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과 피로 사신(금가락지 끼워짐을 당한) 자 (5: 6-10)

계 17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과 피로 사신 자 (계 5, 6-1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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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개역)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개역)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5:8, 개역)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9, 개역)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5:10, 개역)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5:6, 새번역)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5:7,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5:8, 새번역)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5:9, 새번역)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5:10, 새번역)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 또는 '땅 위에서

 

 

인간의 구원이 왜 헛 된 고 하니

인간은 구원 조차도 자신의 숙제로써

자기가 달성해야만이 믿겨지는 믿을 수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래야 쫄깃 쫄깃 실감이 나지

 

만약 제 3자가 개입해서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성취감은커녕 찝찝하기 짝이 없다 말이죠

언제 딴 소리 할 줄 누가 알겠냐 말이죠.

오로지 믿을 구석은 자기 밖에 없다 말이죠.

자기 가족도 못 믿는 판국에

그 귀하디 귀한 구원 문제를 어떻게 남에게 맡기냐 말이죠.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08:12,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자 그래서 제 3자의 개입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구원 받는 그 당사자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 물에 확 빠뜨려 죽였다가 다시 살리십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부정한 입술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버렸구나 백부당 만부당 타 죽어야 하구나)

 

이것을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 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말은 때려 죽어도 우리는 죄인이 싫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한 거죠.

 

그래서 인간의 속임수인 꾀가 어떻게 작동을 하는고 하니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라고 바꿔 버립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믿을 구석은 제 3자의 개입이 아니라

구원 조차도 자신의 숙제로 보겠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구원

쪽팔리는 구원 (박땡선 목사)

때려죽어도 싫다 라는 거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 막살지 말자 라고?

 

이래서 그럴 듯 하게 방종이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오는 겁니다.

즉 방종 개념을 끌어들인다는 자체가

쪽팔리는 구원이 싫타 라는 거죠.

 

이것이 인간의 성경 해석입니다.

이 한계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신앙은 안 받습니다.

성경은 오로지 예수님의 신앙 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신앙이 바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우심으로써

 

베드로를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구원 시키시는 겁니다.

 

즉 베드로의 신앙 안 받겠다는 겁니다.

 

저들 성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쪽팔리지 않는 신앙

방종을 하지 않는 신앙

막살지 않고 제대로 사는 신앙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럼 뭐로?

예수님의 신앙만 받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은 오히려 탈탈탈 털려서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심

즉 눈물 흘리심

피 흘리심으로만

베드로를 사서

그 피로 사신 믿음으로만

베드로를 건지시는 구원을 펼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피로 사신 자를 제사장 만드심이다 말이죠.

 

어떤 분의 질문 때문에

아직도 저는 낯설고 설레임에 부들 부들 전율을 일으킵니다.

 

아니 탕자를 글쎄 금가락지 끼워서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 삼겠데요 글쎄

 

이 소식을 아마 맏아들 같은 오늘날 교인들이 들으면 짜증을 낼 겁니다

방종이니

부끄러운 구원이니

다들 쳐다도 안 볼꺼다 말이죠

 

아니 누가 봐도 왕 같은 제사장 조건을 갖춘 맏아들 곧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도 없는

맏아들은 왕같은 제사장 안 만들고

 

누가 봐도 막 산자요 방종자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 자를 글쎄

금가락지를 끼워서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이것이 아름답다고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의 발길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라고 한다면

 

이거 반 칙 아닙니까

반 칙

바로 이겁니다 기분 나빠야 합니다.

이 기분 나쁨을 어떻게 표현 했는고 하니

 

바로 십자가라는 거리끼를 걸림돌에 넘어져 실족 했다고 표현하십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다 말이죠.

다 넘어뜨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라는 반칙이요 부조리입니다.

 

이 부정한 십자가가 옳았다 가 될려면

반드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나를 탕자로 만드실 때만 이것이 수긍이 가지

본인이 탕자가 안 되는 이상은 절대로 이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칠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니 글쎄 그러니 이것이 십자가 곧 예수님의 믿음이요 제 3자의 개입인 되는 겁니다.

 

내 믿음은 없는 겁니다. 안 되는 겁니다.

죄의 소원으로 인해 넘어설수가 없어서 문턱에 걸려 넘어진다 말이죠.

마귀 이킬수 있습니까?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뭐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심심하면 성화론자들이 개혁주의자들이 외치지 않습니까?

원수 사랑하라고! 자기는 정작 눈꼽만치도 원수 사랑 안하면서

어디서 감히 그 무거운 짐을 막 지울려고 하냐 말이죠.

그것도 안되면 이웃을 사랑하라꼬요? 그 이웃이 바로 원수예요

자기 친한 벗이 아니라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시리아 난민들 아무리 받아 줬다 쳐도

결국 다 나가 달라고 한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

인간의 신앙

인간의 사랑은 다 거짓입니다.

 

본인이 도리어 난민으로써 쫏겨나시면 된다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 이 벌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이 부정한 십자가에 예수님은 충성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신앙은 행함은 물 건너간 겁니다.

 

도리어 탕자를 왕같은 제사장 만드는 것에 도저히 기뻐 감사하지 못하는

악함이

완악함이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서 들추어질 때 맏아들이 과연 방종한 탕자를

왜 금가락지 끼우고 왕같은 제사장 만드냐 라고 따질 수가 있겠냐 말이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그 우상숭배(자기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였다는)가 들추어진다 말이죠.

 

그때 방종한 자 라는 둥, 막 사는 자 라는 둥 이라는 말이 쑥 들어갈 꺼다 말이죠.

 

안 그렇다면 일곱 인을 떼 보시던가?

 

일곱 인을 못 떼면

남의 눈에 티를 볼 바에

자신의 눈의 대들보를 빼 달라고

울어야 할 판국이 아니냐 말이죠.

 

이 눈물이 오늘 피 흘리심으로써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라고 표현 됨으로써

 

그 어디에도 인간의 믿음이 안나온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아무도 뗄수가 없다고 해야 할 판국으로써

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쳐다보는 사도요한의 입장에서는

그저 우는 것 외에는 없다 말이죠.

 

우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숙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에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로지 저 분만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만이

그 피 흘리심만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셨다 즉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저 분의 숙제 뿐이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님의 믿음을 인간은 과연 수용을 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 자체가 믿음을 거부당한 입장에서

과연 예수님의 믿음을 수용할 수가 있냐 말이죠.

 

없습니다.

그러니 없습니다 라고 이 단절성만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데

 

어찌된 심판인지 인간은 도리어 개방성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믿음을 펼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고립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즉 단절을 두려워 해요

 

단절이 뭡니까 그야말로 버림 아닙니까

버림받음을 두려워 한다 말이죠.

 

그래서 자꾸 자꾸 단절이 아닌 개방성 연결성 연합 결속력

이겄이 인간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집단의 소속감인데

그 집단 도 사실상 바로 그런 개개인들의 모여서 결속한 것이지

하나됨이 아니다 말이죠.

그 대표성이 국가입니다.

 

이 국가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있어요 글쎄

누굽니까? 가룟유다 아니냐 말이죠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음녀 라고 했지요.

이 음녀 곧 제사장 딸을 보시면

오늘날 누구랑 닮았느냐를 보시면

현재의 이스라엘을 보시면 됩니다.

그 이스라엘의 속성을 물론 육적 혈통적인 이스라엘 민족 말이죠.

이 국가를 자꾸 짐승을 올라 탈려고 해요

가룟유다가 하나님나라 독립 회복운동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글쎄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 넘겨버린다 말이죠.

즉 국가에 짐승에 팔아 넘겨요

 

아니 그 짐승으로부터 독립운동하겠다메?

 

그러니 같은 한 통속인데 마치 적군처럼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같은 편이였다 말이죠.

저거들끼리 서열 싸움 힘 자랑 할 뿐이다 말이죠.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이 온 천하 만국을 줄테니 내게 절하라 라고 하잖아요.

즉 원수 갚을 수 있게 해 줄게 라는 거다 말이죠.

 

이게 말이 안되는게 원수가 자기인데 마귀인데

그 마귀라는 원수를 갚도록 마귀인 자기에게 절하라 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다 넘어가요

이스라엘이 다 넘어가서 마귀에게 장악 당해서

허구한날 독립운동 펼치고

기여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짐승에 올라타서

예루살렘을 즉 구원의 문을 장악하겠다고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기여이 쟁취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다 따라하듯이

교인들과 거짓선지자인 목사들이

자기 쪽에서 신앙하겠다고 나서더라 말이죠.

 

3자의 개입은 아예 거들떠 보도 않더라 말이죠.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쳐다볼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서 어서 음녀처럼 짐승을 길들여서 올라타기 바쁜 판국에

 

저렇게 구원 문제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한가하게 방종하고 막사는 탕자처럼 살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서 어서 이웃사랑도 실천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한 율법사의 질문처럼

부자청년의 질문처럼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느냐 라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키고

큰 계명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바쁜 판국에

 

왜 브레이크를 걸어서

실족케 만들려고

 

마음을 낮추시고자

전 재산을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누어 주면 과연 저들이 부요해 질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저들이 혹시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가난한 자란 결국 밑 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 라는 거다 말이죠.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부자야 너가 그런 밑빠진 장독대와 같은 가난한 자이다는 겁니다.

 

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강도 만난 자가 글쎄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닌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 인이 도움을 주게 되면

 

얼굴이 발그레 발그레 하듯이

머리에 숯을 얹은 것처럼 부끄 부끄 달아오른다 말이죠.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런 성령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사람의 일로써 하나님을 사랑했었다고?

 

이런 철천지 원수인 너희들을 위해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안 쳐다보고

? 큰 계명 두 계명을 지켰다고?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이게 음녀이다 말이죠.

마귀요 마귀 자식인 사단의 회이다 말이죠

 

이 차이로써 예수님의 믿음은 저들의 믿음과 간극을 벌리시는 구별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 분의 믿음만이 일곱 인을 떼시는 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이미 일찌감치 죽임 당했던 어린양이였다는 겁니다.

출애굽시에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든 어린양의 살과 피를 먹어 놓고도

그 어린양이 나를 광야에서 마음을 낮추시고자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 인간의 믿음 신앙을 쪼오옥 기름기 쫘악 빼듯이 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믿음만을 쳐다보라고

 

무화과 나무 잎이 없어도

포도 나무에 열매 없어도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오로지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만으로 즐거워 하겠끔

이 혼인 잔치를 예수님의 믿음은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 잔치만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새 것으로써

새 노래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믿음으로써만 펼쳐지는

피 잔치입니다.

 

상대적으로 이 피 잔치를 싫어하는 자와의 차이를 똑똑히 밝히 보여주시면서

저 속임수와의 비교를 보여주시면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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