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깨끗이 씻어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어 지게 할 것이다 라는 관계성 ( 1:25-31)

 

종말의 기도,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주의 이름 (한나, 마리아의 기도)

 

(1:25, 개역)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1:26, 개역)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1:27, 개역)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1:28, 개역)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1:29, 개역)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1:30, 개역)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1:31, 개역)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1:25, 새번역)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1:26, 새번역)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1:27, 새번역)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1:28, 새번역)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님을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1:29, 새번역)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1:30, 새번역)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1:31, 새번역)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1:25, 공동) 그리고 손을 돌려 너의 찌꺼기는 용광로에 녹여내고 납은 모두 걷어내어 너를 순결하게 하리라.

(1:26, 공동) 내가 너의 재판관들을 그 옛날처럼 다시 세워주고 너의 고문관들을 처음과 같이 다시 일으켜주리라. 그제야 너는 '정의의 도시, 성실한 마을'이라 불릴 것이다.

(1:27, 공동) 시온은 그 기틀이 바로잡히고 주민은 마음이 바로잡혀 다시 살게 되리라.

(1:28, 공동) 패역무도한 죄인들은 모조리 거꾸러지고 야훼를 저버리는 자들은 멸망하리라.

(1:29, 공동) 너희는 상수리나무에 기대를 걸었던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그렇게도 좋아하던 동산에 실망하리라.

(1:30, 공동)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같이, 물 없는 동산같이 되리라.

(1:31, 공동) 힘센 사람은 삼오라기가 되고, 그가 만든 것은 불티가 되어 다 함께 타는데도 그 불을 꺼줄 사람 또한 없으리라."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원수가 된 이스라엘에게 이사야가 외칩니다.

어찌하여 신실했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냐 라고 말이죠.

 

이방나라를 보고 외치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보고 외친다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를 보고 외친다 말이죠.

말이 기독교이지 종교 곧 666이다 말이죠.

 

그것도 자기 삼촌이 이스라엘 왕 임에도 불구하고

그 왕족의 혜택을 실컷 누리다가 갑자기

원인 없이 말도 안되게

갑자기 이사야가 졸지에 원수가 되어서

자기 가족 집안 식구의 원수가 되어버린다 말이죠.

 

누구처럼? 바로의 공주의 아들

왕자였던 모세처럼 말이죠.

졸지에 자기 삼촌이 애굽처럼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바벨론으로 피신해 탁란하는 식이다 말이죠.

 

이사야는 마치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기생라합처럼

갑자기 이 이스라엘을 예수님께 몽땅 팔아넘겨버려서

어서 심판해 달라고 외치는

 

오로지 애굽 곧 지옥을 무너뜨린 그 여호와의 이름에만 간담이 녹아서

40년 동안 벌벌 떨면서 기다렸던 그 여호와만을 쳐다봤던

기생라합 처럼

졸지에 자기 민족 자기 친족 자기 국가 자기 신을 배신하고서

몽땅 여호와께 팔아넘기듯이

 

지금 이사야가 딱 그런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바닥을 뜯어내버리는 겁니다.

이사야의 눈에는 더 이상 이스라엘은 국가 체제라든지

그런 것들이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의 심판만을 미리 앞당겨 보고서

혼자 딸랑 혼자 이런 외침을 벌리고 있습니다.

 

아니 소돔과 고모라에서 외치면 우리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말이죠.

즉 말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 최고로 소돔과 고모라와의 거리두기 구분짖기를 가장 멀리한 이스라엘을

지금 창기 라고 살인자들이라고 강도라고 외친다 말이죠.

 

이런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외치시면서 소와 양을 쫏아내시고 상전을 엎어버리시니까

그들이 과연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살인자로 졸지에 변해요

그러니 말씀이 맞잖아요.

예루살렘이 창기가 맞잖아요.

소돔과 고모라 맞잖아요.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지금 이사야의 모습이 예수님처럼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쫏아내듯이 하니까

이사야를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한마디로 죽고 싶어서 재촉하는 모습과 같다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 가장 깨끗한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 아니냐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 아닙니까

개혁주의자들

정의를 부르짖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진보들 좌파들

정의사제구현단들 이런 자들 아니냐 말이죠.

 

그들이 자부하는 것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저 최순실 같지 않음을

저 오공삼 같지 않음을

저 여자 박그네 no철수와 같지 않음을

저 명땡교회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이죠.

 

당연히 저 세리의 더러움과 간음 토색과의 거리를 가장 멀리 했으니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보고 있고

다들 그것을 인정하는 판국에

 

유독 예수님 딸랑 혼자만

인간 중에 가장 깨끗한 그 자를

강도 라고

살인자 라고

창기 라고 공격하시더라 말이죠.

 

원인이 있다 없다? 없어요.

 

다짜고짜 창기라고 공격하더라 말이죠.

다짜고짜 강도라꼬 ~~~~~~

 

대한민국에 최순실 아닌자 있습니까?

세리 매국노 아닌 놈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래서 오늘 청소 개념이 나옵니다.

 

보통 우리가 청소 라고 하면 더러우니까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청소 한다고 하잖아요

원인이 더럽다 라는 과거형이다 말이죠.

 

또는 갑작스럽게 손님이 온다고 하면 별로 더럽지도 않은데 손님을 맞이 하기 위해서 청소한다 말이죠.

 

아직 오지도 않은 손님 때문에 말이죠.

더럽지도 않은데 말이죠.

 

그럼 후자로 생각해서

미래에서 손님이 오는데 있어서

청소를 하는데

 

즉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고 외친 세례요한이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라고 외치고서는

정작 본인은 죽어서 무대뒤로 퇴장을 해 버립니다.

아니 첩경을 평탄케 해야 한다메?

청소 한다메?

불도저로 밀어버린다메?

 

본인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그냥 개죽임을 당해서 무대뒤로 누락되어 버리면

누가 첩경을 평탄케 하냐 말이죠?

 

아니 첩경은커녕

본인이 나 쓰레기입니다 어서 청소차에 실으세요

어린양 차에 실어나르세요 라고 하더라 말이죠.

 

오히려 자신은 방해꺼리 밖에 안된다고

자신을 똥차 치워버리듯이 치우는 식이더라 말이죠.

 

그리고 첩경이 평탄케 되기는커녕

오히려 난공불락의 첩첩산중의 길을 걸으시니까?

누가 예수님의 첩첩산중의 길을 따라 가기나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당사자 예수님은 신났어 신났어요

어서 어서 이 쓰레기들을 모아서

청소해야지 깨끗하게 해야지 라고

청소부의 기능을

의사의 기능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화목제물 되심을 신나게 자랑하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도 못 따라오는 겁니다.

? 베드로는 청소부가 아니라

청소부가 청소해야할 수거해 가야할 쓰레기 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청소는커녕 오히려 따라 갈수 없는 길로만 골라 가시더라 말이죠.

 

그럼 왜 이런 말들을 하시냐 말이죠.

 

이것은 우리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도 나오고

지난 주에도 나온

 

마귀를 보고 하신다 말이죠.

마귀와 아이돌

마귀와 그의 자식들만을 상대로 하신다 말이죠.

 

참 나 이게 또 말이 안되요

 

인간은 자꾸

예수님 우리 보고 말씀하세요

도대체 누구에게 말씀 하십니까 라고 자꾸 물을 정도로

우리를 상대 안하시더라 말이죠.

예수님은 마귀를 염두하고 하시는 말씀이다 말이죠.

 

그 마귀를 우리가 볼 수가 있으면 쉽게 이해가 빠를텐데

도대체 이 마귀가 우리 눈에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안보이면 없다고 본다 말이죠.

 

그래서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죠.

 

정작 있는 것이 없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사라져 없어질 겁니다.

어차피 없어질 것을 없다고 미리 봅시다.

 

그리고 없는 것을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이죠.

 

결국 놀라운 점은

안 보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 입니까?

 

인간의 시선을 피해 가 버린다는 겁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당나귀의 시선으로 봐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그래서 당나귀가 외치는 겁니다. 고만 좀 때리라꼬

니 눈에 저 불검을 든 주의 사자가 보이지 않느냐 라고 말이죠.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영적 존재이다 라는 거죠. 비존재이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사야의 활동

참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그의 증상물로써 나타나는데 있어서

우상숭배자 곧 약속 밖의 사람들이 보인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거짓선지자들처럼 더러움과 구별짖기를 하는

거룩 거룩 거룩으로 몸에 칭칭 감아버렸다 말이죠.

경문이라고 테필린이라는 단어로 검색이 되던데

 

(23:5, 새번역)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곽으로서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님

 

사단의 회의 특징이 바로

유대인들은 말씀을 대상화 했다는 겁니다.

말씀을 몸에 감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미신을 추구하는 이방인을 경멸하는 유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더 더 더 미신을 추구하는 줄 모르는 셈입니다.

? 성경말씀에 나와 있으니까

몸에 감으라 라꼬

테필린

 

(6:8, 개역)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6:8, 새번역)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문자 그대로 지킨다 말이죠.

이것이 사단의 회 이다는 겁니다.

말씀으로부터 대상화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말씀을 대상화 했기 때문에 몸에 칭칭 감아서 지키더라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대상화 해버린 무리들과

 

말씀으로부터 대상화 당해 버린 이사야 와의 충돌은

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남을 7번 용서 하는 자들과

예수님으로부터 도리어 770번 용서 받는 이사야 와의 충돌 말이죠.

 

이사야가 환상이 덮쳐져서 외치게 되듯이

성령이 임해서 외치듯이

 

즉 이사야가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한 그 증상물이 이사야이다 말이죠.

 

그럼 반대로 보이지 않는 마귀의 증상물로써

바로 우상숭배자들 곧 악령이 들어간 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또는 참선지자들이 마귀만을 상대로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증상물인 우상숭배자들을 이사야가 공격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로써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겁니다.

 

인간은 원수가 없어요 기껏 자기를 건드린 자를 원수처럼 여기다가

2-3대만 지나면 다 없어져 버려요

대대로 원수가 안 됩니다.

더 빨리 원수 문제를 해소 할려면

돈만 있으면 더 빨리 원수 문제 해결해 준다 말이죠.

? 그 돈이 매매 곧 먹고 살게 해주거든요.

돈 으로 화해가 다 가능한 세계가 짐승의 세계 666이다 말이죠.

 

그런데 말씀의 세계는 다릅니다.

대대로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또 흉내내는 것이 바리새인 곧 유대인 아닙니까?

너희는 이방신을 믿는 우상을 믿는 자들이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도 우상이다고

그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사야가 진짜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다고

졸지에 하나님이 두 개로 나누어져 분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 그럼 왜 바리새인 곧 가장 깨끗한 자임을 다들 인정하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원수 곧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라고 공격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봐도 마귀적인 요소, 이단 적인 요소를 그들은 다 없애버렸다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가장 신앙이 좋은 자들인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곧 말씀 플러스 실천한 자들이니까 마귀라는 겁니다.

 

아니 그건 오히려 진짜 신앙인이다는 것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게 바로 마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지요.

 

즉 사단의 회는 말씀을 대상화 했다는 겁니다.

믿음도 결국 대상화 했다는 겁니다.

행함인거죠.

 

인간에게서의 믿음이란 대상화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회 이다는 겁니다.

오죽 사랑이 없으면 대상화 할까요?

 

차라리 대상물이 되어버리는

주여 저는 사랑이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해야할 판국 아니냐 말이죠.

 

 

자 청소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서

미래에 오실 분, 남겨진 씨 때문에 청소하시겠다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미래 라고 표현했지만

 

진짜 의미는 남겨진 씨 라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입니다. 미래가 아닌 미래완료 이다 말이죠.

종말이다 말이죠. 그 곽씨 말고

 

즉 남겨진 씨 때문에 우리는 이유 없이 무조건 창녀이고

무조건 죄인 중의 괴수요

무조건 쓰레기 이다 말이죠.

그 창녀를 변론하시겠다고 청소부로써 오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 존재로 창녀나 청소부나 존재로 보시지 말고

기능으로 봅시다.

손님으로 오는 청소부 때문에 어린양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이유없이 창녀가 되어야만 하고 죄앤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바리새인이 그랬지만

청소부가 온다고 해서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온다고 해서

새벽에 청소차 온다고 해서

죄를 일부러 만들어서 내어놓을 수 있겠냐 말이죠.

 

나 쓰레기 없는데?

새벽에 내어 놓을 쓰레기 없는데 내가 왜???? 청소차를 청소부를 맞이해야 해????

나 죄가 없는데? 어린양 차에 태울 죄가 없는데?

 

자 그렇게 되면 이것은 각각 따로 따로 노는

따로 국밥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그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 가만히 안 있거든요.

 

반드시 청소차에 실어갈 쓰레기가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청소부는 반드시 그 청소차는

반드시 그 어린양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외치는 기능을 펼침으로써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그 실체의 내막을 들통내더라 말이죠.

 

어떻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 주장하는 의인 맏아들이

의인이 아님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씌우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세상에나! 이런 도저히 견딜수 없는 진노를 표출하겠끔 하더라 말이죠.

마치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니까

가인이 격분해서 아벨을 죽여버리니까

거봐 거봐 너는 의인이 아니라 살인자였잖아 라고 말이죠.

 

함정을 파 놓고서 걸려들기를 바랬던 겁니다.

 

또 바리새인들 앞에서 항상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을 펼치심으로써

그렇게 의인이라던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일에 의해서는 한결같이 살인자로 돌변 하더라 말이죠.

평상시에는 그렇게 광명한 천사였는데 말이죠.

 

지금 이사야가 딱 그런 식입니다.

다짜고짜 창녀라고 하지를 않나?

 

그럼 좋다 이스라엘이 창녀이고 강도이고 살인자 이다 치자

그럼 아벨은 누군데?

금가락지 씌운 탕자는 그럼 누군데?

 

바로 이사야 본인이라는 겁니다.

 

?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유가 없어요

결과만 덮쳐진 겁니다.

그 결과 자체가 원인으로써 뒤에서 소급해서 거꾸로 덮쳐지는 겁니다.

 

자 그래서 청소차가 왔는데

내어놓을 쓰레기가 없는 맏아들 곧 의인에 비해서

 

이사야는 배신을 때립니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아무도 쓰레기를 내어놓지 않는데

딸랑 이사야 혼자 배신을 때리면서

쓰레기를 내어놓는 겁니다.

? 하도 청소를 완벽하게 해 놓아서 쓰레기가 없는데?

어떻게 쓰레기를 만들어서 내놓았지?

뭐 있어야 내어놓지???

 

알고보니 이사야 본인이 저 쓰레기입니다 라고 내어놓음으로써

이스라엘 심판의 근거가 되더라 말이죠.

저 배신자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죽임을 당하는 거죠.

 

앞에서 말한 세레요한 본인이 저 쓰레기입니다. 저 좀 치워주세요 라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더라 말이죠.

? 우리가 청소부가 아니라

거룩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청소부 곧 거룩한 분

의사

환자를 부르러 오신 의사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이사야가 그래서 배신을 때리면서 저 쓰레기입니다.

저 좀 심판해 주세요 라고 하더라 말이죠.

 

마치 기생라합이 빨리 이 땅을 다 차지해 버려라 라고 하듯이 말이죠.

 

이런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원수가 된 이스라엘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믿는데 예수는 누꼬?

예수가 누구관데 땅문서를 내 놓는냐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내어놓느냐 라고 하더라 말이죠.

 

미래완료에서 오는 구원은 결국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애굽취급해서

애굽으로부터

원수로부터 구원을 펼치시는

남겨진 씨가 아니였다면

 

(9:29, 새번역)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9(칠십인역)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9:29, 쉬운) 또 일찍이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한 것과 같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이다.”

(9:29, 킹흠정) 이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군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되었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냐? 후손이 아비를 살리는

후손에게서 아비가 태어나는 겁니다.

말이 되냐 말이죠?

 

결국 이사야가 맞아 죽을 소리를 하고 있다 말이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랬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안 죽였다 말이죠.

그런데 혼자 외치니까

딸랑 혼자 말이죠.

 

이무도 듣지도 않는 소리를

그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

곧 끝을 미리 땡겨와서 해 버리니까

아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된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니까 말이죠.

 

결국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 말만 골라서 하니까

혼자 아벨이 되어버리는 죽임을 당하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고 보니 세례요한도 그런 식으로 죽어요 글쎄

후딱 후딱 죽어나가서 누락 되어 무대뒤로

퍼뜩 퍼뜩 퇴장하고자 죽임을 당하더라 말이죠.

 

이사야 본인이 증상물로써 쓰레기로써

청소차를 증거하는 겁니다.

심판 주를 말이죠

완벽한 거룩인 남겨진 씨를 증거하고자

딸랑 혼자

아벨의 허무한 죽음처럼

 

가인의 안색이 변하게 하는 사건을 벌리고서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를 나타내더라 말이죠.

 

그 가인의 제사가 바로 우상에게 하는

번제와 제사 이다 말이죠.

 

반면에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인데

바로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씌우는

너희 죄가 붉을지라도 흰눈 같이 희게 될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같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개 할 것이다 라는

 

오늘 본문처럼 너희가 너 자신을 깨끗케 하는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깨끗케씻겠다

의의 성읍으로 신실한 고을로 만들겠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이죠.

 

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고자 인데

우리는 안됩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를 씻겠습니다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안씻겨지더라 말이죠. 의문의 반복입니다.

 

그러니 주여 안됩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세요

저는 쓰레기입니다.

어린양차에

청소차에 버려주세요 라고

주님이 직접 깨끗케 해 주세요 라고 말이죠.

 

세성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의사의 기능에 부합한

남겨진 씨 때문에 죄인이 되는

탕자가 되는

이 관계성이 바로 인애와 자비를 나타내심이다 말이죠.

 

그러니 말 그대로 의인을 필요가 없다 말이죠.

여기에 마귀가 반발하고

비로소 우상의 속성

즉 우상 임이 드러나고

마귀의 특징인 번제와 제사의 달인들이지

마귀가 때려 죽어도 못하는

인애와 자비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를 못 외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인애와 자비 곧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전부 나누어 줄 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것을 외칠 것 같으면 베드로를 잡을 이유가 없다 말이죠.

그것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아닙니까?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언제 나타날까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때 나타나요

 

그 놈이 마귀 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면

마귀가 안 잡고는 못 배기게 미쳐 날 뜁니다.

 

지금 이사야가 이런 식으로 마귀의 속성을 들추어내더라 말이죠.

알고보니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자로써 드러나더라 말이죠.

의의 성읍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를 않나????

 

그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이유입니다.

 

그럼 평화가 뭡니까?

검을 주러 온 겁니다.

썩은 부분을 오려내는 겁니다.

청소하는 겁니다.

세탁기에 넣어서 빠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세탁기가 나오던데!!!

 

(1:25, 새번역)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1:25, 공동) 그리고 손을 돌려 너의 찌꺼기는 용광로에 녹여내고 납은 모두 걷어내어 너를 순결하게 하리라.

 

하나는 물로 씻는 표현으로

또 다른 번역에는 불로 태우는 완벽한 거룩을 표현 했다 말이죠

 

그럼 이 세탁기 차가 반가운 자는

이 용광로 불 차가 반가운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뭘 해도 더럽다는 것을 아는 자 아닙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하는 자 아닙니까?

율법을 준 이유가 이 고백이 나오라고 한 것인데

 

이상하게 십의 이조 드리고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다고 고백을 하니

율법을 준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청소차를 반깁니까?

누가 예수님 발에다 볼에다 뽀뽀하고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라고

껴안고 기뻐합니까?

 

이 십자가는 누구껍니까 ~~~~~~

 

다스는 누구껍니까 라는 소리를 전혀 안 반갑고요

그거 해결 해서 뭐하게요? 어차피 또 의문의 반복일 뿐인데

 

이 십자가는 누구껍니까 라는 소리는 그야말로 기쁜소식입니다.

제 껍니다

나 자체가 쓰레기입니다.

이 나를 치워주세요 이 쓰레기 치워줄

이 십자가가 나의 것입니다 라고

물동이 던지면서 기뻐한다 말이죠.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내 죄를 해결 해 주신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

 

이 똥덩어리 인 나를 치워줄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십자가에 그 정과 육을 몫박을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라고 말이죠.

 

그것도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자 중에 누구이겠냐 말이죠?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진짜 거룩을 만난 자의 고백은 저는 쓰레기입니다.

저 자체가 쓰레기입니다 라고 비로소 거룩의 임재의 증상으로

일곱의 증상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쓰레기 통에 있는 쓰레기가 더러운게 아니라

내가 더러운 쓰레기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십자가 라는 심판이 전혀 안 기쁩니다.

오히려 거리끼는 걸림돌입니다.

자신들의 더러움을 밝히 보여주니까 더더욱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 누구껍니까 라고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스라엘 조차도 이런 판국인데

우리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저 이사야 딸랑 혼자 뿐이다 말이죠.

본인이 외치고 본인이 답하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


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저 세상 죄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내어놓지를 못할까요?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거든요.

 

여기서 두려움과 사랑이란

과거의 자신의 행적에서 유무를 따지는게 아닙니다.

 

그럼 겁쟁이 기드온은 우찌 되냐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는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미래완료라는 인물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과거에서 찾는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에서 찾는 겁니다. 미래완료에서 말이죠.

저 분을 보니

무조건 그가 옳았고 나는 무조건 틀렸기 때문에

결과에서 찾는 겁니다.

 

아무리 겁쟁이라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면 두려워 하지 않더라 말이죠.

그것이 꼭 시간적으로 계속 지속 되어야 합니까?

누구 마음대로? 기능적이다 말이죠.

존재에 장착 되는게 아닙니다.

소유 자체가 불가능해요.

 

두려움과 겁을 없게 할려고 현대 군사 훈련을 매일 365일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마약을 먹어서 없앨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뇌 과학이 발달해서 알약을 먹어서 없애는 신기술이 나와도

어차피 모조리 다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런 속임수는 안 통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속임수로 소통 되는 것이 종교입니다.

유대인 이라는 사단의 회입니다.

 

믿음이라는 인물이 오지 않는 이상 모조리 다 허구요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천하의 겁쟁이라도 기드온의 칼이여 용사여 라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말도 안되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다 말이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화목제물 되신 분 만이 사랑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 말이죠.

 

화목제물이 못 되거든요.

모든 사람의 죄악을 감당 못하거든요.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주시는 분에 의해서만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의 섬기심만 받으면 됩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을 어린양에게 내어놓을수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덮치면

나의 죄악을 내어놓을수 있게 된다 말이죠.

남들이 손가락질 하든 말든

나의 죄를 대신 감당 할 분은 예수님 뿐이거든요.

십자가에

저 거리끼는 십자가

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외면하는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지도 못하는 자들이 자기가 손가락질 당할까봐 괜히 손가락질 하는 겁니다.

겁이 나서 두려워서 사랑이 없어서 말이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은 자들을 겁내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거꾸로 해석해야 합니다.

양탈쓴늑대무리처럼 시간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자꾸 그러니까 다시는 죄 짖지 말자 라고

앞으로의 시간은 곧 미래는 죄 안 짖기를 하자 라고

마귀의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용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여인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간음했다고 미끼를 덮썩 무는 자들이 생겨나야 하고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할려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율법을 어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시험을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 여인을 너는 어떻게 해석 할낀데?

너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너는 어떻게 할 낀데?

제사장 옷 거룩한 에봇을 잿더미로 태워버린 이 여호수아를 너는 어떻게 할래?

 

우리 같으면 겁이 나서

당장 베드로를

당장 현장에서 간음한 자를

당장 에봇을 더럽힌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당장 능지처참 하라고 할 것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원수로부터 구원을 펼치시는 십자가의 피 용서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입니다.,

 

결국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어떻게 하던가요?

용서합니다.

인애와 자비를 베풉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20% 더 언져주는 성령까지 선물로 줘서

믿음(예수님)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셨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인 신념과 오기가 곧 종교 666 완악한 수건 덮기가 떨어지지 않도록이 아니라

 

그럼 마귀가 죄 값을 청구하고 송사하는데?

그 비용은?

자기 목숨 값, 피 값으로 대신 치르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

 

결국 마귀를 들추어내실려고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신 겁니다.

마귀가 미끼를 덮썩 물도록 말이죠.

 

함정을 파 놓으신 거다 말이죠.

 

제가 지금 말했다고 해서 마귀가 멍청하게 또 속아 넘어가겠냐 라고 하시는데

넘어갑니다.

이것은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 곧 자기 멋대로 못해요

반드시 예수님이 부여한 기능이기에 알아도 못 벗어나는 겁니다.

 

유대인 곧 사단의 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번제와 제사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뻐하는게 아니라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온 것을 기뻐하는게 아니라

청소차가 온 것을 기뻐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어놓을 죄가 없다고 여기니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의인이다고 맏아들이다고 여기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인을 잡을 정도로 떳떳하다고 여기니까

저 세리처럼 토색하고 더럽고 부정하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여기니까

 

죄인을 덮썩 물다가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무시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드러나게 되더라 말이죠.

 

자 그럼 이사야가 왜? 성령이 임해서 환상이 임하게 되는 겁니까?

 

자기 삼촌이 왕인데 그 왕족의 집안에 졸지에 원수가 되어서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이다고

 

그 원수 곧 죄인의 짖을 왜 하는 겁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율법을 어기면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데

적반하장으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쫏아내시고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공격하시는 겁니까?

 

이것은 마치 두 소욕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물론 누가 허무하게 죽습니까?

허무 허무

아벨 아벨

 

이사야죠.

예수님이지요.

 

뻔히 죽을 줄 알고서 외치고 있다 말이죠.

 

?

이미 미래완료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봐 버렸기 때문에 말이죠.

 

이 기준에 의해서

미래완료라는 인물

종말이라는 인물을 기준으로 해서

 

이유없이 무조건 해체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해체 당하는 기쁨을 누리는 자가

이사야의

저 말도 안되는 외침이

 

저 강도 맞아요

저 창녀 맞아요

저 소경 맞아요

저 소돔과 고모라 맞아요.

 

제발 저를 깨끗하게 해 주세요 라고

소경이라고 고쳐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외쳐야할 고백을 말이죠.

즉 회개를 빼앗는 겁니다.

고백을 빼앗고 있어요.

 

저 소경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외치는 자에게만

그야 말로 복음으로 들린다 말이죠.

이사야의 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말이죠.

처음사랑으로 들리는 겁니다.

의의 성읍으로 되돌려 주마 라는 소리가 말이죠.

흰눈 같이 희게

양털 같이 희게 해 주마 라는 소리가 말이죠.

 

울며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거든요.

그래서 정작 예루살렘이 울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시는 겁니다.

울음 마저도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정죄 하기 바빠요.

 

내가 왜 강도야?

내가 왜 창녀야?

난 소경이 아니라 지금 멀쩡히 눈이 잘 보이는데?

뭘 고쳐달라고 해? 난 건강한데 !!!!

 

라고 하는 자들은

 

이사야의 외침은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닌

피하고픈 소식으로 들리는 겁니다.

피해도 끝까지 따라오니까

결국 죽여 버리는 겁니다.

 

더러운 나를 깨끗이 씻어서 의의 성읍으로 만들어 주마 라는 소식이 전혀 안 기쁘다 말이죠.

 

그러나 죄인 곧 성도는

의사가 반갑고

구원자가 고맙고

이사야의 외침이 기쁜 겁니다.

 

드디어 나를 심판할 심판주가 왔다고

이 마귀의 손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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