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충성하신 예수님의 서머나 교회를 섬기시는 사랑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 ( 2: 8-11)

사단이 회
, 유대인 이냐? vs 서머나 교회,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신 죽도록 충성하심 이냐

계 08 죽도록 충성하신 예수님 (계 2, 8-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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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 개역)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16:20, 개역)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16:21, 개역)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2, 개역)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개역)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개역)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16:25,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8, 개역)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개역)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2:10, 개역)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8, 새번역)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 또는 '천사'

(2:9, 새번역)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2:10, 새번역)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 , '월계관'

(2:11, 새번역)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지난 주에 짐승 666 이냐? 일곱교회 곧 주의 오른손이냐? 라는 의미로써

니골라 당과 에베소 교회의 처음사랑을 언급했습니다.

 

이 처음사랑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연히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가 생각나서

말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니골라당과

말이 안되는 처음사랑이 덮쳐진 에베소 교회의 차이를 살펴봤습니다.

 

그럼 오늘 사단의 회인 유대인과 서머나 교회의 차이점은 뭘까?

 

계시록은 앞으로 미래에 벌어진 미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 다 이루어진 바된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뭘 지키거나

또는 종말의 현상을 파악해서 피한다고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서 대비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그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떻게 다 이루었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사단의 회인 유대인과 서머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바로 지옥간 부자와 거지나사로를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이지만

이것이 실상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로써

탕자와 맏아들 비유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세 비유 3종 세트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 비유라는 열처녀 비유와

불의한 종과 충성된 종의 달란트 비유

그리고 염소와 양의 비유

 

바로 앞의 글에서 고아를 신원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예수님 곧 미래의 남겨진 씨로 인해서

일방적으로 원수로 취급당합니다.

? 무슨 이유로?

 

너는 내가 배고플 때 헐벗었을 때 목마를 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웁니다.

 

더 앞의 글에서 이것이 비밀이다고 했습니다.

즉 그거 전문가들이 바로 유대인 아니냐 말이죠.

남이 배고플 때 헐벗었을 때 목마를 때 해결사로써

최고의 전문가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말이죠.

 

즉 누가 봐도 양이지 염소가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염소와의 거리감을 더더욱 벌리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 와의 거리감을 더더욱 벌리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그런 일에

곧 배고픈 자 배불리도록 하고

헐벗은자 입을 것을 자기 속옷이라도 벗어주고

목마른 자 마실 것을 주는 일에

목숨 걸고 충성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다 말이죠.

 

그런데 양이 아니라 염소라고

아무도 그렇게 안 보는데

다들 양이라고 보는데

예수님 딸랑 혼자만 염소라고 보시는 겁니다.

이사야 딸랑 혼자만 예수님의 원수로 이스라엘을 보듯이 말이죠.

 

그 염소 비유가 바로 마태복음 25장 종말의 3종세트 비유에 나오는 겁니다.

종말이 뭡니까?

모든 시선이 뒤짚어 진다는 겁니다.

예상 못했다 말이죠.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반전이요 전복이다 말이죠.

 

(25:41, 개역)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25:42,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25:43, 개역)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25:44, 개역)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25:45, 개역)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6, 개역)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말씀이 매개체로 있어서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지키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말씀이라는 율법이

순종하도록

지키도록 내버려 두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모든 인간을 오히려 거꾸로 죄 아래로 가두더라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라는 고백을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회개를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죄 아래로 갇힌 자를 건질 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믿음

곧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거부하고

 

저들 사단의 회는 인간의 믿음을 곧 인간의 가치성

말씀이라는 중간 매개체를 지키면 지킬수록 인간의 가치성이 높아지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의 가치를 아예 무시해 버리고

아예 인정을 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단의 회가 있어요.

바로 개혁주의자들과 성화론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유대인처럼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로 여기시는 것에 반발하는 그 표정을

저는 성화론자들에게서 무지 무지 많이 직접 봤습니다.

 

다행히도 거기서 빼내주시는데 있어서

진짜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빼내주시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저 지옥에서 건져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

 

그렇게 주변의 많은 자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찬하는 그 교회가

지옥 곧 사단의 회 일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그들의 핵심교훈이 바로 경건 이거든요.

다른 말로 성화

그것도 저 수준 낮은 박땡선 목사의 성화론 쪽팔려서 하는

쪽팔리지 말자 라고 하는 그런 수준 낮은 성화가 아니라

아주 아주 수준 높은

 

고상하고 엘레강스하며 클래식 고전적인 정통을 따르는

그렇게 말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자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 답게 하자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게 사단의 회 이다 말이죠.

니골라 당이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조직으로 만들 듯이

인간의 가치를 높여서

무시 안 당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 안되는 처음사랑이란 오히려 무시 받죠.

처음사랑이기 때문에

말이 안되기 때문에

본인이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 인데

 

오히려 그 고아를 무시하고 과부는 무시하고 나그네를 무시하는

자기는 죽은 자가 아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거룩을 지킴으로써 나도 거룩해 지는

살아 있는 자이니까 누가 너의 거룩 곧 아버지 말씀을 단 하나도 어긴적 없는 나를

누가 나를 무시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저 탕자를

경건치 않는 탕 탕 방탕한 자

불의한 자

막사는 자를

금가락지를 끼워 주니까

 

비로소 경건하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마귀로 돌변하더라 말이죠.

 

마치 니골라 당처럼

저 금가락지라는 일만달란트 용서를 처음사랑을

빼버리고

십자가의 피 용서를 빼버리고

말이 되는 것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종교가 되어버린

666을 형성하는

말 안되는 것 빼버리고

말 되는 것으로 채워버리는

그 니골라 당처럼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그렇게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을 빼버리는 겁니다.

말 안되거든요.

 

말씀을 지키는 내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려면

말 안되는 것 빼야되요

그래야 내가 지킨 것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게 그들의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 정반대인 서머나 교회 곧 일곱교회는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임마누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멀쩡히 하나님의 계시가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유대인 속에서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할때에

십자가는 저들은 빼버리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오히려 저들이 거리껴 하는 십자가를 더더욱 자랑하는

아예 노래를 불러요 글쎄 그것이 바로 새노래

어린양의 피를 노래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노래한다 말이죠.

 

저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뿐더러

노래 할 수도 없어요.

오히려 거부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쓴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말도 안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노래 한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아 다윗이 그래서 행복했다는 겁니다.

보통 기쁨이 아니지요. 전혀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말이죠.

로마서 4장에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죄 용서 받았다고

말도 안되게 말이죠.

그것이 시편 이라는 노래로 나온다 말이죠.

그럼 유대인들이 달달달 어릴적부터 외운 시편은 뭡니까?

 

처음사랑으로써 말도 안되는 용서로써 노래한게 아니라

말이 되게 신앙을 지킬려고 했다는 겁니다.

시편을 글쎄 지킬려고 했다 말이죠.

그러니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을 죽일수 밖에요.

시편을 지키는 유대인 자신들을 예수님은 인정을 해 주지 않으시니까요.

 

자 그렇게 되니까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마귀에게 사로잡힌 바 된 줄도 모르고

교회 열심히

말씀 지키면서

성화 할려고 얼마나

경건주의를 추구했냐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정반대로 행한

음란한 짖이였다는 겁니다.

 

저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나왔으니 말이죠.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1,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8:11, 공동)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8:11, 쉬운) 바리새파 사람이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 즉 사기꾼, 죄인,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18:11, 킹흠정)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1, 현대인)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이 세무원과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18:11, 현대어)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이게 유대인이라는 사단의 회의 고백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짖을 멀리 멀리 했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고백이고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제대로 된 심판을 보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유대인의 거룩이 아닌

완벽한 거룩을 보고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보는 것이 바로

성전 저 미문 저 구석에서 우는

세리의 기도였다 말이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 일곱(심판의 주 이시자 완벽한 거룩한 분)에게 사로잡힌 교회 입니까?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4절이 기가막힙니다.

말 되는 신앙조직을 추구하겠다는 니골라당과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보기에

말이 됩니까?

 

누가 의롭습니까? 토색 즉 빼앗고 약탈하고 강도짖을 해서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도록 하는

저 매국노가 더 의롭다고 하신다 말이죠.

여기에 호국 불교도 반발할 것이고

독립운동하는 김구도 반발할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는

이 의롭지 않은 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

경건치 않은 자

불의한 자를

의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일만달란트 용서에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에

다들 달려들면서 안돼 라고 반발 할 것이다 말이죠.

 

자 그럼 서머나 교회의 모습은 저런 사단의 회인 유대인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야말로 거지 중에 상 거지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도 없는 상태가 거지 곧 죽은 자의 상태이다 말이죠.

 

더 웃끼게도 이런 거지 나사로가 되자

저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자 라고 자살한 목사가 주장했는데

거지 나사로가 되기는커녕 바리새인처럼 자살 하더라 말이죠.

너무 너무 바리새인이 되고 싶어서

 

아니 가만히 있어도 원래 우리들은 바리새인이다 말이죠.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는 그 갇혀진 그 속에서

우리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그 엉터리 속에서 못 벗어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우리를

경건치 않은 우리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일만달란트 용서는

오로지 피로 덮었다는 겁니다.

모든 허물을 덮어버리니까

의로워서 의가 아니라

의로 덮어버리니까

죄가 안보이는 겁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데 마귀는 자꾸 이 십자가의 피로 덮은 다 이루심을

자꾸 베드로에게 빠뜨려서 정죄 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베드로야 니 내 사랑하나?

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

곧 일곱이 일방적으로 물어봐 주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곧 베드로와 하나가 되시겠다고

바리새인을 타 넘고

마귀를 타 넘어서 오시는

넉넉히 이기시는 사랑이다 말이죠.

 

서머나 교회가 베드로처럼 마귀에게 탈탈탈 털려서

이제 거의 죽기 일부 직전인

아니 이미 벌써 죽어버린 자입니다.

 

그 죽은 베드로가 무슨 수로 죽도록 충성하며

무슨 수로 이 마귀를 이 음부의 권세를 이 죽음을 이기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죽은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으로써 다시 생기를 불어넣듯이

 

너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린 자는 마귀가 아니라 나 예수다 라고

내가 대신 채찍질 맞았다 그러니 너는 고침을 받아라 라고

 

경건치 않은 불의한 베드로를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자 이제 묻습니다.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을 일방적으로 퍼 붓습니다.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죠.

 

어머니께서 지난 주에

처음사랑이 언제 떨어졌는지 어떻게 아냐 라고 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질문이라서 일주일 내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처음 사랑이 과거이고

언제 떨어졌는지 잊었는지 라고 그 언제도 과거이고

모조리 다 시간적인 과거로 보고 있더라 말이죠.

 

아닙니다.

처음사랑은 미래입니다. 시간적인 것이 아닌

인물입니다.

그러니 언제 잊었냐 라는 것을 과거에서 찾아서 다시 기억해 낼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미래완료의 증상물로써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처음사랑이 아닌 거죠.

 

또 나는 그런 음성 안 들리는데 요???? 라고 또 물을 수 있겠지요?

 

그것은 자꾸 사단의 회인 유대인처럼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즉 내가 반드시 그 음성을 듣고 말리라 라고

자기 숙제로 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숙제에 놓여져서

숨쉬기를 해야지 해서 하는게 아니라

주님의 숙제로 인해

저절로 숨쉬고 있는 겁니다.

은혜죠 값없는 은혜

혹시 공기값 공기 세금 내셨나요?

공짜죠 그야말로 토색 약탈하듯이 먹고 있다고

바리새인이 정죄할 정도로 공짜로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꾸 조건에 맞게

말이 되게

내 머리에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볼게 아니라

모조리 다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으로써

모든 것이 주님의 대신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공짜요 은혜인 겁니다.

 

여러분 공짜에 목숨 거세요 ㅋㅋㅋㅋ

공짜에 충성하세요 머리가 벗겨지든 말든

주여 저 공짜 아니면 죽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처음사랑 아니면

주의 살과 피가 아니면 저 죽습니다 라고

 

세리가 기도했듯이 말이죠.

 

이것이 서머나 교회의 고백으로

바로 예수님께서 오른손으로 꽈악 붙잡고 있는 그 증상으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 처음사랑인 십자가의 사랑에

일만달란트 공짜 용서에 죽도록 충성하는 행복한 예수님의 피를 신나게 누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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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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