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일곱인(혼인잔치)를 개시하다 (6: 1- 8)

봉인된 일곱인을 떼다

계 19 드디어 일곱인(혼인잔치)를 개시하다 개봉박두 (계 6, 1- 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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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개역)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6:2, 개역)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6:3, 개역)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6:4, 개역)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6:5, 개역)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6, 개역)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6:7, 개역)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6:8, 개역)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6:1, 새번역)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2, 새번역) 그리고 내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

(6:3,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4, 새번역) 그 때에 불빛과 같은 다른 말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아서 가졌습니다. 또 큰 칼을 받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6:5, 새번역)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6, 새번역)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 , '데나리온'

(6:7,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8, 새번역)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 , '하데스'

 

 

사도요한이 일곱인을 뗄 자가 이 세상에 없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즉 단절이다 말이죠

이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자가

이제 드디어 봉인이 해제가 되어 열리는 이 순간

얼마나 기쁠까요?

우는 자가 드디어 복 받게 되었다 말이죠.

 

이 장면을 바벨론 포로가 되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그렇게 그토록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드디어 드디어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고

기뻐 춤을 추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될 테니 표시해 두어라 라는 겁니다.

 

이 선지자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가 될까요?

예수님의 비유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 먹을 수 있을까요?

선지자는 기능으로써 마치 예수님의 비유처럼 비유 덩어리로 던져지는 겁니다.

선지자 자체가 말이죠

마치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실로암 소경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존재는 오히려 모조리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존재를 우기니까 말이죠.

 

선지자는 결국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입 속으로 이스라엘을 집어넣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아니 이건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요 저주가 아닙니까?

심판이요 멸망인데 어떻게 구원이라고 하냐 말이죠.

 

오늘 본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 한다 말이죠.

 

자 그럼 구원 사건으로 보여야 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는 자 치고

구원으로 보는자는 단 한 사람도 없고

도리어 죽음이요 저주로 보더라 말이죠.

불안과 공포로 보이지

축복이요 기쁨으로 전혀 안 보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말이죠

 

만약 기뻐한다면

마치 그동안 울었던 예레미야가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기뻐 웃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구원 사건으로 안 보인다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보겠습니까?

 

그렇게 열수가 없어서 울었던 사도요한이

드디어 개봉이 되는 이 일곱인이 열리는 순간을 보고

너무 너무 기뻐하듯이

우리 또한 과연 기뻐할 수 있냐 하는 점입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정반대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마치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도록 하니

울 수 밖에 없더라 말이죠.

 

그렇게 울다가 드디어 일곱인이 열렸을때에

드디어 구원이 벌어진다고 기뻐 좋아라 할까요

전쟁을 좋아라 할까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기뻐 할까요?

아니면 왜 애굽을 멸망시키냐 라고 원망할까요?

 

오늘 본문이 계시록에서 드디어 처음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종말심판이 처음 나오는 장면으로써

이 이후로부터 본격적으로 심판이 퍼부어지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다들 싫어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애굽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애굽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곧 인간 자체인 나 라는 자아를 멸망시키는 겁니다.

인간 신체, 육체 말이죠.

 

이 자아를 멸망시키는데 있어서 드디어 시원하다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로써 우상으로써 태어남에 있어서

정작 말씀이라는 기능은 이 존재를 삭제시키는 겁니다.

애굽 삭제는 곧 인간 삭제이다 말이죠

 

이것이 마땅하고 당연함을 아는 자가

바로 일곱인을 떼는 유일한 분을 보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존재는 새 것이 될 가망 조차도 없다 말이죠.

어서 빨리 새 것이 와서 나를 삭제 시켜 주세요 라고

기생라합(행함이 있는 믿음-3일의 간극-일천이백육십일)처럼 기도하는 자가 없듯이

어서 구원사건 벌려 달라고(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

이 민족 이 국가를 멸해 달라고 하는 자는 없습니다

 

안식의 주인이 어서 오셔야만

손마른 자를 건지는 구원사건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이 구원 사건을 누가 거부하는고 하니

애굽이 거부하더라 말이죠

곧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말이죠

유대인이 글쎄 거부를 해요

누구를

안식의 주인을

 

요셉의 아들 아니냐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 그래 이제 알려줄게 기다려봐 ~~~~

 

왜 하필이면 딴데 가서 하지 않고

꼭 우리 코 앞에서 하느냐 라는 겁니다

하필이면 많은 요일 중에 꼭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치느냐

 

이 투덜거림이? 네 맞습니다

애굽 왕 바로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노예를 보내주냐 라고 하더라 말이죠.

 

왜 하필이면 쎄고 쎈 숱한 땅 다 내버려두고

꼭 애굽땅에 탁란을 해서

갑자기 쭈우욱 빠져나오냐 말이죠.

하루 아침에 쫄딱 망하냐 말이죠

그래야 전 세계에 여호와의 구원이 퍼진다 말이죠

이 말도 안되는 소식을 듣고 간담인 녹아서

나라와 민족을 팔아 넘긴 자가 바로 기생 라합 아니냐 말이죠

증상물 아니냐 말이죠

 

이것은 곧 반드시 안식의 주인의 증상물인

손마른자와 vs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반드시 역여서 한 세트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말이죠.

 

이스라엘 혼자 빈 땅에서 거주하고 살아라가 아닙니다.

마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소경된 것처럼

구원자를 말하는 죄인

의사를 말하는 환자

생명의 주를 말하고자 하는 죽은 자로써

 

일곱교회 곧 피로 사신바 된 일곱교회는

반드시 저 사단의 회인 유대인과 역여서 한 세트를 구성하듯이

 

(9:1, 개역)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9:2, 개역)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9: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은 반드시 애굽이라는 그 당시 최고의 국가와 역이도록 되어 있더라 말이죠.

 

그리고 죽은 자 이스라엘 곧 마치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있고

 

반대로 존재를 우기는 살았있다고 우기는, 살아야 할 그런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 애굽은

마치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구원자의 활동 곧 의사의 기능인 의술을 보여주듯

구원을 십자가를(걸림돌이자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그 기능과 역이도록 되어 겁니다.

 

이 십자가가 인간의 지혜로 결집된 국가 곧 피라미드 부활게이트 구원게이트 통로를 박살내더라 말이죠.

그 차이를 반드시 나타내시니까 말이죠

이게 거룩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은 결국 순 엉터리인 거죠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무게를 재보자 말이죠

함량미달인 주제에 뭐 거룩하다고? 과연 그럴까요

모조리 666 부족하다 말이죠

일곱에 도달하기는커녕 택도 없이 1도 안되더라 말이죠.

그래놓고 남을 7번 용서 했데 글쎄

 

안식일 지키기로 구원의 탑을 쌓는 것을

안식의 주인이 정작 안식일날만 골라서 탈락 당한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손마른자를

99마리 양을 버리고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거룩을 보여주니까 이 거룩에 다들 분노하며 달려는데

뭐 거룩 지켰다고? 안식일 지켰다굽쇼?

당신의 제자는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 라 굽쇼

누가 보면 디기 디기 거룩한 줄 알겠다 말이죠.

이 십자가 라는 거룩 사건에 다 말려들더라 말이죠.

매일 매일 구원 사건을 벌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마귀의 세력을 들추어냄으로써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드디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퍼붓는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 동안 울고 부르짖은 자에게는 이 상황이 너무 너무 기쁘지 않습니까?

드디어 구원 잔치요

드디어 혼인 잔치요

드디어 유월절 어린양의 피 잔치이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린다는 그 비유입니다.

 

(22: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손마른 자에게서는 안식의 주인이 기쁘지 않습니까?

드디어 안식일 지키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되니 말이죠.

애굽으로부터 건짐을 받으니 말이죠

구원을 받는 희년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자칭 의인들로부터 구원 받는

희년이 드디어 완성 되었다고 예수님이

유대인 회당에서 선언 해 버리니까

애굽에서 선언해 버리니까

 

죽일려고 달려들더라 말이죠

교회에서 십자가를 외치면 이렇게 된다 말이죠.

 

일곱인도 떼지도 못하는

되도 않는 의문의 거룩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드디어 구원을 받으니 말이죠.

 

이 구원자를 보고

정작 마귀가 외쳐야 하는 심판하소서 라는 말을 손마른자는 외치고 있고

(이사야 선지자가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죄인의 자리에서 외쳤고)

오히려 반대로 마귀는 안식일을 지켰으니까 구원받아야 마땅하지 않냐고

어떻게 하면 구원얻냐고 부자청년이 외치고

어떻게 하면 영생 얻냐고 율법사가 외치는데

졸지에 예수님은 비유로써 그들의 구원을 가로 막고

전재산 다 나누어 주지 못하면 도리어 심판받아 마땅하지 않냐 라는 그 비유에

드디어 반발하고 왜 내가 심판받아야 하느냐 라고 근심하고 등돌리더라 말이죠.

 

너가 뭔데 나를 심판하느냐 라고 졸지에 심판 주와 맞서게 되는

강팍한 애굽왕 바로의 모습과 동일하게 되더라 말이죠

안식일 지키는 것이 동일성 합일성 연합성 일치성을 이루기는커녕

도리어 그 행함 때문에, 안식일을 지킨 것이 도리어 주를 삼키는

완악한 애굽왕과 다를바가 없게 된 것을 모를 정도 수건을 벗지 않더라 말이죠

 

오늘 심판이, 일곱 인을 떼심이

애굽에만 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함께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전 인류가 다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신에게 감사하다고

의문의 제사와 번제를 주장하는 반면에

 

도리어 이스라엘은 주여 불쌓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더라 말이죠.

 

마귀는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이스라엘은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상 일곱인을 떼는 분의 등장으로 인한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일곱인을 뗀다는 자체가

미래완료로써 덮쳐져서

현재는 그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는 미움받기도 작정이 되었고

또 하나는 사랑 곧 긍휼, 인애와 자비를 받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애굽의 자리가 아닌

도리어 그들로부터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는 기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바리새인들의 눈에 천생 죄인인 실로암소경의 기능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믿음을

개같은 이방여자인 귀신 들린 딸의 어미가 고백하고 있으니

 

도리어 유대인들이 애굽의 자리에서 의인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기능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더라 말이죠

즉 구원자의 증상물로써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더라 라는 겁니다.

 

유대인에게 주고 싶어도 유대인에 마귀의 사고방식에 꽉 차 있더라 말이죠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일곱인을 떼는 거룩한 자가 바로 심판주 라고

구원자가 나타남으로써 벌어지는 사건 사태 이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말이죠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


나를 제대로 삭제하고 심판 하는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더라 말이죠

 

아 그럼 믿으면 나는 죽는거네 사라지는 거네

바로 그겁니다

나를 삭제 시키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무이다

 

나를 제대로 심판하시는 분은 유일한 거룩한 씨 뿐입니다.

유일하게 일곱 인을 떼는 자 뿐입니다.

 

그런데 다들 사람의 일만 생각하더라 말이죠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

어떻게 하면 영생 얻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

 

라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데

그 분의 살과 피를 먹을 정도로 나는 죽은 자입니다 라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증상물로써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도리어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서

그 애굽으로부터 탈출

이스라엘로부터 탈출

교회로부터 탈출을

요나의 표적으로써 보여주셨듯이

 

인간으로부터 탈출 곧 구원

세상으로부터 탈출

 

이 탈출 사건을 벌리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말이죠


결국 인간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인

갇혀 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정도로

할수 조차도 없다 말이죠

했다면 그 원인의 결과물로써 구원이 와야 하는데

그게 바로 마귀가 늘 주장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냐 라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는 겁니다.

소위 믿음의 달인들로부터 믿음을 탈출시키는 겁니다.

기도의 달인들로부터 기도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벌리시는 일이 바로 오늘 나오는 애굽과의 전쟁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펼쳐진다 말이죠

새노래의 증상으로

이미 유리바다를 건넘으로써 말이죠

우리는 애굽때처럼 갇힌 자로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이 어떻게 벌어지는 가를 보라 라고 기록되었듯이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주님이 하시는 일만 보면 된다 말이죠.

(91:8, 개역)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1:8, 쉬운) 오직 여러분은 가만히 서서 악인들이 벌받는 것을 쳐다보게 될 것입니다.


불뱀에게 물린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누리시면 된다 말이죠

 

이것이 출애굽 구원 사건인 십자가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때로 끝난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완료라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완벽한 완료이기에


더 풍성하게 증폭이 되어서 펼쳐진다는 겁니다.

무한 반복으로 말이죠.

그러니 누리는 것 밖에 없어요

성경 어디에도 지킬 것이 없어요

누리는 것 밖에 없어요

무엇을? 십자가를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누리는 증상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증상을 즐겨라 이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출애굽 사건은 잘도 이야기하는 목사들이

십자가는 반대로 목사 본인이 적극적으로 거부하더라 말이죠

 

출애굽은 눈에 가시화 되었지만

십자가는 가시화 되지 않았거든요

 

오로지 죄인에게만

소경에게만

십자가는 밝히 보이고

 

소경아니다고 고침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때려 죽어도 그 밝고 또렷하고 명료한 십자가는 때려죽어도 안 보이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구리놋뱀 쳐다 본다고 낫겠냐 라고

때려죽어도 안 보여요

오로지 나 같은 죄인에게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린 이 비밀을(긍휼) 보여주십니까 라는

죄인에게만 회개가 덮쳐진 자에게만 십자가는 너무 너무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죄인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이지만

진짜 사랑이지만

 

반대로 그거 쳐다본다고 나을빠에 약 달라고 외치는 자들에게는

음녀처럼 자기가 사랑하겠다고

문둥병자 9명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그동안 못 지킨 율법지키겠다고

그 소속에 들어가겠다고 또 조건 갖출려고 할 꺼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다니는 자들는 교회에서 외치는 그런 조건 갖출려고 미쳐 있어요

헌금 교인이라는 조건

이거 뭐 한 두 개 이겠습니까?

십자가가 또렷히 보이는데 감히 속일려고 하다니 말이죠.

 

죄 죄 고만캐라 마이 무따 아이가

이제 부활 부활을 외쳐야지

십자가 십자가 고만 캐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즉 돈이 안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또한 십자가 사건인데

거부감이 든다면

나의 존재성을 염두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심판받아 마땅하다 말이죠.


그 심판이 기쁜게 아니라

? 드디어 의문의 것을 드디어 지나가게 삭제케 만드시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이제 또렷한 십자가 뿐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도리어 거부감이 들어서

뭔가의 조건을 갖추어서 이 심판을 피하는 해석을

본문을 통해서 추구하는 발상 자체가

 

주의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지 않고

여전히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추구하는 애굽과 같다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죄인데

죄 아닌 것을 갖추겠다고 하니

의문과 허구만을 막 끌어 모으다가

안식일 지키기에 달인이 되어

안식의 주인을 죽이더라 말이죠,

또 반복을 해요 그 의문을

그 흐릿함을

 

자 이렇게 두 패로 가르는 겁니다.

 

일곱인을 떼시는 주님의 등장으로써 나타나는 증상들인 겁니다.

오히려 기쁜 혼인 잔치이지

왜 피할 방법을 간구하느냐 말이죠.

이미 승리에서 나오는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릴 뿐인데

 

기쁘게 이 심판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덩실 덩실 춤추어야 하지않냐 말이죠

 

아제 드디어 일곱인을 떼심으로써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룩한 전쟁의 개시 시작을

이 애굽에

이 육체에 펼치시는 겁니다.

 

왜 사라져야 하는지의 기쁨을 누립시다

이전 것은 지나가거든요

저 태양도 처음것도 다 사라지는데

왜 끝까지 남을려고 하냐 말이죠,

남아 봤자 의문의 덩어리 일 뿐인데

왜 질질질 끌고 다니냐 말이죠,

 

주님이 삭제시키는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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