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인과 피의 신원 (6: 9-11)

계 20 다섯째 인과 피의 신원 (계 6, 9-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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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12:24, 개역)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6:9, 개역)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개역)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6:12, 개역)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6:13, 개역)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개역)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개역)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개역)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개역)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6:9,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6:10, 새번역)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지배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지배자님께서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어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6:11,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 , '형제들'

(6:12, 새번역) 그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6:13, 새번역)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6:14, 새번역)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고,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6:15, 새번역) 그러자 땅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노예들과 자유인들이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6:16, 새번역)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숨겨다오.

(6:17, 새번역) 그들이 진노를 받을 큰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성경에는 미완료는 없습니다
.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신학자들이 철학을 도입해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관계라는 말처럼 순 엉터리는 없는 겁니다.
그런 모호하고 
의문의 표현은 없습니다.

의문은커녕 오히려 또렷합니다.

 

일곱인를 뗄 자가 없다는 이 단절성으로 인해 울던 사도요한이

드디어 개봉되는 인 앞에서

드디어 말씀에 기록된 대로 펼쳐짐의 이 또렷하고 명료하고 밝히 보임 앞에서

이제 의문은,

이전 것은,
처음 것은 다 삭제 되는 겁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해도 달고 성전도 없고 오직 어린양만 참성전 되심으로 있다 말이죠.

(계 21:4, 개역)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결국 일곱 앞에서
123456은 사라질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누락으로써 말이죠.

네 생물인 네 천사가 이 일곱이 떳다는 이유로

이사야서로 치면 남겨진 씨가 떳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 이스라엘이라는 의미 자체가 누락의 의미이거든요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는 것은

그가 떳기 때문에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누락되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일곱이라는 안식의 주인 때문에

안식일 지키기는 자는 누락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주인과 손마른 자가 짝꿍을 이루고

마치 구원자와 죄인이 짝궁을 이루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설명할려면 그 차이로써

그렇지 않은 자의 짝꿍 또한 제시 되어야 합니다.

즉 의인을 부르러 온 가짜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바로 앞의 글 이사야 7장의 스알야숩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의미는

 

오로지 새 하나님의 이름인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스알야숩 곧 남은자가 짝꿍이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설명이 될려면 반대로 상대적인 짝꿍 또한 언급이 되어야 겠지요?

 

(1:21, 개역)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 10:22, 개역)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그것이 바로 아무리 이스라엘이 바다의 모래와 같을 지라도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것에서

 

기존의 이스라엘과 기존의 하나님이 해당되는 겁니다.

 

즉 새이스라엘(남은자)와 임마누엘(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의 이름) vs 기존의 이스라엘과 기존의 하나님 존재

가 서로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기존의 하나님이란 매일 매일 사건을 터트리지 않고

과거에 머물러서

인간의 경험에 포착 되어버린 하나님입니다

 

사랑이란 매일 매일의 새로움입니다

구원이 말이죠

 

오늘처럼 구원사건 곧 출애굽 사건(입가나안 사건), 출이스라엘 사건 (입 예수안 십자가안 사건) 곧 일곱의 손아귀에 사로잡히는 사건 말이죠

 

이 일곱이 이미 떳기에

안식의 주인이 이미 떳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탈출하는 구원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 죄에서 건지시는 이름이 예수 이기에

일곱 이기에

안식의 주인이기에

이 죄를 심판 하는 겁니다

손마름을 심판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네 생물인 네 천사가 말을 타면서 인을 하나씩 뗍니다

말이란 기동력입니다

에스겔 1장에서 또 계시록 4장에서 나왔듯이

눈이 여러개이고 즉 세상 구석 구석

주의 목전이 아닌 곳이 없고

발통달린 자동차처럼 오로지 직진만 하는 기동력으로 인해 포착 자체가 불가능한

이동력으로써 부랴 부랴 에덴동산을 철수시킨 그런 기동력으로써

말이 등장합니다

각 색깔의 말을 타고서 네 천사의 기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사가 첫 번째 인을 뗄데

흰말을 탑니다,

흰말을 탄 천사의 기능은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자기백성과 자기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겁니다, 피로 사신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분입니다.

 

이 구분은 결국 죄수복을 입고서 피를 자랑하느냐의 여부로써 구분하는 겁니다,

결국 구원이란 부자청년처럼 어떻게 구원 얻냐 라고 구원받을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불가능한 구원이 아닌 가능한 구원이요 단절로써의 구원이 아닌

연결로써의 구원이니 구지 천사가 나설 이유가 없다 말이죠

오로지 영으로만 한다는 것은 성령(예수의 마음)과 천사들로써 다 이루지

인간이 보탠 것 하나 없는 불가능한 구원을 펼치는 겁니다.

육은 오히려 육으로써 단절성만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듯이 말이죠

 

이것이 출애굽 사건이다고 했지요

그래서 10가지 재앙을 퍼붓는 겁니다

 

즉 재앙을 퍼붓든

인을 떼든

거룩사건이 펼쳐진다는 자체가 둘로 구분 구별 분리시키는 겁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 분리되고파 하지 않습니다.

이 애굽이라는 최고의 나라에서 분리 되고픈 자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두 번째 천사가 붉은 말을 타면서 두 번째 인을 뗍니다

붉은 피 색깔은 곧 전쟁입니다

 

어떤 누구도 이 애굽으로부터 분리 되고픈 자가 없는데 어떻게 분리가 될까요

그것이 바로 전쟁의 방식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 기존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키는 방식이 뭡니까

저들이 싫어하는 십자가 아닙니까

이 십자가를 피를 자랑하면 졸지에 전쟁이 벌어진다 말이죠

여호와의 이름이 누구관데 내가 노예를 풀어주겠냐 라고 바로왕을 강퍅케 하신 상황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이 아니면 분리가 될 리가 없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무능한 십자가의 피로써 벌리는 전쟁 개시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천사가 타는 말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곧 기근입니다

 

큰 형님이 이번 설에 이런 질문을 저에게 하는 겁니다.

MV는 왜 평생을 다해도 못 먹을 돈을 왜 저렇게 다 해쳐먹느냐 라고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겁니다.

해외에 숨겨둔 돈은 국내와는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이니

아니 먹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차피 못 먹는데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천사의 활동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루 열심히 벌어도 이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MVMV 대로 축복받은 자 그것도 최고로

그래서 이유없이 다 끌어모으니 아이들 주머니까지 다 터는 겁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빈부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가난에서 벗어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네 번째 천사는 청황색 말을 탑니다.

황색은 사람 가죽 껍데기 색깔이고

죽으면 이끼가 끼듯이 버짐이 피어서

청황색의 시체가 됩니다.

바로 시체 색깔인 죽음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막 죽어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다섯 번째 인을 떼니까

이런 고난으로 인해서 성도의 신원이 펼쳐지는 겁니다.

 

주여 언제까지 우리 성도의 피의 신원을 들어주실껍니까?

리고 호소하는 겁니다. 부르짖음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는 주님이시니까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죽은 자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망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이 이 희년의 기쁜소식 곧 신원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니 말이죠

 

그런데 답변이 아직 목베인 영혼의 수가 덜 찾다는 겁니다.

찰때까지 쪼매만 기다리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이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어머니께서

저번에 들었던 말씀이 생각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녹음 파일 30분부터 나오는데

듣고서 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래서 녹음이 끝난 예배 끝나고 난 뒤에 그 부분을 또 신나게 나누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게 되었으니 어서 빨리 오셔서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라고

마리아 마르다가 보낸 사람의 요청을 예수님이 들으시고는

요즘으로 치면 시계를 보시면서 아직 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지채하면서 죽을때가 딱 되니까

이제 가자 라고 하신다 말이죠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피의 신원을 들어주시는 주님이

왜 일부러 늦게 가실까요?

 

어머니께서 갑자기 불쑥 떠오른 생각을 듣고 바로 그겁니다

일곱을 말하기 위한 12345 번째 인이지

그렇기에 처음부터 일곱을 말하기 위해서 12345가 나타나면서 누락 되는 겁니다.

소임을 다 하고 무대뒤로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다 라고 했을때에

마르다 마리아가 네네 부활 교리 믿숩니다 라고 하면

그게 아니라 내가 부활이라니깐

네네 부활 교리 믿는다니깐요

 

이게 대화가 서로 안통하고 단절이 되는 겁니다.

인간 부활교리 신앙을 안 받는 겁니다.

 

내가 안식의 주인이라니깐

네네 안식일 지킬께요

아니 안식일 지키지 말고 내가 안식의 주인이라니깐

 

두 번째 천사가 탄 말이 뭡니까

평화가 없도록 하는 전쟁을 퍼붓는다 말이죠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그럼 이 안식의 주인이 뭔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존재로써 안식일 지키는 존재로 땜빵할려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 안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나를 치러 오신 겁니다.

 

요한 계시록 전체는 나를 치는 겁니다.

부활교리 믿는 것으로 나를 유지할려고 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나를 유지할려고 할 때 구원받고자 할려고 할 때

마구 마구 그런 나를 부셔버리셔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삼일을 일부러 지체를 하십니다.

삼일이 딱 지나니까 자 이제 가자 라고 하신다 말이죠

죽은 나사로를 왜 늦게와서 죽도록 했냐 사랑한 것 맞냐 라는

모든 원망을 일부러 듣습니다.

그리고 그 심각한 와중에 뜬금없이 내가 부활인줄 믿느냐 라고

하나님의 일을 펼치시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사람의 일로 원망을 하는 겁니다.

부활 교리 믿는다는 사람의 일로 답변을 할 뿐이지

하나님의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죽여 놓았다는 겁니다.

죽여 놓고 다시 삼일 만에 살리시는 겁니다.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은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한꺼번에 퍼붓는 겁니다.

역사 라고 하니까 다른 민족과 같은 역사가 아니라

언약의 역사입니다.

출애굽 통해서 구원해 놓고서

다시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키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피로 다시 살리시는

이 언약을 퍼붓는 것이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입니다.

 

우리는 개같은 이방인으로써 무슨 수로 2천년 전에 완료된 이 언약의 묵시를 겪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격었던 바를 다행히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언약의 자녀들이 격었던 선배들이 받았던 선물을 우리도 살면서 겪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입니다.

 

그러니 수천년 전의 창세기 3장이든 심지어 창조의 일곱날이든 과거로 끝난게 아니라

현재에서도 우리는 겪는겁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우리는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원해서일까요? 기도하기라도 할까요? 전혀 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도록 되어 있습니다. 즐기는 길 밖에 없지요.

 

이미 미래완료로써 일곱이 완성이 되었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바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피의 신원을 들으시고자

목베인 영혼의 수를 채우시는 겁니다.

 

다 죽여 놓고서 남은 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자기 양을 찾는 겁니다.

 

아무리 바다의 모래같이 이스라엘이 많아도

99 마리 양을 내 버려 두고

 

오로지 남은 자만 돌아오겠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 찾으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삼일의 간극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라는 닭의 울음의 간극을 통해서

 

임마누엘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피로 사신바 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속에서의 새이스라엘인 남은자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 말마따나 일부러 다 죽여 넣고서

죽을 때 까지 일부러 지체를 하셔놓고

내가 부활이다 라는 일곱이 부활이다

이 일곱의 오른팔로 붙잡은 피로 사신 교회를 만들고자

이제 나사로에게 가자 라고 하시듯이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숨어있던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시면서

이미 넉넉히 승리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그 다 이루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니까

인간들의 눈물이, 신앙이, 모조리 다 거짓으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사랑했다메 왜 죽도록 했냐? 라는 그 강퍅함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야 우리가 예수 대신에 너를 위해 울어주마 라고 했던

동네사람들의 눈물이 얼마나 거짓임을 들추어내듯이 말이죠.

 

자 이렇게 일곱 인을 떼면서 막 죽어나감으로써

그 죽은 자의 자리에서 생명의 주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기능

곧 죄인으로써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말하고

환자로써 의사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반드시 마귀 보란 듯이

즉 가짜 하나님을 믿는 저들의 하나님을 믿는 그 자리에서

임마누엘 예수님을 말하고자

너희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이 다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한다고

아이고 함께 한다면서 왜 죽이시느냐

너는 왜 죽냐 라는 그 비아냥 속에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물 위에서 생명의 주 임마누엘 예수님을 증거하는게 아니라

물에 빠뜨리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의해

물 속에서 죽음 속에서 생명의 주를 외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겁니다.

 

이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말하고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 혼인잔치, 이 구원잔치, 이 출애굽잔치,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신나게 누리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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