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당한 어린양 찬양 (5:11-14)

계 18 죽임당한 어린양 찬양 (계 5,11-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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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1, 개역)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5:12, 개역)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5:14, 개역)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5:11, 새번역)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5:12, 새번역)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5:13, 새번역)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5:14, 새번역)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인간의 노래의 특징은 살아있는 존재를 전제로 해서 합니다.

만약 죽은 상태라면 노래이기 보다
달래면서 화 풀어라 라는 식으로

한풀이 하지 말라고 귀신 달래는 식입니다.
이게 바로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즉 이 말은 인간 본인이 살아 있으니 그 살아있음을 인정해 달라고

그러니 죽은 영혼을 달래는 식이다 말이죠.

이게 우상 숭배죠

 

곧 자신이 죽은 존재인줄 모르고 우상을 달래겠다는 겁니다.

즉 번제와 제사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노래입니다.

정작 인간 본인 자기자신을 타독 타독 달래는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 제사 없애자고 청원 20만 운동을 벌린다고 합니다.

죽은자 챙길려다가 산 자가 죽을 판국이다고 말이죠.

 

그러나 오늘 나오는 찬양은 그 반대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한다는 의미는

죽은 자를 달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죽임 당한 어린양 만이 제대로 살아 있는 분이고

그를 찬양하는 자는 죽은자로써 찬양한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로써 찬양이 덮쳐져서 찬양을 하게 되는데

이 말은 찬양이 바로 죽임 당한 어린양의 승리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그 승리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찬양 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5:12, 개역)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죽임 당한 어린양의 능력

부요함

지혜로움

힘되심

존귀하심

영광스러움

찬송받으심 이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에서

그 증상 물로써 우리에게 덮쳐질때에

 

이렇게 됩니다.

어떻게?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죽임 당한 어린양의 능력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능력하게 되고

즉 죽임 당한 어린양의 능력이 덮쳐진 결과가 그 증상으써 무능해서 무시 받게 되고

 

죽임 당한 어린양의 부요함이 덮쳐져서 그 증상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겁니다.
일곱이 붙잡은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의 기능이 그랬다 말이죠.

상대적인 음녀인 사단의 회는 그 반대로 부자의 황금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가벗었다고

어서 피 옷을 값주고 사서 심판의 불에서 안 타 죽도록 해라 라고 한다 말이죠.


(계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8,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결국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부요함을 말하기 위해서 가난함에 놓여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애와 자비 라는 겁니다.

 

또 그 다음 죽임 당한 어린양의 지혜로움이 덮쳐진자에게는
십자가라는 어리석음을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헬라인(국가라는 짐승)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이요, 세상 인간에게 유통 소통되지도 않는 지혜이고

음녀인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구원 받는 한 쪽 강도처럼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소서 라고 하듯이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외친다 말이죠.

아니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십자가가 옳다고 외치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죽는 판국에 무슨 놈의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냐 말이죠.

그래 죽는 판국에 그러든 말든 그 말에 걸려 넘어지는 자는 죽는 판국에 그게 무슨 말 되는 소리냐 말이죠

그러니 기능으로써 한 쪽이 일곱교회라면 다른 한 쪽은 사단의 회로써 반드시 기능하도록 되어 있는 한 세트로써 약속에 의해 말씀에 의해 작동된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으로써 말이죠

 

자 그 다음은 뭐였죠

힘 되심

죽임 당한 어린양이 힘이 된다고 보는 자는 없습니다

즉 이 말은 아무도 찬양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을 찬양하는 자가

죽임 당한 어린양의 힘이 덮쳐진 자입니다.

참 말이 됩니까?

제가 지금 말하고서도 기가 막힙니다.

말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즉 힘이 전혀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죽임 당한 어린양이라고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죽임 당한

그럼 도대체 누가 죽였냐 라는 거죠.

바로 우리입니다

저입니다 저

 

자기가 죽인 자를 살아있다고 힘이시다고 외친다는 것은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부정의 부정이요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그럼 죽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하는 자는

힘이 있는 자일까요?

아무런 힘이 없는 자일까요?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 꼭 할례 꼬추끝을 짜르라고 합니다. 남근을 짤라서
힘 없는 전쟁을 하라고 합니다. 아니 그럴것 같으면 여자보고 전쟁하라고 하지
남자 강함을 늘 의식하는 힘의 강박증이 있는 남자에게 왜 전쟁을 하라고 할까요?
힘 짜르기 전쟁 입니다. 이 할례 여부가 힘의 여부와 무관하게 전쟁의 승리를 좌우 한다 말이죠)

 

찬양을 누구든지 듣고 반응한다는 것은 힘이 된다고 감동을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반응을 하는데

 

전혀 힘이 없는 자가 찬양을 한다는 것은 반응은커녕 감동은커녕

시끄럽다고 살기가 넘쳐서 어떻게 하면 입을 막고자 달려든다 말이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찬양을 하니까 짜증을 내더라 말이죠.

 

이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 말이죠.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즉 힘 있는 자들이 찬양했다면 저들이 분노하지 않았다 말이죠.

오히려 굽신 굽신 거릴꺼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복음이 아니지요

십자가 사건이 아닙니다.

복음은 반드시 한 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다른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밝혀지는 사건으로써 등장한다 말이죠,

 

결국 찬양이란 죽임 당한 어린양의 힘이 덮쳐진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 결과의 증상으로써

오히려 힘 없는 어린아이로써 찬양할때에

 

이미 예루살렘은 여리고성처럼 무너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삼손처럼 블레셋의 돌기둥을 붙잡고 자폭하듯이 무너뜨리는 것처럼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자로 판명난 것이 바로 죽임 당한 어린양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어린아이의 호산나 찬양에 의해 그 무너진 결과의 증상이 바로 분노입니다.

인애와 자비를 외치니

번제와 제사가 분노를 하더라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임이 또렷함을 외치니까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반복이 거리껴 하더라 말이죠.

 

자 그 다음 어디까지 했죠? 힘 까지 했죠
그 다음이 바로

(5:12, 개역)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존귀입니다.

 

주님의 존경 경배 높으심 귀하심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싫어버린바 되는 귀히 여기지 않는 자리에 놓여져서 외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말이죠.

흠모할 모양이 없어서 싫어버린바 되었다고

아무도 안 쳐다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귀하심이 다 이루어졋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주님이 가셨던 그 싫어버린바 된 그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걸어가야 존귀하게 되는게 아니라

존귀하심이 높으심이 경배받으심이 다 이루어 졌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서 우리가 이제 신나게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이 체험을 천사들이 흠모한다고 하죠

찬송가 고난의 신비 알고자 천사도 부러워 한다 라고 말이죠.

 

우리가 귀히 여기지 않았던 그 때의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 하는 겁니다.
(이것이 연합이요 세례이고 마음판의 할례인 회개 입니다. 내가 그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을때 처럼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주의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또 그 다음은

영광

 

즉 보배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마귀는 그 영광은커녕 우리의 과거를 들춰보겠다고

십자가의 영광을 못 쳐다 보게끔 꾀고 사기를 쳤다 말이죠.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다 이루심 때문에

이 십자가의 영광을 외치기 위해서

신나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감개무량의 황공무지로소이다를 격게 되는 겁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죽을 것이다 라고

이땡순 장군이 협박하면서 칼들고 하는게 아니라

정작 본인 당사자가

아무도 안 따라 오면 우짜지 라는 염려조차도 할 겨를도 틈도 주지 않고

본인이 제일 먼저 빨리 빨리 누가 먼저 하기도 전에

그 영광을 홀로 받으시고자 했다 말이죠

 

그제서야 참선지자들이 저도요 저도요 라고 한다 말이죠.

서로 서로 내가 먼저 죽는 영광을 누리겠다고 ㅋㅋㅋㅋ

 

그래서 핍박의 자리를 재수 없게 앉았다고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핍박의 자리에 어서 어서 빨리 놓여져서

과연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지를 똑똑히 봐라 라고

이 십자가의 밝히 보이는 영광

또렷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를

그 어떤 것도 이 십자가 앞에서는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일 뿐임으로 신나게 들통냄으로써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고

신나게 외치는 그 영광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을 누린다 말이죠

 

 

왜 망하는 자의 자리에서 승리하신 예수님

죽은 자의 자리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외칠까요?

 

이것 보다 더 또렷한 구체적 보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라는 저주가 하나님의 영광일까요?

부정한 저주인데

 

바로 그 저주 그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가 내가 받아야 하는데

주님이 넙쭉 빼앗아서 내가 받겠다고

대신 심판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대신 망하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이 보다 더 또렷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이 왜 영광이신지

이 영광이 다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오히려 늦게 나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죽는 그 순간의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처형 자리에 까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를 고백해 만들어 주실려고

그 영광이 덮쳐져서

신나게 죽으면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외치고 노래하는

오늘 또 하루를 주신 것에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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