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는 예수님과의 썰전 ( 1:16-20)

 


(
1:16, 개역)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17, 개역)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19, 개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1:20, 개역)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1:17, 새번역)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또는 '억압하는 자들을 꾸짖어라'

(1:18,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1:19, 새번역)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1:20, 새번역)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에게 환상이 덮쳐져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곧 성령이 임해서 말이죠.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임한 겁니다.

이사야는 남겨진 씨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고 있지

과거에서 원인을 따질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에게서도 그렇고

지금 이사야에게 성령이 임의로 불어서 임해져서 이사야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도 과거에서 그 원인을 따져서 지적을 받는게 아니라

남겨진 씨 때문에 지적을 받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남겨진 씨 때문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과거를 시간적으로 운운할 때

그 과거에 무엇이 있는가?

자아의 흔적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운운할때에도

역시나 시간이라서

자아의 미래를 확장시켜서 운운할꺼다 말이죠.

결국 자아로 출발해서 자아로 미래를 보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시선을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시선에서 나온 하나님관을 지금 이사야가 성령을 받아서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아란 없다 말이죠. 우상이다 말이죠.

과거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지나와서 도출 되었고
그런 자아를 체험했기에

당연히 미래도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미래란 시간이 아니라 인물 곧 남겨진 씨이다 라고 했을때에

역시나 과거 또한 없었던 것이 되는 겁니다.

시공간이 날라가 버린다 말이죠.
자아와 몸이 날라가 버려요.

 

그렇게 시간 속에서 또렷한 자아를 경험한 자가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 빼앗기게 될 판국에 놓여졌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라는 예수님의 변론은

오늘 나오는 변론 곧 썰전은

 

인간의 모든 하나님관을 한마디로 규정해 주는 의미 이다는 겁니다.

곧 너의 하나님 개념을 부수겠다 헐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당연히 반대하고 사수할려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속에 자신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동시에 미래도 담았다 말이죠. 보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네네 암요 당연히 허물어 버리셔야지요 라고 대답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 성전은 곧 거룩한 터전은 곧 자아의 몸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의 몸을 헐어주세요 라고 할 자가 누가 있겠냐 말이죠
또 뻔뻔스럽게 새 몸을 주세요 당신의 살과 피를 먹도록 라고 할 자가 누가 있겠냐 말이죠.

오히려 그 잘난 몸 뚱아리를 어떻게 하면 하늘에 까지 끌고 가고 싶어서 시험을 하는 겁니다.

조건을 따지고
조건을 갖추겠다는 겁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천사들이 두손으로 받쳐서

발이 상하지 않게 해 주겠다 라고

 

마귀가 시편 91편을 인용해서 메시아 조건을 따지면서 시험 했다 말이죠.

 

(4:6, 새번역)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 91:11;12

(4:6, 공동)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 시편 91:11-12.

 

(91:9, 개역)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91:10, 개역)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91:13, 개역)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91:14,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바로 그 거룩한 성전이 바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를 맞이할 몸

곧 이스라엘 자기자신의 투사 투영 투시처럼

인간 자신의 몸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변론하자 곧 헐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 몸 없어 라고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에 그렇게도 열심인 이유가 바로

그 교회와 자기자신을 연결 연합 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그 몸을 헐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3일 만에 짖겠다 라고 말이죠.

 

다윗도 성전 짖는 것에 열심히였던 그 집착이 그러했다 말이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킨다 말이죠.

 

즉 자아의 몸을 사모하는 열심히 예수님의 몸을 삼키더라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시편 91편을 인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성전과 합체한 너의 거룩한 몸

절대로 망하는 법 없게 하마 라고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몸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까?

 

바로 이게 변론입니다.

 

나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 곧 하나님의 저주로 못 박는 이 역설

 

그런 몸을 위해 모든 하나님과 거룩과 율법과 모든 것들이

나의 몸을 위해 모두다 배치된 반면에

 

정작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냐 말이죠.

 

하나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잖아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예수님의 울부짖음에 정작 하나님 아버지는 아무런 답변이 없으신데

 

정작 인간의 자아의 몸을 위해서는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도 착 두손으로 받쳐주질 않나

율법도 있질 않나

모조리 다 구비해 놓여져 있다 말이죠.

? 하나님은 너의 피난처 이니까

 

더군다나 예수님 당시가 바로 로마 압제

우리 한국으로 치면 일제치하에 놓여져 있으니

더더욱 그런 요구를 펼치는데 딱 맞다 말이죠.

가룟유다가 바로 그것은 대변해 주는 독립운동군이다 말이죠.

하나님 나라 운동의 행동대장처럼 말이죠.

 

다윗의 시편 91편이 바로 원수로 부터의 피난처 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 원수가 바로 누가냐 말이죠.

다윗 자기자신인줄 남겨진 씨 때문에 알고

자기를 싹 빠져나갔지만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대 안 걸고

오히려 바닥을 다 뜯어내지만

 

지금 이사야 때의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때의 이스라엘의 원수는 그럼 뭐냐 말이죠?

 

이사야 때는 바벨론 입니까? 조금 있으면 바벨론으로부터 망하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탁란 시키더라 말이죠. 보호하는 피난처로 삼더라 말이죠.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그럼 원수는 누구냐 말이죠.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라는 신부의 대조물이 곧 누구입니까?

사단의 회 유대인 이더라 말이죠.

 

죽으면 죽으리라 의 에스더와 대조를 상대적인 자가 누구였었죠?

하만 아닙니까?

내부의 적

원수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려고 했던 자들이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히더라 말이죠.

 

그래서 계시록에서 이미 사단의 회가

예수님 당시에 규정이 되었고

일곱교회도 규정이 되었다고 했지요.

 

사단의 회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자였고

반대로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의 신부로 규정되어서

 

예수님의 긍휼만 쳐다본자로 나오더라 말이죠.

 

이미 벌써 말이죠.

 

앞으로가 아니라

 

그러니 예수님은 누구와 변론했었냐 말이죠

사단의 회인 바리새인과 변론했었다 말이죠.

 

아니 왜?

사마리아인과 곧 이스라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과는 변론 자체를 하지를 않아요 글쎄

변론은 누구와 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합니다.

 

사마리아인과는 변론할 이유가 없는 이유가

어차피 사마리아인은 엉터리 하나님관인줄 저들 스스로도 알기 때문에

누가 고쳐주시느냐에 있어서 그 누구가 바로 예수님인줄 성령으로 인해 알고서

바로 바로 받아들인 반면에

 

바리새인은 끝까지 예수님께 항변을 하면서

자기의 하나님을 포기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 모습이 이미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 나오더라 말이죠.

마귀가 이미 예수님께 덤벼들었다 말이죠.

그 마귀가 잠시 떠나 있었는데

누구에게 들어갔느냐 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이며 가장 신앙적인 자들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도 존경받는 저 바리새인들이랑

예수님은 말씀의 공방전을 벌리시더라 라는 겁니다.

 

? 엉터리 하나님관을 사마리아인 보다 더 심하게

엉터리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날도 똑같아요

개혁주의 부르짖는 성화론자들이나

얼마전에 뉴스룸에도 나온

명땡교회의 비리를 은닉재산을 고발할 줄 아는

뉴스땡조이의 뉴스룸과 손잡고 뉴스로 고발하는 그 모습이

둘 다 똑같이 명땡이든 뉴땡이든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서

서로 자기가 옳다 느니 우기지만

정작 그런 돈 문제로 바른 하나님관을 세우겠다는 그 자체가

엉터리 하나님관이다 말이죠.

죽은자는 죽은자에게 맡기지 뭐 나서서

바르게 하겠다고 우기냐 말이죠.

교회를 바르게 하면 바르게 될까요?

언제는 세상을 바르게 하자 라고 외쳤을땐 언제고

그 외침이 다 기어들어가서

이제는 교회 마저도 안되는 판국에 이르니까

몸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나의 거룩한 몸은 그런 교회를 다닐수 없어 라고 외친다 말이죠.

바리새인이 그랬거든요.

가룟유다가 그랬어요.

나의 하나님나라 운동 그 거룩한 운동에 예수님이 안 도와준다면

그 예수는 나쁜 놈이다 라고 팔아버렸다 말이죠.

군자금은커녕 죄책감에 턱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그래놓고 무슨 놈의 하나님 나라 운동

독립운동

촛불운동 하냐 말이죠.

그냥 솔직하게 자기의 몸을 건드리니까 발악했을 뿐이다고 하면 될 것을

왜 확대시켜서 거국적인 운동으로 대의로 확대시키냐 말이죠.

그냥 먹고 살려고 발악했을 뿐입니다 라고 빠져나오면 될 것을

 

그 정도로 인간에게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변론하자 라고 하신다 말이죠.

 

놀랍게도 이사야 때는 변론하자 라고 해 놓고서는

변론 내용이 나오던가요?

안 나오잖아요.

말 해놓고 3초도 안되어서

바로 공격 들어가는 겁니다.

변론 해 봤자 안들을꺼 뻔하니까

공격 하시더라 말이죠.

 

주님 거짓말 한 겁니까?

아니지요!

안 듣는거 아셨으니까 말이죠.

 

그래놓고 죽어가는 자는 그럼 누굽니까?

이사야죠

딸랑 혼자의 외침이 먹혀들 리가 있겠냐 말이죠.

아무도 안 듣는 이 외침에

이사야는 왜 목숨 거는 겁니까?

누구 단 한 명이라도 듣는 다면 의미가 있을텐데

아 의미 없다.

 

아무런 의미 없는 외침을 부르짖었다 말이죠. 변론했다 말이죠.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우리 서로 변론하자 라고

 

딸랑 혼자 외치는 겁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 말을 말이죠.

 

그럼 예수님은 좀 살림살이 나아지셨을까요?

바리새인과 변론을 펼치십니다.

다행히도 수십번 그 내용들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도 반격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안 들을까요?

왜 이사야 때는 안 듣는 줄 알고 바로 공격했을까요?

물론 이사야가 바위에 계란치기로 자기만 손해로 죽어나갔지만 말이죠.

 

자 이 표현이 희한합니다.

 

이 말 자체가 변론 곧 설득이 안 됩니다.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변론을 할려면 두 변론의 주체가 팽팽하게 간격을 유지하고 있지

한 쪽이 수긍해서 이 쪽으로 넘어와 버리면 변론 자체가 성사가 안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변론하자 라는 것 자체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 이미 말도 안되는 것이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라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해

 

아 나의 죄가 주홍 같구나

나의 죄가 진홍 같이 붉구나 라는 것을

인정해야 될 판국이 되어야

변론이 안됩니다.

서로 화해케 되어버리니까 말이죠.

 

그런데 어 누가 그렇게 주홍 같나요?

어 누가 그렇게 진홍 같이 붉나요? 라고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지

자기가 그런 죄인입니다.

저의 죄가 주홍 같고 진홍같이 붉습니다 라고 인정 하는 자가 없더라 말이죠.

그렇게 되면 변론 곧 썰전이 계속 된다 말이죠.

간격이 좁혀지기는커녕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더라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래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데

다들 특히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발이 상하지 않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피할 바위라고 주장하는

그래놓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저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서

기적을 구원을 선택을 바란다는 자체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살인 뿐인 손에는 피가 가득한

이 모순점을 보이는데 있어서

정작 예수님의 모순점은 잘도 밝혀내더라 말이죠.

남의 눈의 티끌을 잘도 잡아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눈의 대들보는 못 보더라 말이죠.

 

대들보가 뭡니까? 성경 말씀이 얼마나 노골적입니까?

그런데 맞아요.

대들보가 얼마나 크냐 말이죠.

눈에 대들보가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들어가게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이것이 일곱교회가 말도 안되는 결혼의 의미로 비밀이듯이

역시가 사단의 회 도 아무도 예상 못한 지옥행으로써의 비밀이다고 했습니다.

 

자 그래서 이사야가 자신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으로 증거합니다.

심판행하는 자가 아닌

심판 받는 자의 모습으로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더더욱 저들은 좋아라 라고

자신의 하나님관을 펼쳐냅니다.

저 봐라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니까

번제와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니까

이사야가 저렇게 소돔과 고모라로 저주를 받잖아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는 정작 너희들의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 로써

이렇게 심판 받아야 마땅한 모습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남겨진 씨를 증거하는 겁니다.

 

이 남겨진 씨에 의해 변론 썰전을 토론 논쟁을 벌리게 될 판국이다 말이죠.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꺽지 않고

팽팽하게 맛서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죠.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정작 니느웨 백성과 변론할 줄 알았는데

니느웨 백성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인줄 알고

바로 바로 회개를 하더라 말이죠.

죽었습니다 주여

금식하고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회개를 하는 반면에

 

요나는 이 니느웨 백성의 회개가 말도 안된다고 반발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는데 왜 하나님은 배신 때리십니까 라고 반항했던

엘리야와 똑같은 반응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사람의 일 곧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욕먹는

베드로의 그 경험 곧 사단의 일을 거침으로 인해서

 

남겨진 씨가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는

요나의 표적을 인해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었었었었어야만 했던 것을 알고서

 

아 저쪽은 이미 사단의 회로 규정이 되었기에

아니 우리 모두가 이미 사단의 회로 규정이 되었기에

주님은 빼내시는 작업을 이 남겨진 씨로 인해서 하시는 구나 라고

그리고 그 빼낸 그 일곱교회

곧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의 죄는 주홍같고 나의 죄는 진홍같이 붉으오니

불쌍히 여기셔서 눈과 같이 흰 양털과 같이 해주소서 라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정작 전리품으로써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반면에

 

아니 나는 절대로 주홍 같은 죄를 지은적 없고

아니 나는 절대로 진홍같이 붉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자에게는

 

남겨진 씨가 필요가 없다 말이죠.

남겨진 씨가 필요가 없으니

나의 죄가 주홍 같을리도 없고

나의 죄가 진홍 같이 붉을 리도 없고

 

오히려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은 삶을 살게 해 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있으니

변론할 리가 있겠습니까?

썰전 토론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말이죠.

 

불뱀에게 물린 적이 없는데

환자가 아닌데

죄인이 아닌데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볼 필요가 없다 말이죠.

 

바로 이런 엉터리 하나님관에 대해서 예수님이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으니까

 

왜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는 이유를 알 리가 없으니까

 

자꾸 자꾸 신경을 파고 들어오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데

졸지에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리게 되더라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십자가가 졸지에 구체적 보편성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도

다 걸려 넘어지게 되니

십자가가 나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글쎄

이사야가 성령을 받아서 이 사건을 벌리고 있는 겁니다.

 

다들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음에 인정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의 죄가 붉다는 것을 인정해야

변론 곧 원수로써

주여 저 원수 맞습니다.

주여 저 죄인 맞습니다 라고 인정을 해야

변론을 함으로써

전리품으로 뺴내실 텐데

고침을 받을 텐데

 

소경 아니다고 하니까

소경인 채로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더라 말이죠.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6:39, 개역)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변론이 뭡니까?
주여 저 고쳐주세요

저 살려주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주홍같은 죄

저의 진홍같이 붉은 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

양털과 같이 하얗게 하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

남겨진 씨 당신 뿐입니다.

저는 소돔과 고모라 일 뿐입니다 라고

 

남겨진 씨 때문에 고백해야 하는 것이

변론 아닙니까?

 

그 미래의 남겨진 씨 때문에

 

그런데 다들 과거를 따져요

원인을 따져요

조건을 따져보니까

 

남겨진 씨에게 그렇게 변론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건강한 자 인기라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돔과 고모라와 가장 멀리 거리두기에 성공했고

뭐가 아쉬워서 남겨진 씨를 바라 보겠냐 말이죠.

뭐가 아쉬워서 변론 하겠냐 말이죠.

뭐가 아쉬워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요나의 표적을 보겠냐 말이죠.

뭐가 아쉬워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겠냐 말이죠.

 

부정을 쳐다 볼 리가 없다 말이죠.

십자가 라는 부정함을 왜 쳐다 보겠냐 말이죠.

막살지 않는데

저 소돔과 고모라만 십자가를 쳐다나 봐라 말이죠.

 

우리는 황금십자가만 쳐다 보겠다 말이죠.

 

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엉터리 하나님관으로써

예수님이 변론하자 라고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그 엉터리 하나님관을 허물어 버리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3일만에 짖는 성전을 말이죠.

 

이 예수님을 이사야는

오로지 하나님만 믿겠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뭐 개죽음 당하는 것은 뻔하겠지만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겁도 없이

저 하나님만 믿겠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바닥 구석 구석까지 이사야는 다 뜯어내고 있는 겁니다.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16, 개역)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17, 개역)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19, 개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1:20, 개역)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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