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인생(우상)을 의지하지 말라 (2:12-22)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2:12, 개역)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2:13, 개역)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2:14, 개역)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2:15, 개역)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2:16, 개역) 다시스의 모든 배와 보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2:17, 개역)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2:18, 개역)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2:19, 개역)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20, 개역)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2:21, 개역)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2:12, 새번역) 그 날은 만군의 주님께서 준비하셨다.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 모든 오만한 자들이 낮아지는 날이다.

(2:13, 새번역) 또 그 날은, 높이 치솟은 레바논의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2:14, 새번역)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언덕과,

(2:15, 새번역)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튼튼한 성벽과,

(2:16, 새번역) 『㉢다시스의 모든 배와, 탐스러운 모든 조각물이 다 낮아지는 날이다. / 또는 '모든 무역선과'

(2:17, 새번역) 그 날에, 인간의 거만이 꺾이고, 사람의 거드름은 풀이 죽을 것이다.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2:18, 새번역) 우상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2:19, 새번역) 그 때에 사람들이, 땅을 뒤흔들며 일어나시는 주님의 그 두렵고 찬란한 영광 앞에서 피하여, 바위 동굴과 땅굴로 들어갈 것이다.

(2:20,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배하려고 만든 은 우상과 금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 버릴 것이다.

(2:21, 새번역) 땅을 뒤흔들며 일어나시는 주님의 그 두렵고 찬란한 영광 앞에서 피하여, 바위 구멍과 바위 틈으로 들어갈 것이다.

(2:22, 새번역)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성경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단 한 군데도 말이 되는 곳이 없습니다.

모조리 전부다 말도 안되는 내용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라고 말이죠.

결국 이 말은 죽으라 라는 소리와 같다 말이죠.

 

즉 성경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죄인 곧 정녕죽으리라 라는 말씀대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녕죽으리라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생을 쳐다 보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것인가를 쳐다 보고 말이죠.

 

이런 높은 마음을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전쟁을 여호와는 쉼 없이 벌리고 있습니다.

이국종 교수처럼 사비를 털어서라도 죽음과 사투를 매일 매일 벌리는 전쟁을 말이죠.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을 피하기 위해서

더더욱 인간이 신앙을 가질려고 하고 있고

이것은 결국 인생을 의지하기 때문이지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신앙 조차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이죠.

 

즉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하시냐 말이죠.

어차피 이 말씀을 지킬자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죠.

 

결국 주님과 우리는 늘 항상 동떨어진 별개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반대로 늘 항상 함께 주와 함께하고 있다고 마약으로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종교는 마약이니까 말이죠. 짐승의 수 666이다 말이죠.

마약은 소통이 가능하고 매매가 가능하지만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을 땅에 파 묻어 버릴려고 한다 말이죠.

 

자 그런 입장에서 주님을 나의 쪽으로 끌어들일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는 자체가

주님이 자신의 쪽으로 우리를 땡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나의 쪽으로 땡기는 이 우상성과 그런 인생과

차이로써 주님이 자신의 쪽으로 우리는 땡기는 입장에서

우리는 왜 불가능한 말씀만 하시는가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즉 그 어떤 인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주님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다르구나

너무 너무 차이가 나는 구나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구나

어떤 이는 주님께 가까이 가보겠다고 별에 별짖으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른다거나

스스로의 고행길로 가거나 해도

 

택도 없는 것임을

 

주님이 직접 내려오심으로 통해서 다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충돌을 맞이한 자를 통해서

우리는 왜 이런 말씀을

왜 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느냐 라고 합니다.

어디 부자청년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도 그렇고

모든 인생이 그렇게 묻습니다.

헛된 인생들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물어요 글쎄

 

정녕 죽으리라를 어떻게 해서든 피하는 식인 인간의 꾀를

또렷하게 밝히 보여줌으로써 누가 너를 꾀는지 보라는 겁니다.

 

(19:16, 개역)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7, 개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8, 개역)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결국 모든 사람들의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냐

영생을 얻을 수 있냐 라는 겁니다.

인간이 눈뜨고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목적과 이유가

결국 이것 하나 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단 하나입니다.

죽어라 입니다.

물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나온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이 구원받기를 바라지 말아라 라는 겁니다.

그 인생이 허구이다는 겁니다.

 

그럼으로 너는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겁니다.

영생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한일을 쌓고 쌓아서 영원한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을려고 했다 말이죠.

그래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냐고 묻습니다.

부족분을 채우겠다는 겁니다. 영생을 얻는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 증거가 부자 된 것 조차도 그런 이유이니까

가능한 것으로 본 겁니다.

 

(19:16, 개역)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9:18, 개역)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19:19,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9:20, 개역)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19: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19:22, 개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19:2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율법사가 영생을 어떻게 얻냐 라고 묻습니다.

여기에서도 어린아이를 대조 시키십니다.

즉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이 옳다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 곧 어리석고 미련한 무능한자입니다.

 

먼저된 어른들은 나중 되고

나중된 아이들은 먼저 되는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셨다 말이죠.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또 역시나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위의 마태 19장 마가 10장처럼

 

어린아이를 언급 하시고 이런 자의 것이다 라고

그리고 부자청년 이야기 하시고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 하는 것이 더 쉽다고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인자가 죽임을 당해 삼일만에 살아나는데

세상은 본격적으로 너희들을 미워한다는 내용으로

 

어린아이 부자청년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항상 성경은 말도 안되게 대조 시킵니다.

가장 가난한 거지 중에 상 거지인 서머나 교회와

세상을 쥐락펴락 하는 가장 부자인 유대인 곧 사단의 회와 대조를 하듯이

 

좀 우열이 비슷한 것과 대조를 하면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일반인 성인과 거인 골리앗도 아니고

어린아이 소년과 거인 골리앗을 대조 시켜요

누가 더 부끄럽겠습니까? 사울 왕 아니겠습니까?

외부 싸움이 아니라, 내부싸움을 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너무 너무 비겁합니다.

아니 비교할 것이 없어서

가장 높은 자와 가장 낮은 자를 대조 하시냐 말이죠?

 

(2:11, 개역)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2:12, 개역)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이 부분을 보자 마자

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즉 우상은 사람들이 가치를 두는 것이 높은 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2:14, 개역)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2:15, 개역)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2:16, 개역) 다시스의 모든 배와 보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2:17, 개역)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그래서 가증한 물건 곧 높은 것이 거룩한 곳에 서거든 도망치라 라고 하셨다 말이죠.

그 도망치는 곳이

더 높은 산 곧 절대 산 곧 시온산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장 높은 산이더라 말이죠.

 

그런데 알고보니 오늘 언급한 4 복음서 에 나오는 어린아이 에게 피하라 라고 된다 말이죠.

어린아이가 높은 산입니까? 오히려 낮은 산 아닙니까?

 

부자청년에게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라 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가 높은 산으로 보입니까?

아마 높은 산으로 보였다면 전 재산을 나누어 주어도 아깝지 않고

남의 재산 까지 뺴앗아 나누어 줄려고 할 껍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가난한 자가 높은 산으로 안 보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의지 하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를 쳐다 보지 않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보라 라고 하면

누가 쳐다보겠습니까?

정녕 죽으리라를 누가 쳐다 보겠냐 말이죠.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불뱀 물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생을 의지합니다.

 

두 강도 중에 한 쪽 강도는

예수님과 다른 강도의 대화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죽는 마당에 무슨 놈의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느냐 말이죠?

 

아니 죽는 마당이니까 말이 되는 것이 무슨 놈의 소용이 있겠냐 말이죠?

 

둘 다 두 소욕을 서로 못하게 하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소위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자

곧 오늘 본문 언급한 4복음서의 내용처럼

어찌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어찌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자를 보세요

물론 우리 자신이지요?

소위 신앙을 가졌다는 자들

 

이런 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낮은 자 라고 우기지만

정작 예수님이 대조시키는 인물 앞에서는

가장 높은 자가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럼 또 인간의 꾀로 자신을 그 사람보다 낮은 자로

조건을 갖추면

주님은 또 더 낮은 자를 대조 시켜 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 자신을 대조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뭘 해도 죄인인 정녕 죽어야 하는 자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나를 뭘해도 가장 높은 자로 설정해 놓고서

그런 나와 대조시켜서 나를 기준으로 해서 가장 낮은 자를 대조 시켜 버리면

졸지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이게 참 희한해요

내가 가장 약한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내미시는 패의 인물은

나를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물증을 내밀어 버리는 겁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

 

이게 믿음이예요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이라고

원한 풀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은 내가 무시하는 닭의 울음으로 찾아오시는 겁니다.

닭이 울어주지 않으면 내가 나의 인생을 자꾸 수에 칠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에서 못 벗어나더라 말이죠.

어린아이 라는 무능하고 무시받는 인생 자체가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

꺽으신 뼈가 아니면

저 지옥가는 자들과 다를바 없이 그 속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는 갇혀있음을 모른다 말이죠.

우상에서 못 벗어나요.

 

? 진짜 믿음을 들이대시니까

모조리 가짜로

우상으로

헛것으로 드러나 버리는 겁니다.

 

율법 네 배나 갚으라 왜?

자기는 구원 받으야 하니까

율법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다윗에게 다윗의 자손을 들이대시는 겁니다.

? 하나님을 들이대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언급하시는게 아니라

다윗의 자손을 들이대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언급합니다.

 

그 다윗의 자손이 바로 꺽으신 뼈 곧 이름도 없이 죽어나간 어린 아이입니다.

 

곧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증상물로써

그 기능으로써 아이의 죽음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꺽으신 뼈입니다.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말이 되나요?

이사야 에서는 남겨진 씨 곧 남겨진 후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이 꺾으신 뼈가 아니면

내가 우상 숭배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우상 숭배자인 것 조차도 모른다 말이죠.

 

? 인생을 의지하고 있거든요.

전신에 모조리 다 묻는 말

 

예수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곧 구원을 얻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자체가

인생을 의지하고 있는

곧 우상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헛것에 빠져 있다 라고 말이죠.

 

믿음은 이 우상을 깨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말이죠.

그런데 우상을 깨는

원수에 대한 복수를 너 자신이 직접 하라 라고 하는 것이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이다 말이죠.

이것이 사단의 깊은 것입니다.

우상은 결국 원수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가 직접 원수 갚고자 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에게 맡기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동행

곧 다윗과 다윗의 자손의 동행이다 말이죠.

다윗이라는 우상을 깨는 것은 다윗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가룟유다가 된다 말이죠. 자살

아브람을 깨는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다 말이죠.

후손이다 말이죠. 육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허리에서 나오는 다윗의 주입니다.

어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냐 말이죠?

육체의 법칙에서는 말이 안되죠?

그런데 믿음이란 그런 육체의 선악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반대로 허리에서 난 자인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가 없는 분이

대신 죽어야만 살아나는 겁니다.

아니 왜죠? 우상이니까 말이죠.

 

탐심을 죽이게 되면

우상을 내 손으로 죽이게 되면

그 우상을 죽인 내가 또 우상이 된다 말이죠.

처음부터 우상은 나 였는데 내가 나를 죽이는

속임수, 꾀가 먹혀드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데

그 속임수를 펼치냐 말이죠.

주님은 타짜입니다.

자신의 손모가지 아니 진짜 모가지를 걸고 옆에 도끼를 두고서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서

그 속임수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다고 우겨도

지혜롭고 슬기로움의 조건을 갖추어서

정 안되면 우리 중에 가장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를 내세워 예수님에게 질문 했어도

부자청년처럼

율법사처럼 물었다 손 치더라도

 

우상숭배자임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심지어 그 헛것인 인생을 세상에나 천국에까지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하면 되냐고? 선한 일 할까요?

율법 큰 계명 두 계명 지킬까요?

남을 7번 용서할까요?

 

모조리 말씀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3가지 시험으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켜라 라고 합니다.

3가지가 모두다 말씀에 있거든요.

 

돌이 떡 되게 이거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아니냐 말이죠.

유대교 자체가 기적의 종교이니까 말이죠.

역사적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장 역사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죠.

 

가장 높은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시편 91편의 내용이고요.

 

그리고 온 천하 만국을 줄테니 절하라 시편 2편이다 말이죠.

너는 내 아들이라 모든 원수를 철퇴로 부수는 온 천하만국을 얻게 해 주마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말씀을 지키라 라고 한다 말이죠.

몰랐죠?

마귀가 말씀을 지키래요 글쎄

 

그러니 광명한 천사죠.

 

말씀을 지키라는 소리를 마귀가 할 줄 몰랐죠?

 

이런 마귀에게 장악당한 유대인들에

자꾸 예수님한테 뭘 지킬까요? 뭘 할까요? 자꾸 묻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예수님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십니다.

즉 못 지키는 자를 대조 시켜버리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 여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

또는 무능한 어인아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창녀와 세리와 강도 등 죄인의 친구로써

 

한 마디로 말해서 말씀을 지킨다고 볼 수 없는 자들만 골라서 저들과 대조를 시켜 버리는 겁니다.

 

아니 비슷한 자와 왜 하지 않나요?

말문이 막히죠

바로 그겁니다.

말 문이 막히도록 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철천지 원수이고

어린아이 중에 인생을 논하는 자 있습니까?

 

철학이 웃끼게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세뇌 시키더라 말이죠.

꼴에 어린아이를 언급한 니체가 졸지에 현대인들에게 대안 인냥 인기를 끌더라 말이죠.

 

정신분열의 세상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다.

바보로 살지 않기 위해서 바보가 되자 라고 말이죠.

오죽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을 질질질 끌수가 없을 정도인

막다른 절벽에 놓여진 것이다고 본 거죠.

 

그런 잔머리가

세상에는 먹혀들지 몰라도

예수님에게는 안 통해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는 안 통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는 안 통해요 글쎄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흡이 코에 있다 라고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좀 있어 보이는 표현인데

막상 그 호흡이 코에 있다 라고 하니까

뭔가 느낌이 팍 떨어지면서 뭐지? 무슨 뜻이지 라고 느껴지더라 말이죠.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생 이라는 표현은 하도 귀하게 귀하게 취급하다 보니

코 라는 의미가 나오니까 그 귀하디 귀한 인생의 가치가 팍팍 떨어지다 못해

아예 이제는 수 라고 숫자에 칠수가 없다고 하더라 말이죠.

 

수에 칠 가치가 없는

 

더럽다고 해도 되고

죽었다고 해도 되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해도 되고

그런 표현으로써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에서 그 의미가 그냥 땅바닥으로 추락을 해 버리더라 말이죠.

 

초등학문인 철학이 인생을 이렇게 다루던가요?

 

웃끼게도 철학자를 살펴보면

아주 아주 자극적인 의미로써 사고의 지평을 넓히면서

상당히 불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쓰면서 인기를 끌고 있던데

아주 간단하게 왜 그러는 너는 저들과 싸우지 않냐 라는

일반인의 질문에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철학으로 피하더라 말이죠.

아무리 실천을 강조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피해요.

 

철학자들의 사상을 조금만 들어보면

말만 어려운 용어를 썻다 뿐이지

전형적인 거짓선지자의 주장들과 같아요.

 

예수님과 충돌했던 바리새인이나

마귀의 사상과 그야말로 딱 떨어지더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해야 해요

 

어떤 목사는 절대로 철학에 물든면 안된다고 철학을 공부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본인이 거짓선지자가 아니다고 여기니까 말이죠.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방금 말한 그 목사처럼

자기자신이 어떻게 사기를 치는지를 몰라요.

철학 공부 하지 말라고 사기를 치는 겁니다.

 

인생을 의지하는 철학자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사기를 치는 목사더라 말이죠.

 

어린아이를 보세요

인생이 없어요.

무슨 놈의 인생이 있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하겠냐 말이죠.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습니끼 라고 어린아이는 물을 필요 조차 없는 겁니다.

구원을 어떻게 하면 얻습니까 라고 묻는 어린아이는 없다 말이죠.

 

왜죠?

 

어린아이는 그야 말로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그 호흡이 코에 있음을 아주 노골적으로 누구든지 볼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새새 거리면서 자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면

너무 너무 약해서

모든 소리가 저 새새 거리는 소리가 전부인 것처럼 보여요

 

새새 거리면서 잠 자는 아이의 모습이 말이죠.

 

그래서인지 심지어 아예 숫자에도 쳐 주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한 자 아니냐 말이죠.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애들은 가라

 

? 숫자 라고 매길 가치가 없거든요.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린아이 이다 말이죠.

 

뭐 순수하니까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가 아닙니다.

순수가 아니라 ㅋㅋㅋㅋ

 

무시 받는 자가 어린아이 이다 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처럼

허무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어린아이 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하지 말라 말이죠.

니고데모가 무슨 수로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냐고 묻잖아요.

그것마저도 할려고 할꺼다 말이죠.

오늘날 현대과학을 이용해서 할려는 자들이 많을 꺼다 말이죠.

 

성령이 어린아이처럼 무능하게 만들지

자기 스스로가 무능하게 될려고 하지 말아라 말이죠.

성령이 사단의 가시를 푹 찌르는

사건이 덮치면

주님이 땡기신다 말이죠.

 

갓난아기 4명이 병원에서 죽었잖아요.

 

왜 죽었겠습니까?

 

귀한 가치가 부모에게만 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어요.

돈이 가치가 있지

돈 때문에 일하는 거지

어린아이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말이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숨결 하나 하나를 지켜보면서

귀하게 취급했을까요?

 

새근 새근 새새 거리는 그 코의 호흡을 듣고

생명을 얻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앞으로 귀하게 취급하자 라고 해서

귀한취급하기를 실천한다고 칩시다

오래 못가요

 

앞으로 자주 발생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 이구요.

오히려 첫 출발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든 인생이 달려들어서 막아보겠다고 나서본들 소용이 없어요.

 

남들은 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장지져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이 동행입니다.

다윗과 다윗의 자손

 

제가 표현을 좀 어렵게 아니 좀 말이 안되게 표현해 볼께요.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다시 다르게 표현하면

 

귀하디 귀한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호흡이 코에 있는 헐떡 헐떡 거리는 어린아이의 죽음이

귀한 인생을 붙잡고 있는 나를 살리더라 말이죠.

그래서 귀하디 귀한 꼭 붙잡고 절대로 손놓지 않는 인생을 손 놓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동행

나 다윗 속에 다윗의 자손이 산다 말이죠.

내 속에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 께서 사신다 말이죠.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다윗은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고 행복을 외칩니다.

 

다윗의 인생이 귀해서?

아니요 비로소 그 귀하디 귀한 인생이라는 것이

헛깨비 우상

모래 위에 짖는 집

부질없는 허무

먼지덩어리 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이죠.

 

(21:1, 개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2, 개역)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제 무서울 것이 없어요.

세상의 비난도 안 두려워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신부

곧 신랑의 증상물이다 라는 겁니다.

 

아이의 죽음이 자기를 살렸거든요.

그 살아난 자기의 목숨을

전에는 귀하디 귀해서 절대로 죽으면 안되는 목숨이였는데

 

이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 없는 목숨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

곧 다윗의 후손의 죽음이 덮쳐진 자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생을 두려워 하는게 아니라

귀하게 여기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천하게 취급해 버리고 헛것이라고 우상이라고 여겨버리고

 

오히려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어린아이 양을 귀하디 귀하게 여기더라 말이죠.

다른 기쁨이 없어요.

이 꺽으신 뼈로만 기뻐해요

 

이것을 배울수도 또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새노래 라고 했습니다.

 

기존의 노래와는 차원이 틀려요

기존의 노래는

내 인생이 귀해서 나오는 노래였는데

 

새노래는 인생이 하나도 귀하지 않아서

오히려 인생의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진 대조로 말이죠.

꺽으신 뼈를 노래하는 것이 졸지에

밝히 보이는 귀하디 귀한 것이 되었다 말이죠.

 

그러니 세상이 이 새노래(십자가의 복음)을 들으면 춤을 출까요?

절대로 안 춥니까 시끄럽다고 듣기 싫다고 쫏아내고 죽여 버립니다.

 

바로 이겁니다 빨리 죽어줍시다

뭐가 아쉬워서 인생을 의지하면서 남을려고 합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아냐 아냐 너의 인생은 귀해 라고

철학자와

목사와

심지어 땡중(교리 플러스 실천)

카톨릭 신부, 사제? 간호사들 춤추는 것 보고 자신이 귀한 인생이라고 우기는 그 사제? 수녀?

 

모조리 다들 헛것을 쫏고 있는 겁니다.

 

무슨 수로 빠져나오실래요?

귀하디 귀한 인생이 거기 있는데

그거 손 놓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너무 귀한데?

 

또 어린아이 또 죽어야 합니까?

주님은 과감하십니다.

어린아이 죽여서라도 빼내시겠다면 빼내십니다.

 

그 정도로 너의 인생이 가치가 없기에

너가 가치 없게 여기는 어린아이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이삭 제사로 했지요.

행함이 있는 믿음

 

무식하게 행함이 있는 믿음 이라고 하니까

죽은 믿음이 안 될려고 다 따라해요

다행히 목사들이 해석을 할 줄 몰라서

참으로 다행히도 못 지키더라 말이죠.

 

맞습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지키는 것은 오히려 누구다?

마귀 예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말씀 지키라고 얼마나 달려 드느냐 말이죠.

저마다 구원 얻고자

영생 얻고자

말씀을 지켰다는 단서를 들고 오더라 말이죠.

 

이게 우상숭배자 들이다 말이죠.

개혁주의 성화론자들

다 우상 숭배자들인

마귀 자식들입니다.

 

말씀 지키지 마세요

그냥 인정하세요

못 지킨다고

못 지키면 당연히 심판 받아 죽어 마땅한 자가 되는 거죠.

맞습니다. 심판 받아 죽어 마땅한

수에 칠 가치가 없는 놈이 비로소 되는 겁니다.

 

말씀도 지킨 적도 없는 막사는 놈이

무슨 수로 번제와 제사를 지킵니까?

 

오로지 어린아이처럼 인애와 자비를 바랄 뿐이지요.

 

어린아이의 죽음이 나를 무가치한 나를 살렸듯이

이제 나의 죽음으로 이 어린아이를 살리는 겁니다.

 

이것이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헛것에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지 않는 겁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 얻냐고

영생을 얻냐 라고 묻지 맙시다.

 

철학은 이 물음으로 속이고 있습니다.

의문의 반복으로 장난쳐요

쳇바퀴 도는 것에 멈춤이 마침이 없어여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 상의 어린양의 외침을 여전히 무시합니다.

꺽으신 뼈로 기뻐하지 못해요

새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유리바다를 건너서 새노래를 할 수가 없어요.

 

새노래를 부르지도 못하는 자의 말을 말라고 듣냐 말이죠.

어떻게 속이는 줄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을 통해서

그 바리새인의 속임수를 같은 맥락에서 철학자들을 통해서

그 차이를 발견하면 됩니다.

 

우상은 절대로 약속을 못 지킨다 말이죠.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마침을 외칠수가 없어요.

마침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냐 말이죠.

의문의 증서를 드디어 찢어버리는

 

그래서 우상은 바뀜이 없다 말이죠. 새로움이 없어요.

여전히 과거의 것을 답습하듯이 습관화 시킨 그 몸을 여전히 끌고 오는 겁니다.

 

날로 날로 겉사람이 후패해야

날로 날로 속사람이 새로움을 볼 것 아니냐 말이죠.

 

우상이 부서지지 않는데 어떻게 새로움을 알겠냐 말이죠.

 

그래서 전남편인 율법과 이혼하지 않는 이상

새남편을 모르는 겁니다. 자유가 없어요.

막살수가 없어요.

 

율법이라는 의문의 증서를 여전히 계속해서 지켜야 해요.

지옥에 갈 자에게 여전히 지키도록 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천국에 갈 자에게는 더 이상 지킬 말씀이 더 이상 없다 말이죠.

다 이루었거든요.

막살자 라는 말이 진짜 복음인데

당연히 죽죠.

 

절대로 막살지 않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 한 복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으니

우릿 까지야 뭐 백부당 만부당 당연히 죽은거다 말이죠.

 

막살면 저들의 위계질서가 다 무너지는데

얼마나 두렵겠냐 말이죠.

더더욱 공포로 다가온다 말이죠.

 

?

어린아이의 죽음이 덮쳐지지 않았거든요.

 

세월호 부모 심지어 교인들도 있던데, 목사가 하는 말들을 대충 기사를 봐도

우상숭배자들이라서 사기를 치더라 말이죠.

그 속에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기타 종교인이나 일반인이다

차이가 없어요. 메시지는 같더라 말이죠.

다들 속일려고 달려들더라 말이죠.

 

누가 건방지게 그 4명이 아기의 죽음을 통해서

꺽으신 뼈로 기뻐하라 라고 외칠수 있겠냐 말이죠.

막사세요 라고 할 수 있겠냐 말이죠.

 

그랬다가는 mbc나 종편들이 세월호 가족들이 깡패들이라고

일베랑 합작해서 공격해 올텐데?????

 

막살기를 지키는 자들이 있어요 글쎄

그게 무슨 막사는 겁니까? 지키는 자 이지

 

막살기 라는 자유는

십자가의 죽음 밖에 없어요.

 

다윗이 비로소 다시는 회개 금식 기도 눈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더라 말이죠.

비로소 막 살더라 말이죠.

 

? 꺽으신 뼈가 다윗을 자유케 했거든요.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만이 막살아요.

자유로와요

 

새것이 아닌 자들은

곧 우상 숭배자들은

 

이전의 것

지나가는 것

사라지는 것을 지켜요 글쎄

 

의문의 증서를 찢어도 소용없요

본드로 붙여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어린아이는 자유롭게 죽어서 정작 다윗을 살렸는데

우상숭배에서 다윗을 빼내주었는데

인생을 의지하는 수에칠 가치가 없는 곳에서 빼내주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느냐 라고 할때에

 

예수님이 참으로 어리석게도

미련하게도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말이죠.

 

당연히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반드시 또 지키는 놈이 거의 없지만 0,00000001 프로 우연히 생겼다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은 구원을 얻을까요? 못 얻어요.

 

죽으라는 소리인데 어떻게 구원 얻습니까?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을려고 한 질문에

죽으라는 소리를 들은 것인데

지킬려고 하니 말이 되나요?

목사들에게 물어보세요

과연 그런 놈이 있는지

전 재산은 커녕 내돈 내돈 내돈 이라고 울부짖을 겁니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말이 아니라

막 살아라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자기자신의 인생을 귀하디 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봤으면

근심하고 등돌려요 글쎄 ~~~~~~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버렸다 말이죠.

전 재산도 못 바쳤고

율법을 어릴적부터 지킨 것도 가짜로 들통났고

아마 더더욱 우상숭배하지 않으면

저 예수님의 말씀을 떨쳐 낼수가 없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죽은거나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그 뒤의 삶이, 그 인생이 아무리 가치 있게

철학자들 말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아무리 지혜로 슬기로 살아도

 

지혜있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헛것인 우상과 또렷한 십자가의 죽음의 차이입니다.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 인생을 수에 칠 가치도 없게 만드시는 것이

오히려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라는 겁니다.

 

이 가장 나약한

허무한 죽음

어리석고 미련한 무능한 십자가의 죽음이

 

글쎄 가장 높은 애굽을 허무는 심판자였고

소돔과 고모라를 허물어 뜨린 심판이였다 말이죠.

 

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바로 처음사랑

말도 안되는 처음 사랑을

 

가버나움은 (유대인에게 기적을 베푼 곳으로써의 대표성)

또는 유대인 곧 이스라엘은

스스로 발로 차 버렸다는 겁니다.

처음사랑을 말이죠.

 

애들은 가라 라고 말이죠.

 

인애와 자비를 발로 차 버리고

나머지 9명 유대인은 문둥병을 고침받아서 번제와 제사를 이제 드리게 되었다고

예수님에게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의미를 스스로 발로 차 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나약한 어린아이

또는 무능자

또는 말씀을 도저히 지킬수 없는 개같은 이방인

또는 가장 원수 중에 원수인 사마리아인

특히 민족의 배신자인 매국노 세리

 

이들 죄인과 이들 막사는 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자유자로써

 

가장 높은 자들과 가장 낮은자를 대조시켜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새이스라엘을 다 이루셨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는 기존의 것을 다 뜯어내는 겁니다.

아무리 해도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이스라엘이 되었거든요.

무슨 수로 빠져나옵니까?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오히려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겁니다.

남겨진 씨로만 기뻐하는 겁니다.

샛별로만 기뻐하는 겁니다.

 

우상에서 벗어나게

나 라는 우상에게서 드디어 벗어나게 해주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등장했으니 말이죠.

 

이 꺽으신 뼈로

이 십자가의 피로 기뻐하는 겁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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