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를 신원하지 않는 예수님의 원수가 된 이스라엘 (1:21-24)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4, 개역) (없음)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23:18, 개역)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9, 개역)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3:20, 개역)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3:21, 개역)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3:22, 개역)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3:1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14절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 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23:15,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 '게헨나'

(23:16, 새번역)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23:17, 새번역)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23:18, 새번역) 또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23:19, 새번역)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3:20, 새번역)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23:21, 새번역)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23:22, 새번역)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23:2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23:24, 새번역)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23:25,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23:26, 새번역)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23:27,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23:28, 새번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23:29,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23:30, 새번역)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23:31, 새번역)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23:32,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23:33, 새번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23:34,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23:35, 새번역)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23:36,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

(23:37, 새번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23:38, 새번역)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23:39,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118:26

 

(1:21, 개역)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1:22, 개역)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1:23, 개역)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1:24, 개역)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1:21, 새번역)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1:22, 새번역)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1:23, 새번역) 너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1:24, 새번역)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사야가 오늘날로 치면 자기 혼자 딸랑 혼자서
모든 기독교를 정죄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치 변론하자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럼 이 외침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의 이런 외침은

마치 예수님의 외침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즉 미래적이다는 겁니다.

다시 신약으로 치면 종말적인 외침이다는 겁니다.

 

갑자기 느닷없이

왜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왜 너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왜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냐고 다구치시는 겁니다.

 

아니 언제 주께서 목마르고 배고프고 헐벗었습니까?

그거 해결하는 해결사가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그것 전문가가 우리 아니냐 말이죠.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

 

즉 남을 도와줄 생각 하지 말고

너가 바로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 인데

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신원하시는 신원자이신 예수님을

왜 거부하냐 라고 아예 미리 정해놓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즉 지난 주에

너희 죄가 진홍같을지라고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겠다 나와 변론하자 라고 하셨다 말이죠.

 

어 그런데 이 말 자체가

그럼 내가 진홍 같은 죄 즉 아주 아주 나쁜놈이고

내가 주홍같이 붉은 죄 즉 죄인 중의 죄인 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변호사가 투입이 된다는 말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따져봐도

눈씻고 봐도

내 죄가 주홍같이 붉지 않더라 말이죠.

진홍같이 먹보다 더 검은 죄가 아니다 말이죠.

 

아니 진짜이다 말이죠.

늘 남을 7번 용서하고

늘 남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늘 남의 목마름을 헐벗음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죄인으로 몰아갈까?

 

그럼 이사야가 과거를 따져서

시간적(성화적인 행위들)으로 공간적(거룩한 장소에서)으로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식이다면 누구든지 지적할 수 있는

cctv를 돌려서 밀까부듯이 찾아내는 방식이니까

그 시간과 그 공간을 찾아내면 된다 말이죠.

구지 이사야가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나서는 이유는

미래적으로 종말적으로 외치는 겁니다.

 

즉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외침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거는 외침이 되는 겁니다.

 

아직 행동 하지도 않은 미래의 죄를 지적하고 있고

아직 그런 장소를 그런 몸 신체가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 너희는 거룩한 장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말이죠.

 

아니 베드로가 무슨 수로 미래의 일을 생각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것도 그 미래라는 것이 시간적인 미래가 아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

곧 인물에 대해서 말이죠.

미래란 없어요.

미래완료라는 인물 뿐이지

안식일 이라는 것은 없어요.

안식의 주인 만 있다 말이죠.

 

존재는 없어요.

기능만 있지

 

미래라는 시간적인 의미에 베드로가 미쳐 못 깨닫는

그 미래로 베드로가 가서 눈치 채고 알았더라면

이라고 그 미래를 운운하신다면

그럼 베드로 자체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누구든지 다 한다 말이죠.

cctv를 시간적으로 미래로 돌려서 보듯이 말이죠.

물론 말이 안되지만

그런데 그런 미래라는 시간적인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헷갈리니까 미래라고 시간적으로 볼게 아니라

종말이라고 보자 말이죠.

계시록 21장의 해도 달도 사라지고 첫아담도 다 사라지는

이전 것은 지나가버리는

새것이 된

인물의 등장을 종말로 미래로 보자 말이죠.

인물이다 말이죠 인물

그 앞에서 나도 인물입니다 라고 할 수가 없다 말이죠.

존재가 지나가 버렸다니깐요.

기능만 있다 말이죠.

어떤 기능

이전 것은 다 지나가게 하는 기능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몰고온 인물이다 말이죠.

 

자 그런 종말을 이사야가 끌고 와서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나와 변론하자

너희 죄가 붉을지라도 주홍같고 진홍같을 지라도

희게 할 것이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그 변론자 때문에

나는 무조건 이유 없이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의 죄가 주홍같이 붉어야 한다는 겁니다.

 

? 변론자를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는 기꺼이 자신이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될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그래 되면 존재가 되니까

기능으로 변론자 곧 남은 씨가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저절로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되어 버리더라 말이죠.

 

그렇게 이사야는 종말이라는 인물을 소개하게 되는 겁니다.

종말도 시간이 아니다고 했지요

종말이란 인물입니다.

 

몇주전에 녹음은 안되었지만

말씀 나누고 난 뒤에도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이사야가 왕족입니다. 왕이 자기 삼촌이다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의 마음이 곧 겸손한 마음이 미래완료에서 덮쳐지는 바람에

졸지에 환상을 보게 되고

멀쩡히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덮쳐져서

졸지에 이사야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듯이

이사야는 자기 삼촌이 이스라엘 왕으로써 치리함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졸지에 원수가 되어서

이 이스라엘을 자기가 왕도 아니면서

모조리 다 기생라합처럼

예수님 껍니다 라고 땅문서 국가 문서를 다 팔아넘기듯이

예수님 혼자 다 가지고 가세요 라고

팔아넘기더라 말이죠.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로써 이사야는 졸지에 돌변해서

자기 나라, 자기 백성, 자기 국가, 자기 나라의 땅을

심판자에게 모조리 다 팔아버리는

매국노가 되더라 말이죠.

 

이런 구체적 보편성의 의미로써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이다 라고

화평을 주러 온줄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을 나누었다 말이죠.

 

원수가 되지 않으면

심판주의 원수가 된다 말이죠.

 

?

지금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원수이니까 말이죠.

 

어떤 원수?

 

일만달란트를 빚진자를 용서하니까

그 탕감한 용서를 무시하고

백데나리온을 떼먹은자를 옥에 가두는

임금의 용서를 무시한 원수이니까

그 용서를

그 처음사랑을 무시하는 원수로써 자리잡은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로부터 원수가 되지 않으면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의 원수가 되니까

용서의 왕의 원수가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철저하게 기능적이다는 겁니다.

용서를 쳐다보는 죄인이라는 기능으로 본다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집안 식구의 원수로써

이스라엘을 뜯어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예수님께 몽땅 팔아넘기는

기생라합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뭡니까?

인간의 믿음을 배신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의 믿음은 뭐냐 말이죠.

마침 니골라당에서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 니골라당의 행위가 인간들의 믿음입니다.

곧 종교이다 말이죠.

사람의 일로써 누구든지 말이 되는 것을 유통 시키고

매매 시킬수 있는 종교이다 말이죠.

유일하게 종교에서 딱 하나 빠진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도 안되는 처음사람 바로 일만달란트 빚탕감입니다.

770번 용서받음입니다.

이것을 교묘하게 거꾸로 남을 7번 용서하기로 바꾸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말이죠.

666이다 말이죠.

종교는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을 빼버리는 겁니다.

 

뭐 내가 770번이냐 용서 받아야 한다고? 그런 나쁜놈이라고?

뭐 내가 일만달란트 16만년 일해도 못 갚는 빚쟁이라고 그런 나쁜놈이라고?

뭐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이것이 그만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었고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우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주의 사랑을

주의 값없이 주시는 말도 안되는 일만달란트의 용서를 외칠수 있는

영광을 주시다니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남들은 절대로 못 입는 죄수복을

기쁨으로 입고서

 

자기집안식구의 원수로써

기생라합으로써

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나가게 하는

첫아담은 지나가게 하는

이 인간의 신체를 몽땅 심판해 달라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모조리 땅문서 집문서 신체몸문서 모조리 팔아넘겨버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덮쳐진

종말의 증상물이

오늘 나오는 이사야가

일방적으로 왜 너희는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것 주지 않았냐 라고

 

고아를 신원하지 않고

과부의 간구함을 거부하고

그저 돈 돈 돈 만 밝히는 원수가 된 이스라엘이냐 라고

남겨진 씨 때문에 죄인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인으로 몰아가더라 말이죠.

 

남겨진 씨를 보라꼬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꼬

 

의도적으로 불뱀에게 물려 죽게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이런 이사야의 외침을 과연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듣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있다고 여기지 마세요

남들은 다 예수님을 배신해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오히려 가장 제일먼저 배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능이지 존재를 내세울수가 없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이 변론이라는 말은

계시록 2장에 의하면

오른손이요

일곱이 되는 겁니다.

 

오른손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죽은 자의 시체에서 오른손을 떼왔다 칩시다

그게 오른손입니까?

아니잖아요

차이성이 없잖아요.

신체에서 떼어 왔기에

아니면 멀쩡히 살아있는 몸에서 떼어와도

오른손 아닙니다.

그건 존재이지

 

결국 차이성으로써의

기능입니다.

이 기능 곧 비존재로 보게 되면

우리는 모조리 다 왼편에

부정한 죄인의 자리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뭘 해도 죄인이다는 거죠

뭘 해도 막사는 자이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이번주에 어머니께서 언제 처음사랑을 잊어버렸는지 어떻게 아냐 라고 물었는데

가만히 계속 며칠 동안 생각해 보니까

처음사랑이 과거이고

잊어버림도 과거로 보는데

그게 아니라 모조리 다 미래에 다 있는 겁니다.

그럼 지금이 처음사랑으로써 십자가라는

내 대신 죽으심을 모르고

자꾸 니골라당처럼 뭔가를 해야 한다 라고 보고

말이 되는 신앙을 하겠다고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식하면서

사람의 조직을 형성하고자 하는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하면서 노말한 듯 유니크하고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하기까지 하면서 미니멀리즘하고 퍼펙트한

 

이게 바로 바리새인 외식하는 자 아니냐 말이죠. 말 되는

 

처음사랑 곧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짜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용서 받은

그것도 일만달란트나 16만년 일해도 못 갚는 빚을 탕감받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자꾸 빼버리는

그래서 자꾸 조건 따지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불뱀 물린자로써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지금 안 쳐다보는 것이

바로 첫사랑을 잊어버린 겁니다.

 

과거가 아니다 말이죠.

그리고 시간적으로 따지는 미래시간도 아닙니다.

 

미래란 누구냐 라는 그 인물과의 관계성입니다. 그래서 미래완료이지

인간의 미래는 항상 미래불확실성이니까 아예 안 보는 겁니다.

답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원인 곧 과거를 따지는 겁니다.

인간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

곧 다윗의 4종 세트 회개 눈물 금식 기도는

원인을 바꾸어서 현재를 바꾸어달라고

리셋 타임리셋을 요구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철회를 합니다.

다시는 이 따위 회개 눈물 금식 기도 하지 않겠다고

존재를 위한 회개 눈물 금식 기도가 아님을 알았다 말이죠.

 

그럼 첫사랑이 언제 떨어졌는지 회개 하라 라고 했을때에

회개란 과거를 반성하는게 아니라

미래완료를 못 쳐다보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못 쳐다보는

본인이 불뱀에게 물린 자인줄 모르는 것을

본인이 불뱀인 것을 모르는 것에 상하고 통회하는 것이

회개이다는 겁니다.

즉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나의 변론자가 되어주세요 라고 못 하는 자

 

? 나는 그런 빚진적 없고

그런 일만달란트 용서가 필요가 없는

어느 정도 괜찮은 자이다는 겁니다.

말 되는 신앙을 구비했다 말이죠.

 

천만의 말씀! 미래완료에서 떙겨주지 않으면

그 어떤 완벽한 신앙도 다 모조리 거짓이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부활도 마찬가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부활은 글쎄 모조리 다 말이 되게 교리화 했더라 말이죠.

 

부활이 없으면 말라꼬 믿겠냐 말이죠.

구원이 없으면 말라꼬 믿냐 말이죠.

그래서 부활교리를 믿는다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야기 했을때에

 

내가 부활이다 라는 인물로써

종말로써

미래완료로써 말을 하니까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자꾸 과거의 원인으로 부활을 따지니까

주님께서 민망해 하시더라 말이죠.

 

동네사람들도 다 째려보면서 아니 사랑했다메? 사랑했다면서 왜 죽도록 내버려 두느냐?

마치 아는 것처럼

빨리 안 오고

일부러 삼일을 지체하고

일부러 늦게 왔다는 것을 아는냥

다들 째려보더라 말이죠.

 

그리고서는 나사로를 위해서 울음꾼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

그래서 우십니다.

 

우와 이게 보편화 되었다는

당연하다고 오히려 째려보는

저들의 모습에 황당 무지 극치라서

혀를 내 두를 정도로

노골적인 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천사다운 모습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어서

주님이 우시는 겁니다.

 

즉 과거의 증상물로써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라는 답이 없다 미완료이다 불확실성이다 라고 여겨서

그 증상물로써 말이 되는 조건을 따져서 부활교리를 믿는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그러나 첫사랑을 언제 잊었느냐

미래완료로써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오른손이

나의 변호사가 안 보이면 무조건 처음사랑을 잊어버린 거다 말이죠.

말도 안되는 미래완료의 다 이루었다의 증상물이

지금 현재에 말도 안되는 증상물로써 현재를 구성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냅니다.

 

미래완료의 증상물로써 말이죠.

 

자 이렇게 되니 부활교리를 갖추었다고 말 되게 갖추었다고 여겼던 것이

진짜 부활 앞에서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진짜 부활이 뭡니까?

나사로가 무덤을 열고 나오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되요.

부활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라니?

 

존재의 부활 곧 나사로의 부활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이라서

다시 죽어야 합니다.

나사로는 부활의 첫열매가 될 수가 없어요.

 

오죽하면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 라고 한다 말이죠.

시형제 결혼법에 의하면

막내까지 맏형수가 결혼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어떻게 되냐 말이죠.

개판 된다 말이죠.

아이구 더러워

기생라합이 뭐? 예수님의 족보에?

아이구 더러워

이렇게 되니까

말이 된다 안된다?

말이 안되기 때문에 거부한다 말이죠.

지금 현재 이 순간 처음사랑을 거부하는 거다 말이죠.

 

그렇다고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은

오히려 종교 곧 모든 종교가 부활이 없으면

종교 자체를 형성 못한다 말이죠.

말 되는 것을 형성 못한다 말이죠.

그래서 부활이 있다고 여기지만

이 꺼림직한 막내와 맏형수의 결혼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만 남아서

은근슬쩍 빼버리고 싶은 걸림돌로 남아 버리더라 말이죠.

해결을 못해여 글쎄 그런데 부활은 되고 싶어?

존재를 부활 시키고는 싶어?

 

여기에 예수님이 끼일 자리가 없어요.

처음사랑이 끼일 자리가 없다 말이죠.

처음사랑이라는 과거가 아닌

처음사랑이라는 미래완료가 끼일 자리가 없어요.

? 말이 되는 소리를 갖추어야 하니까

말이 안되는 소리를 빼버리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게

사두개인은 솔직하게 부활이 없다고 빼버리는데

바리새인은 못 빼고 있어요.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말이 되는 종교가 더더욱 큰 손익계산에서 우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누가 이 큰 이득을 마다 하겠냐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다들 예수님을 빼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말이 되는 것을 어설프고 말도 안되지만 그냥 능구렁이같이 넘어가면서도

말이 되게 갖추었다 말이죠.

부활교리든 뭐든

 

이게 오늘 나오는 성

예루살렘 성이다 말이죠.

 

예루살렘 성전은 결국 인간의 몸이

말이 되게끔

부활 할수 있는 최적의 몸으로써 갖추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렇게 할려고 누구를 핍박 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무슨소리냐

우리가 오히려 부활 되기 위해서라도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보아 주었다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 한 것이다.

 

무슨 소리냐 언제 배고팠고 언제 헐벗었으며 언제 목말랐으냐

반칙이나 진작 말했으면 우리가 당장 했을 것이다.

그거 우리 전문이다 왜?

말이 되는 부활을 해야 하는 말 되게 해야 하거든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거 뭐 완전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이다 말이죠.

 

즉 오른손이 떳다면

우리는 무조건 미래완료 때문에

죄인의 자리

소돔과 고모라 자리인 사망과 흑암의 백성임을 알아야 하는데

 

자꾸 과거를 따지더라 말이죠.

처음 사랑? 나 침례교 영향을 받아서 그때 날짜까지 알고

그 처음사랑 처음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웃끼고 있네

그게 처음사랑이 아니야

 

처음사랑은 미래완료에서 오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죄인이 되어서

원수가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지

 

처음사랑 잊어버리지 않은 나를 내세우는게 아니다 말이죠.

 

시편의 후반부를 보면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다윗 본인이 원수로써

그 원수를 이기신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아주 아주 신이 났어요 글쎄

 

그 원수로부터 빼내시는 예수님의 구원을 찬양하라 라고

마치 홍해를 건너는

죽음을 건너 넘어와서 모세의 노래를 부르듯이

유리바다를 건너와서 새노래를 부르듯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듯이

 

유리 바다를 건넌적도 없던 다윗이

마치 미래완료를 격은냥

미래완료의 새노래를 부르더라 말이죠.

 

다윗이라는 존재를 부러워 할게 아니라

미래완료의 증상물로써 다윗이 원수로부터 구원을 받는거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들 또한 다윗처럼 지적을 받는 겁니다.

너 우리야 장군 죽였지?

난 다윗처럼 그런 짖 한 적 없습니다.

? 그럼 예수님은 왜 죽였어?

아 참 예수님은 죽였지

 

너 밧세바를 취했지

난 다윗처럼 그런 짖 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또 은 30냥에 팔았잖아

아 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

 

너 이름없는 아기 다시 살려내지 못했지

난 다윗처럼 그런 짖 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살려달라고 회개 금식 눈물 기도를 왜 흘렸어

나사로 왜 못 살려냈냐 라고 왜 울었어

아 참 예수님의 부활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다들 뿔뿔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자 이렇게 뭘 해도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지만

내가 흰 눈 같이 희게 할게

양털 같이 희게 할게

 

정말요? 말도 안됩니다.

이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이 바로

오른 손이요

변론자요.

일곱이다 말이죠.

 

완벽한 770의 심판주이자 완벽한 거룩이 일곱으로써

교회와 하나가 되겠다고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시는

원수를 타 넘어 오시는 주님이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가 바로 고아요 너가 바로 과부요 너가 바로 나그네로써

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한 원수로부터

신원하고자 미래완료에서 왔다는 겁니다.

남겨진 씨로 인해서 왔다는 겁니다.

 

이 소리를 글쎄

이스라엘 전체 속에서 딸랑 단 한 명 이사야가 외치고 있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라고 여길까요?

 

그럼 아무도 안 듣는 소리를 왜 할까요?

존재를 모조리 다 삭제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이사야 본인 부터가

이스라엘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존재삭제를 당하잖습니까?

그럴줄 뻔히 알면서도 왜 외칠까요?

 

이미 남겨진 씨의 증상물이 되었기 때문에

이사야는 성령을 받은 이상

환상 본 이상

더 이상 존재가 아닙니다.

 

떠도는 부유하는 영혼처럼 비존재로써

기능으로 외치는 겁니다.

 

아무도 이것을 막을수가 없는 겁니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서 바톤을 또 딸랑 한 명의 선지자가 이어받고

좀 여러명

좀 많은 다수의 참선지자가 동시에 등장해서

지옥간 부자의 말처럼

제대로 설득 시켜서 지옥 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지옥 다운 생각이다 말이죠.

말 되는 소리를 해 달라가 아니라

 

오로지 딸랑 한 명씩 한 명씩 바위에 계란 치기 하듯이

말 안 되는 소리로써

미래완료라는 인물

곧 남겨진 씨의 증상물로써

처음사랑을 발로 찰 수 밖에 없는

원수성을 들추어내는 식으로써

이사야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으로써 저들에게 질리도록 나타나는 겁니다.

 

애굽에게 모세가 내 백성 내놔라 라고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산삼 다리를 가지고 간 여인에게

계속 나타나서 내 다리 내 놔라 라고 집요하게 나타나듯이 말이죠.

 

그래야 여호와가 누꼬? 라고 나온다 말이죠.

비로소 원수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누구인지 앞으로 제대로 보여줄게

너의 목숨 줄을 쥐락 펴락 하는 것을

마치 애굽 성을 쥐락 펴락 하듯이

오늘 나오는 성읍

예루살렘 성읍을 쥐착 펴락 하시는 분이

바로 남겨진 씨 라는 분이다 라고

이 분이 진짜 하나님이야 라고

증거하고

기존의 하나님은 가짜다 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이고

이사야는 그 견고한 애굽의 피라미드 부활성

구원의 성을 바벨탑 성을 무너뜨리듯이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릴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뭐 성전을 헐라꼬?

3일 만에 짖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기존의 예루살렘 성이 뻔히 있는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새예루살렘을 짖겠다고

지금 시비는 거는 겁니다.

변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어서 심판해 주소서 라는 자에게만

새이스라엘 새예루살렘 새하늘과 새땅이 보일 것입니다.

이미 새예루살렘의 증상물로써

처음사랑의 증상물로써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외치는

저 니골라당 속에서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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