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보좌와 24장로 (4, 1- 5)

계 14 거룩한 보좌와 24장로 (계 4, 1- 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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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2, 개역)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3, 개역)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4, 개역)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4:5, 개역)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4:1, 새번역)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내가 들은 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나에게 들린 그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4:2, 새번역)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 , ''

(4:3, 새번역)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모습이 벽옥이나 홍옥과 같았습니다. 그 보좌의 둘레에는 비취옥과 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4:4, 새번역) 또 그 보좌 둘레에는 보좌 스물네 개가 있었는데, 그 보좌에는 장로 스물네 명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4:5, 새번역) 그 보좌로부터 번개가 치고, 음성과 천둥이 울려 나오고, 그 보좌 앞에는 일곱 개의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일곱 횃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17:1, 개역)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17:2, 개역)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3, 개역)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17:4, 개역)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17:6, 개역)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17:7, 개역)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17:8, 개역)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17:1, 새번역)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17:2, 새번역)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17:3, 새번역)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17:4, 새번역)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가'

(17:5, 새번역)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17:6, 새번역)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17:7, 새번역)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17:8, 새번역)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바람에

인간은 늘 선을 행해야 하는 집착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촛불시위때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어린아이까지 내세워 선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선하기는커녕 죄의 문턱을 넘어 설수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4:5, 개역)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6, 개역)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렇게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라고 했을때에

너가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7:26, 개역)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가 떳다면, 새 것이 떳다면

기존의 인간 쪽에서 가지고 오는 것은 헌 것이 되는 겁니다.

삭제되고 사라질 것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새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24장로처럼 면류관을 반납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의 헌 몸이 사라져도, 지나가버려도,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이 새 것으로, 이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로, 생명책으로 만

온 리, 오직 십자가로만 기뻐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하늘문이 열리고 보좌가 나타나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등장하는데

마치 앞에서 일곱교회에 나타나신

일곱교회를 피로 사신 분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너무 너무 거룩한 모습으로써 등장하십니다.

 

결국 예수님 자체가 천국으로써 그 거룩성을 나타내시는데

그 천국이 곧 예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등장하심 앞에서

땅에 사는 인간은 그야말로 더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 된다 말이죠.

그런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저 거룩한 하늘 보좌가 있는 거룩한 천국에 살수 있겠습니까?

 

선해야 가능하다 거룩하면 가능하다고 다들 가능성을 주장하지만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식으로

정작 주의 거룩한 보좌 앞에 있으면

거룩은커녕 선함은커녕 그 앞에서 안 타죽으면 다행일 정도로

더럽고 더러운 부정하다 부정하다 화로다 화로다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다 라고 말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당위성에 놓여진다 말이죠.

 

오히려 사도바울은 배설물임을 알게 되었다 말이죠.

그 정도로 제대로 된 거룩성 앞에서 정작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보게 된다 말이죠.

 

어 이상하다 왜 안 타 죽지?

안 타 죽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주의 불, 여호와의 불 앞에서 사라질 정도이다 말이죠

새 것이 아니면 다 타 버립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 아니면 다 녹아버려요

인간이 성화하겠다고 했더 것들이 그 불 앞에서

허무하게 다 녹아져 없어져 버리는 타 버릴 것들이다 말이죠.

그런 판국에 주여 제가 십의 이조 드렸고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자꾸 헌 것을 주장한다는 자체가

약속도 못 지킬 것들을 내 세운다는 자체가

우상이다 말이죠.

새 것 곧 다 이루셨다가 아니면

모든 것이 우상이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우리 몸 신체 나의 경험과 정신들

이 모든 것들 조차도 새 것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앞에서는 우상이 됩니다.

그럼 우상 아니다고 주장하고프면

불에 넣어보자 말이죠.

불에서 온전하게 나올수 있다면 약속을 이루는 새것이다 말이죠.

이 새 것은 원인을 갖추면 결과가 없다 말이죠.

존재는 원인만을 갖추고자 집착하도록 되어 있는

선을 행해야 죄의 문턱을 넘어 설수가 있는데

율법이 가입한 이유가 선을 못행하도록 막아버렸다 말이죠.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간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니 더더욱 결핍성이 강해서 더더욱 원인을 갖추고자

바리새인 보다 더 낫고자 할려고 하고

율법을 행할려고 하고

선을 행해야 하고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가 없기에 더더욱 빛이 될려고 할 꺼다 말이죠.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한계에 부딧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를 알게 되도록 되어 있는데

오히려 회칠한 무덤이 되어서

남들에게 봐라 나는 지켰지 않았냐 라고 그 실천력과 행함을 껍데기로 갖추다 보니

예수님 앞에서 발가벗겨져 버리는 겁니다.

어디서 외식, 가식, 거짓을, 광명한 천사의 가면으로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차라리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제대로 된 심판의 거룩 앞에서

나의 헌 것 됨, 지나가고 사라질 것을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는 십자가 앞에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바래야 한다 말이죠.

 

그 정도로 새 것 앞에서 헌 것임이 드러나는

이것이 바로 보좌의 기능

심판과 거룩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24보좌를 베풀어서

거기에 24 장로들을 앉혀버리고

머리에 황금 면류관을 씌우고

거룩한 흰 옷을 입혀 버리는 겁니다.

 

이들 24장로들은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거룩을 행해서 그 보좌에 앉은 자가 아닙니다.

로마서 4장에 나타난 다윗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사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 다윗의 고백을 다시 사도바울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24장로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때에

못 박아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들이 무슨 수로 24보좌에 앉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모든 종교꾼들이 반발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 것입니다.

새 것이 떳는데

자꾸 원인이 있었다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새 것이 아니다 말이죠.

새 것이 떠버렸다면

원인이 없이 결과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막 산다 라는 표현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표현이다 말이져.

뭘 해도 다 막사는 죄 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그런데 이 막살기를 마치 법처럼 규율처럼 조건처럼 또 지킬려고 한다면

그것은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니라

결과가 없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이게 우상입니다.

 

일곱 교회와 상대적인 사단의 회처럼 주의 발등상에 놓인 원수들을 보게 되면

항상 결과는 없는채로 원인을 갖추는데 도사들이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늘 미완의 상태 뿐이더라 말이죠.

결과는 없어요. 의문의 반복 뿐이더라 말이죠.

 

반면에 일곱교회는 결과만을 받은채로 원인이 사라져 버리고 삭제를 당하다 보니

뭘 해도 죄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허물을 덮어버린 십자가의 다 이루심 밖에 없는

원인이 사라진 결과 밖에 없더라 말이죠.

아버지의 사랑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탕자처럼

아버지가 졸지에 생겨버린 징계받는 아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저들은 사생아처럼 내어버려둠을 당하다 보니

아버지가 책임쳐주고

배상 하듯이 물어주는 고엘로써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없다 보니

자기가 자기 신앙을 자기가 직접하는 수고하는 무거운 짐을 져야만하고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하는 판국이더라 말이죠.

성화론을 보세요 딱 봐도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급을 매기지 않습니까?

왜 이런 마귀사상이 교회를 다 장악하는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다를바 없잖아요.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지 않습니까?

성화론자들처럼 십자가 십자가 고마 캐라 2000년 전에 다 이루었지 않았냐

이제는 부활이 되어야 할 것 아니냐

 

우와 믿음 억수로 좋지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하는 부자청년 율법사와 어쩌면 똑같은지?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으면 저런 속임수를 무슨 수로 보겠냐 말이죠.

다행히도 십자가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무한 반복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오늘 내용처럼 혼인잔치이다는 겁니다.

 

일곱교회에게 곧 피로 사신 교회에게 거룩한 흰옷을 입히듯이

24 장로에게 흰옷을 황금면류관을 머리에 씌우는 겁니다.

 

신랑이 입혀주는 신부의 꽃단장입니다.

 

신부 스스로가 거룩한 흰 옷을 갖출수 없도록 하셨다 말이죠.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마귀가 처음 피조물로써의 가장 큰 능력의 천사였다 말이죠.

 

그런데 가장 무능하고 가장 늦게 창조된 이 인간과의 결혼에 마귀가 반란을 일으키고

쫏겨났다 말이죠. 그런 마귀의 사고방식과 다를바가 없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입니다.

 

다윗도 이 번제와 제사 라는 이전 것을 손 놓을 수가 없어서

주님이 의도적으로 밧세바사건 우리아 사건 꺽으신 뼈 사선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구원이 되는게 아니라

다윗이 죄인 중의 괴수로써 주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인애와 자비가 아니면

새 것이 아니면

아무리 원인을 갖추어 본들 소용이 없도록

오로지 결과로서만

아무것도 한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닭이 대신 울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결과로써만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만

바로 이 새 것으로만 구원하시고자

 

자기의 것이 모조리 탈탈탈 털리도록

더 이상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수 없도록

비로소 주여 나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는 뭘 해도 거짓일 뿐인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우는 자로 만들어

 

새 영을 달라고 부르짖는 자로 만들어서 구원시키시더라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거든요.

상한 심령이 없어서 부르짖도록 해서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집어넣으시더라 말이죠.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 새 영이, 그 정직한 영이, 오늘 본문에서는 일곱 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곧 주의 마음인 성령입니다. 예수의 마음 = 성령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래서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말이죠.

 

이 일곱영이 붙잡고 있는 교회가 일곱교회요, 주어가 일곱이다 말이죠.

일곱교회가 주어가 아니라

성령의 전이 바로 성도이다 말이죠.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런데 자꾸 성령을 소유할려고 하듯이

심지어 자꾸 우리 자신을 소유할려고 내 것인냥 착각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자기 것이 없도록 탈탈탈 털리도록

 

겉사람은 날로 날로 후패하도록 탈탈탈 털리고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도록 매일 매일 낯설기 짝이 없도록 하셨다 는 겁니다.

 

마침 노트북이 자주 꺼질길래 도움을 호소했는데

설마 누가 도와주겠는가 싶었는데

선뜻 도움을 주시던데

너무 너무 낯설더라 말이죠

 

아니 안 주셔도 되는데

주님이 더 급하셨는지 막 퍼 주시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냥 저 개인적인 경험인데

 

이 새 것을 아끼면서 써야지 라고

기존의 것을 잘 정리해서 옮겨서 사용하고자 했는데

단순히 퍽퍽 꺼지기만 했지 작동은 했고

전원을 켜면 작동이 되던 기계가

1주일만 더 버텨줄줄 아니 충분히 한 달 정도는 여유있게 정리해서 사용할 줄 알았는데

새 것이 등장해 버린 이상

더 이상 전원 조차도 켜지지 않을 정도로 고장이 나더라 말이죠.

 

약간 소름이 끼쳤는데

예상을 뒤 엎고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부랴 부랴 프로그램 찾아서 버전에 맞게 설치를 한다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래야 주일에 녹음을 올릴수 있으니까 말이죠.

 

어느 정도로 새 거시 낯서냐 하면

너무 너무 얇아서 가볍기 짝이 없고

뚜껑?을 열수 없어서 두 양손을 동원을 해야

종이 페이지를 침발라서 넘기듯이

그 정도로 과장스럽게

 

기존의 것에 손이 안가도록 갑자기 더 무거워서 손이 가질이 않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익숙했던 것이 새 것 앞에서는 손도 안가는 우상이 되어버린

더 이상 약속을 증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이런 개인적인 경험도 이렇게 새 것 앞에서 낯선데

 

24장로들은 이 혼인잔치(잔치 중의 잔치)의 상황이 얼마나 낯설었으면

자기의 것들을 모조리 다 반납할 정도로

더 이상 나의 것이 없다고

자신의 생명도

자신의 몸도

모조리 다 반납하는 마음으로 면류관을 반납하더라 말이죠.

 

그 정도로 자기의 것이 하나도 없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이 새 것 앞에서

성전 구석 끄트머리에 서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무시 받아도

죄인 중의 괴수임이 마땅함을 알고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8:18, 개역)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새 것(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예수님의 외침) 앞에서

천하디 천한 구스여인이 되어도 상관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 임이 드러나도 상관 없는

 

오히려 새 것이 저 십의 이조 드린자와 결혼하는게 아니라

최고의 피조물이였던 최고의 능력자였던 마귀와 결혼하시는게 아니라

가인과 결혼하시는게 아니라

무능하게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벨과 결혼하시는

믿음으로 살리시는 아벨과의 결혼

구스여인과의 결혼하시는

이 온유하심을 나타내심이 바로

결혼 곧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으로 창조한 세상을

마귀와 합한 음녀(제사장 딸, 21:9 )

자꾸 새 것을 못 보도록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자꾸 꾀고 속이는 자로써

사랑이라는 다 이루심 보다

자꾸 기존의 것이라는 우상을

약속도 못 지키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의문의 미완료를 매매 유통시켜서

인간이 기존의 것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있다 말이죠.

 

아무리 애쓰고 애써도 결국은 모든 인간들은 마귀 곧 바리새인 보다 나을수 없는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 때 낙심하고서는 뭘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에 포기를 하고서는

자기자신을 무능하게 변해버린 자기자신에게 해를 가할려고 하는 유혹을

마귀가 펼치면서 노리고 있다 말이죠.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 말이죠.

 

마귀가 몽둥이 역할로써 앗수르처럼 몽둥이 역할로 탈탈탈 자기 것이 없도록 터는 역할인데

베드로가 탈탈탈 털려야

자기 것이 없이 무능한 자가 되어서

죄인이 되어서 구원자와 결혼을 하는데

자기 것이 많으면 이건 마귀가 반란을 일으켰던 그 사고방식과 뭐가 다르겠냐 말이죠

 

그래서 일곱교회와 사단의 회를 차이내시듯이

베드로와 마귀를 차이내시고자

탕자와 맏아들을 차이내시고자

 

저 세리 매국노처럼 성전 끄트머리에서 고개도 못 들고

주여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신랑이 듣고파 하는 상한심령으로써 인애와 자비 곧 결혼이라는 사랑의 결심을 맺도록 하심이지

 

안 그러면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결혼 하시겠냐 말이죠

너무 너무 싫어하는 제사와 번제를 자꾸 들이대는데

이게 무슨 신부 입니까? 이게 무슨 교회냐 말이죠.

 

긍휼을 베푸시고자

오늘처럼 보좌 거룩한 보좌를 베푸시고자 오시는 신랑 앞에서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설물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맏아들)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부자청년)

큰 계명 두 계명을 지켰다는 둥(율법사)

 

손에 가득 쥐고 있는 자기의 것이 너무 너무 많은데

 

과연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겠냐 말이져.

 

이것은 신랑과 신부의 사랑 관계가 아니라

신랑이 베푸는 긍휼로 인한 자유의 관계(곧 사랑의 종이 되신 예수님-죽기까지 복종)가 아니라

 

도리어 주종 관계로써 이것 지켰으니까 구원 달라고 협박 공갈하는 (법적 주종관계)

행함의 댓가만을 노리는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자유자가 되기 싫은, 신부가 되기 싫은

저런 허구헌날 십자가의 사랑만 찬양하는 천국을 지옥처럼 느껴서

그 답답함에 몸서리 쳐서 도리어 지옥으로 나 돌아갈래(박하사탕) 외치는

 

정직한 영을, 새 영을, 오늘 나오는 일곱 영을 거부하는

여전히 우상을 사랑하고 더러움을 사랑하는

나는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은 나 라는 우상을 여전히 고수하는

그런 번제와 제사에 승부를 걸겠다고 하는 그것이

 

보좌 앞에서는 더럽기 짝이 없는 심판받아 마땅함을

무시 무시한 번개와 음성 앞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거룩함을 입혀짐을 당한 자들인

24장로와 일곱교회 또 주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오히려 면류관을 반납하듯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자기의 것이 더 이상 없는

진정한 자유자

얼마나 가볍냐 말이죠.

내 것이 없다는 것이

내 것이 있으면 관리해야 하고 청소해야 하고 ㅋㅋㅋㅋ

고장 나면 안되고 버리면 안되고 사고나면 안되고

? 무라줄 고엘이 없으니까 자유할 수가 없다 말이죠.

 

자기 인생이라는 그 허구를 질질 끌고가는 무거운 짐을

누가 과연 책임질수 있겠냐 말이죠

그 인생 꾸역 꾸역 책임질려고 하다 보니

어느 세월에 병들어 죽게 되는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쓰레기임을

 

이 보좌 앞에서 들통나는 겁니다.

어딜 감히 그 쓰레기를 하늘에 까지 들고 올라갈려고?

 

그래서 아예 직접 하늘 문을 열고 내려오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베드로가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너무 너무 좋아서

그 기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초막 셋을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아파트 세 채를 짖겠다고 하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곧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 하신다 말이죠.

 

아파트 초막 세 채가 새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새 것 이겠습니까?

 

기존의 것을 모조리 다 사라질 것, 이전 것, 삭제 될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새 것이 아니무이다.

 

하늘문을 열고 내려오는 보좌가 떳다면

기존의 모든 것은 이 새 것 앞에서 보좌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사라지고 삭제되어야 할

쓰레기 통에 냅다 버려야 할 냄새나고 더러운 똥이라는 것이 비로소 밝혀 지는 겁니다.

 

그래서 새번역서에서는 낯설게 표현되어 있는데

베드로가 말하는 중에 그 말을 끊듯이 하늘에서 문이 열리듯이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리니까

갑자기 두려워 떨게 되더라 말이죠.

 

(17:5, 새번역)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벧후 1:17, 새번역)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 17:5; 9:7; 9:35

 

그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 너희는 그의 말만 들어라 라고 말이죠.

 

? 십자가에 달려 내 죄를 대신해 죽은 분은 예수님 뿐이거든요,

그래서 모세가 어서 어서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 아는 새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그 다 이루었다는 약속성취만이 새 것이고

비로소 이 새 것 앞에서 다 지나갈 것으로 사라질 것으로 삭제 될 것으로 들추어지니까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겠습니까? 주여 어서 어서 주의 살과 피를 나에게 먹여주세요 라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새 것이 이미 떳다는 거죠.

 

주의 거룩한 보좌 곧 주의 주 되심 앞에서 모든 것은 이 새 것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임이 드러납니다.

 

이 심판을 보좌를 통해서 봤다면

뭘 해도 죄요 뭘해도 막산 것 밖에 안되는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인애와 자비를 바라봐야 할 판국이기에

 

천국에서는 이 인애와 자비만을 찬양할 뿐인데

 

용서 받을게 없는 자는

그저 남을 7번 용서하겠다고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 자들은(행함)

주의 인애와 자비만을 찬양하는 이 천국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천국에서 오로지 주의 인애와 자비만을 찬양하는 새 것만 쳐다보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찬양하는 이 찬양을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마귀가 듣기 싫어하는 주의 십자가의 사랑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새찬양하는 자로써 십자가에서 새피조물 새이스라엘로 태어나게 만드신 이유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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