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하는 자들아! 입술로는 존경하나, 손에는 피가 가득하도다 (1,11-15)

 

보이러 오니,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으로, 기도를 듣지 아니하리라

 

 

(15:7, 개역)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15:8, 개역)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7, 새번역)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15:8, 새번역)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 29:13(칠십인역)

(사 29:13,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5:9, 개역)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5:10, 개역)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5:11, 개역)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5:12, 개역)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15,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5:1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5:17, 개역)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5:18, 개역)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5:19, 개역)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15:20, 개역)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1: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개역)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4, 개역)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11,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12, 새번역)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13, 새번역)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14, 새번역)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15, 새번역)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모두다 가짜인 이유가 바로 보이러 오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즉 더러운 줄도 모르고 깨끗한 척 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더러운줄 알아라 라는 것 조차도

남겨진 씨 때문에 지적하시는 것이지

과거의 외식이 쌓여져서 보이러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뭘 해도 다 죄이다는 겁니다.

? 남겨진 씨 때문에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하는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씨알도 안 먹히는 이유가 바로

미래에 남겨진 씨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로 지적 받는게 아니라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속성을

더더욱 거리를 벌려 놨기 때문에

이사야의 외침은 어 누구한테 하는 소리이지 라고

자기와 연관성이 없다고 본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계시록 1장부터 나타난 일곱교회와 사단의 회 와의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의 4 복음서를 다시 생각해 보니

 

이미 일곱 교회가 정해져 있고

이미 사단의 회가 정해진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는 점입니다.

 

계시록에서 미래에 앞으로 장차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몇 년도가 아닌

 

이미 예수님의 활동 속에서 다 나타났고

다 두 패로 갈라진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럼 그 예수님의 활동은 지금도 역사 하신다는 점에서

이미 정해진 상태로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사단의 회의 모습이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일곱교회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일곱 금촛대 사이로 지나가는 인자를 볼 때

혼인 잔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것도 엽기적인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벌리시는 임금 비유 말이죠.

 

잔치날이 그야말로 엽기적인 살인이 벌어지는 심판날이였더라 말이죠.

주님의 거룩을 무시했으니 말이죠.

 

또 잔치에 초청 된 자들 또한

예복 곧 그리스도의 옷

거룩한 흰 옷을 입지 않은 자는 쫏겨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잔치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결혼 이라는 사랑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일곱교회가 주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 되었다는 것은

결혼에 대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구원의 손이 오른손이 아니다 말이죠.

 

왜 결혼의 의미까지 이야기 하느냐 하면

바로 사단의 회

 

곧 마귀 때문입니다.

 

마귀가 격동하고 견디질 못하는 구원은

바로 결혼의 의미이다 말이죠.

 

괜히 베드로에게

그것도 반드시 부정성을 미래에서 붙였다 라고 했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그냥 베드로가 아니라

 

그 베드로 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머슴아 끼리 이런 표현 쓰면 낯 간지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머슴아끼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남녀 개념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남자 여자 자체가 없는데요 뭘

 

그럼 뭡니까?

 

피조물과 창조주의 결혼이다는 겁니다.

 

너무 오바 하는 거 아니냐 라굽쇼?

 

제가 남자로써 이 오글 거리는 표현을 자기 디스 하듯이 쓰겠습니까?

 

역사물은 남자니 여자니 우기지만

묵시물 곧 묵시가 낳은 피조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새피조물의 입장인 묵시의 시선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주 아주 당연한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존재 라는 역사개념이 붙어버리니까

이 기능이 뭔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존재와 기능의 차이를 우리는 봐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혼인 잔치 곧 결혼의 차원

최고의 잔치의 의미이지

 

딸랑 구원이 아닙니다.

만약 구원인데 남자로써 구원을 바랬는데

여자가 되었다 구원 취소 반품 처리해 달라고 아우성일 겁니다.

 

실제로 유대인이 그랬거든요.

사두개인이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보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시형제 결혼법에 의하면 너무 너무 더럽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미래완료인 묵시에서 오는 사랑은

부정한 것을 만질수가 있지만

 

역사의 신 곧 하나님이라는 우상은

부정한 시체를 만질수가 없듯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괜히 이렇게 표현한게 아니라

바로 너희 자신들이 우상이다는 겁니다.

 

? 부정한 시체를 못 만지는 제사장 레위인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하니까 말이죠.

누가 네 이웃의 형제냐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단순히 종교에서 말하는

666 이라는 모자라고 부족한 거룩에서 말하는 구원과는 차원이 틀려요

 

완벽한 거룩은 계시록 1장에서 살펴봤듯이

 

바로 결혼 곧 사랑이다는 겁니다.

 

구원은요 마치 9명의 유대인, 곧 이스라엘 사람 9명 문둥병자처럼

깨끗하게 고침 받는 차원에 머물 듯이

뭔가 고통에서

저주에서

또는 심지어 지옥에서

애굽에서 건짐 받는 차원으로 구원을 언급하잖아요

원수로부터 구원 이라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구원에 머물지 않아요

 

사랑의 차원으로 결혼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딸랑 고침받고

구원받고 자기 갈 길 가버리는 9명의 문둥병자와 달리

 

여기서 중요합니다.

한 명의 문둥병자 한 명이 작다는 의미 보다

부정하다는 의미에서

이중 부정

곧 사마리아 인이다는 겁니다.

 

이중적인 부정이지요.

딸랑 한 명이라는 소수자와

거기에다가 이스라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 말이죠.

 

이게 왜 그렇겠습니까?

어떤 사단의 회는 이 부정성을 자꾸 역사로 보고 있어요 글쎄

 

그렇다면 이 사람의 구원관도 십자가를 깨끗한 구원처럼 여기게 되니까

신학이든 교리든 모조리 다 거리끼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막살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깨끗하게 산다고 여기겠지만

이미 막살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마치 안식일 지킨다는 자체가 안식을 어기는

쉬지도 못하기에 법을 지키는 겁니다.

 

대부분 이 표현에서 방종을 주장하고 있다고 우기는데

그게 종교꾼들의 666 매매의 모습이다 말이죠.

 

방종을 못하게 해야 666 이라는 종교가 매매가 됩니다.

자유케 못하게 해야 말이죠.

 

방종 또는 더러움 악행을 매매 할 수가 없다는 거죠.

막살기를 매매 곧 소통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강도만난 자를 더럽다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 아닙니까?

?

부정하거든요.

 

이것이 유대인의 하나님관입니다.

마귀죠 뭐

 

이미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의 실체를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다 드러내셨거든요.

 

돌이 떡덩이 되게 하는 하나님 곧 경제와 종교죠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도 안 다치도록 천사들이 두 손을 받쳐주는
곧 존재(사는 이유는 딱 하나 이것 때문, 선민의식도 구원관도 다 이것 때문)
기적종교(딴 종교 보다 최고의 종교라는 정치)

그 다음에 온 천하 만국을 다 줄테니 절 하라

이것은 정치인데 정치란 누가 왕이냐 라는 거죠.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이런 천하 만국을 받은 왕과의 대조를 통해서 보여주시는데

바로 애굽왕과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대조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 또 로마 치하 속에서의 왕과의 대조

특히 유대인의 왕 이라고 팻말로 조롱하고 비아냥 거렸던 모습 등등

유대인의 왕 꼬라지 참 좋다

저게 무슨 유대인의 왕이고? 라는 의미 아니냐 말이죠.

 

즉 가룟유다가 가룟유다 혼자만의 의식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의 사고방식이 바로 가룟유다의 의식이다는 겁니다.

 

너는 메시야가 아니야

너는 구원자가 아니냐 라는 의식으로 팔았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시선이

가룟유다와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미리 밝혀 주신거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그때 2천년 전의 사건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벌어지고

앞으로도 벌어지는

이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다 말이죠.

우리의 어두움을 들추어내시는 ~~~~~

 

우리의 부정함을 만지신다는 겁니다.

? 강도 만났기 때문에

마귀에게 장악 당했기 때문에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냐 라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과거가 쌓여서

즉 시간이지요

역사죠

그런 족보에서

 

오히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당겨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사야가 성령을 받고

즉 환상을 봄으로써

 

이 이스라엘 속에서

마귀가 다 장악한 이스라엘 속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마귀가 다 장악한 유대인을 상대하듯이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관 속에서 새로운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때에

똑같이 예수님처럼 당하는 겁니다.

?

남겨진 씨 때문에

 

그래서 이사야가 왕의 조카 쯤 되는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애굽의 왕자

바로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버리고

부정함 속에 들어가듯이

 

강도 만난 자를 만지듯이

피 흘리는 부정한 시체를 만지듯이

 

이사야가 왕의 집안의 원수로써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이다 말이죠.

 

뭐 화평? 뭐 구원?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기생라합처럼

이스라엘의 땅과 전재산을 이 예수님께 팔아 넘겨버리는

이 부정성 이라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더라 말이죠.

 

다윗이 시편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듯이

바닥을 다 뜯어내는

베드로를 물에 빠뜨리듯이

선지자들이 막 마 주 찻뿌까처럼

물에 막 빠뜨리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는 거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이미 다 완료된 새이스라엘이라는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새 계시의 주인공을 보라는 겁니다.

 

?

사랑이니까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추상적입니까?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허걱 자아가 날라가 버리더라 말이죠.

 

마치 풍선에 바람을 넣으면 점점점 부풀어 올라서

터질까 말까 하는 그 조바심에 조심 조심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더 불어야 하듯이

자아를 그렇게 다루게 하는 것이

 

마귀라는 사망의 왕노릇이다 말이죠.

 

얼마나 조심 조심 챙깁니까?

그런데 십자가 라는 바늘이 못땟게

풍선을 펑 하고 터트리니까

 

더 이상 자아라는 것을 챙길 것이 없다 말이죠.

 

아니 왜?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자아를 챙겨라 아닙니까?

예수를 이용하든

하나님을 이용하든

메시아야를 이용하든

 

자아를 챙기는데 있어서

너 예수 과연 그 조건에 맞는지 함 보자 라는 거 아니냐 말이죠.

과연 나 라는 자아를 챙겨줄 자인지?

나 배고플 때 너 어떻게 해줄래?

나 슈퍼스타 지저스크라이스 슈퍼스타 되고플 때 너 어떻게 해줄래?

나 왕이 되고픈데 너 어떻게 해 줄래?

 

이거다 말이죠.

 

이런 사고방식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간다 말이죠.

아무리 교회 다녀도 이런 의식으로 살아요

그런데 지금 이사야 때가 바로 이렇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말이죠.

가버나움에 아무리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줘도

반응이 없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 하여도 울지 않는

 

각자 다 따로 따로

 

이것이 마귀가 장악한 세계이다는 겁니다.

구원도 따로 따로

개인의 구원을 바라고 있지

 

강도 만난 자가 구원 받는 꼴은 못 보겠다는 의식이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

오늘날로 치면 모든 종교인들이다 말이죠.

 

666 이다 말이죠.

 

이것 만이 매매 되고 소통 된다 말이죠.

 

자아 곧 사람 만이 매매가 되는 겁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죠

개개인 하나 하나가 왕으로써 말이죠.

애굽의 왕

느부갓네살 왕

하나 하나가 짐승이다는 겁니다.

자아 가 말이죠.

 

여기에 이 늑대 소굴에 어린양이 뛰어드셨다 말이죠.

참 무모하시죠.

 

그 늑대를

자기 양으로 바꾸시겠데요 글쎄 ~~~~

 

이전 것 늑대는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 자기 양이 되었도다 ~~~~

 

이것을 시도하시는 겁니다.

 

무엇으로?

십자가 라는 부정함으로

 

그래서 졸지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원수로써 투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했지요?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교훈이나 지혜나 뭐 상식 등등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이다 말이죠.

 

천국이라는 유대인들의 보편성에

또는 구원이라는 선민으로써의 유대인들의 보편성에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만드는 단절로써의 구원과

단절로써의 천국을 이야기 했을때에

 

그때 막혀버린 것에 대한 반발

탁 걸려 넘어져 실족케 됨에 있어서의 반발

바리새인에게서는 이단 사상을 퍼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데서 오는

막힘 단절 거리끼는 걸림돌에 대한 반발

 

이 모든 것이 지금 이사야가 졸지에 남겨진 씨로 인해서

미래에서 현재로 받아버리니까

선물 곧

단절이라는 선물인 성령 종말의 영을 받아 버리니까

 

이제 끝을 증거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바닥 뜯기 시작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너희들은 소돔과 고모라 이다 라고 말이죠.

아니 왜?

이사야가 소돔과 고모라이거든요.

아니 왜?

남겨진 씨 때문에

이유 없어요 무조건 미래완료에서 볼때에

다 미흡한 것들이다 말이죠.

 

그 미흡한 것들 싫타

내 마당만 밟는다

 

졸지에 어제까지는 아무 말이 없다가

갑자기 이사야가 성령을 받고 난 뒤로 부터는

절기도 미워하고

너희들의 기도도 안 받겠다고 하고

왜 어제는 왜 안그랬느냐 말이죠.

 

앞 뒤가 안 맞잖아요.

어제도 그럼 받지 말고

그저께도

점점점 처음부터 그러지 아니 이제 와서 왜?

 

이유?

원인?

있을까요?

없어요

 

과거나 시간이나 공간

역사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오로지 미래의 남겨진 씨 때문에

졸지에 이사야는 부족하다는 것들을 다 바닥 뜯고 있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말이죠.

보라 새것이 되었기에

 

내가 새것이 되는게 아니라

이사야가 새것이 되는게 아니라

 

즉 남겨진 씨가 새것이 되었기에

 

졸지에 이사야는 이전 것으로써 배신을 때리는 기생라합처럼

졸지에 부정함이 덮쳐져서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이 씌여져서

졸지에 이스라엘의 바닥을 뜯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세의 정통을 따른다 라는 둥

다윗의 정통을 따른다 는 둥

그런거 일체 통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다 뜯어내더라 말이죠.

 

물론 아무 변화 없이 이사야가 죽지요

 

예수님도 죽는 판국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닥을 뜯기던가요?

지금 현재 2017년에도 이스라엘은 멀쩡히 있는데?

다시 탈환해서 말이죠.

바닥 뜯고자 했던 예수님만 죽었지

변한게 없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데 글쎄 ~~~~

~~~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냐 말이죠

 

보이지 않는 길을 뚫고서 본인 혼자 떠나갔어요

 

갑자기 한 동안 뜸했었지 라는 노래가 생각났는데

정작 비숫한 리듬의 선녀와 나뭇꾼의 후렴구가 저 멀리 떠나갔다 라는 가삿말이 나오네요

그 후렴구 단어만 생각나고

노래는 한 동안으로 ㅋㅋ 둘이 겹쳐져 버렸는뎅

 

아무튼 선녀를 찾아주세요 아니 예수님을 찾아주세요

찾고프냐? 네 찾고픕니다.

 

십자가를 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불가능하지요.

 

주님 쪽에서 미리 가 계셔서

작살을 날려

나에게 꼿아야

그 작살에 의해 당겨 가는 것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런데 이 작살에

그 미래완료에서 쏘는 작살에 맞은 자가 바로 이사야 이다 말이죠.

 

그러니 남들이 외치지 못하는 희한한 말을 하는 겁니다.

자기가 소돔과 고모라 라는 둥

자기가 소돔이면 고모라 이면

니 혼자 소돔과 고모라 했뿌라 말이죠.

자기가 거짓선지자 라는 둥

자기가 거짓선지자 이면

니 혼자 거짓선지자 해라 말이죠.

 

아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를 걸고 넘어지는 겁니다.

자기 혼자 소돔과 고모라 안하겠다고

같이 소돔과 고모라 되자 라고

같이 거짓선지자 되자 라고

같이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이 되자 라고

같이 강도 만난 자가 되자 라고?

 

아니 왜?

아니 왜 자꾸 부정한 존재가 될려고 하느냐???????

 

부정한 존재가 될려고 하는게 아니라

부정한 기능으로써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하기 위해서

강도 만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글쎄

 

이게 무슨 소리냐 말이죠.

존재가 알아 먹도록 해 달라 말이죠.

 

존재는 절대로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먹는다 말이죠.

 

막살아라 라는 말을 존재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역사가 낳은 피조물인 존재는 외계인의 말로 들릴 뿐이다 말이죠.

 

역사가 알아 먹는 언어는 하라 하지 말라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성경 전체는 하라와 하지 말라 로만 적혀 있다 말이죠

? 존재는 다 걸려 넘어지라꼬

 

그런데 작살 꼿힌 자에게는

성경이 하라 하지 말라가 전혀 안 보여요

존재가 아니기에

역사가 낳은 피조물이 아니라

 

묵시가 낳은 새것이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가 전혀 안 보여요

 

그럼 뭐로 보이느냐?

 

사랑으로 보인다 말이죠.

 

어떤 사랑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

 

그러니 나의 하라 하지 말라는 전혀 안 보이고

주님의 행함이 있는 믿음

주님의 숙제 밖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우와 이런 일도 하셨구나

저런 일도 하셨구나

 

주님의 하라 하지말라 밖에 안 보이더라 말이죠.

주님의 선과 악으로 구분 시키는 일만 보이더라 말이죠.

인간의 선과 악으로 구분 시키는 그 엉터리와 비교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선악성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투사 이다 말이죠.

인간 자아의 자기자신의 선악을 투영한 거다 말이죠.

성경 문자가 더더욱 보채요

하라 하지 말라로 선악을 자꾸 자꾸 보챈다 말이죠.

 

그런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선악으로 인해 곧 십자가로 인해

다 무너져야 할 판국이니

 

이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너 몸을 헐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몸을 헐레 글쎄

이 거룩한 몸을 허물겠데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매국노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는

음란하지 않는

절대로 막사는 법이 없는 이 몸을

 

십자가에 못 박겠데 글쎄 ~~~~~

 

겨우 저따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사야 몸 뚱아리로

이 거룩한 이스라엘을 헐겠다고?

그리고 다시 3일 만에 짖겠다고?

 

~~~~~~~~~~~~~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데

무엇을?

 

 

절대로 막살지 않았고

소돔과 고모라와의 거리를 더더욱 벌렸꼬

심지어 강도 만난 자의 시체 조차도 만지지 않았는데

 

우리 끼리는 다 그것을 소통시켰고 매매로 주고 받고 다 했는데

 

딸랑 니 혼자 뭐?

그것도 술꾼에 먹보에 세리와 강도의 친구인

너 딸랑 혼자인 예수 너가

뭘 믿고 까부냐 말이죠.

 

가장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혼자 예루살렘 보시고 우신다 말이죠.

 

아무도 그런 자 없거든

저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하는 판국에

 

나사렛 출신이

? 예루살렘을 보고 울어????

 

거룩한 성을 보고 울어 ~~~~~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다 무너지는 애굽처럼 초토화 되니까 말이죠.

 

혼자 그렇게 본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런일들은 안 벌어졌다 말이죠.

한 참 뒤에 70년 이였던가?

예루살렘 성전만 혹시나 벽돌 하나 하나에 금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그랬고

예루살렘 전체 도시가 그런적 없다 말이죠.

뭐뭐 그렇게 따지면

안 그런 국가? 안 그런 민족 어디있겠냐 말이죠.

조선도 곧 대한민국도 일제치하에서

지금도 그런 민족들 얼마나 많냐 말이죠.

다들 있는 역사이고

다들 있는 사건이다 말이죠.

 

뭐가 특별나게 달라서 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냐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만

혼자의 눈에만 그렇다 말이죠.

 

666을 매매하고 있는 인간의 눈에서는 아무리 집단과 다수를 이루어도

보이질 않을 뿐만 아니라

소통도 될수 없는 단절만 소동만 야기한다 말이죠.

 

예루살렘 거주민에게 그렇게 외쳐 보세요 어떻게 되나?

다수 에게 먹혀들 이야기가 아니다 말이죠.

 

그 딸랑 혼자만의 시선이

졸지에 작살이 이사야 에게 꼿혀 버렸넹

바로의 공주의 아들

애굽의 왕자처럼

이사야는 삼촌 이스라엘의 왕 집안의 원수로써

출애굽사건을 벌렸던 것처럼

출이스라엘 사건을 벌리고

예수님처럼 출예루살렘 사건을 벌리듯이

오늘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는 출교회 사건을 벌려야 하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져서

서로와 서로가 십자가로 인해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뭐뭐 어떤 교회처럼 부자세습 목회세습 때문에 싸우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것은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6, 새번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 7:6

 

원래 갈라져 있는 자는 가족이 아니다 말이죠.

가족인데 가르겠다는 겁니다.

가족인데

 

원수로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해도 다시 돌아가더라 말이죠.

가족을 찾고자 ~~~~~

애굽이 낳은 자식이다 말이죠.

 

애굽에 탁란 시켜서

새로운 어미가 부르면

 

졸지에 가족이 원수가 된다 말이죠.

이유 없어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원수이지

 

남겨진 씨 때문에 원수이지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야 하고 누가? 이사야가

졸지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말이죠.

그냥 부정성이 아니다 말이죠.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의 부정이다 말이죠.

남들이 아닌 이스라엘의 부정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본인들의 처음자리가 이 부정성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라는 의미가 뭡니까?

 

바로 예수님의 원수가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라는 겁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원수로써의

십자가의 원수요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원수의 자리에

이사야가 놓여져서

이 십자가를 외치는 겁니다.

 

말이 통할까요?

말 되는 소리가 되어서 소통이 될까요?

 

뚝뚝 끊어지는 단절만 새록 새록 또렷해 지는 겁니다.

 

그러면 저들은 더더욱 절기와 기도와 십의 이조와 이레에 두 번 금식과

토색하지 않는 삶과

막살지 않는 삶과

 

이런 것으로 더더욱 무장하고 방어 한다 말이죠.

 

그래야 죽어요

 

그래야 이길수 있다 말이죠.

 

누구를? 예수님을 드디어 죽일수가 있는 겁니다.

 

심지어 로마와 손 잡고

자기들 손에 피 안 묻히는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자기 손에 피 묻히면 율법 어기니까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살인으로 다 모아지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결국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요 원한풀이요 한풀이요 살인의지 이다 말이죠.

이런 잘난 나의 믿음을 안 받아주겠다고??

맏아들이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하니까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우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새로 씌여지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탕자만 미웠는데 말이죠.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에게 갈 줄 누가 알았으리요?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탕자가 나음을 입을 줄 누가 알았으리요? ~~~~~

 

이 사랑에 마귀는 미쳐버리는 겁니다. 격분을 해요

베드로에게 격분 안 합니다.

베드로를 신부로 삼아 버리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부드러운 음성에 그만

견디질 못하고 격분한다 말이죠.

 

가인이 그래서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의 일방적인 아벨 편파 사랑에 말이죠.

 

안색이 변해서

살인을 촉발하게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랑이냐 말이죠.

살인을 촉발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오늘 나오는 유대인 이스라엘은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또 한다고 하니까 지키는 법처럼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하시는 그 사랑을 누리는

그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보이러 온다는 겁니다.

보이러 온다는 표현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보이러 온다는 표현이 왜 이상하게 보이냐 하면

주님 혼자만의 시선이다 말이죠.

 

그럼 누가 보이러 오지 말아라 라고 누구 하나 충고해 준다면

그것을 가지고 토론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를 들여다 보고

고치고 바르게 인도해 주는 그런 분위기를 주님이 조성해 주시면 얼마나 좋지 않냐 말이죠.

 

그런 아무도 보이러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죠.

모두다 그런 생각이 일체 없는데


딸랑 혼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혼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듯이

 

주님 혼자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처럼

찔찔 우시듯이

왜 내 마당 밟노

나는 눈을 가리고

나는 귀를 막고

안 볼란다 안 볼란다 ~~~

마치 인간처럼

인간도 그런 애처럼 굴지 않는데

 

왜 소극적으로 하나 하나 일일이 안 가르쳐 주고

단 하나도 따지지도 않다가

 

오로지 딸랑 한 명

저 이사야 만을 통해서

이런 시선으로 갑자기 훅 들어와서

어제까지도 말이 없다가

이사야의 등장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 바닥을 뜯어낼려고 하느냐 말이죠.

 

이것은 누가 봐도 애굽으로 보는 시선이다 말이죠.

 

당연히 그 동안 말도 안하고

갑자기 내 백성 내 놔라 하고 훅 들어오는

애굽을 대하는 태도이지

 

이스라엘을 돌이키고자 하는 목적이 처음부터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제 애굽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런 과거가 아니라

이스라엘도 애굽으로

 

아니 첫 아담에게 속한

이전의 것

심지어 해와 달도

모조리 처음 것은 다 지나가게 하는

 

이 남은 씨의 등장으로

우주 천지 만물 모든 피조물 까지도 확대 시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부터 시작 하시더라 말이죠.

 

자 그럼 시작했다면

우리 눈에 뭔가 변한 것이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해도 여전하고

달도 여전하고

이스라엘도 여전하고

 

뭐 하나 눈에 바꾼 것이 없다 말이죠.

 

혹시 바뀐게 있다 라고

본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 바뀐 것인지 알려주세요

 

물론 딱 하나는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당사자 예수님만 사라졌고요

그렇게 말한 이사야도 사라졌고요

말이 사라졌다이지

죽었다 말이죠.

 

그들이 예수님 혼자 부활하셔서

예수 안에 거하고 있다고 할 뿐이지

 

그 믿음의 언어들은

종교 언어가 아닌

종교는 돈이 되지만

그런 믿음은 종교들도 거부하기에

왜 돈이 안되기에

명땡교회 보세요 돈 때문에 저러지

돈 없어 봐요 부자세습 절대로 할 이유가 없잖아요.

믿음은 소통이 안된다 말이죠.

 

아니 절대로 소통 안 할래 라고

 

저 멀리 떠나갔어요

 

선녀를 찾아주세요 ~~~

 

다 떠나더라 말이죠.

 

작살에 꼿혀서 휙 휙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휙 휙 다 사라지더라 말이죠.

 

남아 있는 것은 이 성경 말씀 밖에 없다 말이죠.

 

내가 읽으면 하라 하지 말라 밖에 안보이는

믿음의 세계가 아니라

종교의 세계만 소통 될 뿐이지

사라진 선녀 안 보인다 말이죠,

 

그런데 이 말씀이 나를 읽어버리면

졸지에 이 이사야 선지자처럼

자아가 삭제를 당해서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있다

 

환상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빨간약 묵을래 파란약 묵을래

 

이런 취사선택권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방금전까지 다윗처럼

우시더니

금식하시더니

회개하시더니

기도하시더니

 

왜 지금을 씹고 뜯고 먹고 마시고 즐기느냐?

 

처음 것이 다 지나가는데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잡을 수가 없다 말이죠.

? 보라 새것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알파와 오메가 때문에

남겨진 씨 때문에

 

기존의 것을 다 날려버리는 겁니다.

이사야는 집안 식구 가족으로써

졸지에 원수로 변해

배신자로 변해

기생라합처럼 민족 팔아 먹고

가족 팔아먹고

국가 팔아먹는 매국노로써

가족의 원수로써

부정한 창녀로써

기존의 이전 것

절기든 뭐든 다 뜯어내는 겁니다.

 

누가 듣겠냐 말이죠.

아니 아예 듣지 말라꼬

누가 믿겠냐 말이죠.

아니 제발 좀 믿지 말라꼬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오른 손이란 말은

상대적인 왼손으로 곧 부정한 손으로

오른 손의 기능에 의해서

사로잡히는

부정성의 기능을 찾는 오른손이다는 겁니다.

 

즉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표현 자체가

신랑으로써

결혼 대상자 인

부정한 신부를

자신의 정결함으로 뒤짚어 씌움에 있어서

진짜 부정한 악마가 반발하고 격분하고 견디질 못하는

제대로 된 정결함

완벽한 거룩함을 입히심이다 말이죠.

 

아 마귀가 반발하지 않는 거룩이 무슨 놈의 거룩이겠냐 말이죠.

 

이렇게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결혼

혼인잔치를 벌리시고자

이미 완료 되었음을 선언 선포 하심으로써

나팔 불면서

 

자신의 신부를 찾듯이

신랑은 자기 신부에게 작살을 꼿아

이제 신부는 신랑을 찾듯이

 

이 둘의 공명으로써 이 세상을 초토화 시키는

이 전 것을 지나가게 하는

처음 것을 지나가게 하는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이러 갈 뿐이고

우리의 손은 피가 가득할 뿐이고

우리의 기도는 들리지 않는 꽹과리 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로 인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피로 깨끗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즐기면서

이 십자가를 노래하는 겁니다.

 

이 전 것을 지나가게 하는

처음 것을 다 지나가게 하는 이 십자가를 ~~~~~

 

다 이루었도다 외치신 선언 때문에

부정한 옷을 입고

죄인 중의 괴수 복을 입고

그 죄수 복에 발린 피를 외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라는 부정한 얼룩을 찍으면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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