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자가 없어서 우는 선지자 (5: 1- 5)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펼자가 없다고 우는 사도요한

계 16 책을 펼자가 없어서 우는 선지자 (계 5, 1- 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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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개역)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개역)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5:3, 개역)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5:4, 개역)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5,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1, 새번역)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5:2, 새번역)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5:3, 새번역)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땅 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5:4, 새번역)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5, 새번역)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사도요한이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지자란 이렇게 울음을 통해서 단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절성을 이야기하면 많은 목사들이 화를 내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낸다는 자체가

그럼 내가 잘못 가르쳤다는 말이가? 라는 투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아니 그럼 언제는 제대로 가르친 적이라도 있기는 있냐 말이죠.

우리는 뭘 해도 엉터리인데???

 

단절성으로써 오늘 나오는 사도요한의 눈물은

오로지 이 책을 펼자는 아무도 없고 단 한 분

창조주 만이 일곱째날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분만이

이 책을 펼치실 유일한 분임을 말하기 위해서 단절성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성령의 일을 개방성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졸지에 음녀가 되는 겁니다.

음녀가 뭡니까?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 아닙니까?

가능성을 늘 심어주는 겁니다.

 

오늘날 철학자나 신학자들처럼 늘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자들 말이죠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야 유통 매매가 된다 말이죠. 곧 돈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666이다 말이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희망을 심는 겁니다.

목사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는 음녀들이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날만 골라서 손마른자를 고치십니다.

? 저들에게는 불가능하거든요. 단절 되었거든요.

 

먼저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안되고요 즉 단절이 되었고요.

그리고 두 번째로 손마른 자 자체도 저들은 고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불가능성이라는 단절성에 놓여진자들로써 울어야 합니다.

운다는 것은 서러워서 우는게 아니라

또는 한풀이로써 우는게 아니라

 

성령의 탄식이라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졌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즉 회개입니다.

 

즉 회개란?

울음이란? 기능으로써

죄인으로써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환자로써 의사를 말하기 위한 것이지

울음 자체가 존재를 주장하는 우기기 신념이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안식의 주인이 아니면 안된다고

다른 자들은 환자에게 죄인에게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댈수가 없다는 겁니다.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방보다 더 개방적인 초과잉적인 개방으로써의 비개방인 단절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안식의 주인만이 고쳐달라고 회개하는 울음인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오로지 일곱인을 뗄수 있는 창조주 곧 안식의 주인만이 손을 대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마치 비오지 않기를 36개월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엘리야의 행함이 있는 믿음처럼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졌기 때문에 단절을 기도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 앞에서 즉 이런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는 안식일날 예배드린다고 우기기를 하지 않나?

그래서 반드시 대조로서 한 세트를 구성하고자

가장 인간들이 자랑하는 하나님을 인간 쪽에서 사랑한다는 증거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그 앞에서 안식일날만 골라서 안식일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는 겁니다.

 

하필이면 안식일날만 골라서 손마른자를 고침을 목격한 자들이 감사가 아닌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꼬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번제와 제사에 정신팔리다 보니

인애와 자비 곧 오늘 나오는 생명책을 펴는 분에게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사람의 일에만 빠져 있다는 겁니다.

 

사단아 물러가는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그래서 반드시 이 베드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 마른 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일 지키기 라는 우상숭배에서 빼내시는 구원자

곧 안식의 주인을 보게 된다 말이죠.

 

물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를 풍랑을 일으켜서 반드시 빠뜨려야

물에 빠진 베드로를

죽음 속에 집어 넣었다가 다시 건지시는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심으로써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울도록 반드시 닭이 세 번 울어야만 하도록

 

죄인 만드시는 겁니다.

닭이 세 번 울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만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뭘 믿고 마귀에게 잡혀 오도록 하신 걸까요?

네 맞습니다. 안식의 주인으로써

일곱인을 떼실 분으로써

 

인애와 자비를 베푸실 유일한 분으로써

자신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바를려고

피와 연관된 자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도 일곱인을 뗄자가 없기에

아무도 생명책을 펼 자도 읽을 자도 없기에

 

아무도 없으니 마귀가 마음껏 속이고 있는 그 상황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피로 사셔야만 하는 겁니다.

일곱 인은

사람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뗄수 있는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저 번제와 제사에 미쳐 있습니다.

자기 구원 밖에 모릅니다

개인 구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은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자신 밖에 모르는 우상숭배자인 겁니다.

자기를 위한 구원 밖에, 자기를 위한 믿음(행함) 밖에 모릅니다.

 

남을 7번 용서하기 위해서

그런 자신에게 용서 받아야할 자를 생산하는 것이 번제와 제사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의 의인됨을 위해

남은 그저 자기에게 용서 받아야만 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어야 하는

이게 바로 음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착하게 살자 라는 선악의 사고방식이, 이런 의문의 제사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서검사가 회개하고 간증하고 돌아다는 그 동영상을 보고

7? 동안 참고 참고 있다가 드디어 폭발한 겁니다.

누구는 영화 밀양의 전도연 격이라고 하지만

그거 마귀들끼리 음녀들끼리 회개하는 그 장난질에 왜 말려드냐 말이죠.

어차피 모든 인간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강간한 자들로써

밝히 드러난 것이 십자가 사건인데 말이죠.

 

좌파들은 신이 났어요.

이것이 짐승의 세계입니다.

복수심과 원한만이 유통되고 돈이 되는 겁니다.

돈으로만 위로가 되는 세상이다 말이죠.

? 잉여? 위로? 희망? 이것만이 유통되고 있지

 

단절이 유통되지 않습니다.

단절은 단절입니다.

 

누가 나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 라고 울겠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단절을 외치겠습니까?

 

모두다 사람의 일만 유통시키고 있지

하나님의 일 곧 십자가의 피 흘림은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린 것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겁니다.

 

도리어 그 따위 사고방식 밖에 모르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눈물 흘려야 할 판국이기에

단절 중의 단절이기에

닭이 세 번 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이 단절성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러니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을 어기는 자로써 마귀처럼 취급받았듯이

선지자들 또한 번제와 제사 밖에 모르는 안식일 지키는 자들로부터 거짓선지자로 취급받는

철저한 단절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건, 사건을 유일하게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개방성은 일단 사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건이 아니다 말이죠.

다들 공감을 하기에 수긍해 버리니까 말이죠.

사건이란 모든 상황을 뒤집는 전복입니다.

선악을 뒤집고

역사를 뒤집고

시간과 공간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겁니다.

안 그러면 강도의 소굴인지를 알 길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 평화롭고 고요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전을 뒤엎어 버리고

양과 소를 채찍으로 쫏아내어 소동을 일으키는 사건만이

가장 정결한 장소와 시간을 곧 성전이요 교회를 예루살렘 성전을

가장 악하고 음란한 공간과 시간으로

밝히 또렷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가장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자를

가장 살인자로써 안식의 주인을 죽이는 자로 들추어내는 것이 사건입니다

손 마른 자만 고치는게 아니라

이 긍휼의 그릇에 반드시 진노의 그릇 또한 들추어냄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자를 살인자로 밝히 또렷히 나타내는 것 또한

안식의 주인이 하시는 일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책을 펴실 분이기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기록되지 않은 자를 동시에 들추어내신다 말이죠.

 

창조 곧 7일만에 창조하신 분이

새 것으로써 떳다면, 등장했다면

이 새 것 앞에

이전의 것

지나간 것

처음것

사라질 것들도

 

또렷하게 들추어짐으로써 그 차이(사건)로 새것이 등장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이 차이로써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반면에 음녀들은 곧 거짓선지자요 사단의 회는

차이가 아니라

사건 곧 십자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동일성 개방성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주고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단절성으로써, 어디를 가든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사도요한을 꽁꽁 묶어서 아무일도 못 일어나도록

밧모섬에 가두어도

그 공간

그 시간을 찢고서

묵시라는 단절성은

휘장을 찢고서 마구 마구 쏟아지는 겁니다.

보좌에서 거룩이 생산이 되듯이

생명수가 마구 마구 흘러 흘러 넘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가 마구 마구 막 쏟아지기에

역사는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 원인 없는 결과가 떳기 때문에

안식의 주인이 떳기 때문에

구체적 보편성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인간 편의 사람들이

사람의 일 밖에 모르는 인간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 안식의 주인만 쳐다보는 단절성을 외칠때에

졸지에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동시다발이다 말이죠.

 

그러면 배신이 벌어지는 겁니다.

너 예수 제지이지? 우리는 1300년 묵은 모세 제자야 라고

이 배신자 이 이단 예수를 쫏는자 어디서 까불어 라고

자신들이 음녀임을 스스로 드러내더라 말이죠.

 

오히려 모세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은 적도 없는데

도리어 모세 조차도 울고자 변화산에서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십자가를 나타내소서 라고

단절성을 보여주었는데 그래서 가나안에서 탈락 되었는데

? 단절성을 보여주고자 말이죠.

왜 단절성을 보여주느냐? 이미 새 것이 떳기 때문에

기존의 것은 지나가는 자로써

처음 것으로써

처음 아담으로써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의사를 외쳐야 하는 기능이기에

 

그런데 저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존재를 우기더라 말이죠.

스스로 우상숭배자 라고 말이죠.

 

MB를 아무리 외부에서 공격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난공불락의 요새가 언제 무너지느냐?

내부의 배신자들이 생겨나면 그때 무너지는 겁니다.

 

삼땡그룹도 마찬가지 계열사 였었었었던 손땡희 아나운서가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렇게 난공불락의 요새도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언제 그랬냐는둥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말이죠.

그것을 딴나라당이 노리고 있다 말이죠.

좌파나 우파나 서로서로가 음녀로써 서열싸움을 하더라 말이죠.

이 의문의 번제와 제사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성화론자 바리새인이나

로마 독재 개같은 이방인의

둘 간의 서로 서로의 싸움이

음녀와 짐승으로써 서로 싸우는 겁니다.

이것만이 유통 된다 말이죠.

 

자 이렇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될 때만

진짜 진리입니다,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리

 

용어가 어렵지요? 그냥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구체적 이다는 것이 뭔고 하니

 

철저한 적군이 도리어 아군으로 돌아서서 승리하는 승리만이 진짜 승리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반박이 안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마귀 손에 잡혀 오도록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를 말이죠,

이것을 구체적 보편성

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라고 하는 겁니다.

 

? 베드로 자체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음녀였는데

그 음녀였던 당사자가 짐승을 배신하고 예수님의 피만 외치고 있으니까 말이죠.

더 이상 음부가 베드로를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음부를 이긴다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를 피로 사신 분에게 즉 책임자에게 달려들수가 없는 겁니다.

달려 들어봤자 자기만 당하니까 말이죠

음부가 곧 마귀가 자기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데 자기가 당하는 짖을 하겠냐 말이죠

그러니 철저하게 따지고 계산하고 조건 갖추기를 하니까

자신이 당하는 짖을 못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두려워 한다는 겁니다.

피 사랑을 안돼 안돼 안돼 라고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극도로 싫어한다는 겁니다.

 

결국 원인 없는 결과로써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 쪽에서 피 흘렸다는 겁니다.

피로 샀다는 겁니다.

더 이상 마귀가 베드로를 붙잡고 따질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물건이 예수님에게 전권이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마귀가 따진다면 이제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따져야 하니까 말이죠.

피로 사셨기 때문에

더 이상 마귀는 따질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곧 사도는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마귀가 시비를 거는

번제와 제사를 외쳐야 할까요?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모든 종교가 외치는

특히 오늘날 철학자들이 외치는 희망을 외쳐야 할까요?

 

아니면 도저히 힐문 할 수 없는 말 문이 막혀 버리는 구체적 보편성인

철저한 단절성 곧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를 외쳐야 할까요?

인간의 것 더 이상 안 본다를 외쳐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저 분을 외쳐야 할까요?

닭의 세 번 울음을 외쳐야 할까요?

 

오늘날 선지자는 우리를 대신해서 닭이 세 번 울 듯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울고 있습니다.

 

? 다윗의 뿌리가 떳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저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것 안 받습니다.

제발 드리지 마세요.

 

그래서 기생라합처럼 이 국가 이 민족 이 나라 이 이스라엘의 바닥을 다 뜯어내는

집문서 땅문서 등등 모조리 이 십자가에 다 팔아버리는 겁니다.

저 십자가만 옳았다고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3일의 간극 말이죠.

 

계시록에서는 36개월이라는 간극으로 표현 안되어 있고

일천이백육십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괜히 천년이 넘는 표현의 숫자로써

역사는 이 완결된 묵시 앞에서 꼼짝 다달싹도 못하게끔 동결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얼마나 역사가 묵시 앞에서 단절 되었으면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지근 지근 밟힌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고난 속에 즉 단절 속에 성령의 일하심 속에 놓여지게 되었기에

 

울 수밖에 없습니다. 즉 새것이 이미 떳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로써 우는 겁니다. 결과가 이미 승리했기에

오늘 표현으로 하자면 승리하신 분

피로 사신 분

일곱 인을 떼실 유일한 분이 떳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으로써 우는 겁니다.

 

시편에서 56편 다윗이 울어서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기록하소서 라고 했다 말이죠.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래서 다윗은 지근 지근 밝히는 겁니다.

이 우는 자에게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겁니다.

우는 자가 복 된 겁니다.
유리함을 계수 당하는 것이 복이 떳기에 덮쳐졌기에 말이죠.
그 날 수가 바로 한 때 두때 반때 곧 일천이백육십일, 유리한 날 수, 곧 삼일 이라는 간극이다
십자가 속 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천사들이 흠모한다는 겁니다. 고난의 비밀 속에

이 믿음의 선물을 받은 것을 흠모한다 말이죠.

 

우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복, 기쁜소식, 희년, 복음이 미래완료에서 덮쳐졌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겁니다.

말이 되나? ㅋㅋㅋ

말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두운 눈으로써 저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달린다고 했다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인간들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그저 안식일 지키듯이 사람의 일만 생각 하다보니

안식의 주인을 죽이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 하나님처럼 군림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를 죽이는데

이것을 인간들이 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인간을 장악한 결과이니까 말이죠.

이 마귀만을 예수님은 상대하는 겁니다.

인간 상대 안 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마귀만을 상대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고백한다 말이죠.

시편 전체는 원수로 부터의 구원이니까 말이죠.

이 원수에게 갇혀버린 다윗이 무슨 수로 구원얻습니까?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 하나 죽일려고 달려드는데 말이죠.

빠져나올수 없습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겁니다. 아낌없이

 

자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의 사랑은 인간 스스로의 인간세계를 배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인 단절성을 외치는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 한 것이 아니요

너희가 남을 7번 용서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을 주셨다 라고

도리어 우리 손으로 죽인 너희가 죽인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셔서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셨다,

그냥 주가 아니지요.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우리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리인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새노래입니다.

새로운 노래 라는 뜻이 아니라

신곡 발표 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세 번 부인한 자로써 예수님의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치는

배신의 배신의 노래, 부정의 부정의 노래를 말하는 겁니다.

이전 것을 사라지는 것을 대조시켜서 새 것과의 차이로써 외치는 노래이다는 겁니다.

 

나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못박는 허물 까정 보시지 않겠다고 피로 덮어버리는

그 피를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이지

 

교회 이름에 새노래를 붙이니까 도리어 헌노래자로 들통나는 명땡교회라는 음녀가

새노래가 아니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새노래는 기존의 노래와의 철저한 단절성

일천이백육십이라는 간극, 곧 단절성이 더더욱 더 크도록, 극대화 되어 있습니다.

 

어딜 감히 하나님을 사랑할려고 하냐 말이죠.

그런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더더욱 간극을 버리는 겁니다.

 

누가 알았으리요?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으리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의 팔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왠 걸?

 

우는 자에게 나타난 겁니다.

 

단절 된 자에게 나타난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창녀 세리 강도에게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렇게 저들을 말도 못하게 저주하고 정죄했는데

그 정죄가 웃싸스럽게 되어서

도리어 시기에 시기로

도저히 견딜수 없어 배 아파 죽을 정도로 만드는

이 구체적 보편성 곧 십자가의 피 용서에

유대인들은 거리껴 하고, 목에 딱 걸려 딱꾹질 하듯이 넘어가지도 않고 내 뱉을수도 없는 걸림돌이 되어버렸고

헬라인들은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고 미련함으로 취급받는데

구원 얻은 성도에게서는 이 보다 더 좋을수가 없는

원수로 부터의 자유

드디어 막사는 자유를 얻었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요?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 부르고 막 춤추는 겁니다.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이 손마른 자에게만 안식일날 나타났고

우리는 도리어 그 안식의 주인을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친다고 싫어해서 쫏아내었다 말이죠.

 

그럼 누가 이 손마른 자를 고칠수가 있을까요?

안식일 백날 지켜 보세요 고칠수가 있는가?

누가 일곱인을 뗄수 있습니까?

 

우는 자입니다.

 

내 죄를 보고 나도 울지 않는데

내 죄를 보고 우시는 분이 있다 말이죠.

 

내 사랑도 나를 구원 못하는데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외침이

손마른 나를

마귀에게 사로잡혀 갇혀서 기껏 안식일 지키겠다고 우기는 자를 보시고

우시는 이 예수님만이 이 생명책을 펼수가 있는 겁니다.

 

이 지옥에서 끄집어 내신다 말이죠.

 

그렇지 않는 이상 단절이 되었습니다.

즉 생명이 없습니다.

모두다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안식일 지키겠다는 음녀짖만 하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니

십일조니

교회봉사니 등등

음녀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한 율법사가 도리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큰 계명이 뭔줄 아십니까?

뻔데기 앞에서 사랑을 운운하다니 참 용감하죠!

뭔데?

아니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의 구원을 너의 구원처럼 구원하라

 

저 이거 지켰습니다

 

어 그래?

너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보자

 

아니 결과가 음녀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누가 봐도

또 모든 인간들로 부터도 인정 받은 것인데

예수님에게서 만큼은 안 통하는 겁니다.

결과는 음녀입니다.

뭘 해도 음녀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음녀입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갇혔다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을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하듯이

자기가 큰 계명 두 계명을 지킨 것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더라 말이죠.

 

반대로 누가 봐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음녀라고

배신자 라고 가룟유다와 다를바 없는 배신자의 트레이드 마크로 봤는데

 

유일하게 예수님에게서만큼은 마귀 보란 듯이 떳떳하게 당당하게 뻔뻔스럽기 그지 없이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껄끄럽게 보고 있는 우리들 보란 듯이 우리에게서 마저도

 

당당하게

 

보란 듯이

 

무수히 쏟아지는 악플과 거부감 반발심 적개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묻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용서 했걸랑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이 불가능한 뻔뻔스러운 고백이 바로 회개입니다.

 

뭘 해도 우리는 회개 밖에 안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 이미 36개월 동안

이미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우리를 지근 지근 밟아서 단절시킨

회개시킨 예수님의 눈물 흘리심인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덮쳤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만 노래하는 새노래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막사는 자들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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