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거룩한 산 시온 산에 나의 왕 곧 남은 씨를 세웠다 (2: 1-10)

 

(2:6, 개역)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7, 개역)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2:8, 개역)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개역)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2:6, 새번역)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산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 또는 '왕을'

(2:7, 새번역) "나 이제 주님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2:8, 새번역)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2:9, 새번역) 네가 그들을 철퇴로 부수며,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 또는 '철퇴로 다스릴 때에'

 

(2:1, 개역)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2, 개역)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4, 개역)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2:5, 개역)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2:6,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2:7, 개역)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2:8, 개역)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2:9, 개역)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2:10, 개역)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2:11, 개역)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2:1, 새번역)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2:2, 새번역)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2:3, 새번역)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 또는 '가르침' 또는 '교훈'

(2:4, 새번역)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2:5, 새번역)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2:6, 새번역)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동방의 미신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치며, 이방 사람의 자손과 손을 잡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2:7, 새번역) 그들의 땅에는 은과 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땅에는 군마가 가득하고, 병거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2:8, 새번역) 그들의 땅에는 우상들로 꽉 차 있고, 그들은 제 손으로 만든 것과 제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게 꿇어 엎드립니다.

(2:9, 새번역) 이처럼 사람들이 천박해졌고 백성이 비굴해졌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 또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마십시오'

(2:10, 새번역) 너희는 바위 틈으로 들어가고, 티끌 속에 숨어서, 주님의 그 두렵고 찬란한 영광 앞에서 피하여라.

(2:11, 새번역) 그 날에 인간의 거만한 눈초리가 풀이 죽고, 사람의 거드름이 꺾이고,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하면서

한가지 의아한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물론 무한 반복이 되어서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시편 148편에서는 모든 열방들아 주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시편 149편에서는 열방을 보수 곧 보복 한다고 했다 말이죠.

 

(148:11, 개역)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148:12, 개역)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48:13, 개역)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148:14, 개역)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149:1, 개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149:2, 개역)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지어다

(149:3, 개역)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4, 개역)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5, 개역)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149:6, 개역)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149:7, 개역)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149:8, 개역)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149:9, 개역)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어 왜 이러지????

 

이런식으로 거꾸로 150 149 148 147 146편으로 거꾸로 방향으로 보시면

구지 그렇게 안해도
(어차피 시간 속에 갇힌 자아의 시선에서는 역사를 거꾸로 볼수가 없기에-미래완료에서만 보는 불가능한 시선이기에)

 

열방 심판 과 열방이여 찬양하라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표현입니까?

열방을 심판한다는 말입니까? 열방이 찬양토록 하겠다는 말입니까?

 

더더욱 모순은 이미 찬양속에 들어왔다는 이스라엘 조차도

탈락케 만들어서 찬양을 못하도록 되는 경우도 염두하고 있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순의 모순을 반복하더라 말이죠.

 

자 그런데 이렇게 원인을 따지다 보면 답이 안나오더라 말이죠.

그래서 반칙으로 답을 미리 당겨봅시다.

답을 미리 보고서 문제를 다시 보게 되면

결과로써 보게 되면

 

즉 찬양 곧 새노래 속에서 보게 되면

즉 내가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이 나를 가지고 노래 부른 것을 보게 되면

 

열방이라고 해서 새노래 속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있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

또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새노래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있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


오히려 거꾸로 이스라엘이라도 새 노래 속에,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새노래 속에

찬양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찬양이 막아버리면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이스라엘 할배라고 해도 열방과 마찬가지이고 (단절)

또 열방이라고 해서, 단절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밖이라서 마땅히 심판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새노래가 덮쳐지면 곧 주님을 찬양 아니 하고는 못배기는

 

시온의 백성으로써 새노래 속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바로

새노래가 벌리는 찬양사건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손해 보시는 것 있나요? 전혀 없어요 오히려 더 풍성해요
아무리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우상의 본부,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도
주님은 이스라엘이 포기해 버린 예루살렘을 포기 하지 않으신다 말이죠.
아무리 개판 만들어서 손 쓸수 없게 해 본들
결국 그렇게 만든 이스라엘 너거들 손해이다 라는 겁니다.
열방으로 채워버리니까 말이죠.
열방이 주님을 찬양할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그것도 누구 코 앞에서 찬양?

마귀 앞에서 말이죠.
마귀 보란 긋이 말이죠.

이스라엘도 못하는 찬양을

죄인 중의 괴수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명이 주께 감사하더라 말이죠.

나머지 9명은 예루살렘으로 드디어 교리 실천할려고 들어가고 말이죠.

그 동안 교회에 문둥병자라서 못 들어갔는데

이제 드디어 정결해 졌으니 들어가더라 말이죠.

들어가서 기껏 하는 것이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이 원수이니까 찬양을 못하는 겁니다.

우상숭배자 이니까 말이죠.

 

우상은 반드시 실상과 대조를 이루면서 설명이 됩니다.

그 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저런 의문의 번제와 제사라는 꾀임에 빠지냐 말이죠.

이런 우상이 서거든

여호와의 산으로 도망치라 라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9명이 아니라

한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로

시온산으로 도망쳤다 말이죠.

피할 바위로 숨었다 말이죠.

 

서머나교회처럼 누가 봐도 가난하나 실상은 부요하다 라는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이 입혀진거다 말이죠.

 

그래서 이 찬송의 옷이 미리 준비가 되어 있기에

베드로는 마귀에가 잡혀 오도록 되어 있어

찬송의 옷을 입힘으로써 마귀가 물러가는 겁니다.

무엇이 또렷하냐 말이죠?

예수님 세 번 부인 하지 않은 것이 또렷합니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차라리 속물이 되세요

누가 자기를 자꾸 속물로 보는데

그거 은혜 받은 겁니다.

아무나 자기자신을 속물로 보는 자가 없다 말이죠.

은혜 받아야 속물인줄 압니다.

속물 안 되면

언제 속물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우찌 삽니까?

그래서 바로 답장을 했는데

답장을 아직 확인하지 않았더군요.

아무튼 우리 모두가 속물이 된 것을 감사합시다.

십자가가 또렷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주님의 조치였음을 말이죠.

 

이것이 원수 앞에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나 같은 벌레 속물도 용서하시는 십자가 사랑 말이죠.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는게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 안식이 뭔가를 보여주듯이

인간이 찬양을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인간의 찬양은 원수 보수를 들추어낼수가 없으니까 새노래가 안되는 거죠.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있다 말이죠.

 

새노래 스스로가 벌리는 찬양사건이 바로 원수를 들추어냄으로써

찬양사건이 바로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경건치 않을 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그 의를 믿는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야 말로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것인데

믿음을 놀랍게도 교리화 논리화 하는

말이 되게끔 하겠다는 겁니다.

곧 그것은 없는 자아를

자아를 투사해서 자아를 말이 되겠끔

우상을 말이 되겠끔 하겠다는 거죠.

 

바로 이 우상을 철퇴로 부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못 박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저 세리 저 예수와 같이 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말이죠.

 

어쩌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저들은 저주 받았지만 나는 저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 말이죠

심지어 그것을 예수님까지 끌어들여서 자아의 옳음을 주장하다가

우상이 옳았다고 주장하다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인 우상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우상과 한 세트로써 우상을 부수는 예수님에게까지 잘못 들이대더라 말이죠.

육을 자랑하다가 육을 부수는 임자를 만나버린 거죠.

 

우짜노? 그 다음은 니 차례인데 우찌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저 세리와 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자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너가 그 다음 차례인데 우짜노?

 

그래서 에라이 그 다음은 내가 아니라 예수 너다 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말이죠.

드디어 거리끼는 걸림돌을 빼버렸다 말이죠.

눈에 티끌 눈에 가시를 빼 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빠지기는커녕 분명 뺏는데 더 깊숙이 박혀 있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감사할수 있겠냐 라고 묻는다 말이죠?

누가? 십자가가

누가? 새노래가

 

찬양하겠다고 한 것이 도리어 미워하고 살인하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한 입에서 두 가지가 나오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이 모순을 무슨 수로 극복하실래예?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을 찾고자 하는 자아의 우상성이다는 겁니다.

이 우상을 타파 해주시겠다고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영광

우리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이 걸림돌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자아를 부수어 주니까 말이죠.

열방이란 우상 숭배자를 일컫는 대표성이고

이스라엘이란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의 대표성인데

 

그것이

뒤 바뀌더라 말이죠.

 

누가 봐도 개같은 이방인은 유대인 말마따나

주님을 영접 안해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영접하고

오히려 주님은 당연히 영접해야 하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자랑을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 자랑이

죽여도 또 살아나고

그래서 또 죽이면 또 살아나고

졸지에 밑도 끝도 없는 반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말이죠.

 

9명의 이스라엘 백성인 문둥병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한 명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겁니다.

 

99마리 양은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

바로 찬양사건이다 말이죠.

 

찬양이란 말도 안되는 겁니다.

말 되겠끔 찬양하는 것은 그냥 노래이고

세상노래처럼 말이죠.

모조리 자기를 위한 노래이고

새노래는 말도 안되는 저 십자가의 피용서를 노래하는 겁니다.

죄인 밖에 못 불러요 글쎄 ~~~~~

바로 이런 말도 안되는 사건 자체가 바로 새노래 이다 말이죠.

 

즉 오로지 시온의 거민만이 부르는 노래가 새노래인데

왜 시온인가?

거기가 한 인물이 등장하거든요.

바로 남겨진 씨다 말이죠.

 


씨 곧 자손 후손이라는 개념은

나의 우상성을 깨뜨려주는 것은 믿음이라는

후손으로써 오는 겁니다.

 

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생각나죠.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공명을 말하는데 즉 짝꿍인데

후손이 죽어야만

부정한 내가 사는 것인데(노아언약- 성결제사)

이것을 믿느냐 라는 겁니다.

 

동행이 뭐라고 했지요?

동행이란

다윗 과 다윗의 자손이 함께 하는 겁니다.(임마누엘)

그럼 다윗은 의로운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않은 죄인으로써

이 다윗을 살리는

다윗의 자손 곧 아브라함의 자식인 이삭이 죽어야만 하는데 있어서

이 죽음에 아브라함이 동참 되는 겁니다. 이삭을 바치는 겁니다.

 

이것을 유명한 목사가 인신제사라는 안목에서 벗어날수가 없어서

도저히 이 부분만은 목사로써

목사로써 도저히 교인들이 따라할까봐 그대로 증거했다가는

큰일 날까 싶어서 본인이 너무 믿음이 좋아서

본인이 교인들을 책임져야만 하는 목사로써 책임감을 느껴서

이 부분을 빼버리고

성경 속에서 삭제 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남기더라 말이죠.

이거 빼면요 성경 전체를 삭제하는 것인데

이 얼룩을 무슨 수로 빼시겠습니까?

 

이 얼룩을 자랑을 못해요 글쎄

 

그러니 그 동안 그 목사는 말이 되는 성경만 증거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대표성으로 발람 거짓선지자를

인간 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추구한 거짓선지자로써

대표성으로 발람을 언급하는 겁니다.

혼합주의 이다 말이죠.

동행을 인간 쪽에서 말이 되겠끔 구상하는 거짓선지자의 대표성으로써 말이죠.

사람을 위한 선지자 이다는 겁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

 

그러니 동행 곧 함께하심이라는 임마누엘을 이사야가

너희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다고

 

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이스라엘 속에서 외친다 말이죠.

 

맞아 죽어도 싼 소리를 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교회에서 외친다는 것은 맞아 죽을 소리 이다 말이죠.

왜 안 쫏겨나는지 의심해야 한다 말이죠.

 

결국 피로사신 교회에서는 반드시 이 문제가 반드시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하는 기능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발람의 꾀를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과의 동행 방법을 구상한 자가 발람이다 라고 말이죠.

교회자체가 이런 기능을 상실해 버린다면

그저 존재로써의 교회는 오로지 사람을 위한 자들의 모임 동아리로 자리할 뿐인

피로 사신 교회와 대조를 이루는 사단의 회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럼 이 발람의 결과는 뭐냐? 바로 우상입니다.

자아를 위한 예수요 하나님이요 십자가를 구상하는 것

 

그래서 오늘 이 시온산과 우상을 대조 시키면서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다니엘서에 가증한 물건이 서거든 산으로 도망쳐라 라고 한다 말이죠

 

(24:14, 개역)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24:15,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 9:27; 11:31; 12:11

(24:15, 공동)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들어라.) / 다니 9:27, 11:31, 12:11.

 

(9:27, 개역)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9:27, 새번역)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11:31, 개역)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11:31, 새번역)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지역을 더럽힐 것이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12:11, 개역)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11, 새번역)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없어지고, 혐오감을 주는 흉측한 것이 세워질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지나갈 것이다.

 

(11:3, 개역)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2:6, 개역)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11, 공동) 정기 제사가 폐지되고 파괴자의 우상이 선 다음 일천이백구십 일이 지나야 끝이 온다.

(11:3, 공동) 나는 내 두 증인을 세우고 그들에게 베옷을 입혀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을 하게 하겠다."

 

아니 산으로 도망치면 가증한 물건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좁은 길, 좁은 문으로만 다니면 구원이 될까요?

심지어 산상수훈 속에 좁은 문으로 가라 라고 되어 있네요

 

(7:13,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개역)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7:15, 개역)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산상수훈 하면 성화론자들이 이거 지킬려고 눈에 불 키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놈들이 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말이죠.

저 세리와 같이 미신 따위나 믿고

그런 미신을 행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들 아닙니까?

 

산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옆 동네 앞산 뒷산

조금만 도심지에서 벗어나면 있는 그런 높은 산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시한 산이 아니라

가장 높은 산입니다.

 

아 그럼 에베레스트로 도망가라?

무슨 수로 비행기타고 거기까지 높이 올라가야 합니까?

적어도 전문 훈련을 엄청해야 하고

안그러면 올라가다 중간에서 다 탈락하고

올라가지도 못하고 중도에 다 죽어나갈텐데 말이죠.

무슨 수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냐 말이죠?

 

가장 높은 산을 말이죠. 어떻게?

 

모든 산 위에 산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고서는

우상 때문에

졸지에 저 바위 틈으로 피신하라고 하더라 말이죠.

가장 높은 산에 피신하러 바위에 피신하라 라고 말이죠.

 

정말 말도 안되는 모순덩어리로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동행입니다.

바로 볼품 없고 싫어버린바 된 예수님이라는 산에 올라가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무슨 수로 올라타서 올라가냐 말이죠.

 

결국 여호와의 산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아무리 봐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닌데

왜 높은 산이죠

세상의 중심인 시온 산이 바로 예수님 임을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산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왜 가장 높은 산이자 피할 바위 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종말로 몰아가버리는 겁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종말로 몰아가 버려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팔아넘겨요 글쎄

 

그래야 예수님과 우상이 또렷하게 구분 된다 말이죠.

이 구별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결국 우상이 한세트로써 동원이 되어야

그 차이로 이해가 됩니다.

 

우상의 특징은 발람의 꾀처럼

또는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우상처럼

인간 쪽에서 동행하겠다고 나서거나

또는 때려죽어도 바뀌지 않는

기존을 것을 그대로 들고 들어오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번제와 제사라는 속성

가장 역사적인 시스템

종묘 사직

종묘 국가이데올로기 제사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정신이 지배하는

사직 경제 풍성 염원 제사 돌이 떡덩이 되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할 수 있도록 축복이 넘쳐 나는

이 종묘와 사직이 함쳐져서 제 일의 국가가 되는 온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이 우상의 나라 허상을 심는, 인간의 꾀가 담겨진. 그 속임수를 꾀라고 여기지 않고 지혜라고 여기는 저 어리석음의 반복

 

이 의문의 반복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말이죠.

 

그 변하지 않는 속성의 차이로써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옴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율법이 이 허상을 박살내고

곧 율법이라는 거룩이 시온에서 나오고 곧 예수님이 시온에서 나오고

다윗을 뜯어내는 다윗을 바닥 뜯어내는 그 거룩이

그 다윗의 자손이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나오고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 성취가

바로 예루살렘에서 나타나는데 있어서

 

우상을 철퇴로 부수는 십자가(약속 성취)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상대적은 어두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우상의 속성을 보여주는 자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우상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겁니다. 한 세트로써

 

결국 예수님 홀로 영광 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심판 속으로 들어가야

그 불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덩실 덩실 춤추는 동행을 하는 겁니다.

새노래는 이 불속에서 이 심판 속에서

주와 함께 부르는 겁니다.

 

(2:10, 개역)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2:11, 개역)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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