바벨론포로와 귀환이다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기에 신약으로 넘어오면 곧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자 그런 입장에서 형 에서는 반드시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듯이

애굽왕 바로왕은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는 난 그런 신의 이름 들어본적 없다 라고

반드시 액션을 취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귀한 것이 있고 그 귀한 것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여주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어디서 굴러온 돌삐가 박힌 돌을 뽑겠다고 설쳐대냐 말이죠.

 

자 그렇게 한복판에 시온을 두는 겁니다. 거치는 반석을 두게 된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기다려봐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려줄게 라고 여호와가 등장하는 거죠
.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구원사건인 출애굽 전쟁인데

곧 이름 싸움입니다. 인간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 전쟁인거죠.

 

그러니 그들은 바로 여호와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고 여호와가 등장하면

반드시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말이죠.

미워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인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정작 여호와는 존재로 등장하지 않고

딸랑 이름만 있으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다 말이죠.

 

곧 여호와의 이름은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맏아들이 탕자가 아니면 미움을 드러내지 않아요

맏아들 말 마따나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것으로

정당성과 알리바이를 형성할꺼다 말이죠.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고

부자청년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정당성을 부여할꺼다 말이죠.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말씀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모습이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모습이 바로

전 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겁니다.

즉 가난한 자가 아니였다면

부자청년의 본색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다 모아 모아 보면

인간은 예수님의 등장이 아니였다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는 외침을 나타내지 않는

본색을 들통나지 않았을꺼다 말이죠.

 

오늘 본문처럼 시온을 미워하지 않았을꺼다 말이죠.

약속을 미워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았을꺼다 말이죠.

 

그런데 바벨론이 왜 이 이스라엘을 삼키느냐

왜 애굽은 이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채찍질로 등에 고랑을 파느냐?

 

이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오호 또 희한한 해석을 합니다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아닌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써

덮썩 미끼를 물어서

예수님에 대한 반발성을 표출하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미움을 나타내지 않고자

평생을 어릴적부터 율법지키는 부자청년처럼 훈련을 하고

꽁꽁 감추어서

자기자신도 그런 미운 마음이 있었던가 라고 할 정도로 최면에 걸어서

자기가 자기를 최면 걸었기에 아무도 풀수가 없게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본색을 들추어내는 방식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을 통해서

누가 봐도 버림 받은자를 그들의 코 앞에 두게 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 버림받은 예수를

내 하나 쯤이야 라고 잠깐 방심하는 그 사이에

결국 말려들어서 이 십자가로부터 들추임을 당하는거다 말이죠.

 

그것에 대해서 화를 낼게 아니라

아 맞군요 저는 죄의 문턱을 못 넘어서는 군요

죄가 나보다 쎕니다 라고 나와야 하는데

그 동안 죄를 이겼다고 장담하다가

그 한방에 훅 하고 넘어가서

이제는 아예 못 일어나더라 말이죠.

 

그래서 시온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약속이

그래서 십자가 곧 주의 인자하심이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게 더 미워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거다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더라 말이죠.

 

시온을 미워한다는 말은

주의 인애와 자비가 더 밉다 라는 거다 말이죠.

유대인으로 치면 십자가가 더 밉다 라는 거죠.

 

졸지에 이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가질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은 완전히 형 에서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죄를 못 이길정도로 죄가 나보다 쎄면

그 불뱀에게 물린 것에 불뱀을 쳐다보면 될 것인데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 붓듯이

그 말이 더 미워!!!

아니 불뱀에게 물려서 다 죽게 되었는데

불뱀을 쳐다 보라니

불뱀 쳐다 보라는 말이 얼마나 미운지 ~~~~~

 

평상시 불뱀 물려 죽임을 당해서 싸다 라는 의식이 없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말이죠.

겨우 불뱀 따위에게 물려 죽을 팔자라니

그런데 약은커녕 불뱀을 쳐다보라니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게 뭐 그리 어렵겠냐 말이죠.

그런데 안 돌아가는 겁니다.

그동안 그렇게 쉽던 그 고개 돌리는 것이 말이죠.

즉 막은 겁니다. 고개 못 돌리도록 말이죠.

 

시온을 왜 미워할까요?

왜 약속을 미워할까요?

왜 십자가를 미워할까요?

 

우리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탕자를 왜 미워하는지 그래서 아버지의 그 탕자를 용서함에 대해 왜 더더욱 화를 내는지를

 

맏아들 입장에서

가인의 입장에서

부자청년의 입장에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하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노예들을 내어주냐 라는 애굽왕 바로의 입장에서

다윗왕에게 창을 던지는 사울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말이죠.

 

앞의 시편 121편 스토커 여호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어머니께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필이면 손 마른자를 그것도 안식일 날만 일부러 골라서

그것도 바리새인 코 앞에서 고치더라 말이죠.

 

즉 어서 덤벼보시지 라고 대 놓고 불법을 자행하는

인간재판관 코 앞에서 범법을 저지러더라 말이죠.

 

그러니 멀리 떨어져서 두 패로 나누는게 아니라

항상 코 앞에서 보란 듯이 떡하니 충돌시키는 거다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차이내는 방식과

주님 쪽에서 차이내는 방식의 차이가

차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말이죠.

 

인간이 기껏 쥐고 있는 무기는

번제와 제사 이다 말이죠.

뭘 자꾸 지켰데요

 

그런데 백날 지켜본들 팥죽 한 그릇에 팔아서 소홀히 여기는 그 본색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거봐 거봐 너는 율법을 지킨적이 없잖아 라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쪽의 무기는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무기가 뭔고 하니

십자가의 죽음이다 말이죠. 곧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이것만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만이 영원하다 말이죠.

그런데 주의 인자하심을 소홀히 여기니까

즉 이 말은 상대적으로 무엇을 귀히 여긴다?

번제와 제사 곧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이 귀히 여기는 모습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맏아들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바리새인 등등이

이것을 귀히 여기다 보니

무엇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는고 하니

아버지가 전재산을 다 바쳐서 탕자를 용서하는 가난한 자에게 다 전재산을 다 주시는

그 주의 인자하심에 그만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탕자가 미워 죽는다 말이죠.

 

시온이 미워죽는 겁니다.

약속의 중심

약속의 정신이 미워 죽는다 말이죠.

 

여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시온을 없애 버리고

아벨을 없애 버리고

예수님을 죽여 없애 버리면

내가 미워하는 것이 사라졌기에

나는 이제 미움의 마음이 없는

저 깊숙이 꽁꽁 감추어버리고 꺼낼수 없게 되는데

 

더더욱 얄밉게 다시 3일 만에 살아났뿌니까

미운데 더더더 미워지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부활을 자꾸 내 몸뚱아리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만 생각지 마시고

 

실컷 마귀가 실컷 베드로를 잡아 왔더니만

어라 예수님이랑 베드로랑 둘이 짝짜꿍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는

 

부활을 더더욱 미움을 구체화 시키는 것으로 보자 말이죠.

 

그러니 모든 종교에 있는 부활은 다 엉터리인거다 말이죠.

상대적인게 없어요

사랑이 있다면 미움이 있어서 한 세트를 이루는데 말이죠.

천국과 지옥처럼

예수님과 마귀처럼

 

왜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서 그것도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주님 주님 주님을 세 번 배신한 베드로 잡아왔다고 자랑할까요?

예수님을 억수로 생각해서 입니까?

아니잖아요

마귀의 무기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번제와 제사 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에게는 없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애와 자비 이다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를 마귀가 무시했고

소홀히 여겼으며

시온을 미워하듯이

베드로를 미워한 것이

 

바로 마귀가 참으로 마귀 다운 모습을 나타낸 거다 말이죠.

이것이 부활이다 말이죠.

마귀의 참상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무이다.

 

마귀가 장악한 유대교에서 바리새파는 부활까정 믿었잖아요.

그런데 부활을 믿으면 뭐해?

번제와 제사 문제 때문에

졸지에 누구 아내가 되느냐 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말이죠.

시형제 결혼법을 지켜야 하는데 말이죠.

법을 지킬려고만 했지

그 취지인 인애와 자비는 쳐다볼 생각이 없다 말이죠.

법을 지킬수가 있어요. 행함으로 ~~~

그런데 인애와 자비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회개를 해야할 판국이다 말이죠.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알아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 인애와 자비는 눈씻고 봐도 우리에게는 없거든요.

 

그것을 없다 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애굽에게 괴롭힘 당해 보고

바벨론에게 포로 당해 봐야 아는 거다 말이죠.

아 맞네

인애와 자비는 없네

그것도 모르고 헛짖인 의문의 번제와 제사로 때울려고 했으니

누가 속겠냐 말이죠

주님이 속을 리가 있겠냐 말이죠.

 

이 주의 인애와 자비를 소홀히 여기는, 미워했음이 들통나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불뱀에게 물려야 하듯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야 한다 말이죠.

마치 애굽때에 바로왕을 강퍅케 하심으로 인해서 부르짖도록 되어 있듯이 말이죠.

 

왜냐하면 바로 그런 자들이 번제와 제사를 지키기를 귀히여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누구는 소홀히 여긴다? 이스라엘을 소홀히 여긴다 말이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의 등장이 바로 그런 이유다 말이죠.

요셉을 통해서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애굽이 알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다윗도 마찬가지

그래서 주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다시 출애굽인

바벨론 포로와 귀환을 통해서

시온을 그 동안 미워했던 마음이 들통남을 당하게 됨으로써

다시 첫사랑

다시 시온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케 만들고자

십자가를 미워했던 그 마음을

이제는 완악한 수건을 벗어서 십자가를 사랑하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다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하필이면 손 마른 손을 가진 자를 안식일날 바리새인 코 앞에서 고치시더라 라고 설명했다 말이죠.

 

손 마른자가 손이 마른게 아니라

손이 멀쩡하다고 하는 너희들이 이미 손이 말라버렸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다 말이죠.

소경이면 차라리 고치실 텐데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이사야 42장의 내용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말이죠.

(12:17,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2:18, 새번역)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 42:1-3

(12:19, 새번역)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12:20, 새번역)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12:21, 새번역)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 42:4(칠십인역)

 

흔히 장로께서 대표기도 하실때에 자주 언급하는 상한갈대는

정반대로 잘못언급한거다 말이죠.

이미 상한갈대이면 사용못해요

꺼져가는 불은 바람 속에서 곧 꺼진다 말이죠.

그런데 봐주는 이유는 이방인에게 넘어갈때까정 잠시 유보하는거다 말이죠.

이미 꺽어짐과 불꺼짐을 전제로 한 거다 말이죠.

안그러면 여전히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지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지 않는다 말이죠.

이방인은 쳐다보고

이미 꺽어졌기에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 거다 말이죠.

 

즉 이 말은 첫째아들 유대인과 둘째 아들 이방인을 통해서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 이방인

손 마른자

탕자

다윗

동생 야곱

동생 아벨을 통해서

 

이들이 미움 받음을 통해서, 미끼로써

 

저들 첫째아들 유대인

가인

형에서

부자청년

성전에서 기도하는 십의 이조 드렸다는 바리새인

등등이

 

이방인에게 복음이 구원이 넘어가게 하기 위해서

상한갈대를 안 꺽고 있다가

드디어 이방인을 소홀히 여김으로 인해서

미워함을 통해서 싹 넘어가도록 함과 동시에

상한갈대를 꺽어버리더라 말이죠.

꺼져가는 심지를 꺼버리더라 말이죠.

 

얼마나 그 동안 참고 참았겠냐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을 받을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가 등장할때까지 말이죠.

드디어 등장하니까

그 동안 비기도 싫었던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 자를 확 꺽어버리고 확 꺼버리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의 죄가 자기 죄냐 부모죄냐 라는 상한갈대 속성 꺼져가는 심지의 티를 팍팍내더라 말이죠.

그렇게 봐주고 봐주고

상한갈대를 안 꺽고 있다가

주님이 이 실로암 소경을 고치시니까

드디어 본색이 드러나서

어 너 시온 미워했지? 알리바이 형성

눈물을 주의 병에 드디어 담았다 앗싸 하고

예수님을 미워한 증거를 잡은 그 내용의 실체

곧 너 누구 제자냐 난 모세제자야 어디서 신참이 여기서 고참한테 까불어 라는

주의 인자하심을 무시하고 미워하고 소홀히 여기는 증거를 잡음으로써

 

장자권을 빼앗기듯이

상한갈대를 실로암소경에게 주의 인자하심이 덮치기 전까지는

안 꺽다가 잠시 유보하다가

이제 주의 인자하심이 덮치니까

상한갈대를 확 꺽어 버리더라 말이죠.

 

? 오늘 시편 129편의 용어로 치면

시온을 미워했기에

 

안 미워할려고 안 미워할려고 아무리 애쓰고 힘써고 해도 안돼

마치 늑대가 아무리 천년동안 피를 안마시듯이 도 딱아서

드디어 3일 뒷면 인간으로 부활할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가장 맛있는 인간을 코 앞에서

그것도 자신의 사랑을 배신 때린 그 인간을 드디어 복수하듯이 잡아먹어서

하루 놔 뚜고 잡아 먹는 바람에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하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처럼

모든 종교의 구원 개념은 다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얼마나 시온을 미워하는지?

애굽이 피라미드 종교 아니냐 말이죠.

부활 종교 아니냐 말이죠.

3일 뒷면 신으로 환생하는데

태양의 아들로 환생하는데

하필이면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인 이스라엘을 잘 못 만나는 바람에

태양의 아들이고 뭐고 다 뿌서지더라 말이죠.

 

유대교도 마찬가지

그래서 더더욱 번제와 제사로 감추고 감추었는데

천년 동안 늑대발톱을 도 닦듯이 감추어 감추었는데

졸지에 시온이 등장하는 바람에 산통 다 깨지듯이 확 들통나 버려서

 

그럼 들통나게 해 주신 주님의 인자하심에 고마워해야하는데

그 대표자가 바로 사도바울이지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러나 왜 나를 들통나게 하냐고 더더욱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완고함 때문에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가 버리는

둘째 아들에게 넘어가버리는

나의 번제와 제사를 무시하는

그래서 시온을 미워하는

약속을 미워하는

 

서로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하는

 

이 상황이

완료 되었기 때문에 나타는 증상으로써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로 표현되었다 말이죠.

즉 구원사건이다 말이죠.

십자가 사건

 

그러니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이 의문의 반복인 제사와 번제를 멈출길이 없고

동시에 시온을 미워하는 마음을 들추임 당할 길이 없는거다 말이죠.

 

그래서 이 십자가가 고맙죠

저런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니 말이죠.

 

아 눈치채셨나요?

맞습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사고방식은 다 마귀적이네????

네 바로 그럽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모습이다는 거죠.

교회가 졸지에 강도의 소굴인 마귀 본부인 이유입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의 모임인 사단의 회이다 말이죠.

 

그럼 다니지 말아야 하나?

안 그런 곳 있나?

없지요.

다니면서 아 우리가 시온을 이렇게 무시하고 미워하고 있구나

그것을 들통내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그저 그저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시면 됩니다.

 

뭘 해도 다 죄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십자가의 용서를 베푸심에 있어서

마귀가 왜 모든 것을 장악해서

이 십자가를 미워하고

왜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지를

왜 우리의 눈은 이 의문의 반복 뿐인 번제와 제사만을 주장하는 세상에 갇혀 있는지를

우리가 소경으로써 고쳐달라고

번제와 제사는 나를 못 고치지만

주의 인애와 자비는 나를 고칠수 있다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목사도 가족도 심지어 번제와 제사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흘린 것이 아니니까 말이죠.

 

이것이 시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히 12:22, 개역)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계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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